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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광장에서 살곶이다리까지 청계천 종주
글/사진 이종원
복잡하고 물가 비싸고 야박한 강남이 뭐가 좋은지, 기를 쓰고 강남가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아마 그곳에 끼지 못한 강북사람의 푸념일지 모른다. 하긴 강남 한 번 살아보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강남에서 살던 사람이 강북으로 이사가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된양 서글퍼 하는 사람도 보았다. 아무래도 지역과 신분을 함께 묶어 버리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강남북의 문제는 비단 요즈음의 문제는 아닌 듯 같다. 조선시대, 한양은 양반가와 관청이 들어섰던 북촌과 서민들과 가난한 선비들이 사는 남촌이 청계천을 기준으로 나뉘어졌다. 몰락한 남촌사람들은 다시 출세해 청계천을 건너 북촌 한옥에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는지 모를 일이다. 일제 강점기때 서민들의 상권인 종로와 오늘날 충무로의 혼마치가 또 한 바탕 붙는다.
청계천 주변을 따라 인구가 밀려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활발한 경제 활동이 오늘날 세운상가, 평화시장, 두타빌딩 같은 물산의 집산지로 발전하게 된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도시 빈민층은 청계천변에 아슬아슬한 판자집을 세우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한밤에도 1평짜리 평화시장 다락방에는 재봉틀 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억압과 착취속에 전태일 같은 비극적인 열사를 만들어낸 것도 근대화의 상징인 청계고가도로가 만들어낸 우리네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종로와 을지로, 수많은 간선로도 등은 예나 지금이나 길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청계천의 물의 방향에 따라 길이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계천은 600년 한양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늘로 치솟은 빌딩,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지하로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난 불사조의 물길이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보겠다면 앞만 보고 걸어라. 흘러가는 물속에서 과거의 향수를 끄집어 내는 것이 청계천 탐방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 청계천의 가장 큰 목적은 생활하수를 모아 한강에 흘려보내는 기능을 담당했다. 제방을 튼튼히 하고 땅을 깊고 넓게 파야하는데 이런 국가 공사 덕에 빈민들은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하는데 4대강도 이런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냄새가 나고 전염병의 루트가 되다보니 국가는 청계천을 완전히 덮허 버리는 복개공사에 들어간다. 1978년 하수관를 땅에 묻고 오폐수가 빠져나가게 했고 그 위에 계고가도로를 만들어 3.1빌딩을 지나가게 하면서 근대화의 아이콘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세월에 눌려 도로는 시의 흉물에다 유지비용까지 많이 들어 과감히 헐어냈다.
청계천 종주는 광화문 사거리 동아일보사앞에서 시작해서 마장동,사근동을 거쳐 중랑천합류점까지 총 8.14km다. 성수동으로 넘어가는 살곶이 다리까지 종주코스는 총 8.5km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다닌다면 두 어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먹거리 천국인 광장시장, 관우를 모시고 있는 동묘, 황학동벼룩시장 후신인 서울풍물시장, 청계문화관 등을 기웃거리다보면 5시간도 부족하다. 과거의 흔적들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곳곳에 설명도 잘되어 있어 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늠하는데 더 없이 좋은 길이다.
청계천은 중랑천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용비교에서 한강에 몸을 섞고 남산을 깃점으로 서울을 태극모양으로 휘감아 돈다. 산태극과 물태극이 만나는 곳에 한양이 자리잡고 있으니 서울이 풍수지리의 명당이 아닐 수 없다.
걷기 전에 셀카 인증샷~
청게천의 시작은 스프링이다. 외부는 탑처럼 위로 상승하는 다슬기 모양으로 문화도시 서울의 발전상을 상징하며 내부 리본은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상징한다.
서울의 비상
청계천 폭포. 특히 야경이 볼 만하다.
폭포에서 내려가면 팔석담이 보인다. 한반도에 흐르는 물을 상징하며 우리나라 팔도의 기운과 정기를 한곳에 모아운 것이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팔석담
팔석담 제일 끝이자 육지와 떨어져 있는 제주도
야경 또한 좋다. 첫 번째 다리가 모전교. 예전에 토산 과일을 팔던 곳이란다.
두 번째 다리는 광통교 . 예로부터 서울에서 가장 큰 다리로 정월대보름이 되면 도시 남녀들이 답교 이를 했던 곳이다.
이 다리에는 아픔과 복수가 점철되어 있다.
