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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과 타자에 대한 질문: 포스트모던 오디션
타자는 항상 그 자체와 다른 것이다.
--도커티(Thomas Docherty)
질문은 사고의 경건함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우리가 같은 언어로 꾸준히 이야기하다 보면
동일한 역사를 재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
계몽(Aufklärung)이란 무엇인가? 1784년 <월간 베를린>에 게재되었고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의심할 나위 없이 획기적인 논문이다. 그는 근대의 템포와 철학적 분위기를 정의하고 정제하며, 이 운동을 ‘계몽적인 것’으로 신격화한다. 순수이성과 응용이성의 계발에 기초한 인류의 무한한 발전을 증진하려는 고삐 풀린 계몽낙관론은 서구 근대의 가장 원대한 담화이자 공용어(lingua franca)이다. 푸코가 20세기 후반 지식과 권력의 결속이라는 측면에서 칸트의 계몽탐구를 비판적으로 복원하고 자신의 ‘비판’을 정식화하면서 강력히 따졌던 것은 칸트가 계몽을 서구 사상과 역사에 대한 단순한 시대 구분이 아니라 정신적 정향으로 구조화한 기점에 대해서이다.
칸트는 그 유명한 논문에서 계몽주의 모토를 지극히 간단명료한 용어로 정리한다. 즉 이성의 자율성을 통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의 어두운 동굴로부터 인간성 - 아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구적 인간성 -을 구해내고 해방시킬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칸트는 서구 근대의 주요 의제를 제도화했다. 궁극적으로 이성의 자율성은(3) 인간성의 영속적 진보를 보장한다. 인식의 자율적 주체로서 순수이성에 대한 칸트 비판은 확실히 데카르트적 코기토(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힘입은 바 크다. 코기토의 논리중심주의는 탈신체적, 독백적, 시각중심주의적 특징들로 수렴되고 통일된다. 코기토에서 마음의 나(I)는 마음의 눈(eye)이다. 세 시각적 용어, 즉 ‘명석 판명한 이념’(clear and distinct ideas)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칸트의 비판만큼이나 ‘계몽적’이다. 코기토는 진정 근대 서구 철학의 전환점이 되었다. 코기토의 합리성이 요구하는 바는 바로 자연에 대한 갈릴레이의 심문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수학적-기하학적 형상으로서 그의 자연은 우리의 환원적 응시에 열려 있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규율체제 -요컨대 인식적 통치(epistemocracy)-에 의해 권능을 부여받고 추동되는 서구의 근대는 제레미 벤담이 단도직입적으로 파놉티콘(전방위감시체제)이라 부른 탁월한 교도소 설계와 유사하다. 그 감옥의 감독관은 지극히 간단하고 짧은 응시만으로도 세계를 객관화하고 보편화할 수 있다.
서구 근대는 계몽의 기준들을 통해 진리주장을 미리 판단할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서구식 근대는 이른바 인간의 (물질적) 진보와 해방을 위한 이성의 권위와 자율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특권화하면서, (이성의) 타자라 할 수 있는 (1) 몸, (2) 여성, (3) 자연, (4) 비서구를 주변부화하고 권리를 박탈하며 강등시킨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 네 범주들은 포스트모던식 사고의 주요 지표가 되었고 근대의 전복 가능성을 열어주었다.주1
(주1: 제일철학(prima philosophia)으로서 타자에 대한 일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는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 The Other, trans. C. Macann, Cambridge: MIT Press, 1984) 참조. 그러나 불행히도 이 책에 레비나스(Levinas)가 빠져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타자에 대한 고전적 연구로는 파비안(Johannes Fabian, Time and the Oth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3) 참조. 사이드(Edward Said)의 영향력 있으면서 논쟁적인 저작(Orientalism, New York: Randon House, 1978)은 비서구 타자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오웬스(Craig Owens, 1983)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서구사상이 다른 성의 이슈에 대해 “부끄러울 만큼 무관심”했다고 주장한다. “The Discourse of Others: Feminists and Postmodernism,” in The Anti-Aesthetic, ed. Hal Foster(Port Townsend, WA: Bay Press, 1983) 참조. 정화열(Jung, 1996)은 정신의 타자 문제로서 몸을 검토한다. “Phenomenology and Body Politics,” Body and Society 2(1996): 1-22. 셰퍼드(Paul Shepard, The Others, Washington, D.C.: Island Press, 1996)는 인간성의 증진에서의 비인간적(nonhuman) 타자의 중요성을 논의한다).
