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학교나 통학 도중에도 직접 키요시에게 “대만의 원주민”이라고 하는 차가운 말은 듣지 않게 됐지만 놀러오는 아이들도 없고 키요시가 가면 모두 도망가버렸다. “재는 금방 선생님께 일러바치기 때문에 무서운 놈이다. 모두, 저쪽에서 놀자.” 라고 말해서 키요시의 마음속은 허전함과 쓸쓸함이 항상 함께 했다. 그러나 키요시는 용기를 가지고 통학을 계속했다. 한편 레이카도 낮에는 남편이 갖고 오는 회사 일을 열심히 계속해서, 지금은 실감는 것도,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무의 전표나 장부까지, 남편의 일을 집에서 도울 수가 있게 되었고 주판도 향상되어 있었다.
기둥이 없어진 모자
돔 속에서 키요시는 초등학교 시대의 자신의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전개되어 가는 드라마를 보면서, 유년시절의 하나하나를 확실히 분석해서 자신의 마음속의 구름을 맑게 했다. 생과 사의 문제는 그다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없고, 돔 속은 상당히 광명의 정도가 높아져서 확실히 밝게 되어 갔다. 그리고 자신도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가는 모습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드라마 속 어머니 레이카와 키요시에게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그것은 아빠의 죽음이었다. 아빠 지로는 작업 중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박테리아가 들어가 패혈증이 되어 고열을 앓다가 1주일간의 짧은 투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아빠는 죽기 2일 전에 각오하고 있었다. “레이카, 고생시켜서 미안해. 혹시 내가 먼저 죽으면 키요시를 부탁해” 라고 말하고 확실히 레이카의 손을 쥐고 흐르는 눈물은 베개를 적셨다. “당신 이런 일로 죽으면 안돼요. 우리들을 위해서도 건강하게 사세요. 신이시여 남편을 구해주세요” 그러나 레이카의 비통한 바람도 신은 듣지 않고 지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팡이로도, 기둥으로도, 의지하고 있던 사랑하는 아빠가 먼저 죽자, 레이카는 키요시와 함께 비탄에 잠겼다. 아빠의 형이 나서서 장례식을 마쳤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지로의 죽음은, 레이카와 키요시에게 가혹한 인생을 전개시켜 갔다.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감시가 심해지고 레이카와 키요시의 허전한 가정에 죽은 아빠의 형 에이이치가 때때로 왔다. 밤 늦게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큰 며느리 히데가 에이이치의 행동을 질투하고, 레이카를 심하게 화냥년이라고 욕하며 떠들고, 시어머니가 일하는 기계도 가져가서 일자리도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대만으로 돌아오라는 재촉이 있다. 시어머니는 모든 방법으로 레이카 모자를 엄격히 감독하고 있다. 그러나 레이카는 남편의 고향을 떠나는 것을 단념하고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키요시를 위해서도 참고 살아 가려고 ,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념했다. 그리고 어느날 히데가 찾아왔다. “레이카. 내 남편을 뺏을 작정이야. 너는 도둑고양이다! 이웃 주부로부터도 들었는데 에이이치를 꼬시고 있는 것같다.” 라고 미친듯이 화난 모습으로 꾸짖었다. “당치도 않아요. 에이이치 형님은 그런 분이 아니예요. 장례식의 뒤처리와 일 때문에 오신 것이예요. 회사가 끝났기 때문에 오셨지만, 저에게 양심에 부끄러운 행동이나 마음은 없어요. 오해입니다. 아무쪼록 죽은 남편의 형인 에이이치한테 잘 들어주세요.” 라고 레이카는 엄격히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 위에 “밤늦게 오기 때문에 오해하셔도 하는 수 없지만 제가 사랑했던 사람은 지로라는 것을 잊지마세요. 중국인은 그런 여자와 다릅니다. 돌아가 주세요.” 히데는 댓구도 없이 현관 문을 있는 힘껏 닫고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 에이이치는 레이카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찾아오지 않았다. 레이카가 대만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떤 문제도 없지만, 키요시의 일을 생각하면 대만으로 돌아가도, 혼혈아라고 하는 낙인을 제거할 수 없고, 예민한 아이 마음에 이 이상 괴로움을 체험시키고 싶지 않은 레이카의 부모 마음이었다. 대만에 가서, 일본인들한테 차별받고 사는 것도, 일본에서 차별받고 생활하는 것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 중에서 대만인으로서 차별받고 평생 괴로움을 짊어지기보다 일본인으로서 아이까지 있는 이상, 언젠가 아이가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희미한 기대도 레이카의 마음속에는 있었다. 그리고 레이카는 대만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누구나 이후의 새로운 사람들은, 일본인으로서 사귀어 줄 것과, 어느 정도의 희망이 마음속에 있었다. 이후도 키요시를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않으면 안되고, 이국 땅에서 모자(母子) 둘이 내팽개쳐진 현재, 어머니로서 강하게 사는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혹독한 어려움과 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젠 눈물따위 흘리고 있을 수는 없다. 레이카는 키요시가 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 힘을 내서, 엄마도 힘낼게. 엄마를 따라와” 라고 방긋이 웃고 위로했다.
1934년 일본은 불경기로 생사(生絲)의 가격이 떨어지고 군마현에도 불황의 바람이 불어왔다. 남편의 우편저금통장에는 357엔의 잔고가 있었다. 당시는 대학졸업자가 50엔의 초봉을 받는 시대다. 이 돈으로는 1년 먹고 살 수가 없다. 레이카는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대만의 타이쥬여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가사도우미를 했을 뿐으로 어떤 기술도 배우지 않았다. 남편이 전표나 장부를 집에 갖고 와서 일을 한 5년간에 레이카는 사무원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취직자리를 신문이나 광고 등을 보며 가급적 집에서 가까운 곳을 찾았다. 남편의 시댁에 상담하러 갔어도 “너는 대만으로 돌아가라. 키요시는 내가 뒷바라지를 한다.” 고 변함없이 무자비한 대답이다. 키요시를 떼어놓을 것이면, 남편에게 가는 것이 좋다고 레이카는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스스로 직장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이세사키까지 가서 상점의 입구에 서서 이런 곳이라면 좋지 않을까하고 용기를 내서 “안녕하세요. 저를 써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사무원이라면 차를 준비하는 것도 장부도 합니다.” 뻔뻔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상점 주인은 “당신은 누구신가요?” “네 저는 변두리에 살고 있는 미타무라 레이카라고 합니다.” “아직 혼자이신가요?” “남편은 먼저 죽고 현재는 초등학교 5학년의 자식이 있어요”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네 31세입니다” “몇 시까지 일하실 수 있나요?” “네 5시까지라면” “그 때는 우리 가계가 제일 바쁠 때이기 때문에 안돼요.” 라고 첫 번째는 완전히 실패였다. 그리고 서너 집 물어봤으나 취직자리는 못 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레이카는 남편이 죽고 벌써 2개월, 취직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어디에 가도 누구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 레이카의 마음에 희망을 주었다. 키요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빠의 영전(靈前)에서 “ 아빠, 나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님께 효도할께요. 지켜주세요.” 라고 학교에 갈 때 불단 앞에서 합장한다. 그 모습을 볼 때, 레이카는 항상 자신이 잘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논의 벼이삭은 황금색으로 여물어 무거운 머리를 숙이고 있다. 허수아비 |
첫댓글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