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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1) 동군과 서군 일본
<서군>
이시다 지부쇼유 미쓰나리[石田三成]
- 임진왜란 때 군감으로 참전, 히데요시 사후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쫓겨서 거성으로 명분 상 은퇴합니다. '도요토미家 수호'를 명분으로 전국에서 영주들을 끌어 모아 총 90명에 달하는 제장들이 가담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 당합니다.
고니시 셋쓰노카미 유키나가[小西 行長}
- 천주교도로 무역 상의 이유로 조선 출병을 반대했고, 조선의 지리를 잘 알아서 제1군의 선봉장이 됨. 귀국 후 미쓰나리 파에 붙지만, 서쪽에 종군하고 있을 때 본국의 거성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락당하고 패하여 참수 당합니다.
시마즈 효고노카미 요시히로 [島津義弘]
2015.0
- 임진왜란 때 4군을 맡고, 사천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후 시마즈 가문은 '서부 일본 제일'이라는 평을 얻고 세키가하라 전투 전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거절당해서 서군에 붙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1500명의 군사로 동군의 진을 정면 돌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구키 오스미노카미 요시타카[九鬼嘉隆]
- 해적 출신의 다이묘로서, 임진왜란 전부터 '철이 붙은 배'를 사용하여 수군으로 활약, 해전에 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 와서는 아시다시피 이순신에게 대패당하고, 귀국해서는 '이나바 미치토'라는 영주와 다툼이 생겨 이에야스에게 소송을 냈으나 이에야스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세키가하라 전에서 서군에 붙습니다.
우키타 비젠주나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2)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關原)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전투라고 하죠. 세키가하라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인데, 모두 17만의 군사가 대치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라고 합니다. 이후 사람이 모든 것 을 건 큰 일을 하려고 할 때 쓰이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인다고 들은 것 같기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내세운 야심찼던 관료 이시다 미츠나리 측의 서군과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비유로 유명한 대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동군간에 벌어졌던 전투로, 이후 250년의 역사의 주인을 판가름한 전투입니다. 결과는 잘 아다시피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의 동군이 승리하여 이후 에도 막부 시대를 열게 됩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몸이 약했던 히데요새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아들 히데요리를 얻었는데, 히데요리가 5살되던 때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자신도 노부나가의 어린 아들에게서 정권을 찬탈하는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히데요리의 안전이 걱정된 그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하다가 각각 쌀 100만석 이상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키 가게가츠(우에스기 겐신의 아들), 모리 데루모토, 유키다 히데이에의 5명의 대명과 자신의 통치를 도왔던 5인의 문관 관료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난 후에도 자신의 업보에 울며불며 편안치 못한 저승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에 재력이나 권력을 재는 기준은 쌀이었으며, 100석으로 3~5명의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앞서 거명된 5명의 대명들은 히데요시 이후를 노리는 2인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너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제휴하기 전에 멋지게 일격을 날린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휘하에 '붉은 악마' 이이 나오마사, '사슴뿔 투구' 혼다 다다쓰구라는 일본 최고의 가신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이 사람을 주목하였고, 나머지 4명의 대로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5명의 관료 중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제2의 히데요시를 꿈꾸는 야심가였기 때문에 히데요리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노골적으로 이에야스에게 적의를 드러내었다.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서쪽은 문관인 미쓰나리를 따랐고 동쪽은 역전의 노장 이에야스를 주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미쓰나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고수하지만 나머지 3명의 대로가 서쪽 진영에 가담을 하였다.
히데요리 보호라는 기치를 걸고 3명의 대로를 전면에 내세운 미쓰나리가 일방적으로 우세하리라는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미쓰나리의 미숙함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관료 재직 중에 독설을 서슴치 않아 상당히 많은 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맹장들은 히데요시가 옛부터 길러온 심복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쓰나리에 대한 반감으로 동쪽 진영에 가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미쓰나리의 결정적인 실수가 또 한 번 일어나 승패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가신들이나 동맹 대명들의 충성을 강요하기 위하여 인질을 잡아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미쓰나리는 전쟁을 유리하게 시작하기 위해 오사카에 남아있던 유명한 무장들의 식구를 인질로 잡아두고 경비병을 세웠으나 너무 방심을 하였다. 도쿠가와 진영의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그라시아(세례명)는 자신으로 인해 남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하였고, 가토 기요시마,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등의 부인들이 어둠을 틈타 전부 탈출을 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에야스의 카리스마를 두려워하던 일부 서쪽 대명들이 미쓰나리는 인물이 못 된다는 판단아래 중립을 표명하거나 동쪽으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야스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던 초기에는 미쓰나리가 절대 우세하였으나 점차 그 무게추가 기울어 거의 균형을 잡게 된 것이다.