근대의 대변자들은 여전히 미완의 기획으로서 근대를 고집하고 있으나 그 반대자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를 실패로 간주하며 이를 파헤쳐 검토하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과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을 고찰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근대 담론의 미반성적 습성(habitus)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던적인 철학함의 목적이 서구 근대의 장기간 누적된 현 상황을 문제화하고 흔들고자 하는 것이라면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감시와 처벌』의 저자 푸코는 분명 탁월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사실 그는 이러한 호칭에 반대하기보다는 무관심해 하는 쪽이었다. 이러한 통찰력 있는 저작들을 통해서 푸코는 마땅히 근대의 “계몽”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서구문명진보의 음습한 저류를 파헤치면서 배제되고 주변화 되었으며 탈권력화된 것에 우리가 주목할 수 있게 한다. 요컨대, 탈근대화는 근대화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주2
(주2: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Consilience, New York: Alfred A. Knopf, 1998, 40)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계몽주의와 대척점에 있다.” ‘지식의 통합’(unity of knowledge)에 대한 윌슨의 열망은 칸트의 영감에 따른 것이다. 최근 들어 존 설(Searle, 1998)은 ‘실제 세계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신, 언어, 사회의 삼각구도를 수립함으로써 논파하고 있다. Mind, Language, and Society (New York: Basic Books, 1998) 참조. 그는 이를 ‘계몽주의의 비전에 대한 작은 기여’로 간주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또한 계몽주의 기획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도전에 응답하고자 한다. 주목할 점은 그가 몸, 여성, 자연, 비서구라는 중요한 이슈들을 제쳐두고 계몽주의 비전들을 유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율성의 반대는 타율성이다. 타율성은 한편으로 동일성과 동질성보다는 차이와 다원성을, 다른 한편 명확성보다는 애매성을 익히고자 한다. 어떤 경우라 해도 탈근대화의 원형은(4) 18세기 나폴리출신 비코(Giambattista Vico)의 철학이다. 그의 반데카르트주의, 공통감각, 무엇보다도 ‘진리 그 자체는 구성된다’(verum ipsum factum)라는 해석학적 원리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잘 알려져 있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첫째, 자율적 이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반드시 탈신체화된다. 그것은 이성의 자율성에 계몽적인 것이라 가치 부여하면서 마음을 사고하는 사물(res cogitans)로, 몸을 연장되는 사물(res extensa)로 양분한다. 마음과 몸을 실체(res)로 객관화함으로써 데카르트의 구상은 살아 있는 주체로서의 몸을 망각한다. 결국 이는 사회성 - 인간 사이의 공생과 종(種)과 종 사이의 공존 -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회성은 다중적인 관계망으로서, 그 뿌리나 닻이 되는 살아 있는 몸이 없이는 지탱될 수 없다. 몸(soma)은 영혼(psyche)의 무덤이나 죽음(sema)이 아니다. 오히려 몸이 정신에 살을 붙이고 활기를 부여한다. 지각이 발생적 개념 또는 로고스인 한 ‘몸이 없는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영혼은 신체(soma)의 다른 이름이라 간파한 니체가 옳지 않은가? 