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시는 1980년 양주(楊州)에서 분리
지금의 진접·진건 지역은
고구려: '골의노(骨衣奴)'
통일신라:황양(荒壤)
고려:풍양(豊壤)
현재의 남양주시 진접·진건지역은 양주와는 별도의 지명을 갖고 있었다.
[ 와부읍 ]
◎ 덕소리(德沼里):한강에 큰 못
'득수리고개' 혹은 '득실 이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다.
율석리와 석실 사이에 있는데, 옛날에 양반이 많이 살던 곳이었고
한양 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이 곳으로 수레를 끌고 지나갈 때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양반들이 수레를 들 고 지나가게 했다고 해서...
한편 덕소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신촌'이 있는데,
이곳은 을축년 대홍수로 원덕마을이 침수되자, 마을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
◎ 도곡리(陶谷里) 기와 혹은 그릇을 굽던 골짜기
다른 이름 : 도골, 도곡 '기와골' '우묵배미·쑥배미'
◎ 팔당리(八堂里):
다른 이름 ;바다나루, 바다이, 바대이, 바당이, 팔당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덟 곳이 나 있고 이후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팔당'
이 밖에 도 팔선녀를 낳았기 때문에, 또는 강이 내와 비슷하게 있었는데 양쪽으로 난 나무가 팔자(八字)처럼 쓰러져서 '팔당'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용이 되어 올라가려는 것을 여자가 봐서 부정을 타 강으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
◎ 월문리(月文里)
=월곡+문곡(글선생)->'글계울' '글개울'
조선 말기에 '문곡'이라는 호를 가진 선비가 살았었기 때문.
월문리의 또 다른 이름인 '월곡'은 '다리골 중광'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원래 이 곳은 동쪽으로는 갑산과 운길산이 솟아 있고, 서북쪽으로 천마군봉이 벌려 서 있으며, 중앙으로는 내가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아늑한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에 이씨가 많이 들어와 살게 되니, 이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 '많을 다(多)' 자를 써서 '다리골', '달골', '월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율석리(栗石里):율북+석실 (밤나무+돌)
지금도 '밤뒷고개', '밤나무고 개', '율정(밤나무정)'이라는 밤나무 관계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율석리에는 '피사골'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 지금의 목식골 북쪽에 있는데, 옛날에 이 곳으로 많은 사람들 이 피난을 왔었고, 그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서 많이 죽었기 때문에 피난와서 죽었다는 의미의 '피사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접읍(榛接邑)
◎ 장현리(長峴里)=장승+봉현
'봉현 (蜂峴)'이라는 이름은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라고도 하는데, 조선 초기에 마을 동쪽에 조그마한 고개에 벌집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벌 때문에 그 곳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 개를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 등으로 불렀으며,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이름도 '벌이 많은고 개 마을'이라는 의미의 '봉형(蜂峴)'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승리'라는 지명은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하였는 데,
'장승(長承)·장승배기 매봉제'라고도 한다.
예전에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어서 '장승' 또는 '장승배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봉제'라 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내각리(內閣里)=내동+비각
한편 내각리에는 풍양궁이 있었다고 하여
'궐리(闕里)·대궐터·구궐지(舊闕址)'등의 이름이 있다.
'비각(碑閣) 리'는 대궐터에 있는 비각에서 유래하였다.
비각에는 1755(영조 31), 1905년(광무 9)에 세워진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이곳이 풍양궁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내곡리(內谷里) [ 안골, 내곡]
본래 풍양현(豊壤縣)이 있던 곳으로서 그 안쪽이 되므로 안골 또는 내곡.
동촌과 영서 사이에 '원내곡(元內谷)·안골·역말·역 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내곡의 원래 마을 또는 원래의 개척지라 하여 이렇게 불린다.
◎ 연평리(蓮坪里)
연평리에 있는 큰 들을 풍양(豊壤)들 또는 요연평(蓼蓮坪)
토질이 습하고 군데군데 연못이 있다고 하여 '요연평'이라 불리었다고 함
요연평 북쪽에는 '목화배기 목화배미'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논이 있다. 예전에 이 곳에서 목화를 재배했던 연유로 '목화배기' 또는 '목화배미'라고 불린다.
◎ 부평리 (富坪里)=부동+후평
부동은 '분토골'이라고도 하 며 '후평'은 뒷벌을 한자화한 것이다.
부평리에는 '능내(陵內)'·능내동·능안'이라는 마을 이름 이 있는데,
조선 제7대 세조의 능인 광릉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능내' 혹은 '능내동'
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 한다.
