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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 一覽 반야 일람
我斷生兮死自滅,
師逐人兮塊自息。
내가 생生을 끊으니 사死는 저절로 멸하고
사자가 사람을 쫓으니 흙덩이는 저절로 쉰다.
《般若經》云:「最勝天王白佛:
『云何菩薩於無生法而見有生?』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최승最勝 천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이 무생법無生法에서 생이 있음을 봅니까?’
佛告天王:『當知諸法無滅,是故無生。
何以故?性不變故。
但由世俗見有生滅,皆是虛妄,非真實有。
부처님께서 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에는 소멸이 없으니,
이 때문에 생함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품[性]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속을 말미암아서 생멸이 있음을 보지만
이는 모두가 허망해서 진실한 유有가 아니다.
若諸菩薩行深般若,即如實知無明因緣故生諸行,依行生識,廣說乃至由有故生,生即有老,老故有死,愁歎苦惱。
만약 모든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한다면 곧 여실하게 알 것이니,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온갖 행을 낳고, 행에 의거해서 식識이 생긴다.
자세히 설하면 나아가 유有로 말미암기 때문에 생生이 있고, 생이 있으면 곧 늙음이 있고, 늙음이 있으므로 죽음과 근심과 탄식과 고뇌가 있는 것이다.
是故,修行為斷無明,無明若斷,餘十有支展轉隨滅。如身若斷,命則隨滅。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는 무명을 끊어야 하고,
무명이 끊어지면 나머지 10지支도 잇달아서[展轉] 그에 따라 소멸한다.
마치 몸이 끊어지면 목숨도 그에 따라 소멸하는 것과 같다.
天王當知:邪見外道為求解脫,但欲斷死,不知斷生。
천왕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外道는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단지 죽음을 끊으려 할 뿐이지 생生을 끊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若法不生,即無有滅。譬如有人塊擲師子,師子逐人而塊自息;菩薩亦爾,但斷其生而死自滅。
만약 법이 생하지 않는다면 곧 소멸도 없으니,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흙덩이를 사자에게 던지자 사자가 사람을 쫓으니 흙덩이가 저절로 쉬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니, 단지 그 생함을 끊기만 해도 죽음은 저절로 소멸한다.
犬唯逐塊,不知逐人,塊終不息;外道亦爾,不知斷生,終不離死。
개는 오직 흙덩이를 쫓을 뿐 사람을 쫓는 것은 알지 못하므로 끝내 쉬지를 못한다. 외도도 또한 마찬가지니, 생生을 끊을 줄 모르기에 끝내 죽음을 여의지 못한다.
菩薩行深般若,善知因緣、諸法生滅。』」(果字函第九卷)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한다면, 인연과 모든 법의 생멸을 잘 알 것이다.”[과자함 제9권]
即這般若豈可求? 非如金寶力而得。
이 반야를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금은보배의 힘으로 얻는 것과도 같지 않다.
《智度論》云:
「但了波羅蜜相是為行深般若波羅蜜,不從十方求,亦無與者,亦非如金、銀、寶物力求而得。」(立字函第一卷)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다만 바라밀의 상相을 요달한다면, 이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시방十方에서 구하더라도 주는 자가 없으며,
또한 금은보배의 힘으로 구해서 얻는 것과도 같지 않다.”[입자함立字函 제1권]
般若無相雖求難,
方便之力應可證。
반야는 모습이 없어서 비록 구하기 어렵더라도
방편의 힘으로 마땅히 증득할 수 있다.
《般若經》云:「佛告舍利子:『所求菩提,方便善巧乃能證得。
菩薩修般若時,若見有法自性可得則應可取;不見有法自性可得,當何所取?
所謂:不取此是色、此是受……等,乃至此是聲聞、此是菩薩、此是如來。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보리를 구함은 방편선교方便善巧라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
보살이 반야를 닦을 때, 만약 법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면 마땅히 취할 수 있으나, 법의 자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 마땅히 어디에서 취할 것인가? 이른바 취하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색色이고, 이것이 바로 수受 등이고, 나아가 이것이 바로 성문이고, 이것이 바로 보살이고, 이것이 바로 여래이다.
舍利子!菩薩修行般若,如實了知一切法性……,乃至如來皆不可取,如是不可取波羅蜜多即是無障波羅蜜多,如是無障波羅蜜多即是般若波羅蜜多,諸菩薩應於中學。於中學時尚不得學,況得菩提?
사리자여, 보살이 반야를 수행하면 일체의 법성法性과 여래를 다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요달해 안다.
이와 같이 취할 수 없는 바라밀다가 곧 장애가 없는 바라밀다이며,
이와 같이 장애가 없는 바라밀다가 곧 이 반야바라밀다이다.
모든 보살들은 마땅히 그 속에서 배워야 하고,
그 속에서 배울 때 오히려 배운다는 것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보리를 얻겠는가?
何以故?無少法有自性,於如是無性為自性法中,何等是異生法?乃至何等是如來法?如是諸法既不可得,依何等法可施設有補特伽羅?補特伽羅既不可得,云何可說此是異生……,乃至如來?』
왜냐하면 자성이 있는 작은 법도 없기 때문이니, 이처럼 자성이 없음이 자성법自性法인데 무엇이 이생법異生法이고, 나아가 무엇이 여래법如來法이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이미 얻을 수 없는데, 어떤 법에 의거해서 시설施設할 수 있겠는가?
보특가라(補特伽羅:사람)가 있더라도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것은 이생법異生法이고, 나아가 여래법이라고 설할 수 있겠는가?’
舍利子白佛:『若一切法皆無自性、都非實有,依何等事而可了知此是異生法……,乃至如來法?』
사리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약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어서 마땅히 실유實有가 아니라면, 어떤 일에 의거해서 이것은 이생법이고, 나아가 여래법이라는 것을 요달해 알 수 있습니까?’
佛告舍利子:『於意云何?為實有色受時,如諸愚夫異生執不?』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이나 수受가 실유實有한다고 할 때 이는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처럼 이생異生의 집착인가?’