따라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에 의하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은 이성적일 수는 없지만 현실적이다. 오늘날 미완의 기획으로서 서구 근대의 가장 강력한 제창자 하버마스는 예컨대, 철학적으로 몸에 주목했던 메를로-퐁티를 비판한다. 그는 의사소통적 행위로서 정의되는 이성이 그 뿌리인 (살아 있는) 몸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다. 그의 의사소통적 행위철학은 마음을 이성의 장으로, 몸을 비이성의 장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을뿐더러 불완전하며 자기파괴적이다. 로댕 조각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을 보라. 그 조각상은 실존을 다만 탈신체화된 이념의 명료성의 측면에서 시각화하려는 그의 동료 데카르트(또한 헤겔과 하버마스)에 대항하여 생각은 몸으로 하는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로댕은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실존한다는 것’도 ‘나는 나의 몸이다’임을 구현한다(embodies). 몸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사회성의 물적 조건이기에 (살아 있는) 몸이 없는 인간은 단지 유령이나 환영에 불과할 뿐, 결코 ‘사회적 인간’은 아니다. 이러한 인간은 다만 기계 속의 유령이거나 사이보그일 뿐이다. 몸은 세계에 응답하기 이전에 우선 세계를 떠맡는(authoring) 것이기에 단순히 공간을 차지한다기보다는 다른 (거주하는) 몸들과 함께 세계에 거주한다.
둘째, 많은 사람들에게 세기적 이슈가 된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는 주로 포스트모던한 것을 발생시키고 받아들이며 구현한다. “그렇다면 서구의 근대가 대변하고자 하는 성(gender)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성은 당연히 남성적이거나 남근 중심적이다. 참으로 계몽이라는 순수이성 비판은 남성적인 것을 특권화한다. 이를 특권화함으로써 서구의 근대는 동일성이라는 ‘남근성’을 행사한다. 남근성 안에서 단성성(univocity)이나 보편성은 여성적 차이를(5) 승인 또는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러기를 거부한다. 여성적 차이는 권리와 지배 그리고 헤게모니적 시각의 의미와 반대되는 만지기와 듣기의 ‘이방적인’ 의미를 포용함으로써 배려와 향유(jouissance; ‘나는 감(感)을 듣는다’의 의미인 j'ouïs sens로 쓰일 수도 있다)을 불러일으킨다. 페미니즘은 ‘지네시스’(gynesis)를 여성적 차이의 원리로 높이 평가하면서 ‘동일성의 전도’에 개입한다. 이는 남성적 남근성과 우월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페미니즘은 ‘남자’는 만물의 척도로 간주되는데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분명한 범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남근적 일원론’과 ‘동질적 동일성’에 치열하게 반대한다. 성적 차이는 타자성의 실제 토대이다. 이 여성적 토대는 단지 생식기를 가리고 있는 ‘무화과 잎’(fig leaf)이 아니다.
(보편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기술하는 ‘본질주의’ 이론은 여성적인 것과 여성적 차이를 주변부화하여 여성을 남성과 다른 것으로가 아니라 남성에 못 미치는 것으로 간주한다. 본질주의자에 따르면, 여성에게 특수한 것은 항상 특수한 것으로 남고 남성에서 특수한 것은 언제든지 기꺼이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제2의 성』조홍식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이 여성성에 대한 사회-문화 구성주의 관점에 미친 영향이 엿보인다. 성별(gender)은 만들어진다. 여기서 만들어진다 함(factum)은 사람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을 운명지우고 주변부화하며 그 권한을 박탈하는 몸 해부학보다는 형태학이다. 문화와 역사로부터 독립된 인간 본성을 본질화하거나 보편화하려는 이론은 허구이거나 괴물이다.