능안쪽에 있다고 해서 '능안'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살내벌'이라는 이름은 광릉 앞 에 있는 벌판을 말한다.
◎ 팔야리(八夜里) [여덟밤이, 팔야]
조선시대에 태조가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 곳에 이르러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태조가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여 '여덟밤이' 또는 '팔야'라 하였다고 한다.
남양주시 서쪽을 관통하여 흐르는 '왕숙천'도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진벌리(榛伐里) [갬벌, 진벌]
개암나무가 많은 벌판이므로 '갬벌' 또는 '진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벌리에는 '진벌·가얌 벌·가얌벌리·갬벌'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얌나무(개암나무)가 많아서 '가얌 벌', '갬벌' 등으로 불리다가 '진벌'이 되었다고 한다.
◎ 금곡리(金谷理) [쇠파니, 쇠푸니]
조선시대부 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지역으로 금곡리 '금'자와 주곡리의 '곡'자를 따서 금곡 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금곡리에는 '쇠푸니·쇠파니·금곡·원금곡'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로 부터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나서 '쇠푸니', '쇠파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금곡(金谷)'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쇠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금곡마을이 점차 커지고 리 이름으로도 쓰이게 됨에 따라, 구별을 위하여 원래의 금곡마을이라는 의미의 '원금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금곡리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주곡(주리골·주유골)'이라는 지명은 삼면이 두루 산으로 둘 러쌓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용신신화와 관련된 '벼락소'라는 이름도 있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벼락을 맞고 이 곳에 떨어졌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벼락이 쳐서 바위가 쪼개져서 이소(연못)의 깊은 물 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벼락소라 불린다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과는 달리 나름의 체계를 갖 춘 장자못 전설 유형의 이야기도 전하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신감역이라는 부 자가 살았는데, 굉장히 인색했었다고 한다. 하루는 동냥하러 온 중에게 쇠똥을 퍼서 주었는데,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안타까운 마음에 바가지를 씻고 쌀을 한 바가지 퍼주었다. 이에 중이 "돌아보지 말고 나 를 따라 오라"하여 뒷산으로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고 폭우가 쏟아졌다. 며느리가 겁 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집은 벼락에 맞아 불이 붙었다가, 쏟아져 내린 폭우에 깊은 못이 되어버렸 다. 신감역의 가족들은 이 때 내려친 벼락에 맞아 모두 죽었고, 그 며느리 역시 뒤를 돌아 본 까닭으로 산중턱에서 그만 바위(혹은 돌부처)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신감역의 집터는 쏟아져 내린 폭우에 못이 되었는데 이것이 벼락소라고 한다.
[ 화도읍(和道邑) ]
◎ 마석우리(磨石隅里)[맷돌모루, 맷돌머루]
'맷돌머루·마 석우'라는 마을은 심석종합고등학교 남쪽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맷돌이 많이 생산되었고, 마을의 길이 돌아서 생겼다고 해서 '맷돌머루'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마석우(磨石隅)'이라 고도 불린다.
그리고 마석우리에 있는 마을로 '아래닭계·계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풍수지리적으 로 이 지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아래닭계' 또는 '계전'이 라고 불린다고 한다.
◎ 묵현리(墨峴里) [먹고개, 먹갓, 묵동]
천마산과 마치고개 밑 이 되므로 '먹고개', '먹갓' 또는 '묵동'이라 함
이곳 묵현리에는 옛 원터가 있었던 곳이라 서 '원지(院址)' 또는 '원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 가곡리(嘉谷里) [가오실, 가곡]
지형이 가오리처럼 생겼으므로 '가오실' 또는 '가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가오실 서쪽에 있는 우물이름으로 소경우물·쇄경우물이 있다.
이 우물에는, 옛날 장님이 이 곳 의 물을 먹고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따라서 '소경우물'은 '소경이 마시고 눈을 뜬 우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 구암리(九岩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상도면 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구곡리의 '구(九)'자와 응암리의 '암(岩)'자를 따서 구암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 되었다.
'응암(鷹岩)'이라는 이름은 한자에서 알수 있는 것 처럼 '매'와 관련된 지명이다. 마을 모 퉁이에 매처럼 생긴 매바위가 있다고 해서, '매바위'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금남리(琴南里)
1914년 금대마을의 '금(琴)'자와 남중리의 '남(南)'자를 따서 금남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 었다.