서쪽 진영에서 가장 먼저 군사를 낸 것이 동쪽의 아이즈에 있던 우에스기 가게가츠였다. 가게가츠가 성공적으로 서쪽을 향해 진격하면 이에야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고, 두 대명이 장기전을 벌이는 동안 서쪽의 8만 대군이 동쪽 진영의 대명들을 진압하여 이 작전을 종료한다는 미쓰나리의 계획에 따라, 가게가츠는 8만 명을 동원해 새로운 성과 진지들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 진격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이에야스는 휘하의 장수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군사들을 징집하도록 명 령하였고,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00년 7월 24일 동쪽으로 발길 을 돌려 미쓰나리의 계략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쾌재를 부른 가게가츠의 앞길을 막은 것은 이에야스의 동맹군인 모가미 요시아키라와 '외눈박이 용' 다테 마사무네였다. 이들은 이미 가게가츠의 움직임을 예상 한 듯 철저한 준비를 하였고 오히려 가게가츠가 이들에게 발이 묶여버렸 다. 미쓰나리의 움직임을 이미 파악한 이에야스는 유유자적하며 5만 대군 을 이끌고 서서히 아오야마까지 진군하였으나, 미쓰나리가 거병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을 공략하게 하고, 다다쓰구, 나오사마 에게 3만 2000명을 주어 먼저 오사카로 급히 진격하도록 명령한 다음에 후쿠시마 와 이케다로 하여금 기요스 성을 거쳐 전략 요충지인 기후 성을 먼저 점 령하게 하는 등 맹장의 면모를 날카롭게 세웠다.
한편 오사카의 기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데루모토가 서쪽 진영의 지휘자라 는 명색뿐이며, 일개 관료에 불과한 미쓰나리가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리 는 것에 불같이 화를 내고 데루모토의 3만6000대군은 전투에는 참가하되 단 한 발의 화살도 날리지 않겠다고 동쪽의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맹세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야스의 카리스마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 쪽 진영과는 달리 서쪽 진영에는 차츰 배신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유부단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야키는 서군에 가담을 하고는 있었으나 이 에야스에게 전투가 시작되면 동군으로 이탈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왔 다.
8월 27일, 미쓰나리 측은 진격로에 있던 후지미 성을 공격하지만, 이 성 은 이에야스의 오랜 친구이자 가신인 도리이 모토다타가 지키고 있었으 며, 이 사람의 목적은 이에야스가 구원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 루라도 더 지연시키자는 것으로 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이 조그 만 성을 함락시키기까지 10여 일을 지체하고도 3천명을 잃었다. 미쓰나 리군은 이런 사소한 전투에 전력을 낭비하고 있는 데에다가 이에야스가 아직 가게가츠에게 묶여있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단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미쓰나리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 고 일부 동맹군들은 정말 쓸 데 없는 곳에서 쓸 데 없는 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며느리 그라시아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호소카와 유사이가 다나 베 성에서 500명의 병력으로 이에야스 지원을 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 여 이에야스의 본국을 유린해야 할 1만5000명이 호소카와 집안의 정벌에 나선 것이었다. 전력의 격차로 보아서는 금방 떨어질 성이었으나 문제는 성주인 호소카와 유사이였다. 이 사람은 문화 불모지대였던 일본에서 얼 마 안 되는 시인이자 학자로 존경받던 인물이었고,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장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정작 포위를 한 후 당황하기 시작한 것은 서쪽 진영이었다. 이 유명한 학자의 일신상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제는 일황도 동쪽으로 돌아설 판이었고 그렇다고 그 냥 물러서자니 그 영향이 만만치 않을 터, 오히려 포위한 쪽이 더 골치아 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궁색한 전술이 포탄이 들어있지 않은 대포로 하루 종일 성을 포격하는 것이었다. 유사이의 안전을 염려한 일황이 항복하고 교토로 오라는 사신을 다급하게 보냈으나 유사이는 학자 이전에 무사였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유사이는 농성을 풀고 교토로 갔 지만무려 1만5000명의 병력을 세키가하라 전투와 전혀 관련 없는 먼 곳 에 2달간이나 묶어두었었다.