셋째, 무엇이 자연의 성구분인가? 모든 문화와 전체 역사를 통해서 내가 아는 바로 자연은 변함없이 여성이다. 여성적인 것과 자연은 다산(多産)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상징화된다. 그래서 남성에 의한 여성과 자연의 착취와 지배는 같은 동전의 양 측면이다. 동일한 이유로 남근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논리중심주의적 근대의 이면이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에게 여성적 신체의 달력이 자연의 주기적 리듬과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근대 인간중심주의자들 중에서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의 기하학적 형상들로 수학화하고 이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기하학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권장한다. 그의 발자국을 따르는 데카르트는 인간을 ‘침묵하는’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자로 개념화한다. 모든 주요 측면에서 베이컨은 근대기(the modern age)를 과학, 기술, 수량 경제의 시대로 규정한 지적인 선구자이자 설계자이다. 이 시기에 지구의 탐욕스런 소비자로서의 근대적 인간성이 정당화되고 장려된다(6). 실로 그는 근대의 기술형태학적이고 산업사회적 에토스를 고안하고 주조해 낸다. 베이컨은 이론과 실용적 조작, 지식과 효용, 앎과 제작의 수렴을 주창한다. 그는 괴테의 ‘섬세한 경험주의’(zarte Empirie)도, 지구에 대한 외경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철저한(hard) 실험주의로 근대 과학의 본질을 포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의 내밀한 ‘여성적’ 젖가슴도 발견한다. 베이컨은 근대 프로메테우스적인 의미에서 지배학(Herrschaftwissen) 원리를 가장 강력하게 제시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지식과 권력은 박애주의(philathropia)를 위한 효용의 측면에서 상호 교차한다. 박애주의야말로 인간중심주의의 센터폴드로서 과학과 기술을 통한 인간의 자연투자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서구의 많은 주석가들은 부지불식간에 미학적 감성을 수용하는 동양을 여성적인 것으로, 과학적 합리성을 주입하는 서구를 남성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비서구 또는 동양은 대지(Gaia, Terra Mater)가 단순히 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요소 중의 요소라는 대지철학 이념의 비옥한 영역을 낳고 일구어 왔다. 근대화의 잿더미로부터 날아오른 불사조인 대지철학은 인간성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생각에 의하면, 젊은이의 마음을 교육하는 데 고요한 자연미는 인간이 손수 제작한 분필과 흑판만큼이나 중요하다. 여린 풀잎, 날개로 춤을 추는 잠자리, 이른 여름 아침의 이슬 머금은 거미집, 가을 저녁 귀뚜라미 우는 소리, 축제분위기의 무지개 색깔, 장엄하게 솟아오른 히말라야 정상 …… 중국사상(Sinism), 특히 도교나 선불교는 하이데거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이라 부르는 대지철학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이 내맡김은 베이컨적인 몰아세움(Gestell)과 몰아세우는 경향의 근대화 에토스에 대해 전복적이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또한 인간성의 신체적 층위로서 자연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건한 수용’에 마음 쓰면서 이른바 ‘문명인’의 비자립성 또는 인간이 만든 불건강한 ‘버팀목’으로서 인간제작물에 대한 의존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아울러 중국사상은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관계를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된 탈인간중심주의적 사회성 개념을 보여준다. 중국적 “생태-기예”(eco-art)인 풍수(風水, feng shui 또는 “바람”과 “물”)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스스로 그러함이나 “현존재”의 사실성과 ‘만물’ 둘 다를 의미하는)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의 외경에 대한 영속적인 동아시아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다. 