'금대마을'은 약 400년 전 전씨 일족이 만든 마을이다. 이 전씨 일족 중에는 음율을 좋아 하던 이가 있었는데, 매일 거문고를 타고 놀았다고 해서 '검터'라고 불리다가, 한자화 되어 '금대(琴臺)'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창현리(倉峴里)
창현리에는 재미있는 마 을 이름이 몇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무시울·무시동'이다. 조선시대 고관이 이 지역으로 낙향하여 정자 를 세웠는데, 그 정자 이름을 '무수정(無愁亭)'이라 칭한 데서 '무수'로 불리다가 점차로 '무시울' 또 는 '무시동'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현·노루너머·노루머리'라는 이름도 있는데, 옛날 이 지역에 노루가 많아서 사냥꾼들이 많이 잡았다고 해서 '노루머리', '노루너머' 또는 한자로 '장 현(獐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답내리(沓內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 주군 상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답동(沓洞)의 '답(沓)'자와 내동(內洞)'의 '내(內)'자를 따서 답내리 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화도읍으로 승격하자 이에 편제되었다.
'내동'은 답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안으로 쭉 들어가서 형성된 마을이어서 '내동'이라 불리 고, '답동·논골'은 논이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어서 논 마을이라는 의미의 '답동(沓洞)'이라 불린다. 순 우리말 이름인 '논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월산리(月山里) [달미, 당미, 땅미]
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달미', '당미', '땅미' '월산'이라 하였다.
'월산'이라는 이름은 '달봉', '월봉(月峰)', '월길산', '달기리산' 등으로도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산 이름들은 모두 달 이 뜨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지역의 모양이 등잔처럼 생겨서 또는 등잔을 걸어 놓은 모양이어서 '등경골'이라 불렀다고 전 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래와는 달리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 때에도 물이 등잔혈의 기름과 같 이 잘 나오는 마을이라고 해서 '등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녹촌리(鹿村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녹동(鹿洞)의 '녹(鹿)'자와 궁촌(宮村)의 '촌(村)'자를 따서 녹촌리라 해서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녹촌'이라는 이름은 옛날부 터 마을 앞산인 잣봉산에 수목이 울창하여 사슴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슴 녹(鹿)' 자를 써서 '녹촌(鹿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 차산리(車山里) [수리너미, 수리너머, 수레너머]
차산리에 있는 고개로 '차유령·수레너머'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 3) 4월 10일 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유강이 사망하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 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兪省曾)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유강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 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車兪嶺)' 또는 '수레넘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 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는 이야기도 전한다.
[별내면(別內面)]
◎ 청학리(靑鶴里) [동학굴, 동학동, 청학동]
청학리라는 리(里) 이름 은 원래 청학동(靑鶴洞)이라는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학(鶴)'과 관련되어 있다.
푸른 학이 이 마을 동쪽편 은행나무에 자주 날아온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 앞산의 모양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앞산에 봉 우리가 잘룩한 모양으로 세 개가 있는데, 먼데서 보면 마치 학이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동쪽으로 날아 가는 것 같은 형상이어서, '동학굴', '동학꼴', '동학동'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 용암리(龍岩里)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용바위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용암리 이름은 용암산 밑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붙게 된 것이다.
용암리에 있는 마을로 '거묵골·거묵굴(巨墨窟)'이라는 이름은 마을 근처에 숲이 우거져서 마을이 거므스름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옛날에 큰 먹이 나와서 이렇게 불린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도감포수(都監砲手)' 혹은 '도감(都監)'이라는 벼슬을 했 던 사람이 이 마을에 낙향(落鄕)하여 살았다고 하는 '도감말', '도감마을' 이라는 이름도 있다.
◎ 광전리(廣田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별비면에 속해 있었는 데, 1914년 광암(廣岩)리의 '광(廣)'자와 마전(麻田)리의 '전(田)'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광암'이라는 이름은 '넉바위·넓은바위'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뒷산에 넓적하고 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서, '넉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광암(廣巖)'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넓을 광(廣)'자 에 '바위 암(巖)'자를 합성한 것으로, '넉바위'의 한자식 이름이다. 광전리라는 리 이름에서 '광'은 바 로 '광암'에서 따온 것이라 전해진다.
그리고 '삼밭골·삼밭꼴'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마전(麻田)'이라 한다.
현재 광전리의 '전'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삼밭이 많아서, '삼밭 마을'이라는 의미의 '삼밭골' 혹은 '삼밭꼴'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태봉마을 동쪽 에 있는 산을 '태봉'이라고 부른다.
