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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7 - 여진족의 금나라는 몽골 제국과의 23년간 공방전 끝에 결국 망하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침략세력이지만...
반면에 고려를 침공한적은 없으며, 군신관계를 인정하고 금나라 황제를 섬기기만
하면 금은 고려의 독립은 훼손하지 않았으니 고려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는 100만도 안되는 적은 인구로 1125년에 거란족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만리장성을 넘어
1127년에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황제를 포로로 잡는등 6천만에 달하는 중국과
싸우는 중에 고려가 송나라와 연합해 배후인 만주에 침입할까 염려해서 굴복만 시킨 것입니다.
몽골이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역시 고려가 금나라나 송나라와 연합해 몽골의
후방인 만주를 침입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했으니
금나라가 힘이 있을때, 즉 몽골이 세력을 키울때 금나라와 연합해 몽골에 대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진족이 세운나라 금(金) 은 중국식 국호이고 여진어로는 암반 알춘 구룬 (Amban Altʃun Gurun)
으로, 국호인 금 (Antʃun) 은 하얼빈 동쪽 아십하 (阿什河) 의 옛 이름 안출호수 (按出虎水)
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안출호 (按出虎) 는 여진어로 금 (金) 을 뜻하는 '알춘' 을 음차한 것입니다.
안출호(按出虎) 는 고구려 시대에 말갈 7부 중 안차골부 (安車骨部) 가 있었던 지역으로, 완안 아골타가 말하기를,
"요나라는 빈철(賓鐵)로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
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띠는 금 만이 변치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라며 금(金) 을 국호로 삼았습니다.
훗날 청나라 시절에“흠정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안출호가
금(金) 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해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하면서, 금 시조 함보가 신라 땅에서
여진족 땅으로 이주했다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은 것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훗날 청나라 황성(皇性) 애신각라(愛新覺羅) 를 "新羅 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 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이신 교로 (애신각라) 는 무쿤(穆昆, Mukūn) 과 하라(哈拉, hala) 의 연칭으로, 아이신
(Aisin, 愛新)은 무쿤(穆昆 가족 공동체) 이요, 교로(Gioro, 覺羅) 는 하라(哈拉: 씨족 공동체, 성씨) 라는 뜻입니다.
금(金)나라는 한족(漢族) 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 몽골족등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쓰곤 했는데, 이간질
시키며 주기적으로 몽골을 토벌해 남자를 죽이는 정책으로 유목민족들에게 악명이 높았으니,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이유가 이런 정책으로 조상 암바가이 칸이 금나라에게 살해당한 원한 때문입니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시킨후,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병력 (9만~12만 명) 을 총동원하였으니 1211년 가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수적으로는 금나라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몽골군의
제베가 우회해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금군은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합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나라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이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두니,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금나라군과 회화보
전투에서 싸워서 또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후 금나라는 야전 대신에 성채전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불리해집니다.
금나라가 만주에서 일어났을때는 천하무적이었으니 요나라와 송나라를 쳐부수고 화북지방을 점령해 정착했는데....
춥고 거친 환경에서 검소하고 질박했으며 사냥등 평소 생활이 훈련이었지만 정착생활로 인해 기름진
음식과 비단옷으로 배에 지방이 쌓여 나태해지다 보니, 새로운 유목민족의 기마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회하보 인근을 초토화시킨 몽골군은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에 도착했으니 수도 연경(베이징)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최후의 관문이기에 금나라에 중요한 최전방이라.... 금나라군은 거용관 근처 100리에
마름쇠를 깔아놔서 몽골군이 침공 못하게 막아놨지만 이후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 거용관을
뚫었고, 마침내 금의 수도 연경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금나라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합니다.
이후 칭기스칸은 자신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를 시켜서 대동(다퉁)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
시켰고, 인근의 목초지를 급습해서 군마를 모두 빼앗았으니.... 말을 거의 잃어버린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었으니 요동 일대의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어느정도 양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위소왕이 거란족 부족장을 죽이고,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는등 탄압 정책을 시행했기에 요나라 왕족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요나라를 다시 세우는 바람에 실패했는데,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 진압하려고 했지만.... 보병 위주 금나라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 부대에 참패합니다.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1212년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징기스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는 구원하러 온 금나라군을 격파했고, 제베의 부대는 요양(랴오양) 을 함락
시켰는데.... 대동을 포위하는 도중에 칭기즈 칸이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었고, 다시 변경으로 후퇴합니다.
