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愛의 단편소설입니다.
시한부애(時限附愛)
나는 사랑을 했습니다.
비록 다른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눈물과 상처로 뒤엉킨 너무나도 아픈 사랑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너무나 행복했던….
그런 사랑을 나는 했습니다.
부시럭 부시럭,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무언가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비춰졌다. 하나, 둘, 셋. 세번정도 눈을 깜박이니, 그제서야 시야가 온전하게 깨끗해졌다. 꼼지락 대며 목까지 덮힌 이불을 들춰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뻐근한 몸을 두들기며 비어있는 옆자리를 매만졌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차가움이 꽤나 시려서 나도 몰래 몸을 흠칫 떨었다.
머리아파.
어쩐지 오늘따라 머리가 어질어질한게 기분이 별로였다. 또다시 흐릿해져오는 시야를 바로잡은 뒤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켜 기지게를 폈다. 우드득.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눈가에 붙은 눈꼽을 털어내며 침대 옆에 고이 놓여있는 푸른색 슬리퍼를 신은 뒤 방문을 열어제꼈다.
" 어? 일어났네! "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녀는 귀여운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상쾌한 아침을 맞는 이 순간이 기분이 좋아 나는 평소에는 잘 짓지도 않던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일찍 일어났네. 나지막한 나의 말에 그녀는 그저 방긋 웃었다.
" 눈이 왔어. 이것 봐봐. "
그녀는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나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 위에는 이미 녹아버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는 그저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실망으로 축 쳐졌다. 내 손으로 눈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속상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확연히 가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강아지 털마냥 내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졌다.
" 눈이 정말 많이 왔어. 온세상이 하얗게 변했는걸. 너무 예뻐. "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말대로 배란다 밖으로는 새하얀 눈이 마치 살포시 세상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새하얀 세상. 그 어떤 근심도 슬픔도 없는 듯 한 그 세상을 우리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기뻐보였다. 눈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좋을까?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작게 웃어버렸다. 어쩐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웃음이 났다.
" 나가자! 나가서 보면 더 이쁠거야. "
밖은 추울꺼야.
나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녀는 괜찮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 난 건강하잖아. "
아아 그래, 맞아.
그녀의 말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어쩐지 너무나도 즐거워졌다.
단단히 옷을 챙겨입었다. 두꺼운 점퍼에 모자, 목도리까지 하니 그 모습이 마치 눈사람 같아서 나는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내 장난스러운 웃음에 그녀의 두볼이 홍시마냥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휙, 몸을 돌려 화난 듯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녀의 뒤를 나는 천천히 뒤쫓았다. 새하얀 눈이 머리위로 떨어졌다. 눈썹위로 떨어진 눈 때문에 저 멀리서 뛰어다니는 그녀가 잘 보이지 않았다.
" 이것봐~ 내가 꽃을 만들었어! "
그녀의 외침에 나는 눈을 비비며 다가갔다. 새하얀 거리 위로 찍힌 그녀의 발자국과 다섯개의 꽃잎을 가진 예쁜 꽃한송이. 예쁘다. 내 칭찬에 그녀가 또다시 방긋 웃었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 내가 또 만들어 줄… 꺅! "
철푸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눈이 쌓인 땅바닥 위로 엎어졌다. 놀라서 서둘러 달려가니 연신 엉덩이를 비비며 울쌍을 짓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괜찮아? 내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덜컥 무서워졌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고 숨이 가파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기울어졌다.
또한번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볼에 닿아오는 차가운 느낌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아하하하하. "
그녀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뭐야 장난이었구나. 놀랬잖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머리를 그적이는 나를 향해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겨우 이정도로 난 안다쳐. 난 건강하잖아. "
응 맞아. 건강하지. 근데 그냥 어쩐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려는 걸 애써 참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상했다. 바보같이 왜이러지?
" 아, 예쁘다. 우리 내년에도 같이 보자.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
바닥에 누워 마치 꿈을 꾸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작은 손을 나는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어쩐지 차갑게 식어있는 그녀의 손이 안타깝고 슬펐다. 대답을 바라는 듯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래, 꼭 같이보자. 계속. 언제까지나.
" 진우야! "
눈을 떴다. 새하얀 천창. 익숙치 않은 기분나쁜 냄새가 코속을 맴돌았다. 새하얀 세상과 방긋 웃던 그녀의 미소가 하룻밤의 꿈 마냥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안돼. 어딜가. 손을 뻗어 사라져가는 그 잔상을 쫓았다. 결국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그 흐릿한 잔상을 허망하게 응시하며 나는 손을 떨구었다. 그제서야 주위의 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 진우야, 진우야. 엄마야. 엄마 알아보겠어? "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 범벅이 되고 헝크러진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못알아볼리가 없었다.
" 엄마. "
" 그래! 엄마야. 진우야…. "
그녀가 나를 품속으로 껴안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그 품에 나는 갑자기 온 몸으로 밀려들어오는 피로에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몸이 나른해져올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머리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에 나는 굳어버린 혀를 움직였다.