舍利子言:『不也。但由顛倒,愚夫有如是執。』
사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단지 전도顚倒됨으로 말미암아서 어리석은 범부가 이같이 집착하는 것입니다.’
佛告舍利子:『諸菩薩修行般若,方便善巧,雖觀諸法皆無自性、都非實有,而依世俗發趣菩提,為諸有情種種宣說,令得正解,遠離顛倒。』」(霜字函第一卷)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이 반야의 방편선교方便善巧를 수행할 때는 비록 모든 법이 다 자성이 없어서 실유가 아님을 관하더라도 세속에 의거해서 보리를 발취發趣하니,
이는 온갖 유정有情을 위해서 갖가지로 널리 설하여 올바른 이해를 얻도록 해서 전도됨을 멀리 여의게 하려는 것이다.’ ”[상자함 제1권]
「復次,善現白佛:『何等名為菩薩菩提資糧?要具如是資糧乃能證得菩提。』
“다시 선현善現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을 보살의 보리의 자량資糧이라 합니까?
요컨대 이 같은 자량을 갖추면 보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까?’
佛答:『一切善法皆是菩提資糧,修令圓滿乃能證得一切智智。』」(第五卷)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일체의 선법善法은 모두 보리의 자량이니, 원만하게 수행함으로써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할 수 있다.’ ”[제5권]
因筏至岸宜亡筏, 於法尚離況非法?
뗏목으로 인해 언덕에 도달하면 마땅히 뗏목은 버려야 한다.
법도 오히려 여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阿含經》云:「『譬如有人縛筏求渡,[A77]已從此岸得至彼岸,由於此筏濟我厄難,苟從有恐之地得至無為之處,我今不捨此筏,持用自隨乎?為不能耶?』
『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뗏목을 엮어서 강을 건너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미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렀다면, 이 뗏목을 말미암아서 나의 액난厄難을 구제한 것이니, 진실로 두려움이 있는 땅으로부터 무위無爲의 처소에 이른 것이다. 내가 지금 이 뗏목의 용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따르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佛告比丘:『善法尚猶可捨,何況非法?』」(如字函第八卷)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법도 오히려 버릴 수 있어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임에랴?.’ [여자함 제8권]
愚智自性本來無, 彼此皆空何得捨?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자성은 본래 없는 것이어서
피차가 모두 공空한데 어떻게 얻고 버리겠는가?
《正法經》云:「佛告迦葉:『譬如燈光能破一切黑暗,而彼黑暗從何而去?非東方去……,乃至北方去,去亦非去,來亦非來。
『정법경正法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이 능히 일체의 어둠을 깨뜨리는 것과 같으니,
저 어둠이 어디로 가겠는가?
동쪽으로 가거나 나아가 북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와도 오는 것이 아니다.
迦葉!復次,燈光又亦非我能破黑暗,若非黑暗,何顯燈光?
가섭이여, 다시 등불도 또한 그 자체[我]가 능히 어둠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니,
만약 어둠이 없다면 어떻게 등불이 드러나겠는가?
迦葉!燈光、黑暗,本無自性,此二皆空,無得、無捨。
가섭이여, 등불과 어둠은 본래 자성이 없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해서 얻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迦葉!是故,智慧亦復如是,有智若生,無智即捨,而彼無智歸於何去?
非從東方至……、北方去,去既非去,來亦非來。
가섭이여, 이런 까닭에 지혜도 또한 이와 같나니,
지혜가 만약 생긴다면 무지無智가 곧 사라지지만,
저 무지가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동쪽으로부터 북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
가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와도 오는 것이 아니다.
迦葉!復次,有智若生,無智即捨,非彼有智,能壞無智,無智本無,有智何顯?
가섭이여, 다시 지혜가 만약 생긴다면 무지는 곧 사라지지만, 저 유지有智가 능히 무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니, 무지가 본래 없다면 유지가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迦葉!有智、無智,俱無自性,此二皆空,無得、無捨。』」(卿字函第三卷)
가섭이여, 유지와 무지는 모두 자성이 없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여 얻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경자함 제3권]
聞空便乃著空無, 猶鹽太過傷鹽美。
공空을 듣고서 문득 공무空無에 집착한다면
마치 소금이 너무 지나쳐 소금의 좋은 점을 해치는 것과 같다.
《智度論》云:「觀其空人,先有無量布施、持戒、禪定,其心柔軟,諸結使薄,然後得真空。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공을 관하는 사람은 먼저 한량없는 보시와 지계持戒와 선정으로 그 마음이 유연하고 모든 번뇌[結使]가 희박해진 다음에야 진공眞空을 얻는다.
邪見之人應無此事,但以[A78]憶想分別,邪心取空。譬田舍人初不識鹽,見人以鹽著種種肉菜之中而食,問言:『何以故爾?』 與語:『此鹽能美物味。』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고, 단지 상념으로 분별해서 삿된 마음으로 공을 취한다. 비유하면 시골 사람이 처음엔 소금을 알지 못하다가 남이 갖가지 고기와 야채에 소금을 뿌려서 먹는 걸 보고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이 소금이 음식의 맛을 좋게 한다네.’
他便抄鹽,滿口食之,鹹苦傷口,遂而問曰:『汝何以言鹽能作美?』
彼責:『癡人!此當籌量,得中令美,云何純食?』
그러자 그는 문득 소금을 입 안 가득히 넣어 먹었는데 너무나 짜서 입이 상했다.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소금이 맛을 좋게 한다고 말하는가?’
그가 어리석은 사람을 질책했다.
‘이 소금은 반드시 양을 알맞게 조절해야만 맛을 낼 수 있네.
어찌 그냥 마구 먹는 것을 말했겠는가?’
然無智人聞空解脫門,不修功德但欲得空,是為邪見,斷諸善根。
무지한 사람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들으면, 공덕은 닦지 않고 다만 공을 얻으려고만 하니, 이는 삿된 견해로서 모든 선근善根을 끊는 것이다.