1213년 7월에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였고, 이전에 한번 뚫려서 철벽방어를 하는
거용관을 피해서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에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반대쪽에서 공격해 점령하였으며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합니다.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연경 포위에 병력의 일부를 남긴채,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모든 화북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으며.... 한편 연경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위소왕 이후 즉위한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 철수합니다.
급한 불을 끈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방어에 용이한 남쪽의 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게 했지만 이에
자극받은 징기스칸은 다시 연경을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게 합니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의 금나라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하였고,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으니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금나라군 장수 포선만노는 만주에 대진국을 세웠고,
이후 몽골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동하를 세웠으며 그리고 징기스칸은 이때 연경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동요를 세운 거란족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하였지만... 자신들 부족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한 일부 거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하였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으며 몽골군에 밀리게 되자 고려를 침공합니다.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으로 차출
되었으니 중국에는 무칼리의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2만명의 몽골인과 5만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무칼리는 1217년~1218년에 산동과 대정 일대를 점령하였고,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 및 고려와 연대해 궤멸시켰으며 그리고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지역을 정복합니다.
이때 금나라는 줄어든 국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송을 공격하는데.... 이는 옛날 선비족의 후연이
북위에게 수도 중산을 뺏기고 북쪽 열하지방의 용성으로 달아나 국력이 30% 미만으로
줄어들자, 북위가 장안의 여러나라들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는 북쪽으로 밀려난
후연을 재공격해 올 것이니 그전에 줄어든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것과 유사합니다.
즉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왜군에 포위된 신라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5만 대군을 남하시키자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개모성을 공격해 7백리 땅을 빼앗고 고구려인 5천을 포로로 잡아가니,
광개토대왕은 병력이 없어 구원병도 보내지도 못하고 전령을 보내 5만 대군을 불러와 2년간
휴식후 수비가 엄중한 신성은 공격하지 못하고 멀리 북쪽에 방비가 약한 숙군성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옛날에 북송이 철천지 원수인 거란족 요나라에 대한 원한 때문에 눈이 멀었으니, 여진족 금나라
와 손을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사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송은 요나라와
화해하고 연합해 금나라에 맞서 세발 솥 처럼 양립했으면 정강의 변을 면할수도 있었을 것이라?
역사는 되풀이 되니, 훗날 이번에는 금나라가 송나라와 화해후 원쑤들끼리 연합해 몽골족의 공격
에 맞섰다면 역시 망하지는 않았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라! 역사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법이니.... 오늘날 한일관계가 그러합니다.
금나라는 30여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1217년부터 1224년 사이
대송 전쟁이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고, 오히려 남송의 금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세폐가 끊기면서..... 역으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설상가상으로 몽골족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서하도 금을 공격해 오는데... 금나라 위소왕 시절
몽골이 서하를 공격했을때 서하가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무시했기 때문에 그원한이 남아 약해진
금나라를 물고 뜯을려고 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금나라, 서하, 송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셋째인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으니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에 화평사절을
보냈으나, 원한에 사무친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金)을 5번째로 침공하기로 결정하는데 황하 북부 대부분은 몽골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으니 황하 연안, 수도인 개봉 근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곳이 있었으니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 공격에 대비했는데 금나라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했고, 금나라 최후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나라 애종이 국가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맞섭니다.
몽골군의 5차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오고타이 칸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번째 루트를 선택하였으니 몽골
의 명장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으니....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킬 유일한 인물을 고작 월권 따위 때문에?
사형죄였으나 금 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해 몽골군과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는데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20배에 달하는 8,000여명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하였으니 이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였으니, 파르완 전투는
6만 대 병력이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몽골군이 적에게 패배한 최초 전투입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니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족에 거란, 여진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말을 탈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기병 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강력한 전력이었는데,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지만...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잡고 민간인을 약탈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다음해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으니 먼저 서쪽에서 경양을 포위하고
전년도 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며,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
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 (衛州) 를 공격하였습니다.
위주를 빼앗긴다면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수 있었으니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 가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합니다.