태종의 복수 광통교를 아십니까?.....클릭하세요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의 석물을 광통교 보수하는데 사용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 있다. 그 뒤로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의 광교가 보인다. 이곳은 한때 거지들의 소굴로 알려져 있다. 집없는 아이들이 다리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고 한다.
영조때 한양의 인구가 늘어나 청계천 물이 막히자 준설작업을 했는데 퍼올린 토사가 산만해서 가산이라고 불렀다. 서울 거지들이 가산에 땅굴을 뚫고 살았고. 영조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뱀을 잡아 파는 독점권을 넘겨 줘 오늘날 '땅꾼'은 뱀장수와 동의어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협객 김두환도 광교밑에서 걸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반차도는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수원 화성과 현륭원(사도세자 무덤)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 보고서다.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지나 광통굘르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행진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66쪽의 그림을 한폭의 그림으로 세운 명작이다.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등 쟁쟁한 화원들이 합작으로 위엄과 질서를 장엄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를 볼 수 있다.
목적지가 경기도이므로 경기감사가 행차를 선도하고 두 번째로 이 행사를 총괄하는 채제공이 뒤따른다. 위 그림은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인 자궁가교로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 간다.
이 행차의 하이라이트다. 임금의 말인 좌마가 있고 신하가 양산을 떠받치고 있다. 임금의 모습은 그리지 않고 있다. 앞뒤는 무장하지 않는 별감과 위내사령이 에워싸고 있다.
자세히 보면 얼굴의 방향이 다양하고 표정 또한 살아 있다. 1779명의 표정이 모두 다르다. 정조반차도가 끝나는 곳에 세련된 분위기의 삼일교가 나온다. 인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했기에 이름 붙여졌는데 다리는 남산을 형상화한 뫼산 모양의 난간을 가지고 있다. 옆에 예전 31빌딩인 산업은행 빌딩이 우뚝 서 있다.
31빌딩은 70년대 남한의 발전상을 대표하는 빌딩으로 31층, 114m로, 국내 최고층이며 기본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인의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빌딩이다. 이 옆으로 31고가가 지가갔다. 장통교와 수표교 일대를 중촌이라고 부르며 역관, 의관,천문관 등 기술직 중인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관수교는 청계천 관리청인 준천사를 두어 개천 바닥의 오물과 토사를 파는 것을 감시했던 장소로 인근에 청계천 수량을 재었던 수표가 있다.
세운교는 10m 높이의 물이 치솟는 분수가 있다. 1967년에 세워진 세운상가는 전자상가 판매의 의 메카로 상인 3명이 모이면 미사일도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IT산업의 산실이다.
배오개다리 오늘날 종로 4가에 배오개(李峴)이라는 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청계천을 빠져나와 광장시장으로 향하는 이유는 순전히 마약김밥 때문이다. 예전에는 딱 한 집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1년 전부터 원조라는 간판을 세워두고 여러 집이 영업 하고 있다.
"헷갈리네요. 김밥집이 많이 생겨서...저 옆집, 원조라는 것을 사용하면 문제가 있지 않아요?" "그 사람들 얼굴에 철판을 깔아서 신경도 안써요."
어쨌든 원조집은 배오개다리를 건너서 종로쪽으로 가다보면
이렇게 광장시장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하나 보인다.
깊숙히 들어가 이 집을 찾으면 된다.
마약김밥 1인분에 2천5백원
포장용 김밥. 소스가 김밥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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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은 1905년 개설된 한국 최초의 상설 근대시장. 광장이란 광교와 장교사이에 위치했기에 이름 붙여졌다. 원래 농수산물 위주의 시장이었지만 6.25전쟁 이후 남대문 도깨비시장과 더불어 미군과 유엔의 구호물자가 유통되는 시장으로 미제 버터와 통조림, 담요등을 살 수 있다. 여러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특히 2층은 건물이 연결되어 있어 일단 들어가면 미아가 되기 딱 알맞다.
광장시장은 먹거리 천국이다. 빈대떡과 막걸리 그리고 좌판에 앉아서 먹는 냉면, 콩국수, 손칼국수, 동태탕, 족발, 즉석 비빔빕 등 골라먹은 재미가 그만
새벽다리는 보행자 전용다리로 천막을 상징하는 아치형이 독특하다.
평화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도매상가로 패션의 원조시장으로보면 된다. 원래 한국전쟁때 피난온 실향민들이 미싱 1~2대를 놓고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하거나 탈색해 팔았던 시장이었다. 이곳에 방출한 폐수가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가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가 짙은 회색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수출산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젊은 노동자의 한숨과 분노도 고여 있었다. 1970년대 겨울 피복공사 재단사로 근무하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길든 곳이 바로 이곳 평화시장 앞이다.