若人入阿毗曇等三門,則知佛法不相違背,能知是事即是般若波羅蜜力,於一切法無所罣礙。
만약 사람이 아비담阿毘曇 등의 3문門에 들어가면, 불법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 일을 능히 아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힘이니, 일체법에 대해 걸리는 바가 없다.
若不得般若波羅蜜法,入阿毗曇門則墮有中、若入空門則墮無中、若入昆勒門則墮有無中。
만약 반야바라밀의 법을 얻지 못하고 아비담문에 들어가면 유有 속에 떨어지고, 만약 공문空門에 들어가면 무無 속에 떨어지고, 만약 곤륵문蜫勒門에 들어가면 유무有無 속에 떨어진다.
復次,菩薩行般若波羅蜜,雖知諸法一相,亦能知一切法種種相;
雖知諸法種種,亦能知一切法一相,名為般若波羅蜜。」(德字函第八卷)
또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비록 모든 법이 하나의 상[一相]임을 알더라도 또한 능히 일체법의 갖가지 상相을 알 수 있고,
비록 모든 법의 갖가지 상相을 알더라도 능히 일체법이 하나의 상임을 알 수 있으니,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덕자함 제8권]
非無人故名曰空, 但法自空非色滅。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법이 스스로 공한 것이지, 색色을 멸한 것이 아니다.
《寶雲經》云:「『善男子!非無人故,名之曰空,但空自空,前際、後際、中際亦空,但法自空,非色滅空,當依於空,莫依於人。
『보운경寶雲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야,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은 스스로 공한 것이어서 전제前際ㆍ후제後際ㆍ중제中際도 역시 공하고, 다만 법은 스스로 공한 것이지 색色이 멸한 공이 아니니, 마땅히 공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라.
若以得空而依於空,佛說是人則為退墮。
만약 공을 얻었는데도 공에 의거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퇴보한다고 설하셨다.
善男子!寧起我見積如須彌,莫以空見起增上慢。所以者何?一切諸見以空得脫,若起空見則不可治。譬如有人怖畏虛空,悲號搥胸,作如是言:「卻此虛空。」
선남자야, 차라리 아견我見을 일으켜서 수미산처럼 쌓을지언정 공견空見으로써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지 말라. 왜냐하면 일체의 견見은 공으로써 해탈을 얻는데, 만약 공견空見을 일으킨다면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을 무서워해서 슬프게 호곡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허공을 물리쳐다오.’
於意云何?如是虛空,可除卻不?』『不也。世尊!』『如是。若畏空法,我說是人狂亂失心。所以者何?常行空中而畏於空。』」(木字函第七卷)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같은 허공을 없앨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공법空法을 두려워한다면, 나는 이 사람이 미쳐서 실성했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항상 공 속에서 행하면서도 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목자함 제7권]
有我無我各一邊, 離有離無名中道。
유아有我든 무아無我든 각기 한쪽 부분이며
유有를 여의고 무無를 여읜 것을 중도中道라 한다.
《智度論》云:「佛為眾生欲墮斷滅見者,說言有我受後世罪福;
若人欲墮常見者,說言無我、無作者、受者,離是五眾假名,更無一法自在者。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단멸斷滅의 견해를 따르려는 것에 대해 나가 있어서 후세의 죄와 복을 받는다고 설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상견常見에 떨어지려고 하면 나도 없고 짓는 자도 없고 받아들이는 자도 없다고 설하셨다. 이 5중衆의 가명仮名을 여의면, 다시 한 법도 자재한 것이 없다.
問曰:『若爾者,何等為實?』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실實인가?
答言:『無我是實,一切法無常,一切法無我,寂滅是安穩涅槃,名為諸法實相。
若人善根未熟,佛不為說是深無我法,若是為說即墮斷滅。』
【답】 무아가 실實이다. 일체법은 무상無常하고, 일체법은 무아이며, 적멸이 안온한 열반이니, 이름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한다.
만약 사람의 선근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깊은 무아를 설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런 자에게 설한다면 곧 단멸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問曰:『如迦葉問中,佛說:「我是一邊,無我是一邊,離此二邊名為中道。」今云何言無我是實,有我為方便說?』
【문】 가령 가섭의 질문 속에서 부처님께서는 아我도 한쪽 변邊이고 무아도 한쪽 변이니 이 두 가지 변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중도中道라 설하셨다. 지금 어째서 내게 무아는 실實이라고 말하고 유아는 방편이 된다고 설하는가?
答曰:『說無我有二種:一者、取無我相著無我,二者、破我,不取無我,亦不著無我,自然捨離。
「『○復次,佛說有我、無我,有二因緣:一、用世俗說,故有我;二、用第一實相說,故無我。如是等說有我、無我無咎,佛處處說諸法有、處處說諸法無。』」(建字函第六卷)
【답】 무아를 설한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무아상을 취하여 무아에 집착한 것이다. 둘째는 아我를 타파해서 취하지 않고 무아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버리고 여의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유아와 무아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세속으로써 설명했기 때문에 유아이고,
둘째는 제일의 실상實相으로써 설명했기 때문에 무아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의 유아와 무아에 대한 설명은 잘못이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모든 법의 유有를 설하셨고, 곳곳에서 모든 법의 무無를 설하셨다.”[건자함 제6권]
通達諸法畢竟空, 是行般若波羅蜜。
모든 법이 필경에 공하다는 걸 통달한다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智度》云:「須菩提白佛:『觀一切空不牢固,是空相為行般若不?』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체의 공을 관하면서 이 공의 모습[相]에 고착되지 않는다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佛言:『不也。何以故?若空無有法,云何行般若?』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공해서 법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반야를 행하겠는가?’
『離是空更有法行般若不?』
‘만약 이 공을 여의고서 다시 법이 있다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佛言:『不也。何以故?若一切法空,無相、無作,云何離空而更有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일체법이 공하다면 모습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공을 여의고서 다시 법이 있겠는가?’
