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를 나르는 사슴 루돌프는 빨간 코 때문에 코에 불이 붙었다는 놀림을 받는다. 이처럼 빨간색은 불로 비유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온 산이 붉은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산이 불탄다거나 불붙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붉은 색깔을 불로 비유하는 것은 물론 불 자체가 붉은색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불과 붉은색과의 이러한 상징 관계가 말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형용사 ‘붉다’는 명사 ‘불’에 /ㄱ/이 덧붙어 만들어진 말로서, 우리말 ‘붉다’는 ‘불’이라는 명사에서 직접적으로 만들어진 말인 것이다.
‘붉다’는 ‘불’이란 명사에서 직접적으로 만들어진 말 불과 상극 관계에 있는 물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찾을 수 있다. ‘불’에서 ‘붉다’를 만들어냈던 우리 조상들은 이제 같은 방식으로 ‘물’로부터 ‘묽다’라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묽다’는 불과 달리 특정한 색깔을 나타내지 않고 단지 ‘물기가 많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의미로 보면 ‘묽다’가 ‘물’에서 만들어진 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에서 만들어진 ‘붉다’는 다시 ‘발갛다’라는 말로 확대된다. ‘붉다’가 ‘발갛다’로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붉다’에서 ‘밝다’와 같은 말이 만들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발갛다’는 원래 ‘밝아하다’에서 줄어든 말이기 때문이다.
‘밝다’는 애초에 빛이 환한 상태를 가리키지만, 약한 붉은 기운을 뜻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밝다’에서 ‘발갛다’가 나오고 이보다 더 센 말로 ‘빨갛다’가 생긴 것이다.
‘불’에서 ‘붉다’, ‘붉다’에서 ‘발갛다’가 나온 방식을 ‘물’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보면 우리는 ‘말갛다’라는 새로운 낱말을 찾아낼 수 있다. ‘물’에서 ‘묽다’가 나오고 이 모음을 변화시켜 ‘말갛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말갛다’도 ‘발갛다’와 마찬가지로 애초에는 ‘맑아하다’였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말은 ‘불’과 ‘물’이라는 원초적 물질로부터 그 속성을 지닌 다양한 형용사들을 만들어 내는 특징을 갖는다. 전라도말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물’에서 ‘묽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표준말이나 마찬가지고, ‘말갛다’라는 말에 대해 ‘맑허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표준말은 ‘말가하다’에서 ‘말갛다’로 줄어들었지만, 전라도말은 ‘맑허다’로 줄어들었다. 이 점은 표준어 ‘빨갛다’를 전라도말에서 ‘빩허다’ ‘삙허다’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맑허다’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전라도말에는 ‘밁허다’라는 말이 있다. ‘맑허다’가 산뜻하고 맑은 상태를 나타낸다면, ‘밁허다’는 묽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죽이 너무 밁허다’라고 하면 죽이 너무 묽어 먹기에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라도말 ‘밁허다’는 표준말 ‘묽다’와 같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표준말에는 ‘묽다’만 있을 뿐 전라도말 ‘밁허다’와 같은 표현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밁허다’는 오직 전라도말에서만 생겨난 독특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밁허다’는 ‘맑허다’로부터 모음을 변화시켜 파생시킨 전라도의 새로운 말일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받침소리가 /ㄺ/인 경우, /ㄹ/로 발음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밁허다’는 때로 ‘밀허다’로 발음되곤 한다. 이것은 ‘삙허다’를 ‘삘허다’로 발음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물’에서 ‘묽다’와 ‘무르다’라는 두 개의 낱말 나와 물기가 많아서 단단하지 않을 때 표준말로는 ‘무르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도 어원적으로는 ‘물’에서 온 것이다. ‘묽다’가 단지 물기가 많은 상태를 가리킨다면 ‘무르다’는 물기가 많아 단단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묽어지다’는 액체의 농도가 낮아지는 것을 뜻하는 반면, ‘물러지다’는 단단한 것이 물기가 많은 상태로 바뀌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이유로 과일이나 땅과 같이 굳은 물체는 결코 묽어질 수 없고 단지 물러질 수 있을 뿐이다. 이 ‘무르다’로부터 ‘물렁’이나 ‘물컹’과 같은 어근이 생긴다. 물론 모음을 바꿔 ‘몰랑’이나 ‘몰캉’과 같은 말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점은 전라도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전라도말은 ‘무르다’ 대신 ‘물르다’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물렁’이나 ‘물컹’을 만들어내는 것은 표준어와 다를 바 없다.
결국 우리 조상들은 ‘물’이라는 말로부터 ‘묽다’와 ‘무르다’라는 두 개의 낱말을 만들어 내고, 각각에 의미의 차이를 부여하였다. 두 낱말은 모두 물기를 많이 포함하는 점에서는 공통이나, 단단하지 않다는 부차적 의미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묽다’와 ‘무르다’로부터 다시 다양한 형용사가 발달하였다. 전라도말도 이러한 말의 파생 과정은 표준어와 비슷한데 다만 표준어에 없는 ‘밁허다’와 같은 말을 더 만들어내는 점에서 표준어보다 말 만드는 힘이 더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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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기갑전라도말맛' 입니다
눈에서 시작되어 마음으로,, 삶에서 시작된 것도 마음으로,, 그 바라보는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