마을사람들은 남쪽에 있는 봉우리인 '옛성산'까지 포함하여 함께 '퇴뫼산'이라고도 부른다.
'태봉'이라는 이름은 왕자의 '태(胎)'를 묻었기 때문에, '태가 묻힌 산'이라는 의미에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혹은 어떤 힘쎈 장사가 흙을 날라다 쌓은 산, 곧 '퇴미[堆山 혹은 堆峯]'이 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원학적으로 접근하면 '퇴미'는 '갈라져 나온 산'이 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퇴뫼산' 이름은 '퇴뫼'라는 말에 '산'이 덧붙은 것이다.
◎ 덕송리(德松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별비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덕동(德洞)리의 '덕(德)'자와 식송(植松)리의 '송(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덕동'은 덕흥대 원군의 묘소가 있는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덕흥대원군의 묘소는 줄여서 '덕릉'이라고도 하는데, 이 '덕릉'이 있는
마을 혹은 동내라 하여 '덕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식송리'는 유꿀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심은 소나무가 있어서 '싱근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싱근솔(심은 솔)의 한자식 이 름인 '식송(植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 화접리(花蝶里) [곶나리, 화접]
화접리는 주을내(하천)가에 형성되어 '주을내·주을동'이란 지명이 있다.
'주을내' 또는 '주을동'이라 불린다.
북쪽의 '안 주을'마을과 남쪽의 '바깥 주을' 마을로 다시 나뉜다.
이름 과 관련해서, 줄과 연관된 유래 추정과 어원학적인 추정이 있다.
줄과 관련된 유래 추정은 태조와 남재(南在)의 장례(葬禮)와 관련된 것이다. 태조의 능지(陵地)를 화접리에다 선정하고는 그 장소 가 적합한 곳인가를 중국에 문의한 결과, 적당한 땅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현재의 동구릉(東九陵)에 재선정하였다. 이 때 마침 개국공신이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재가 죽게 되어 동시에 하관(下官)키로 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통신망이 발달하지 못하여 줄을 이용하여 신호를 하게 되었는데, 이 줄이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줄이 지나간 마을'이라 하여 '줄 흘내', '주을내', '주을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을동'이란, '벌판에서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 가 된다.
[퇴계원면(退溪院面)]
'퇴계원'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도제원(道濟院)', '토원(兎院), '퇴조원(退朝院)' 등으로도 불 린다. 이렇게 불리게 된 유래는 제보자에 따라 약간씩 달라, 서로 다른 세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유래는, 본래 양주군 별비면 지역으로 도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도제원' 또는 '토원'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퇴조원' 또는 '퇴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환궁하던 중, 이 곳 냇가에 이르러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보자 분이 복바쳐서 다시 풍양궁으로 물러가 있었으므로 '퇴조원'이라 하다가 '퇴계원'으로 변하였다고 한 다.
마지막으로, 예종(睿宗)이 선왕인 세조(世祖)의 능인 광릉(光陵)에 참배차 행차하는 데 교통이 불편하여 길을 새로 만드는데, 냇가를 길로 닦기 위하여 밖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퇴계원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이다.
[ 진건면(眞乾面) ]
◎ 사능리(思陵里)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이름을 따서 사능리라 한다.
특히 사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 '비선골' 또는'비선굴'이라고 불리는데, 이 골짜기에 비 (碑)가서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따른다면 '비가 서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가 된다.
◎ 배양리(培養里) [배암굴, 뱀굴, 배양동]
'배양'이라는 이름은 '배암'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뱀이 많아서, 마을 이름을 '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뱀' - '배암' - '배 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 진관리(眞官里)
진관리에는 '수살마기'라고 불리는 논 밭지역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르 면 수살(水殺)이 있어 마을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어서 이 지역에 느티나무를 심고 바위를 세워 놓고 살막이해야 한다. 즉 수살을 막는다는 의미의 '수살마기'라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유래를 가진 마을로 '목골·목동'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힘이 센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산에 가서 나무 한 짐만 해 와도 말 4~5마리가 짊어지고 갈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나무를 많이 해오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목골', '나무마을' 또는 이의 한자식 이름인 '목동'이라 부 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월리(新月里)
신촌리의 신(新)'자와 월음리의 '월(月)'자를 따서 신월리
신촌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고 '월음'은 '대래미', '달음리' 등으로 불리 며 신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었다.