須菩提!聞空非行般若、離空非行般若,一切法皆攝在般若中。今但問般若行般若不?
수보리가 여쭈었다.
‘공空도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공을 여의는 것도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 일체법이 다 반야에 섭수되어 있는 가운데서 지금 단지 반야를 묻는 것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法不自行,應以異法行。』
‘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니, 반드시 이법異法으로써 행해야 한다.’
復問:『離般若更有法行般若不?』
다시 여쭈었다.
‘반야를 여의고서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佛言:『不也。何以故?一切法攝在般若中,更無法行般若。』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법이 반야에 섭수되어 있는 가운데서 다시 반야를 행하는 법은 없다.’
復問:『若不行,云何得無上道?』
다시 여쭈었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도無上道를 얻습니까?’
佛反問:『汝以慧眼見,定有一法行般若不?』
부처님께서 반문하셨다.
‘그대는 지혜의 눈으로 결정코 하나의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한다고 보는가?’
答言:『世尊!不見有行般若者。』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반야를 행하는 것이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復問:『汝見是般若行處不?』
‘그대는 반야를 행하는 처소를 보는가?’
須菩提言:『不見。何以故?般若中一切諸觀滅,若常、若無常,若生、滅等,無一法定相是般若,云何當說是般若?』
수보리가 말했다.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반야 속에선 일체의 관觀이 소멸해서 상常이나 무상無常이나 생멸 등 한 법도 정해진 상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 어찌 이 반야를 적당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復問:『若汝以智慧眼不見法,是不見法為有?為無?』
‘만약 그대가 지혜의 눈으로써 법을 보지 못한다면, 이 보지 못하는 법은 유有라 하는가, 무無라 하는가?’
答言:『無。何以故?佛說慧眼觀不見,故言無。』
대답하였다.
‘무無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선 지혜의 눈으로 관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無라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復問:『若法無不可得,是法有生不?』
‘만약 법이 무無라서 얻을 수 없다면, 이 법은 생生하는 것인가?’
答言:『不生,是法本自無,畢竟空。』
대답하였다.
‘생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본래 스스로 무無라서 필경은 공합니다.’
佛語須菩提:『若菩薩於生是法中通達無礙,信力、智慧力故,能住是法中,是名無生忍,是行般若波羅蜜。』」(表字函第七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이 법에 대해 통달하여 의심이 없다면,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 때문에 능히 이 법 속에서 머무니, 이를 무생인無生忍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표자함 제7권]
集出經中之名相, 直於言下以分疏。
경 가운데 명상名相을 뽑아서 모으고
그 언구 아래에서 바로 간략하게 분석한다.
《指要錄》注出般若名相八十餘科,庶發披閱者智智爾。
『지요록指要錄』의 주석에서 반야의 명상名相 80여 과科를 뽑았는데, 아마도 열람하는 자의 지혜를 발해서 알도록 한 것이리라.
○五蘊:色蘊(積聚虛假)、受蘊(領納資貪)、想蘊(取像奔馳)、行蘊(微細遷流)、識蘊(熾然了別)。
5온蘊은 색온色蘊[쌓임으로서 비어 있고 가짜이다], 수온受蘊[받아들여서 탐착의 자량이 된다], 상온想蘊[상像을 취해서 달려간다], 행온行蘊[미세함이 변천하면서 흐른다], 식온識蘊[타오르는 듯하면서 요별한다]이다.
○六根:眼根(喜怒視相)、耳根(聽審相續)、鼻根(愛憎香臭)、舌根(嘗味甘苦)、身根(貪嫌澀滑)、意根(恒審思量)。
6근根은 안근眼根[모습을 보고 기뻐하거나 노여워한다], 이근耳根[계속해서 듣고 살핀다], 비근鼻根[냄새를 맡고는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설근舌根[달거나 쓴 것을 맛본다], 신근身根[껄끄럽거나 매끄러운 것을 탐내거나 싫어한다], 의근意根[항상 살피고 사량한다]이다.
○六塵:色塵(形顯質礙)、聲塵(反聞成迷)、香塵(薰蕕惑知)、味塵(鹹淡遷怒)、觸塵(冷暖勞苦)、法塵(萬像紛紜)。
6진塵은 색진色塵[형체가 드러나 가로막음을 성질로 한다], 장애[礙]를 가로막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색色은 그 형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다른 것이 그 공간을 함께하지 못하게 막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성진聲塵[도리어 듣는 것이 미혹을 이룬다], 향진香塵[향기나는 것과 냄새나는 것으로 앎을 미혹한다], 미진味塵[짠맛과 싱거운 맛으로 분풀이한다], 촉진觸塵[차고 더운 것이 수고롭다], 법진法塵[만 가지 상이 분분하다]이다.
○六識:眼識(玄黃不真)、耳識(苦樂音異)、鼻識(觀氣旋光)、舌識(辯說邪正)、身識(隨機現儀)、意識(緣慮循空)。
6식識은 안식眼識[검고 누런 것이 참되지 못하다], 이식耳識[고락苦樂의 소리가 다르다], 비식鼻識[기운을 관찰하여 빛을 돌린다], 설식舌識[삿되고 바른 것을 분별해 설한다], 신식身識[기틀에 따라 몸짓을 나타낸다], 의식意識[생각을 반연하여 공으로 돌아온다]이다.
○六觸:眼觸(離則明見)、耳觸(遠近全聞)、鼻觸(聞香即知)、舌觸(味合即覺)、身觸(不合不覺)、意觸(冥契諸相)。
6촉觸은 안촉眼觸[여의면 밝게 본다], 이촉耳觸[멀고 가까운 것이 전부 들린다], 비촉鼻觸[냄새를 맡으면 곧 안다], 설촉舌觸[맛과 닿으면 곧 지각한다], 신촉身觸[닿지 못하면 지각하지 못한다], 의촉意觸[온갖 모습과 은밀히 계합한다]이다.