비록 지연되기는 하였지만 전략 요충지인 기요스 성을 치기 위하여 9월 20일에 미츠나리가 오가키 성에 도달하였을 때에, 지금쯤 먼 아이즈에서 가게가츠와 대치하고 있어야 할 이에야스의 은행나무 기치가 불과 5km밖 에 떨어지지 않은 아카사카에서 나부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군은 크 게 술렁였다. 이에야스는 지난 40일동안 천천히 움직인 거리를 단 2주만 에 돌파했으며 기요스 성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다. 이로서 미츠나리의 계 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시마 사콘이 1300명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전력 탐색에 나섰다. 절반은 매복을 시킨 후 나머지 절반으로 다리를 건 너갔고 이를 요격한 동군의 나카무라는 다리를 건너 추격하였다가 매복군 에게 당하여 도리어 쫓겨왔다. 이에야스는 한 가옥의 지붕 위에서 이 광 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카무라도 제법이군. 서군 녀석들 도망가는 것 좀 봐. 아니 저 바보, 너 무 따라가면 안 되는데. 틀림없이 매복이 있을 거란 말이야. 이봐! 아리마 를 준비시켜라."
이에 동군의 아리마가 보강되면서 정찰형태의 싸움이 차츰 커져 본격적인 전투가 되려는 순간 다리가 부서졌고 날이 저물면서 자연스럽게 최초의 탐색전은 종결되었다.
기요스 성을 빼앗긴 미츠나리의 본진은 언제라도 포위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오사카 성으로의 후퇴를 고려하던 중 미츠나리의 눈에 세키가하 라 지역이 들어왔다. 이 지역은 양 옆이 산으로 둘러싸여 입구와 출구가 각각 하나뿐인 곳으로 이에야스가 섣불리 추격해 들어온다면 쥐덫에 갇히 는 꼴이 될 판국이었다.
9월 20일 저녁, 동군이 다음날의 전투를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 안 12km 떨어진 세키가하라로 총 퇴각하는 서군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은 굵어졌고 어두워져 가면서 서군은 자기 부대의 기치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서군이 세 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미츠나리는 우선 고바야 카와 히데야키가 진을 치고 있는 마츠오 산으로 달려가 신호탄을 발사하 면 산 아래로 진격해 동군의 측면을 치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맞은 편의 사사오 산의 중턱에 6000명의 병력으로 자신의 본진을 설치하였다. 비가 그치자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였다. 호소카베와 모리의 병력 2만 2000명은 낭구 산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도록 되어있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유키다 히데이에의 1만5700명의 병력으로 중앙 부근의 텐마 산에서 이에야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칠 계획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서군의 진영은 학익진과 흡사하였다. 새벽 4시 30분에 모든 진영을 편성한 서군 병사들은 젖은 갑옷 속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 다.
한편 동군에서는 자정 직후에 미츠나리의 후퇴가 전해지자마자 이를 즉시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2시가 되기 전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선봉으 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서군의 후미를 바라보며 달린 덕분으로 미츠나리의 최후위 부대와 비슷한 시각에 계곡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후쿠시마와 유키다의 부대가 예정에도 없던 충돌을 하였으나 곧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이에야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묵계를 이미 모 리에게 받았기 때문에 전면에 거의 모든 주력을 두었고 후방은 그 방어막 이 매우 얇았다.