'월음동'은 마을이 자리잡은 형태가 달에 있는 계수나무 의 그늘진 곳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 말 양주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유씨(兪氏)가 살았는데, 호가 월음(月陰)이라 하여 동네 이름을 '월음동'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어째든 이 '월음 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달음동'이라 변하여 불리어지다가, '다래미' 또는 '대래미'로 변해서 불리어지 게 되었다고 한다.
◎ 용정리(龍井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 천면 지역으로 1914년 오룡리의 '용(龍)'자와 독정리의 '정(井)'자를 따서 용정리라 하여 진건면에 편입 되었다.
한편 용정리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감바위·감바우·반바위·반바우'가 있다. 이 바위에 는 고려 태조 때의 이야기가 전한다. 인근에 대적굴이라는 도둑의 소굴이 있었는데, 이 곳의 도둑들이 어느 날 이 바위 앞을 지나는 예쁜 신부를 잡아다가 도적 두목의 부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신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먼저 내 가 가서 그들을 죽인 후 다시 오겠으니 잠시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이에 도둑들이 허락을 하니, 그 신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부를 본 남편과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정 한 행실을 하고 왔다고 하여 쫓아냈다. 쫓겨난 신부는 이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고 비녀를 뽑아 바 위를 내려치자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바위를 '감바위' 혹은 '반바위'라고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독정(獨井)'이라는 이름은 '독재이', '독쟁이', '독정이' 등으로도 불리며, 북쪽 의 '아랫독정'과 남동쪽의 '윗독정'으로 나누어진다. '독정'이란 이름은 풍양(豊壤)조씨(趙氏)의 시조인 조맹(趙孟)이 홀로 먹던 우물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즉, '홀로(獨) 먹던 우물(井)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오룡골·오룡굴·오룡동'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용 다섯 마리가 이 곳으로 내려왔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다섯 개의 능선으로 뻗어내린 마을 뒷산 줄 기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용이 뻗은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 송능리(松陵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송정리의 '송 (松)'자와 성릉리의 '능(陵)'자를 따서 '송릉'이라 하고 진건면에 편입되었다.
'성릉(成陵)'은 원래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묘이다.
'성릉'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성묘(成墓)'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묘가 이 곳에 생기자 '능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성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웃송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송릉(松陵)'은 왕릉이나 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많고 능이 있는 마 을이라는 의미에서 '송능리'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수동면(水洞面) ]
◎ 운수리(雲水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운하(雲霞)리의 '운(雲)'자와 석수대(石水臺)리 의 '수(水)'자를 따서 운수리라 하였다.
'석수대리'는 돌 틈에서 물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것 으로, 수동유원지의 첫째 가는 경승지라고 한다. 이 지역 암석에는 약 300년 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 는 "석천아묵거편애청산청불로(石泉俄默居偏愛靑山靑不老)"라는 글귀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옛 선현 들도 이 곳의 산수를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송천리(松川里)
조선시대부터 한 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의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송라동의 '송(松)'자와 장천(長川)리 의 '천(川)'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는 '며느리바위'라는 독특한 이름의 바위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장자터에 소문난 큰 부자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인심이 야박하기 로 소문이 나있었다. 동냥 오는 거지들은 물론 시주를 부탁하는 스님마저 문전에서 쫓아내었다. 그러던 어느 흉년이 든 해에 이 집에서는 며느리마저 쫓아내었다. 그녀가 먹는 쌀마저도 아까워 쫓아낸 것이 다. 쫓겨난 며느리는 할 수 없이 산을 넘어가던 길에 스님을 만났고, 산을 넘어가는 도중 절대 뒤를 돌아 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길을 가는 도중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녀의 눈에 는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마을과 자신의 집이 보였다. 그 순간 벼락이 내리쳤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위가 되어 버렸는데, 이 바위가 바로 '며느리바위'라고 한다. 이와 같은 '며느리바위' 이야기 는 금곡리 '벼락소'의 유래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특징이 있다.
◎ 수산리(水山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수막(水幕)동의 '수 (水)'자와 내마산(內馬山)리의 '산(山)'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물막골·수막'은 물줄기의 원 천이라고 해서 '물막골' 또는 이의 한자식 표현인 '수막'이라고 불린다. 중간말과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 다.
'안마산·내마산'은 옛날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곳에 살 았기 때문에 '안마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철마산 줄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기 때문 에 '안마산' 또는 '내마산' 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내방리(內坊里) [안방골, 내 방동]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가평군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내방동과 비금리를 합해 내방리라 하여 외서면에 소속되었다.