○六緣所生:眼緣所生受(光非照境)、耳緣所生受(順音分辨)、鼻緣所生受(薰修頓圓)、舌緣所生受(辛酸何依)、身緣所生受(故逸無逸)、意緣所生受(想念不忘)。
육연소생六緣所生은 안연소생수眼緣所生受[빛은 비춤의 경계가 아니다], 이연소생수耳緣所生受[소리를 수순하여 분별한다], 비연소생수鼻緣所生受[훈습으로 원돈圓을 닦는다], 설연소생수舌緣所生受[맵고 신 것이 어디에 의지하랴], 신연소생수身緣所生受[방일해도 잃는 것이 없다], 의연소생수意緣所生受[상념을 잊지 않는다]이다.
○四緣:因緣(諸法和合)、次第緣(心心數法)、所緣緣(法無所依)、增上緣(法無可得)。
4연緣은 인연因緣[모든 법이 화합한다], 차제연次第緣[심법과 심수법心數法이다], 소연연所緣緣[법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 증상연增上緣[법은 얻을 수 없다]이다.
○六大:地大(堅凝質礙)、水大(潤下滋愛)、火大(炎上生瞋)、風大(鼓[A81]籥操動)、空大(不見邊表)、識大(萬法本源)。
6대大는 지대地大[단단히 응결되고 가로막음을 성질로 한다], 수대水大[매끄러우면서 아래로 향하고 애착을 적신다], 화대火大[불꽃이 피어나듯 성냄을 일으킨다], 풍대風大[조급히 움직인다], 공대空大[끝과 겉을 보지 못한다], 식대識大[만법의 본원이다]이다.
○十二因緣:無明(昏翳真智)、行(流注不息)、識(妄生愛染)、名色(觀形定實)、六入(根塵睹對)、觸(漸生染著)、受(納而不執)、愛(習力成染)、取(執之不捨)、有(業因成就)、生(愛慾流轉)、老(漸覺變異)、病(眾苦纏聚)、死(捨墮識飛)、憂(煩悶沉戚)、悲(鬱快哀悲)、苦(惡緣煩現)、惱(怨害相遇)、我者(起我、我所)、生者(如父有子)、壽者(命根成就)、命者(能舉事故)、有情者(蘊和合生)、養育者(因緣故長)、眾數者(諸法有數)、作者(手足能所)、使作者(力能役他)、起者(作後世業)、使起者(亦令他作)、受者(苦樂果現)、使受者(厭苦厭樂)、見者(目觀色像)、知者(五識知名)。
12인연因緣은 무명無明[어두워 참 지혜를 가린다], 행行[흘러드는 것이 쉬지 않는다], 식識[망령되게 애염愛染을 일으킨다], 명색名色[형상을 관해서 실다움을 정한다], 6입入[근根과 진塵이 상대한다], 촉觸[점점 물들어 집착함을 낳는다], 수受[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는다], 애愛[습기의 힘이 오염을 성취한다], 취取[대상을 집착하고 버리지 않는다], 유有[업의 인因이 성취된다], 생生[애욕이 유전한다], 노老[점점 변이變異를 깨닫는다], 병病[온갖 고통이 얽어맨다], 사死[버리고 떨어지면서 식識은 날아간다], 우憂[번민하고 슬픔에 빠진다], 비悲[울적하고 슬퍼서 운다], 고苦[나쁜 인연이 단박에 나타난다], 뇌惱[원수의 해침을 만나게 된다], 아자我者[나와 내 것을 일으킨다], 생자生者[부모에게 자식이 있는 것과 같다], 수자壽者[명근命根을 성취한다], 명자命者[능히 사事를 하기 때문이다], 유정자有情者[5온이 화합하여 생긴다], 양육자養育者[인연 때문에 자라난다], 중수자衆數者[모든 법에는 수數가 있다], 작자作者[손발의 능소能所이다], 사작자使作者[힘으로 능히 남을 부린다], 기자起者[지은 뒤 세간의 업이다], 사기자使起者[또한 남으로 하여금 짓게 한다], 수자受者[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가 나타난다], 사수자使受者[고통을 싫어하고 쾌락을 싫어한다], 견자見者[눈으로 색상色像을 본다], 지자知者[5식이 명칭을 아는 것이다]이다.
○六度:布施(捨己惠他)、淨戒(三業無染)、安忍(毀譽風清)、精進(勇猛無怯)、靜慮(妙絕諸緣)、般若(智慧圓徹)。
6도度는 보시布施[자기 것을 희사하여 남에게 혜택을 준다], 정계淨戒[세 가지 업에 오염이 없다], 안인安忍[비난과 칭찬에 의연하다], 정진精進[용맹하여 나약함이 없다], 정려靜慮[모든 반연을 미묘하게 끊는다], 반야般若[지혜가 원만히 사무친다]이다.
○二十空:內空(六根無體)、外空(六塵無相)、內外空(六識無有)、空空(病去藥除)、大空(小乘法無)、小空(四果相無)、勝義空(功用投現)、有為空(生滅相無)、無為空(無相亦無)、畢竟空(諸法相盡)、無際空(不見終始)、散空(和合相離)、無變異空(如如智寂)、本性空(法本常無)、自相空(不待彼無)、共相空(自他相盡)、一切法空(皆不可得)、不可得空(可亦不可)、無性空(假緣即無)、自性空(體本元虛)、無性自性空(俱無亦無)。
20공空은 내공內空[6근根에 실체가 없다], 외공外空[6진塵에 모습이 없다], 내외공內外空[6식識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空空[병이 나으면 약도 없앤다], 대공大空[소승법은 없다], 소공小空[네 가지 과의 모습이 없다], 승의공勝義空[공용功用이 거짓으로 나타난다], 유위공有爲空[생하고 소멸하는 모습이 없다], 무위공無爲空[모습 없음도 또한 없다], 필경공畢竟空[모든 법의 모습이 다한다], 무제공無際空[시작과 마침을 보지 않는다], 산공散空[화합하는 모습을 여읜다], 무변이공無變異空[여여한 지혜의 공적함], 본성공本性空[법은 본래 항상 무이다], 자상공自相空[없어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공상공共相空[자기와 남의 모습이 다한다], 일체법공一切法空[모두 얻을 수 없다], 불가득공不可得空[가可 역시 불가不可이다], 무성공無性空[연緣을 빌리면 곧 무이다], 자성공自性空[체體의 본원은 비어 있다], 무성자성공無性自性空[모두 무인 것도 무이다]이다.