풍수는 외경과 타자중심적 또는 탈자기중심적 배려를 받들어 인간과 자연환경이 함께 어우러지는 동양적 방식이다(7). 이의 전형적인 예가 곧 ‘대지를 보살피는 것’이다. 풍수의 측면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선물(‘주어진 것l’etant donne)’로서 땅에 대한 관대함을 소중하고 감사히 여기는 것이다. 바로 이 관대함에다 우리 삶의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우리와 대지 사이의 지속적이고 불가분한 결속을 서약하는 것이다. 도교와 선불교에 이어 풍수는 미래에 대한 동아시아의 청사진(greenprint)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비서구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곧이곧대로 말해서 대지철학 이념의 보물 상자를 포기해 미래 인간의 생존과 대지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근대화’ 이전 고대 아시아적 이념들로부터 서구의 탈피는 곧 생태학적 재앙의 원인일 수 있다. 증가일로에 있는 서구 엘리트 작가들에게 아시아적 사유, 특히 선불교의 재발견과 회복은 서구문화사에서 ‘제2의 르네상스’로 각광받고 있다. 포스트모던 엘리트 작가들의 도래로 인해 서구 근대의 철학적 영혼이었던 계몽주의는 해체되고, 다수의 서구사상가들에게 (단지 이름만을 위한 표의문자인) ‘동양’은 인간 사유와 역사에서 ‘새로운 여명’을 대변한다. 동양은 더 이상 서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화를 주도한 인종과 주요 색상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밝고 특별히 빛나는 흰색이다. 계몽주의나 그 이성은 색맹이 아니다. 이는 하얀 서구의 지적 재산에 속한다. 그러므로 계몽은 ‘백색신화로 동일시된다. 흄과 칸트로부터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는 의심할 나위 없이 서구중심적이거나 오리엔탈리스트이다. 실로 계몽은 비서구에 대한 비계몽적이고, 흐릿하며 미성숙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19세기 초기 독일사상가 로렌츠 오켄(Lorenz Oken)의 『자연철학』(Physiophilosophy)을 읽어보면 실로 (그들의 편견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인종들을 감각의 계서화로 본다. 백색의 서구인은 ‘눈의 사람’(eye-man)으로, 황색의 아시아인(몽골리안)은 ‘귀의 사람’(ear-man)으로 검은 아프리카인은 ‘피부의 사람’(skin-man)으로 특징지어진다. 감각에 대한 서구의 지배적인 형이상학에 의하면, 촉각 기관이자 흔히 여성의 감각과 연관된 피부는 가장 원시적인 감성이며 인간의 감수성 사다리에서 가장 아래의 위치에 속한다. 촉각이란 감각기관은 ‘천민’(pariah)으로 취급받고 완전히 미학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반면 눈은 시각기관으로 ‘서구적’ 감각기관이기에 그야말로 귀족주의적이다. 눈은 미학적 감수성의 장점을 표현하는 데 반해, 흑인 또는 ‘피부의 사람’은 미학적 감수성을 완전히 박탈당한다. 칸트와 헤겔에서 시선은 ‘합리적’ 감각이며 지성의 ‘밝은’ 감각이다.
계몽이라는 순수이성의 이름 아래 서구식 근대의 정신적 정향은 전(全) 지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목적의 특권적 진앙으로 정당화된다(8).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고 한 헤겔은 서구정신을 철학의 수호자로 특권화한다. 따라서 헤겔에게 동양 - 특히 중국과 인도 -은 영원히 철학적 유아기에 머물러 있으며, 이른바 이 유아기는 철학언어로 말할 수 없는 동양의 무능을 가리킨다. 흄과 칸트는 공공연한 인종주의자이자 백인우월주의이다. 경험주의자 흄은 자신의 ‘백색신화’(white mythology)에서 백인이 아닌 모든 다른 인종들, 그중에서도 특히 흑인이 백인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비백인들은 이름을 내세울 만한 문명을 이루지 못한다고 본다. 불가항력적인 서구 근대를 일구어낸 ‘계몽’ 시대의 철학적 우상, 칸트 역시 1763년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느낌에 대한 관찰」이라는 논문(Immanuel Kant, Observations on the Feeling of the Beautiful and Sublime, trans. John T. Goldthwai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0)에서 무분별하게 흄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듯 백인과 흑인의 ‘정신능력’ 차이는 흑과 백의 피부색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한다. 