이로서 17만이라는 대군이 대치하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회전이 벌어지 게 된다. 양측이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으나 안개 너 머로 들리는 말발굽과 진지구축소음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 다. 양군은 쉴 새 없이 정찰병을 내보냈고 정찰병간의 전투와 이를 요격 하는 고함소리가 어둠 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오전 8시 안개가 드디어 걷혀 양 군의 진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진영이 소란스러워졌다. 양 군은 불과 수 백m의 사이를 두고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이 순간 동군에서 30명의 기병이 바람과 같이 서군의 유키다 히데이에의 1만5000대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붉은 색 갑옷을 입었으며 창과 안장까지도 붉은 색이었다. 바로 서군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붉은 악마' 이이 나오마사의 친위 기마대였던 것이다. 원래 전투의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맡기로 되어있었다. 선창(先槍) 을 빼앗긴 사실에 경악한 후쿠시 사이조도 창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나오마사님! 이러는 법이 어디 있소! 어느 누구도 우리 앞을 달려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
"이봐, 나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야. 다다요시님(이에야스의 어린아들)이 적의 진용을 보자고 하셔서 모시고 가는 중이야"
물론 이것은 군령을 위반하였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순진한 후쿠시가 정말 다다요시가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멈춘 순간 이 미 나오마사의 붉은 악마들이 첫 창을 찌르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전투가 거의 결정 난 후에도 필요 이상으로 전위에 나서다가 자신의 소원대로 죽 게 된다. 붉은 악마의 뒤를 바짝 따라온 후쿠시마의 조총부대는 유키다의 전열에 일제사격을 하여 멋들어진 등장을 한다. 교고쿠, 도도, 데라자와와 같은 소부대들도 각각 자신들이 맡은 부대들과 긴 창을 교환하기 시작하 면서 전투가 슬슬 시작되었다.
나오마사의 분전에 흥이 난 이에야스는 3만명의 본진을 1km 정도 앞으로 이동시켰고 드디어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제2진이 미츠나리의 본진을 향 해 쳐들어가면서 싸움은 절정에 다다랐다. 특히 구로다는 전에 미츠나리 에게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어 미츠나리의 목은 자신이 베어야 한다고 생 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맹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날 전초전을 잘 마무리지었던 미츠나리의 선봉 시마 사콘이 총에 맞고 후방으로 실려 갔지만 미츠나리의 본진은 도저히 문관이 지휘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싸우고 있었다. 미츠나리의 본진 앞에 설치된 방책에는 공격군들의 시체가 쌓여갔고 미츠나리의 조총부대도 차츰 그 수가 줄어들 기 시작했다.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기로 한 낭구산의 서군들은 전투를 전 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격렬한 총성과 함성 소 리가 산 너머로 가득하였으나 미츠나리의 신호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오전 10시가 되어가면서 이에야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였다. 아들인 히데다다가 쓸데없는 성 하나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1만6000명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고 서군은 이제 겨우 3만5000명이 움직였을 뿐 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언제 공격해 올 것인가? 그러나 나머지 5만5000 명이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은 미츠나리에게도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고 바야카와 히데야키와 모리는 신호에 따라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였으니 당 연하겠지만 나머지 병력은 왜 싸우지 않는 것이었을까? 이미 미츠나리에 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몇몇 무장들에게 미츠나리의 전령이 그만 무례를 범하고 만 것이다. 동군은 이에야스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한 체계를 갖추 었지만 서군은 히데요리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모인 연합군으로 수에 상관없이 미츠나리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다급한 나머지 말 에서 내리지 않고 미츠나리의 명령을 전했고 이에 화가 난 대명들은 이런 식으로 불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동군 또한 같은 일이 있었다. 고바야카와 의 움직임을 확인하도록 시동인 고에몽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보냈으나 그만 말에서 내리지 않고 나가마사의 지방 이름을 부르는 대단한 무례를 저지른 것이었다.
"교슈! 교슈! 히데야키님이 우리에게 가담할 것 같습니까?"
"저 놈은 예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야. 비록 전투 중이지만 예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거야. 그런데 '교슈! 교슈!'하고 외치다니, 빌어먹을 자 식!"
"나도 잘 모른다. 그 자가 합류하지 않더라도 이시다 유키다 고바야카와 까지 전부 이 나가마사가 무찌르겠다고 전해드려라"
미츠나리와 이에야스의 카리스마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오전 11시가 되면서 점차 이에야스의 본진이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미츠나리는 미친 듯이 신호탄 을 쏘아올렸다. 그렇지만 맞은편 마쯔오산에서 내려와 이에야스의 측면을 공격해야 할 고바야카와의 2만여 대군의 기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미츠나리는 경악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치기로 한 모리의 3만여 대군의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모리에게 전령을 보냈지만 어이없는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점심식사 중이다. 다 먹고 나면 움직일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라."