○四諦:苦聖諦(世間果相)、集聖諦(世間因相)、滅聖諦(出世果相)、道聖諦(出世因相)、真如(不變隨緣)、法界(理事圓融)、法性(常自寂滅)、不虛妄性(本來真實)、不變異性(今古常然)、平等性(凡聖一致)、離生性(寂爾無形)、法定(諸境常如)、法住(各安自位)、實際(不立一塵)、虛空界(無有邊量)、不思議界(心言路絕)。
4제諦는 고성제苦聖諦[세간의 과果의 모습이다], 집성제集聖諦[세간의 인因의 모습이다], 멸성제滅聖諦[출세간의 과의 모습이다], 도성제道聖諦[출세간의 인의 모습이다]이다.
진여眞如[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에 따르는 것이 있다], 법계法界[이理와 사事가 원융하다], 법성法性[항상 스스로 적멸하다], 불허망성不虛妄性[본래가 진실이다], 불변이성不變異性[지금이나 옛날이나 항상 그러하다], 평등성平等性[범부와 성인이 일치한다], 이생성離生性[적멸해서 형상이 없다], 법정法定[모든 경계가 항상 여여하다], 법주法住[각각 스스로의 지위에 안주한다], 실제實際[한 티끌도 세우지 않는다], 허공계虛空界[끝이 없다], 부사의계不思議界[마음과 말길이 끊어졌다]이다.
○四靜慮:初禪(有尋有伺)、二禪(無尋唯伺)、三禪(無尋無伺)、四禪(捨念清淨)。
4정려靜慮는 초선初禪[심尋도 있고 사伺도 있다], 2선禪[심尋은 없고 오직 사伺만 있다], 3선禪[심尋도 없고 사伺도 없다], 4선禪[염念을 버려서 청정하다]이다.
○四無量:慈無量(慈定廣大)、悲無量(悲定含空)、喜無量(喜定周遍)、捨無量(捨定廓徹)。
4무량無量은 자무량慈無量[사랑의 정定이 광대하다], 비무량悲無量[연민의 정定이 허공과 같다], 희무량喜無量[기쁨의 정定이 두루한다], 사무량捨無量[희사의 정定이 두루한다]이다.
○四無色:空無邊處(空定現空)、識無邊處(識定現識)、無所有處(無定是定)、非非想處(無想想定)。
4무색無色은 공무변처空無邊處[공의 정定이 공을 나타낸다], 식무변처識無邊處[식의 정이 식을 나타낸다], 무소유처無所有處[정이 없는 것이 정이다], 비비상처非非想處[생각도 생각 아닌 것도 없는 정이다]이다.
○八解脫:觀內有色外亦觀色解脫(見內見外)、觀內無色外亦觀色解脫(見外見內)、內外諸色解脫(有無俱淨)、空無邊處解脫(緣色同空)、識無邊處解脫(三世識空)、無所有處解脫(無色緣無)、非非想處解脫(絕相成妙)、滅受想定解脫(心數法盡)。
8해탈解脫이란, 안에서 색色이 있는 걸 관하고 밖에서도 색을 관하는 해탈[觀內有色外亦觀色解脫][안을 보고서 밖을 본다], 안에서는 색이 없는 걸 관하지만 밖에서는 색을 관하는 해탈[觀內無色外亦觀色解脫][밖을 보고 안을 본다], 안팎의 모든 색의 해탈[內外諸色解脫][있든 없든 모두 청정하다],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색을 인연해도 공과 동일하다],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3세世의 식이 공하다],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무색無色의 반연도 없다], 비비상처해탈非非想處解脫[상相을 끊고 묘妙를 성취한다], 멸수상정해탈滅受想定解脫[심수법心數法이 다한다]이다.
○八勝處:一勝處(淨相超勝)、二勝處(色境超勝)、三勝處(內外超勝)、四勝處(真空超勝)、五勝處(妙識超勝)、六勝處(空無超勝)、七勝處(非想超勝)、八勝處(想定超勝)。
8승처勝處는 1승처[청정한 모습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2승처[색의 경계가 뛰어나게 수승하다], 3승처[안팎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4승처[진공眞空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5승처[오묘한 식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6승처[공무空無가 뛰어나게 수승하다], 7승처[비상非想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8승처[상정想定이 뛰어나게 수승하다]이다.
○九次第定:一次第定(初禪喜樂)、二次第定(二禪妙生)、三次第定(三禪妙樂)、四次第定(四禪浮盡)、五次第定(空能普入)、六次第定(識能明了)、七次第定(無有即有)、八次第定(無想即想)、九次第定(心滅無滅)。
9차제정次第定은 1차제정[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2차제정[2선의 묘한 생生이다], 3차제정[3선의 오묘한 즐거움이다], 4차제정[4선의 정진淨盡이다], 5차제정[공이 능히 널리 들어간다], 6차제정[식이 능히 명료하다], 7차제정[무유無有가 곧 유이다], 8차제정[상념 없음이 곧 상념이다], 9차제정[마음이 멸해도 멸함이 없다]이다.
○十遍處:一遍處(地大周匝)、二遍處(水大周匝)、三遍處(火大周匝)、四遍處(風大周匝)、五遍處(空大周匝)、六遍處(青色滿空)、七遍處(黃色滿空)、八遍處(赤色滿空)、九遍處(白色滿空)、十遍處(黑色滿空)。
10변처遍處는 1변처[지대地大가 두루 돈다], 2변처[수대水大가 두루 돈다], 3변처[화대火大가 두루 돈다], 4변처[풍대風大가 두루 돈다], 5변처[공대空大가 두루 돈다], 6변처[청색이 공空에 가득하다], 7변처[황색이 공에 가득하다], 8변처[적색이 공에 가득하다], 9변처[백색이 공에 가득하다], 10변처[흑색이 공에 가득하다]이다.