칸트가 흑인의 말이 ‘어리석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가 흑임임이라고 주장할 때 비판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던 그의 약속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예컨대, 우리가 인종주의의 뿌리에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우리가 진리에 대한 계몽의 기준과 주장을 보편화하는 데 사로잡혀 있을 때이다. 뉴질랜드 태생 미국의 민속지학자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자신의 저작 『세상의 고향에서』(At Home in the World)에서 “정의(definition) 그 자체는 인종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환원하고 우리 표지판(labels)으로 다른 사람 입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이다”고 지혜롭게 선언한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와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로부터 기어츠(Clifford Geertz), 클리퍼드(James Clifford), 잭슨에 이르는 민속지학(유일하게 비서구 민족과 문화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학문분야)의 발견은 계속해서 서구의 인종중심주의에 도전하고 우리에게 서구철학에 대한 비판의 토대와 타자의 타자성에서 우리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타자의 타자성’이라 함은 “내가 곧 타자이다”라는 것이지 “타자가 곧 나 자신의 부정적인 거울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항상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의 철학자들이 철학의 기본요소들, 예컨대, 메를로-퐁티의 ‘요소’로서의 ‘살’ 개념을 찾는 민속지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최종적인 분석의 측면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의 도래로 계몽은 해체를 목도하고 있다. 서구 근대의 철학적 영혼으로서 계몽주의가 갖고 있는 ‘백색신화’는 문화적, 담론적 다원화의 에토스를 알지 못한다. 계몽주의는 세계를 ‘절대적으로 단일한 사실’로 드러날 수 있는 단일한 시각은, 그것이 서구적이건 그렇지 않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다원주의적’ 주장에 주목해야 한다. 계몽주의는 타자(예컨대, 비서구)가 옳을 수도 있다는 (가다머적) 해석학의 주요 원리를 수용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해석학의 영혼은(9) 지적 겸손의 색조를 가지고 있으며 철학적 대화에 용이한 반면에 계몽주의는 독단론까지는 아닐지라도 지적 오만을 보여준다. 가다머가 신랄하면서도 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바 계몽의 근본적인 편견, 즉 선판단(Vorurteil)은 “편견 자체에 대한 편견”이다. 실로 편견에 대한 계몽주의의 부정은 이 사실을 긍정하고 예시해 주는 것이다. 이른바 불편부당하고 편견 없는 이성으로 진리나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정치적 도덕적 층위로부터 절연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소박한 생각이 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계몽주의가 비서구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내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계몽주의는 단지 독백일 뿐이며 진리구성 방식으로 대화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토도로프Tzevetan Todorov의 최근 저작의 제목이기도한) ‘아메리카의 정복’은 (비서구적) 타자의 구성을 위한 서구중심 모델을 정형화한다. 생활세계의 다원성 측면에서 그리고 점점 지구촌이 되고 있는 세계에서 서구가 자신과의 대화만을 영속화하는 것은 독백적인 것은 물론이고 참을 수 없으리만치 근시안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미래가 한 문화에만 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미래에는 문화적 차이와 관용이 동의어가 될 것이다. 차이와 관용은 함께 간다. 최근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가 표현한 것처럼, 관용이 차이를 가능하게 하고 차이는 관용에 필수적이다.