그렇다고 이들이 동군으로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 고바야카와는 이 순간 까지도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를 몰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신호를 따르자니 이에야스가 무섭고 이에야스를 따르자니 후 세에 변절자라는 비난을 살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고바야카와의 고민을 없어버린 것이 두 지휘관의 역량의 차 이였다. 고바야카와가 자신에게 밀약한 대로 동군에 가담할 시기가 지났 는데도 움직이지 않자 초조하고 화가 난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를 향해 일제사격을 할 것을 명하였다. 격렬한 총소리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정신이 나간 고바야카와는 벌떡 일어나며 '공격'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전군 진격하라. 목표는 서군의 오타니 요시츠구닷!"
그 동안 관망만을 하고 있던 다른 대명들까지 이 공격군에 합류하기 시작 해 무려 2만여 명이 산을 달려 내려가 오타니의 측면을 찔렀다. 서군의 오타니는 이미 이들의 변절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600명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전세가 기운 것을 직감한 오타니는 가신에게 자신의 목 을 잘라 전리품이 되지 않도록 명령한다. 고바야카와의 2만여 명은 오타 니의 저지를 가볍게 물리치고 유키다와 고니시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동군을 밀어내려는 찰라였는데, 등뒤에서 칼을 맞은 꼴이 되 었다.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된 서군의 우익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였다. 유키다 히데이에는 배신자만은 자신이 목을 자르겠다고 달려나가는 것을 근위무사들이 에워싸고 후방으로 실어날랐다고 한다.
고바야카와의 변절로 순식간에 동군의 승리가 확실해져갔지만 모리의 3 만 대군이 움직인다면 최소한 무승부는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부대 들로 퇴로가 막힌 일부 패잔병들이 그만 낭구 산쪽의 모리 부대의 앞을 지나고 말았다.
"고바야카와가 배신을 했다. 유키다와 고니시의 부대도 깨졌다. 서군이 졌 다. 이에야스의 3만 대군이 몰려온다."
가뜩이나 싸우고 싶지 않았던 차에 아군의 패주 소식을 전해들은 모리의 대군도 동요가 일어나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미츠나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시종 몇 명만을 대동하고 황급히 자신의 영지로 도망치기 시 작했다. 이로서 모두 17만여 명이 벌인 일본 역사상 최대의 회전은 이에 야스의 카리스마와 서군 진영의 변절로 6시간만에 동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아이즈의 가게가츠는 이에야스에게 항복하고 120만석의 영지에서 30만석 의 영주로 몰락하였으며 모리 데루모토도 84만석에서 37만석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서군에 가담했던 나머지 90여 대명들은 아예 영지도 없이 추 방당하거나 처형되었다.
미츠나리는 이부키산 속에 숨어 있다가 친구의 밀고로 이에야스에게 압송 되었다. 사형이 확정되어 형장으로 끌려나가던 중 목이 몹시 탄 미츠나리는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경비무사가 물 대신 곶감을 주자 물끄 러미 바라보고는
"곶감은 변비도 생기고 몸에 안 좋아"
"잠시 후면 목이 잘릴 터인데 그렇게 몸을 아껴서 무엇하겠소"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몸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라며 목이 날아갈 때까지 배짱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3) 이시다 미쓰나리
벽제관전투에서 대승을 하였지만 행주성 전투에 출전하여 조선 권율(權慄) 장군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와 화평 교섭을 벌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출정하였는데, 1598년 도요토미가 본국에서 철군 명령을 내리고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내분으로 휩싸이는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에게 공격을 받고 사와마야 성에 칩거하였다. 하지만 점차 강대해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세를 규합하였고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가 벌어진다. 고니시 유키나와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였던 영주들이 대거 참전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되었다. 도요토미의 가신(家臣) 가운데 문치파(文治派)의 총수였다.