서쪽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하였고,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해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였으니 금군은 수적 우세에 힘입어 몽골군을 격파할 수 있었고 완안합달-
이랄포아에게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나면서 일부 군대를 금군 배후로 이동시켰는데, 몽골
별동대가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오면서 금군은 패해 위주가 함락됩니다.
서쪽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뒤 몽골군이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하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으니 금나라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
에 머무른채 소극적이었으나 그 와중에 안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천명 병력은 동관을 공격한 몽골군을 격파합니다.
동관 서부를 장악한 몽골군은 여름을 보낸뒤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 수도 개봉을 공격했는데 금나라의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을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개봉을 급습하기로 하였으며...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개봉 사이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나라 군대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했으며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하였습니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하려고 했으니... 금나라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차례 전투에서 격렬
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입니다.
한수를 건너는데 성공한 툴루이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완안진화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부 병력만
남기고 금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 개봉으로 진격했으니 이를 알게 된 금나라군은 개봉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나라군이 개봉까지 휴식
없는 강제행군하게 만들었고....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지치기 시작합니다.
금군이 개봉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하였으니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이 기습하였고,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지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기를 자처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균주성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동관에 있는 11만 병력도 개봉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몽골군에게 궤멸
되면서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해 툴루이와
합류하였으니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고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개봉에 도착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워서 장애물을 없앴고,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 개봉은 원래 있는 인구에 피난민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이에 맞선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몽골군에게 거세게 저항하였고,
전투가 장기화되어서 양측 피해가 커지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리니
몽골군은 물러갔지만...... 개봉에선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등 생지옥이 펼쳐집니다.
금나라에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명장 맹공의 3만명 군대와 30만섬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해 전쟁은
금나라에게 불리해지자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했는데,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
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저항력을 상실하고 최립이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몽골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채주도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 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전군이 복멸되고 무선은 도망쳤으며
개봉을 함락한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합니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개의 물줄기를 점령해 채주 쪽으로 돌리니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생지옥이 되어갔으니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몽골- 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해 최후를 맞았고 채주는 함락되었으며
완안승린은 도망치다가 황위를 물려받은지 하루만에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니 금나라는 1234년 멸망합니다.
최후의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지만, 금나라의 부흥 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으니 이 중에 곽하마는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1236년에 몽골군에게 패배했고, 백제의 계백 장군
처럼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는 곽하마도 자결하였으니 결국 금나라는 최후의 명맥마저 끊어졌습니다.
결국 몽골 제국은 숙적이였던 금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
하는데 성공했고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였으니.... 일부 여진족은 이를 피해 고려로 피난가서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고 남은 여진족과 금나라 지배 하에 있는 한족은 원나라의 하층민으로 편입됩니다.
사실 여몽전쟁과 몽골- 남송 전쟁에 가려져서 그렇지 금나라도 23년 정도 꽤 많이 버텼는데..... 서하, 서요, 호라즘
제국, 조지아 왕국이 몽골에 멸망하던 이 때도 금나라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이니 초기에
기병 상당수가 죽고, 북중국 지역의 목초지 마져 뺏기고도 저 정도 버틴 것만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1368년 원나라가 한족(漢族) 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후,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은 금나라 당시 중원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던 여진족인 경우가 많고 예허부 처럼 몽골 투메드부계를 시조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명말청초 만주의 여진족들 중에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구심점이 되어 만주족의
후금(청나라) 을 일으켜 중원 지역을 정복하고 최후의 정복왕조이자 마지막 중화제국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중원에 남아있던 여진족은 명나라 건국후 여진족 혈통임을 숨기고 살거나, 한족으로 동화되어 잊혀진
경우가 많았는데...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뒤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여진족임을 청 황실에
고하기도 했고, 청나라에 고한 여진족들의 후손들은 팔기군에 편입되어 신분상승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여진족은 반농반목, 수렵채집 사회로 축산업과 사냥이 발달했으며, 사슴과 노루, 토끼, 멧돼지, 꿩 등의
짐승들을 사냥했고 어로 생활에 밭농사도 일부 지어 나물과 야채, 곡물도 섭취했고 임업을 하거나
약초도 채집했는데 한족화가 급격히 진행된 이후 목축과 사냥, 야생식물 채집 등은 비중이 낮아집니다.