" …세진이는? "
난 분명 세진이랑 같이 있었는데.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무거운 침묵에 휩싸인 병실을 훑어보았다. 어디에도 세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눈을 뜨자마자 그 예쁜 미소로 나를 제일 먼저 반겨줬을텐데. 제일 먼저 안아줬을텐데. 그리고 그 어여쁜 목소리로 내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근조근 이야기했을텐데.
" 의사선생님도 정말 많이 노력하셨어. 하지만 진우야, 너도 알다시피 그 애는….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머릿속에 방긋 웃는 세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울고 있는 세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실에 앉아있는 세진이, 호흡기를 낀 세진이, 삐적 말라서 뼈밖에 남지않은 세진이….
아, 그래 맞아.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세진이는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유전성 타이로신혈증. 그것이 그녀를 오랜 시간 괴롭게 만든 병명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이 정해진 그녀는 단 한번도 병원 밖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손에 잡히지 않는 그 풍경들을 묵묵히 마음에 담을 뿐이었다. 그애를 만난건 새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날이었다. 교통 사고로 실려온 나는 다리의 신경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달리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선생님의 선고를 받고는 좌절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병원 복도에 앉아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사람들을 응시하는 그녀와 처음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서,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안녕. "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본 후에 아무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고 다시 한번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것은 오기같은 것이었다. 사랑만 받고 자란 철없는 꼬마아이가 처음으로 받은 무관심에 당황하고, 반드시 관심을 받고 말겠다는 그런 아주 유치한 감정이었다.
" 나랑 친해지지 않는게 좋을걸. "
5번째로 하는 인사에 그녀가 되돌려준건 아주 차가운 한마디였다.
" 왜? "
" 나랑 친해지면, 나중에 상처받을테니까. "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바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용감했다. 그녀의 차가운 말에 나는 양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난 튼튼하니까. "
이 얼마나 멍청한 대답이던가. 하지만 이런 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니, 크게 웃었다. 치아가 다 드러나보이도록 아주 밝고 크게.
" 후회하게 될거야. "
나와 그녀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차가운 모습을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밝고 명랑한, 그리고 미소가 너무나도 예쁜 소녀였다. 나는 치료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지냈다. 하루는 밤새 밖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떠들기도 하고, 하루는 간호사 언니들을 피해 병원 앞에 있는 작은 뒷뜰에서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하루 그렇게 즐겁게 보내던 나는 문득 초췌해진 소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였을까. 점점 살이 빠지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징그럽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망가져있었다. 손목도 마치 가는 나뭇가지를 보는 것 마냥 가늘어져있었다.
" 아파? "
내 말에 그녀는 마냥 웃기만 했다. 그녀의 병은 점점 심해졌다. 약도 더이상 효과를 보이지 않는지 의사선생님은 그녀의 병실에 들렸다 나올때면 언제나 깊게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열약한 환경속에서도 웃었다. 왜 웃어? 아프고 속상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 아파. 속상해. 나한테 이런 병을 준 신이 원망스럽기도 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철 없이 복도를 뛰어다니고 싶고, 친구들과 손 잡고 학교라는 곳도 가보고 싶은데, 왜 나는 이렇게 아픈걸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걸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주어졌을까. 정말 많이 속상해.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슬퍼해도 달라지는 건 없는거야. 현실은 바뀌는게 하나 없어. 결국 나는 안타까운 병에 걸린 소녀일뿐인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금까지 내가 울고불고 혼자 괴로워했던게 너무 우스워보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웃기로 했어.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웃기로 했어. 나는 강해서 네가 준 이 무서운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다고. "
그녀는 방긋 웃었다.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로 왠만한 천하장사보다 강인해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병세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결국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침대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도 없이 각혈했으며 근육이 망가졌는지 종종 침대에 누운 상태로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 진우야. "
" 왜. "
그녀는 오랜만에 내 이름을 온전히 불렀다. 그녀의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얼굴을 들어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마주했다.
" 눈이 보고 싶어. "
" 조만간 겨울이 올거야. 그때 같이 눈구경하자. "
내 말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미소에 나는 어쩐지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잠든 내 손을 붙잡은채 저 하늘 멀리,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녀가 떠난 그 시간, 하늘에서는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하얀 눈송이가 세상을 덮었다.
나는 사랑을 했습니다.
비록 다른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눈물과 상처로 뒤엉킨 너무나도 아픈 사랑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너무나 행복했던….
그런 사랑을 나는 했습니다.
비록 이제는 길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는 사랑이 되었지만,
그녀의 미소가 여전히 내 가슴 한구석에 아로새겨져있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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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유치꼬마님 ^^
아ㅜ_ㅜ 지금 세계선수권 틀어놓고 보고 있는데
안도미키의 쇼트곡인 가브리엘 오보에가 나와서
완전 슬픔에 빠져들었어요ㅠ_ㅠ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천령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