(4)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기독교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는 사카이 지역의 약재상이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 그는 사카이 내의 기독교도 상인 집단과 종교적 · 혈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당시 천하인으로 발돋움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사카이에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도 교류를 맺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 의하면, 류사는 교토에 이주했을 때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유키나가는 류사가 교토에 있었을 때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성장한 유키나가는 처음에는 비젠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래에 있었다. 이후 우키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항복하고자 했는데, 류사가 이미 노부나가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 아들 유키나가가 항복 교섭의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유키나가는 노부나가군의 총사령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교섭했고, 교섭이 끝난 후 히데요시에게 회유되어 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도의 삶을 살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어린 시절부터 교토의 성당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출세를 거듭하고 있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선교사들은 출세한 유키나가를 세례를 받은 일본 기독교도의 자랑거리로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이후 유키나가는 선교사들이 히데요시와 회담을 갖도록 여러 차례 중재했다.
유키나가는 1586년에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가 히데요시를 알현하도록 중재했는데, 이때 유키나가는 코엘료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쇼도 섬에서 기독교 포교를 허가해줄 것을 청원했다. 히데요시의 허가를 받은 유키나가는 이후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를 영지에 초빙하여 본격적인 기독교 포교에 들어갔다. 세스페데스의 포교 결과 쇼도 섬에서는 한 달 만에 1천 4백 명이 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아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유키나가 외에도 대표적 기독교도 다이묘는 다카야마 우콘, 구로다 요시타카, 가모 우지사토 등이 있었다. 이들은 규슈 정벌에서 선진을 담당하여 공을 세웠다. 당시 규슈에서는 시마즈 가문이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규슈 정벌을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여기고 참가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사기는 정벌군 내에서도 가장 드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난 직후 ‘바테렌(反天連, 선교사) 추방령’를 반포, 기독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도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홀대받았고, 1587년에는 다카야마 우콘이 영지를 몰수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키나가는 포교를 위해 자신의 영지에 머무르던 선교사들을 퇴거시키는 등 적절한 처세로 히데요시의 탄압을 교묘히 비켜나갈 수 있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중재 아래, 영지를 몰수당한 우콘을 같은 자신의 영지인 쇼도 섬에 숨겨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했다.
아마쿠사 지역은 유키나가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빈번했기에 과거부터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유키나가는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지 내에서 기독교 포교를 은연중에 묵인해주고 있었다.
특히 아마쿠사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기에 탄압을 피하고자 하는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독교도 다이묘였던 유키나가의 영지는 일본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잡아갔던 것이다. 에도 시대 초유의 대규모 민중반란이자 기독교도 봉기였던 1638년의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이 유키나가가 다스리던 지역 인근에서 발발하였던 것도 유키나가의 정책에 의해 기독교 세력이 민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쓰시마의 소(宗) 가문은 유키나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륙 침략의 꿈을 품었던 히데요시는 예로부터 조선과 교류해온 쓰시마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키나가는 소 요시토시를 사위로 삼는 등 쓰시마와 점차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와 쓰시마를 중재하는 위치에 서서, 조선 국왕의 입조를 성사시키도록 소 가문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쓰시마는 결국 요시토시가 직접 한양으로 건너가 조선과 교섭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시토시는 국왕의 입조를 원한다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 측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히데요시가 조선 측에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한다고 말을 바꾸어 전했고, 조선 측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요시토시의 요청으로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요구와 요시토시의 실제 교섭 내용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유키나가는 위기를 넘기고자 조선 통신사가 항복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절이라고 히데요시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유키나가의 말을 믿은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항복 사절로 여기고 치하한 뒤, 조선 측에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 안내를 해달라는 이른바 ‘정명향도(征明嚮導)’를 요구했다. 통신사들은 당연히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고 쓰시마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쓰시마 측은 히데요시의 뜻이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의미라고 바꿔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무마하고자 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결국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을 초래했고, 동아시아 지역을 전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렸다. 