산골짜기 안이 되므로 안방골 또는 내방동이라 하였다고 한 다.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 외방리(外坊里) [바깥방골, 외방동]
앞에서 말한 내방리와 연관된 이름이다. 방골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방골 또는 외방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외방리에 있는 '남이바위'는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바위의 형태가 의자 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이 유래를 바탕으로 한다면, '남이바위'는 '남이 장군이 앉았던 바위'라는 의미 를 갖고 있다.
◎ 입석리(立石里) [선돌, 입석]
'선돌' 마을은 마을 앞 산에 약1평 정도되는 큰 돌이 서 있다고 하여 '선돌'이라 불린다고 한다. '입석(立石)'이라는 리 이름도 즉 서 있는 돌의 의미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 지둔리(芝屯里) [ 지둔지, 지둔]
지둔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광대울'은 약 200년 전 이 마을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집에서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 때 한 광대가 줄을 타다가 떨어져 울고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세와 관련되어 명명된 마을이름도 있는데, '삼각골'은 마을 지형이 삼각형의 골짜기 형 태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천마산의 수려함으로 드러나는 산가(山佳),
풍부한 계곡물로 나타나는 수가(水佳),
그리고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로 표현되는 인가(人佳) 등
삼가(三佳)로 이 루어진 마을이라 해서 '삼가골'이라 불리던 것이
'삼각골'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한다.
[ 조안면(鳥安面) ]
◎ 능내리(陵內里) [능안, 능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 (韓確)의 묘가 있으므로 능안 또는 능내라 하였다고 한다.
능내리에 있는 '마현'은 광주분원으 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던 고개가 있어서 '마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림학사 민씨도 이 곳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 조안리(鳥安里)
조동리의 '조(鳥)'자와 사안리의 '안(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동(새울·새월)은 옛날 이 곳에 새가 머물다 날아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는 달리 박씨 선조가 한양 가는 길에 이 지역에서 쉬게 되었는데,
새 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좋아 가려 했던 길을 멈추고 여기서 살기로
하고, 마을 이름 을 '조동'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새울' 또는 '새월'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새와 관련된 지 명으로 조동 서쪽 와부읍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새재', '새고개[鳥嶺]'가 있다.
◎ 진중리(鎭中里)
진촌리의 '진(鎭)'자와 중리의 '중(中)'자를 따서 진중리
한편 이 곳에는 '고려장터'라는 이름이 전하는데, '고려장(高麗葬)'이란 고구려(高句麗) 때의 장사(葬事) 지내는 법으로서, 늙고 병들은 사람을 묘실(墓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거기에 안치 하고 금은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장사 풍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병 든 노인을 깊은 산골에 버리는 풍습으로 전해졌다.
진중리 북동쪽에 있는 '고려장터'는 바로 이러 한 고려장을 실행하던 구체적인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리'라는 마을은 '중말'이라고 도 하는데, 원래 말의 죽을 먹였던 곳으로 처음에는 '죽말'이라고 부르다가 '중말'로 변하고, 다시 '중 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馬]과 관련된 곳으로 '마진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변응성장군의 전적지이다. '마진산성'이라는 이름은 말로 진을 쳤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곳에 청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 송촌리(松村里)
'송송골·송신'은 송촌리에 있는 마을이다. 두촌 서쪽 송촌 2리에 있다. 중국에서 장수 이여송을 조선에 보낼 때, 송자가 붙은 마을은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을 전해들은 한음 대감이 직접 이 마을에 송자를 붙여 지은 이름 이 바로 '송송골'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와는 달리 두촌마을에 세대수가 늘어나자 마을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소나무밭 속산에 만들어진 마을이라 해서 '송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 다. '송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현재 송촌리는 이 '송송골' 즉 '송송동'의 '송(松)'자와 평촌리 의 '촌(村)'자를 합하여 붙여진 것이다.
[오남면(梧南面)]
◎ 양지리(陽地里)
중심마을이 '양지말', '양지편', '양지'라 고 하는데 양지바른 곳이므로 붙은 이름이다.
이곳 양지리에는 '삭다니·삭다리'라는 특이한 이름 이 있는데, 옛날에는 '골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골말'에서 '삭다니' 혹은 '삭다리'로 바뀐 이유는, 이 마을에서 화재가 나서 마을 대부분이 타버려서 '모두 다 타버린 마을'이라는 의미의 '싹탄리'로 불리다 가 '삭다리' 혹은 '삭다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팔현리(八賢里) [발안, 배라니, 배래 니, 팔현]
이곳은 벌판 안쪽이 되므로 '벌안', '배라니', '배래니'라고 불렸다.