오늘날에도 고단한 삶은 이어지고 있다.
6천여개 동판. 추모 소망이 적혀 있음
2010. 11.13 그가 산화한지 딱 40년후. 버들다리는 전태일 다리로 바뀌게 되었다.
다리주변은 오토바이 천국. 다 몰아냈으면 좋겠다.
오세훈 시장 동판도 보이고 국회의원들 것도
대장과 동명이인
전태일교를 지나면 디자인의 산실 동대문시장답게 도안그림 으로 가득차 있다. 문화의 벽앞은 수변무대가 조성되어 있다.
복원된 오간수문. 홍예문으로 5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문'이라 하였다.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5개의 아치형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에 성곽을 쌓아올렸다. 도성안에서 죄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거니 밤에 도성안으로 잠입할 때 통로로 이용되었다.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망갈 때 이 수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 일제가 원할한 물 흐름을 위해 헐어 버렸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
패션의 거리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꾸면 '맑은내'다, 맑은내다리는 나비의 힘찬 비상을 상징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태껸의 장소로 명성을 얻고 있는데 마을끼리 서로 승부를 겨루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곳부터 왕십리 일대가 군인들이 많이 살았던 장소이기에 무예가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의료상가와 신발, 책등 쇼핑몰이 즐비하며 이곳을 벗어나 남쪽으로 500m 쯤 걸으면 그유명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나온다. 뒷주머니에 도끼빗 끼고 있는 느끼하게 미소짓는 DJ가 생각난다.
정약용의 호를 붙인 다산교를 지나면 청계빨래터가 나온다. 아낙들이 빨래하는 장면과 멱을 갑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봐도 좋을 것 같다.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어서 그런지 정겨움이 묻어 있다. 충남 천안의 능수버들 16그루가 자라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영도교에서 잠시 빠져 북쪽으로 가면 삼국지 주인공인 관우를 묘신 동묘가 나온다. 이곳에 왜 중국인을 모시는 사당이 있을까?
동묘 들어가는 곳에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예전 황학동 시장 자리는 롯데캐슬이 들어섰고 그사람들이 터전을 이룬 곳이 서울풍물시장과 이곳 동묘앞이다. 서민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물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겨울엔 따끈따끈 왕만두가 최고~
터프하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시 길을 나선다. 물은 청계천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롯데 캐슬을 깃점으로 반원을 그리며 휘감아 돈다.
청계8가의 영도다리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이별하며 슬피 울었던 다리란다. 서울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다리니까 정순왕후는 한양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배웅을 하며 이승에서 마지막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다. '영이별다리'라고 해서 영도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할 때 이 돌다리를 헐어 석재로 사용했기에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인근 31아파트는 서울개발의 역사를 1969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세워진 최초의 시민아파트로 청계고가도로를 타고 가면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를 볼 수 있었는데
황학교. 일제 때만해도 거의 논밭으로 누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며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
이곳에서 200m만 빠져나오면 서울 풍물시장
시민들의 꿈이 조각타일. 선착순으로 선정된 2만명의 소망이 하나로 이어져 길이 50m나 이어지고 있다.
리듬벽조다. 상단에서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중간에 까만돌을 박아 물고기가 물을 타고 거슬러올라 가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밤에는 88개의 4색 조명이 비쳐 물이 리듬에 따라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우당교는 비우당은 '비를 근근히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때 청백리인 하정 유관선생 초가집이 다리 근처에 비가 오는 날에도 방안에 과거급제때 하사받은 일산 즉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일산없는 집은 장마철을 어떻게 나나?" 걱정했다고 한다.
조금 걸으면 존치교각이 나온다. 청계고가도로 교각중 3개를 철거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 김현욱 서울시장이 새로 문을 연 워커힐 호텔과 김포공항을 연결하는 자동차 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이곳에 청계고가도로가 탄생한다.
조금 걸으면 무학대사의 이름을 딴 무학교가 나온다. 그 뒤로 하늘물터로 높이 5m, 폭 50m 42개 노즐에서 물이 품어나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존치교각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무학교를 지나면 두물다리가 나오는데 인근 성북천과 합류되는 지점으로 두 개의 물이 마나는다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다리모양은 서로 만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리 옆으로 계단이 놓여 있는데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을 수 있도록 했다.