당시 일본군의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맡게 되었는데, 제비뽑기를 한 결과 유키나가가 먼저 상륙한 뒤 두 사람이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조선 침략이란 공을 세워 영지를 하사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두 사람 모두 전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당초의 합의는 무용지물이 된 채 두 사람은 조선 땅에서 끊임없이 경쟁했다. 일본군의 최전선에 섰던 유키나가 군에는 소 요시토시 · 마쓰라 시게노부 · 아리마 하루노부 · 오무라 요시아키 등 규슈 북부의 세력들이 동행했다. 특히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길잡이로서 장인인 유키나가를 보좌하고 있었다.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천 5백 명의 군세는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진성을 손에 넣었고, 같은 날에 동래성 또한 함락시켰다.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이 이끄는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일본군은 전쟁이 시작된 지 열흘 만에 경상도를 장악했으며, 신립이 충주성 탄금대의 일전에서 패했기에 한양까지 이르는 길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되자 조선의 왕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피했고, 유키나가의 군은 한반도에 건너온 지 20일 만에 별다른 저항 없이 한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평안도 지역에서도 조선군이 도주하면서 유키나가는 별다른 피해 없이 평양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평양까지 이르자 위기감을 느낀 명나라는 원군을 파견하여 평양성 탈환에 나섰다. 유키나가는 점차 밀려오는 군세 앞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유키나가는 전쟁이 소강상태가 된데다 명의 군세까지 남하하고 있어서 더 이상의 진군은 불가능하니 강화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다. 기요마사 등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결국 유키나가의 의견이 수용되어 일본군은 강화조약을 체결할 방안을 모색했다. 한편 한반도 남부를 확보하고자 요충지에 성을 쌓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히데요시는 중국 침략의 야욕을 버린 채 한반도 남부를 확보하는 것으로 기존의 노선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명의 조선 영토 할양에 합의를 논하지 않자 1597년 정유재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키나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강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기요마사 군의 도해 날짜와 진로를 조선 측에 누설하면서까지 교섭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유키나가가 제공한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기요마사 군을 공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탄핵을 받아서 파면당하고 말았다.
1598년 일본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고,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유키나가가 농성하던 순천 성은 육지와 바다 양면에 걸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유키나가는 이번에는 진린에게 뇌물을 써 해상의 포위망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진린의 퇴각으로 해상의 포위망이 약해진 틈을 타, 유키나가는 퇴로를 열기 위해 이순신의 수군과 전투(노량해전)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유키나가는 원군으로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격전을 벌였으나 참패, 겨우 목숨만 건져 본국으로 퇴각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 동안 일본은 본래의 목적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기요마사 등의 무장파와 유키나가, 미쓰나리 일파 사이에 앙금만 쌓인 채 패전을 맞이했다.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정국을 주도한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 정권의 무장파들은 이에야스에게 동조했다. 바야흐로 일본 전역이 둘로 나뉘어 자웅을 겨룬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미쓰나리는 유키나가와 정치적 노선도 비슷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강화 교섭을 함께 주도한 사이였기에 오히려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의 전장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담그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세했다. 서군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서군에는 사전에 이에야스와 내통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눈치를 살피던 이들도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서군의 우측 날개를 담당하던 고바야키와 히데아키가 배신하여 서군의 측면을 급습했고,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쓰나리와 유키나가 등은 목숨만 건져 간신히 전장을 탈출했다.
그때 마침 유키나가의 거성이었던 히고의 우토 성이 함락당했다. 구마모토의 번주였던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채 원수 유키나가의 거성을 침공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유키나가는 전장을 이탈한지 4일 만에 붙잡혀 연행되었고, 연이어 잡혀온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오사카와 사카이에서 조리돌림 당한 뒤 음력 10월 1일 교토 로쿠조가하라에서 처형되었다.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범이 아니었기에 할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금하는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대신 참수를 선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전쟁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출세 가도를 걸었고, 독실한 기독교도인 동시에 침략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결국 도요토미 정권이 내리막으로 치닫는 순간 침몰선에 동승하여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죽음을 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후 에도 시대 역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유키나가와 달리 기요마사는 조선 침략 당시의 행적이 일종의 무용담이 되었고, 민간전승이나 전쟁에 관한 이야기책 속에서 끊임없이 회고되었다. 아마도 기독교도였던 유키나가가 당시 민간신앙의 핵심이었던 불교나 신도와 별다른 관계가 없었던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한때 히고 지역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이후 기요마사가 히고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유키나가의 그림자를 철저히 지워버리고자 했다. 더욱이 시마바라의 난 · 아마쿠사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국가 정책으로 기독교의 색채를 말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