○四念處:觀身不淨(染緣有故)、觀受是苦(執取增縛)、觀心無常(念念遷滅)、觀法無我(無有定相)。
4념처念處는 몸이 청정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오염의 반연이 있기 때문이다], 수受가 고통임을 관하는 것[취하는 것에 집착하면 속박을 더한다], 마음이 무상임을 관하는 것[생각생각마다 흘러가면서 소멸한다], 법이 무아임을 관하는 것[정해진 모습이 있지 않다]이다.
○四正勤:精進根(靈苗滋茂)、精進覺(心心警策)、精進力(毫釐不屈)、正精進(不墮邪習)。
4정근正勤은 정진근精進根[신령스런 싹이 더욱 무성하다], 정진각精進覺[마음 마음마다 경책한다], 정진력精進力[털끝만치도 굽히지 않는다], 정정진正精進[삿됨을 따르지 않는다]이다.
○四神足:定根(深固幽遠)、定覺(寂而常照)、定力(魔不能動)、正定(入佛三昧)。
4신족神足은 정근定根[깊고 단단하고 유원幽遠하다], 정각定覺[적멸하되 항상 비춘다], 정력定力[마魔가 능히 흔들 수 없다], 정정正定[부처님의 삼매에 들어간다]이다.
○五根:信根(能入法海)、念根(住持不忘)、精進根(念茲在茲)、定根(湛寂虛通)、慧根(明辨實諦)。
5근根은 신근信根[능히 법해法海에 들어간다], 염근念根[머물고 지녀서 잊지 않는다], 정진근精進根[언제나 생각한다], 정근定根[맑고 고요하여 허통虛通한다], 혜근慧根[진제를 명백히 변별한다]이다.
○五力:信力(一念萬年)、念力(全清絕點)、精進力(塵劫無怠)、慧力(摧邪顯正)、定力(須彌高固)。
5력力은 신력信力[일념이 만 년을 간다], 염력念力[한 점도 없이 완전히 맑다], 정진력精進力[진겁塵劫이 지나도록 게으르지 않는다], 혜력慧力[삿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드러낸다], 정력定力[수미산처럼 높고 튼튼하다]이다.
○七覺支:念覺(靈心不昧)、擇法覺(微細明了)、精進覺(已覺求覺)、喜覺(法樂禪悅)、猗覺(所覺無覺)、定覺(明明了了)、捨覺(離覺所覺)。
7각지覺支는 염각念覺[신령스런 마음이 어둡지 않다], 택법각擇法覺[미세함이 명료하다], 정진각精進覺[깨닫고 나서도 깨달음을 구한다], 희각喜覺[법의 즐거움이고 선의 희열이다], 의각猗覺[깨친 바가 없는 깨침이다], 정각定覺[밝디 밝고 또렷하고 또렷하다], 사각捨覺[깨침과 깨친 바를 여의는 것이다]이다.
○八聖道支:正語(心口相應)、正業(無非佛事)、正命(結使已除)、正思惟(斷妄想故)、正方便(不墮無為)、正念(心無異緣)、正定(超諸神足)、正見(信業報故)。
8성도지聖道支는 정어正語[마음과 입이 상응한다], 정업正業[불사佛事가 아닌 것이 없다], 정명正命[결사結使를 이미 없앴다], 정사유正思惟[망상을 끊었기 때문이다], 정방편正方便[무위에 떨어지지 않는다], 정념正念[마음에 다른 반연이 없다], 정정正定[모든 신족神足을 초월한다], 정견正見[업보를 믿기 때문이다]이다.
○三解脫門:空解脫門(空不見空)、無相解脫門(相不見相)、無願解脫門(願即無願)。
3해탈문解脫門은 공해탈문空解脫門[공은 공을 보지 못한다],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모습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원하는 것은 곧 원함이 없는 것이다]이다.
○菩薩十地:歡喜地(證聖位故)、離垢地(身心清淨)、發光地(智[A86]已生明)、燄慧地(妙解廓照)、現前地(通達真俗)、難勝地(功行超越)、遠行地(隨方應化)、不動地(忍智自如)、善慧地(通力自在)、法雲地(大智圓明)。
보살의 10지地는 환희지歡喜地[성스러운 지위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이구지離垢地[몸과 마음이 청정하다], 발광지發光地[지혜가 이미 밝음을 낳는다], 염혜지焰慧地[미묘한 깨달음이 확연히 비춘다], 현전지現前地[진眞과 속俗을 통달한다], 난승지難勝地[공행功行이 초월한다], 원행지遠行地[방소에 따라서 감응해 교화한다], 부동지不動地[인지忍智가 저절로 여여하다], 선혜지善慧地[신통의 힘이 자재롭다], 법운지法雲地[대지혜가 원만히 밝다]이다.
○五眼:肉眼(見內暗外)、天眼(內外俱明)、慧眼(照了諸相)、法眼(觀機設教)、佛眼(普觀法界)。
5안眼은 육안肉眼[안은 보아도 밖은 어둡다], 천안天眼[안팎이 모두 밝다], 혜안慧眼[온갖 모습을 비추어 요달한다], 법안法眼[기틀을 관해서 가르침을 시설한다], 불안佛眼[널리 법계를 관한다]이다.
○六通:天眼通(徹視大千)、天耳通(洞聽十方)、他心通(悉知種類)、宿命通(達三世事)、神境通(形無質礙)、如意通(任運自在)。
6통通은 천안통天眼通[대천大千세계를 사무쳐 본다], 천이통天耳通[시방을 확연히 듣는다], 타심통他心通[종류를 다 안다], 숙명통宿命通[3세의 일을 요달한다], 신경통神境通[형상에 장애가 없다], 여의통如意通[임운任運하여 자재롭다]이다.