그래서 마법으로부터 풀려나오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위반과 변화이다. 진리의 복원은 이제 더 이상 서구중심적이 아니라, 탈중심적인 진리처(眞理處)로서 다층적인 사회문화 생활세계들을 ‘횡적으로 연결한’ 결과물인 지구적 사고(또는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모든 곳이 진리의 중심이고 그 어디에도 주변은 없다. 지구적 사고는 인간의 모든 노력 가운데에서 동일성의 총체화가 아니라, 멕시코의 노벨문학수상작가 고(故)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가 신중하게 차이의 융합이라 부르는 것을 추구하고 이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상호문화적 논박들(elenchi)에 의한 이 엄청난 차이의 융합을 ‘횡단성,’ 아니 ‘횡단적 연계성’(transversality)이라 부른다.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거울 이상으로서 낯선 생활세계에 드리워지는 지평을 넓히고 탈영토화하는 횡단성은 세계화 시대에 지구적 사고의 진정한 성숙을 의미한다. 요컨대, 횡단성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처럼) 특정한 한 문화 패러다임의 승리를 내세우지도 않고,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에서처럼)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으로,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분리주의적 접근방식에 지지하지도 않으며, (헌팅턴에서처럼) 문명 ‘충돌’의 불가피성을 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는 서구적 철학하기의 기본축인 보편성과의 ‘단절’이다. 지구촌 또는 코스모폴리스와 같은 오늘날 세계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서 서구중심적인 진리의 신화 또는 미완의 기획으로서 근대를 고집하고 영속화 하는 것은(10) 근시안적일뿐만 아니라 반대급부를 낳을 것이다. 진리가 서구중심주의 묘비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적 철학하기(worldly philosophizing)는 진정으로 범지혜적일(pansophic)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그들 스스로 동양사회가 진정 동양사회로서 세계화의 과정에 참여하는지 아니면 다만 서구의 복제물로서 그리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해 왔다.
서구중심주의의 대안으로 인기 있는 다문화주의이론 또한 지구적 사고의 대의를 고취시키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체로 이 이론은 다중적 인종중심주의 또는 (사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정불가능하고, 파편적이며 지역화된 인종적 ‘본질주의’ (essentializations) 집합체로 드러난다. 예컨대, 아프리카 사람들을 아프리카인으로, 중국 사람들을 중국인으로, 인도사람들을 인도인으로, 미국사람들을 미국인으로, 동양 사람들을 동양인으로, 서양 사람들을 서양인으로 만든다. 본질주의 담론은 개념적 공동 관리와 유사하다. 이래저래 인종적 문화적 자만심을 부풀리고 인정을 위한 무절제한 열망에 빠져있는 다문화주의는 종종 개념적 자기편의주의(gerrymandering)의 덫에 걸려 인터페이스도 못하고, 최악의 경우, 스스로 무너뜨리고자 했던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성의 정치를 행하게 된다. 세계화 과정에서 단일문화주의의 대척점은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바로 횡단성이다. 횡단성이야말로 문화를 가로지르는 다산성(多産性)과 다양한 문화적 지평의 융합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도불교의 중국적 토착화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 이르는 전자시대의 최고 챔피언이자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일상 표현을 지어낸 마셜 맥루언은 가까워지면서 상호의존적인 세계의 특징을 보디랭귀지의 필치로 예리하게 잡아낸다. “우리는 모든 인류라는 피부를 두르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탈육체화 된 서구인의 정신’이 만물의 척도라 믿던 지적 습성을 창밖으로 내던져야 할 때이다.
결국 동양이 새로운 횡적 사고의 ‘여명’을 대표한다면 서구의 정태적이고 독백적인 “존재” 방식은 더욱더 지구촌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상호존재”의 동양적 방식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동일한 굴만 들입다 파고들어 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굴을 파나가야 하는 것이다. 새 천년의 여명은 모든 지구인들이 이 지구촌을 고향으로 느낄 때 밝아올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꿈(a utopian dream)보다는 이질적 장소의 현실(the heterotopian reality)을 희망하는 것이다. 내가 이질적 장소의 현실에 대해 논의하는 이유는 최근 란달 콜린스(Randall Collins)가 자신의 어마어마한 연구서 『철학 사회학』(The Sociology of Philosophies)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의견 차이는 지적 또는 철학적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모순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제대로 증명하는 일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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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 현상학자 정화열 교수의 후기 역작 [횡단적 합리성과 텍스트의 상호문화성 Transversal Rationality & Intercultural Texts] (2011)의 제1부 1장, "Enlightenment and The Question of the Other"(pp. 1-12)를 완역한 것입니다. 제가 그리고 있는 계몽 스토리와 같이 읽으면 좋을 듯 싶어서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