금사(金史) 고려전에는 "금인(金人) 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 라고 기록되었으며,
실제로 금나라를 건국하기 전의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섬겨
왔으니..... 고려와 접촉이 없던 북만주의 완안부가 여진족을 통일하기 전까지 여진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고려는 친고려 성향의 부족들에게 조공받으며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넓혔습니다.
북만주에서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영가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등장한 완안부의 세력이 다른 여진족을 아우르는
한편 고려 북방 경계를 위협하게되자 숙종이 여진 정벌을 시도햇지만 완안부의 전력이 강해 성과가 없었으니,
이에 고려는 절치부심해 예종 대인 1107년에 18만 대군을 일으켜 여진을 공격했는데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입니다.
그러나 함경도 지역은 길이 많아 방어하기 어려웠고,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빼앗긴 여진족은
필사적으로 반격해 1109년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을 대파하며 9성 중 2성을 탈환하자 고려는
북방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고, 여진측 역시 근거지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길주성
탈환에 실패하자 '절대로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 고 맹세한후 자신들의 고향땅을 되돌려 받습니다.
이렇듯 고려는 '영토 확장' 이라는 1차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완안부가
여진족들의 구심점이 되는데 도움만 되었다며 윤관의 여진정벌이 실패한 정벌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니... 고려가 평온한 시기를 거치면서 모아놨던 국력을 한 번에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승승장구하던 완안부에게 고려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형식의 화친을 성사시켜
북방 경계를 안정시켰고, 금을 건국해 요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과 중원을 아우르는 대국이
되었음에도 고려와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는데, 이는 100만도 안되는 소수민족
으로서 남쪽 남송 및 서북쪽 몽골군과 싸우는 중에 동쪽에서 새로은 양면 전선을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라!
여진은 금나라를 건국하고(1115년) 요나라를 밀어붙이는등 세력이 커지자 1117년에 오히려 고려에 여진을 형으로
인정하는 형제의 맹약을 요구하니 고려에서는 무시했는데,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거슬렸지만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었기에 고려와 대대적인 전면전을 치른 요나라의 경우와 달리 큰 충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 1127년 북송을 무느뜨린 이후에는 대놓고 고려에
사대적 관계를 요구하니, 고려가 칭신하고 조공하며 순순히 받아들이고 금 또한
예전에 근거지를 잃었던 뼈아픈 교훈과 남송 전선을 의식하여 고려와 별 충돌 없이 지내게 됩니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은 동북 9성 보다도 보주(保州 의주)
이니 요나라의 멸망이 다가오자 금나라와 고려는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하는데,
금나라가 요나라 땅이었던 보주(의주) 점령에 가까워지자 고려는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반환을
요구하니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 라고 대답한 뒤 부하들에게 대비를 지시합니다.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거부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보주 일대를 두고 두 국가가 만나게 된 것인데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보주(의주)는 요나라 땅이었으니 고려 쪽에서 치러 간다면 고려는 요나라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두 나라 간의 연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고 크게는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으니
고려도 이를 파악하고는 군사적 움직임 보다는 외교적인 움직임으로 항복을 권유하였고 결국
달아나지 못해 남아있던 거란 관리가 고려에 항복(1117년 3월) 하며 보주와 내원성은 고려 땅이 되었습니다.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 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금나라는 건국 10년만인 1125년, 마침내 요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니..... 놀란
고려 인종은 1126년 3월 신묘일에 모든 관료를 소집해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인종이 즉위한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는데 고려사 인종 세가에 모든
신하가 반대했으나 이자겸과 고려 제일의 맹장 척준경만이 동의했다고 하며 종묘에 점을 쳐서 물어
보았다는데.... 결국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하고는 1126년 4월 정미일에 사신을 보내 번국 (藩國) 을 칭합니다.
고려 국왕 인종이 숙종이나 예종 처럼 강경파가 아닌데다가 금이 요를 없앨 정도의 국력임을 인식하여 빠르게
결정했으니, 여진족과 칼을 맞댔던 맹장 척준경이 앞장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금나라의
강성함을 알수 있으며 또한 정권을 주도하는 이자겸과 척준경 일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도 한몫 했습니다.
하지만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칭신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 반발이 컸으니... 인종 9년(1131년) 9월에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된데다가 그가 "국가가 나에게 천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 라 떠들고 다녀서 외교적 문제가 될수도 있다고 하였다.