○十力:一、是處非處如實力(善行惡行),二、知三世報業力(報果分明),三、知諸禪解脫三昧力(明了正定),四、知眾生諸根上下力(了知界性),五、知眾生種種欲力(知根所樂),六、知世間種種性力(定不定性),七、知一切道至力(諸禪定境),八、得夙命智力(古即是今),九、得天眼能觀一切力(不見一法),十、得漏盡智力(薪盡火滅)。
10력力은, 첫째는 처소든 처소가 아니든 여실한 힘이고[선행과 악행], 둘째는 3세의 업보를 아는 힘이고[과보가 분명하다], 셋째는 모든 선禪의 해탈 삼매를 아는 힘이고[명료한 정정正定이다], 넷째는 중생의 온갖 근기의 위와 아래를 아는 힘이고[계界의 성품을 요달해 안다], 다섯째는 중생의 갖가지 욕망의 힘을 아는 것이고[근根의 즐기는 바를 아는 것이다], 여섯째는 세간의 갖가지 성품의 힘을 아는 것이고[정定과 부정不定의 성품이다], 일곱째는 일체 도의 지극한 힘을 아는 것이고[모든 선정의 경계이다], 여덟째는 숙명지의 힘을 얻는 것이고[옛날이 곧 지금이다], 아홉째는 천안天眼을 얻어서 일체를 관하는 힘이고[한 조각도 보지 않는다], 열째는 누진지漏盡智를 얻는 힘이다[장작이 다하면 불도 꺼진다]
○四無畏:法無所[A87]畏(作師子吼)、漏盡無所畏(何所屈撓)、說障道無所畏[A88](能破邪惑)、說道無所畏(決定如是)。
4무외無畏는 법무소외法無所畏[사자후師子吼를 짓는다], 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어느 곳에 굽어 휘어짐이 있는가?],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삿된 미혹을 능히 타파한다], 설도무소외說道無所畏[결정이 이와 같다]이다.
○四無礙解:詞無礙(口海波濤)、辯無礙(應作是說)、法無礙(義無不了)、義無礙(法無不通)。
4무애해無碍解는 사무애詞無碍[구해口海의 물결이다], 변무애辯無碍[마땅히 이러한 설을 짓는다], 법무애法無碍[뜻을 요달치 못함이 없다], 의무애義無碍[법이 통하지 않음이 없다]이다.
○四攝法:大慈(廣攝物故)、大悲(廣拔苦故)、大喜(廣與樂故)、大捨(廣施惠故)。
4섭법攝法은 대자大慈[널리 사물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대비大悲[널리 고통을 뿌리뽑기 때문이다], 대희大喜[널리 함께 즐기기 때문이다], 대사大捨[널리 베풀기 때문이다]이다.
○十八不共法:一、身無失(行無不規),二、口無失(言無不法),三、意無失(念無不正),四、無異想(正信調直),五、無不定心(動而常靜),六、無不知已捨(善惡諸法),七、欲無減(不厭小善),八、精進無減(動靜平常),九、念無減(等心澄湛),十、慧無減(平實明了),十一、解脫無減(縛脫無二),十二、知見無減(遍知普見),十三、身業(隨智慧行),十四、口業(隨智慧行),十五、意業(隨智慧行),十六、過去無不了(所修所行),十七、未來無不知(所記所報),十八、現在無不見(現受現果),無忘失法(證無漏性)、恒住捨性(虛凝湛寂)、一切智(無所不了)、道相智(了無所了)、一切相智(了了無了)、一切阤羅尼門(總持妙性)、一切三摩地門(正心正受)。
18불공법不共法은, 첫째는 몸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행이 규범에 어긋남이 없다], 둘째는 입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말이 법 아님이 없다], 셋째는 뜻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염念이 바르지 않음이 없다], 넷째는 다른 상념이 없는 것이고[올바로 믿어서 조화롭고 정직하다], 다섯째는 정심定心 아님이 없는 것이고[움직이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여섯째는 이미 버린 것을 알지 못함이 없고[선과 악의 모든 법이다], 일곱째는 욕구가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작은 선善이라도 싫어하지 않는다], 여덟째는 정진이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움직이고 고요함이 무상하다], 아홉째는 염念이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균등한 마음이 맑고 담연하다], 열째는 슬기가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고르고 실다우며 명료하다], 열한째는 해탈이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다], 열두째는 지견知見이 줄어듦이 없는 것이고[두루 알고 두루 본다], 열셋째는 신업身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넷째는 구업口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다섯째는 의업意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여섯째는 과거를 요달치 못함이 없는 것이고[닦은 바이고 행하는 바이다], 열일곱째는 미래를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고[수기하는 바이고 보응하는 바이다], 열여덟째는 현재를 보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수受를 나타내고 과果를 나타낸다].
잊어버림이 없는 법이고[무루無漏의 성품을 증득한다], 항상 버림의 성품에 머무는 것이고[비고 고요하며 담적하다], 일체지一切智[요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이고, 도상지道相智[요달할 것이 없는 걸 요달한다]이고, 일체상지一切相智[요달하고 요달해도 요달함은 없다]이고, 일체다라니문一切陀羅尼門[총지總持의 묘한 성품이다]이고, 일체삼마지문一切三摩地門[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수受이다]이다.
○四果:預流果(須阤洹也)、一來果(斯阤含也)、不來果(阿那含也)、無生果(阿羅漢也),獨覺菩提(自悟本智)、一切菩薩摩訶薩行(自覺覺他)、諸佛無上正等菩提(因圓果滿)。 (溪字函第二卷)
4과果는 예류과預流果[수다원이다], 일래과一來果[사다함斯陀含이다], 불래과不來果[아나함阿那含이다], 무생과無生果[아라한阿羅漢이다]이다.
독각보리獨覺菩提[스스로 근본지를 깨닫는다], 일체보살마하살행一切菩薩摩訶薩行[자기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한다], 모든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인과가 원만하다]이다.”[계자함 제2권]
『대장일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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