그런데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인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망세정(忘世亭) 심선(沈璿) 등 여덟명의 선비가 이 곳에서 항시 만나 강론을 하였다 하여, '여덟 현인(賢人)이 은거 했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여덟 선녀가 이 마을에 내려와 목욕하고 올라갔 기 때문에 '팔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이들 팔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팔현재'가 있다.
그리고 원팔현 북쪽 팔현유원지에 '형제바위'가 있다. 옛날 남 양홍씨(南陽洪氏) 가문에서 사효성문(四孝姓門)을 받은 홍서구(洪瑞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우 주구(疇龜), 우구(禹龜), 응구(應龜) 등 4형제가 이 곳에서 사이좋게 놀던 자리라 해서 형제바위라는 이름이 붙 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 바위에 돌을 던지고 기원을 하면, 아들 형제를 낳는다고 하여 '형제바 위'라 불린다는 유래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 오남리(梧南里)
오산리의 '오(梧)'자와 어남리의 '남(南)'자를 따서 오남리 .
'오산'이라는 이름은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그러나 낫을 가는 데 사용되는 숫돌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해서 '숫돌모루', 또는 '숫돌머리'라고 도 한다.
이와는 달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돌아 내려온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 한다.
'어남(於南)·오남(梧南)·어냄이'는 세조가 광릉 묘지터를 찾으러 광릉 방면으로 가는 길에 건너다 본 곳이라 하여 '어람리(御覽里)'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의냄리', '어냄이', '어남 (於南)'이라고 불러오다가 '오남'으로 되었다고 한다.
고종황제 때의 내시가 이 곳에 와서 많 은 농토를 소유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호평동(好坪洞)]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상도면에 속 해 있었는데, 1914년 호만(好滿)리의 '호(好)'자와 평동(坪洞)리의 '평(坪)'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호평동에는 '가마솥둥지'라는 바위가 있는데, 좌우로 갈라진 바위 사이가 큰 가마솥을 얹을 만하다 해서, '가마솥둥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이 지역은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 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온 동네 부녀자들이 키를 들고 이 곳으로 와서 키로 물을 퍼서 바위에 끼얹으 며 비가 오기를 빌었다고 한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몇 번식 키질을 하기도 했으며, 키질을 마치고 내려 오면 젖은 키가 채 마르기도 전에 비가 오곤 했다고 한다.
◎ 구룡터·구명터·구멍터·구녕터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이 지역의 우물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해서 '구룡터'라고 부 른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구씨와 명씨가 살던 곳이라 해서 '구명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구멍 터'라 불리는 것은 '구명터'가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처음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의 이름에 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이 약간씩 달리 전하기 때문 에 마을 이름도 약간씩 다르다. 즉, 전구용이라는 사람이 처음 살았기 때문에 '구룡터', 전구멍이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구멍터', 전구영이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구녕터' 등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호만'이라는 이름은 원래 '홈안'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내미골 논에다 물을 대기 위해 느티울쪽으로 나무 홈을 파서 만든 홈통을 이어 댄 농수로가 있었는데, 이 홈통으로 된 농수로 안에 있는 집들을 '홈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부르기 쉽게 '호만'이라고 하기 시작했으며, 한자어로는 '호만 (好滿)'이라 표기했다.
[평내동(坪內洞)]
평내리 151번지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사당(祠堂) 이 있어 궁촌 이라하는데, '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궁말'
혹은 이성계의 아들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의 사망 후
이 곳에 궁을 세운 이후부터, '궁말' 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궁평(宮坪)'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궁평의 '평'자를 따고 그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내(內)'자를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양정동(養正洞)]
'양정(養正)'은 봉두메삼거리 서북쪽에 있으 며, 건너마을, 봉사골, 홍계, 뒷골, 안마을, 바깥골, 가마골 등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옛날 양정양씨가 처 음 와서 살던 곳이어서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조선 중엽 전주최씨의 양정재(養正齋)라는 묘막이 있어
그 후부터 '양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왕자궁(王子宮)
이패동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해질모루 서쪽에 있다.