삼일 동안이나 간쟁했으나 인종은 끝까지 그를 임명시켰으니....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경우에는, 그들은
우리 조정의 부속이고 늘 조천(朝天, 조공) 해 오던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숙일수 있냐고
분노했다고 묘지명은 기록했으며 그렇다고 고려 조정이 이미 정한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진 않았습니다.
1125년 요나라 멸망후 고려가 금에 칭신(稱臣)한후 1127년에 “정강의 변”이 발생해 금은 개봉을 함락하고 화북
지역을 탈취했으며 휘종과 흠종에 황족들을 잡아왔으니 금나라의 세력은 요나라보다 엄청 커진 것이니, 요의
인구는 400~500만 수준으로 고려에 비해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반면 북송의 절반을 차지한 금의 인구는
여진족 100만에 중국인과 다른 민족을 포함 4,000만 수준으로 정주 인구에서는 남송과도 대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금나라는 고려가 신하가 되겠다며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이전에 고려가 요나라 성주에게서 넘겨받았던
보주(의주) 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는데, 보주성 반환 도중에 금나라에서는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서는 이미 다죽었다고 사실상 반대를 뜻하여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서화는 이미 매마르고, / 西華已蕭索
북새(금)는 여전히 혼미하다. / 北寨尙昏蒙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는데, / 坐待文明旦
천동의 해가 밝아온다. / 天東日欲紅
고려 외교관 진화(陳澕) 의 시로 밀려난 남송과 강호 금나라를 무시하고 있지만 고려는 금나라와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으니 결국 고려 의종 2년(1148년) 2월,
금과 외교문제가 발생하는데, 의종은 금에 보낸 표문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사신을
신하의 신하이니 배신 (陪臣) 이라 써야 함에도 써지 않았으니 처벌해야 될지 금 황제에게 말합니다.
칭신한지 40년 1164년에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 분쟁이 벌어졌으니 말로 풀긴 했지만, 금나라와 고려 양국
은 분쟁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주장했는데... 고려 기록에는 병마 부사 윤인첨이 '恥削土(치삭토 : 국토가
줄어듦을 부끄럽게 여겼다).' 라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니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나라
사신의 입국을 거절(의종의 생일 축하 사신) 하더니, 이듬해 사신을 보내 "의종이 돌아서
정신이 혼미해서 동생(명종)이 대신 왕이 됐습니다." 라고 알리니 금나라 조정에서는
말도 안된다며 난리를 쳤으니 조선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양위했다는 말처럼 믿기 어려운 얘기 입니다.
금나라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1175년에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때문이니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황해도
중부의 자비령 서쪽(북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개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 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금나라는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으니 "나 잘했지?" 하는 식인데
이 사건을 단순히 '금나라가 멍청해서' 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금나라의 한반도에 대한 영역
확대 의지가 소극적이었음을 알수 있으며 이웃 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 싫어서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금나라의 주전선은 남송과의 전선이었고 다음 전선도 몽골과 거란이며 서하등 북방전선이었으니, 금나라는 소수
여진족이 수천만 다민족을 품고있는지라 동쪽에 또 다른 새 전선을 더 늘려봤자 힘에 부치니 모른척
넘어간 것이며 이후로는 고려는 금에 열심히 조공하고 금나라는 고려왕을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역사상 최강, 최악의 무시무시한 기마민족이 동북아시아에 들이닥쳤으니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으며, 1216년에는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을 받는 것을 계속 거부하는등 무시했습니다.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직후의 상황과는 달리 당시의 금나라는 고려가 도와줘도 멸망당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금나라의 멸망을 방치하는 게 훨씬
이득이 되는 일이었고 게다가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족 시절의 역사적 악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 등을 수입하는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는데, 금나라가 힘이
있을 때 즉 몽골이 막 일어설 때 고려가 금나라와 손을 잡고 몽골에 대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원, 만주족의 후금(청) 은 중국과 전쟁중에 고려나 조선이 만주로 진공할까
염려해서 사전에 굴복시키기 위해 쳐들어왔던 것인데, 고려나 조선이 만주로 진공하지 못한 이유는 고구려
구토를 회복하겠다는 "꿈" 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 그럴 용기도 없었던데다가 장차 보복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