조선 중엽 장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恩信君)과 은신군의 생모인 임숙빈(林肅嬪)의 묘를 쓴 뒤부터 '왕자궁'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윗궁'과 '아 랫궁'으로 나누어지며, 예전에는 집도 크게 있었다고 한다. 다른 제보자는 그 무덤의 주인이 고종황제 8 촌의 묘였으며, 지금은 이장했다.
또 어린 왕자를 데려다 키운 곳이 이 마을이었다는 데서 이런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 삼패동
'삼패동(三牌洞)'이란 이름 은 청풍김씨 신도비에서 연유된다.
삼패동 평구마을에는 김식(金湜), 김육(金堉), 김좌명(金佐明)의 신도비가 있다. 이처럼 청풍김씨의 신도비가 3기가 있기 때문에 삼패(三牌)동이라고 한다. 이 중 김식의 비석에 쓴 돌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비신과 이수가 통골로 되어 있다. 일패, 이패동 역시 각각 비석이 한 기, 두 기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 평구마을
평구마을의 '평구(平丘)'는 평 평한 언덕이 박덩쿨처럼 흩어져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평구역'이 있었기 때문이라 고 해서 생겼다고도 한다.
◎ 역말·역촌
삼패동에 있는 마을 중에 '역말·역촌'이라는 곳이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을 기점으로 8도로 가는 도로에 설치하여 여행객의 편리를 제공하거나 혹 은 역마가 휴식을 하고 공문서를 전달, 교환하던 곳을 驛院역원)이라 했었다. 이 마을이 바로 한양 40 리 지점으로, '평구역(平邱驛)'이라는 역원이 설치되었었다. 이런 연유로 '역말' 혹은 '역촌(驛村)'이 라 불린다.
[금곡동(金谷洞)] '쇠골'이라고도 한다.
예전 에 철을 파낸 곳이라 하여 '쇠푼' 즉 '금곡'이라 불렸다.
금곡동에 있는 자연마을 가운데 '무대 (舞垈)'가 있다.
옛날에 벼슬이 높은 선비가 지나가다가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서 커 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흥이 올라 춤을 추고 갔다고 해서 '무대'라 불 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춤을 춘 장소인 느티나무가 있으며, 남양주시 보호수 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금곡동을 이루는 4개의 큰 마을 중 '어룡(魚龍)' 또는 '어룡골'이라는 곳이 있다. '어룡'이라는 이름은, 현재 철도가 놓여진 지역이 예전에는 저수지였는데, 이 곳에서 물고기 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도농동(陶農洞)]
질그릇을 구웠던 마을이어서 '도농' 또는 '도롱'이라 불리 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조선 중엽 남양홍씨가 거주하였는데, 도적이 너무 많아 철(鐵) 로 울타리를 만들어 세웠던 연유로 '쇠미'라고 하다가 '도농'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한 다.
[지금동(芝錦洞)]
◎ 가운동(加雲洞)=가재(加在)동+조운(朝雲)리
'가재(加在)'는 가운동에 있는 마을이다.
'가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을 주변 산의 형상이 가재와 같다고 해서 '가재마을' 또는 '가재울'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는 마을 북쪽에 있는 '안산'에 가재가 많기 때문
또 다 른 유래는 임금이 지나가다 휴식을 취하면서 '이 곳은 가히 쉴 만한 곳'이라 했다 해서 '가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조운(朝雲)'이라는 곳은 옛날에는 '원터'라고 하다가, 다시 '조원'이라는 원집이 있어 '조원'이라 부르다가, '조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수석동(水石洞)수변(水邊)리+석실(石室)리
수변이란 글자 그대로 한강을 끼 고 있는 지역,
석실은 이 곳에 석실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석실(石室)'은 '서원' 혹은 '세원'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여러 지명들 은 모두 석실서원이 이 마을에 있었던 연유
즉, 조선시대에 안동 사람 김창협이 석실서원을 설치하여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라는 연유로 붙여진 것이다.
'미음(渼陰)'은 수석동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중엽 안동김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원래 김조기 자손의 호를 따서 '미음'이라 칭하다가 구한말 때 '수변리(水邊里)로 바뀌었다. 渼 :물놀이 미 ,못 이름
◎ 지금동(芝錦洞) 지사리(芝沙里)+금교리(錦橋里)
금교(錦橋)리'는 조선초 중엽 '금어'라고 불리는 조그만 개울에 있던 다리를 '금교'라고 하였는데, 이 다리 이름을 따서 정했다고 한다.
*출처 : 남양주시 역사문화길잡이 - 우리고장 남양주(남양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