다리위에서 동쪽 50m쯤 청계천변에는 서울문화재단 북카페가 있어 누구든 문을 열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청계천을 걷다가 문득 시가 그립다면 잠시 들러 마음의 수양을 쌓고 가면 좋을 것 같다.
서울문화재단 건너편에 청계문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정면은 복원해 놓은 청계천 판자집. 그옆에 오석은 청계천 복원에 수고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넣었다. 현직 대통령의 업적 홍보 때문일까 청계문화관은 규모가 상상이상으로 크다. 청계천을 복원한 것은 칭찬 받아야할 업적이지만 좀 더 겸손했으면 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수고한 사람의 이름을 볼 수 있는데
그래도 현직 대통령인데 이렇게 돌로 깨뜨리는 사람도 문제가 있다.
청계문화관은 동선상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우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서 1층까지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도록 설계되었다. 입구는 청계천 물흐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거시적 눈으로 청계천과 중랑천, 한강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평일에는 9시부터 21시까지
과거 청계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특히 복원전 땅속의 모습을 실감나는 음향효과를 들으며 지하속 세계를 볼 수 있다. 희망의 떡잎은 어둠속에서 한줄기 햇빛속에 의지해 힘겹게 자란 떡잎
청계천 관련 영상물. 카메라 앵글을 다양하게 해서 입체적으로 찍어 청계천 다리의 아름다움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화면이 열려 밖을 나오면 서울시 지도가 바닥에 깔려 있는데 내 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3층은 영조와 정조때 한양의 준설사업 이야기와 청계천에 관련된 역사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오간수교.
1층은 특별전시장으로 2011년 2월 27일까지 '무형문화재 사진전 전통의 숨결, 찰나의 모습'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제사의례, 풍물, 놀이, 자인의 혼과 숨결 등 6명의 사진작가들의 기록을 볼 수 있다.
문화관 바로 앞은 청계천판자집이 복원되어있는데 판자집의 방, 상점,만화가게,연탄가게 등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아기 기억난다. 지금은 50세가 넘었을걸
환타 옆구리를 젓가락으로 장단 맞추었던 기억이
만화가게
판자집 방안 내부
22개의 청계천 다리중에서 마지막 다리인 고산자교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인근에 살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다리는 물을 의미하는 水자의 형상을 띠고 있다.
청계천 복원은 바로 이 고산자교에서 끝을 맺는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면 서울에서 가장 다채로운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지자체에서 기증한 다양한 나무들을 감상하며 걷도록 했다. 사과나무길, 감나무길, 대숲길이 이어지며 중랑천 합류지점에는 갈대 3만평, 인공 습지까지 조성해 놓았다.
고산자교부터 중랑천과 만나는 세월교까지는 새들의 보금자리. 가까이 관찰할 수 있도록 데트가 마련되어 있다.
예쁜 오리 새끼
고산자교를 지나 신답철교 아래는 마장동 축산물시장이 있고 그 옆으로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어 소의 특수 부위를 맛볼 수 있다. 모듬구이는 1인 2만원이면 먹을 수 있다.
마장동 축산물 사장
저 기차가 우리집 가는데~~
아이들 놀이터
황포돛배를 형상화한 벤치
신답역에서 용답역을 지나 세월교까지 유실수 가로수가 조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내부순환도로 아래길보다는 건너편 길이 조용하다.
철새의 보금자리
중랑천에서 자전거 타고 오는 사람도 이 다리를 건너야 한강으로 갈 수 있다.
청계천과 중랑천 합류지점
3만평규모의 화왕산 갈대숲.
한때 메스컴에 화제가 되었던 남매상인 누나 여울이와 동생 가람이. 3년전 겨울 한 시민이 남매가 추워보인다며 옷을 입혀주면서 오늘날까지 훈훈한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한양여대 의상디자인과 동아리 패크레의 보살핌을 받으며 4계절 옷을 갈아 입고 있다. 크리스마트때는 산타로 깜짝 변신~
마지막 종착역인 살곶이 다리. 현존하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규모가 크며 도성에서 동쪽으로 강릉, 남북으로 충주, 상주등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예전에 이곳에 살곶이벌이 있었다고 하여 살곶이다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20년 집중 호우로 다리 일부가 유실되어 현재는 일부만 복원되어 있다.
상판석과 귀틀석의 모양은 종량과 횡량으로 걸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고 석재가 장대하고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성수동과 한양대를 오가는 사람이 이용한다.
마지막 인증샷~~최대한 얼굴 작게 나오려고 손을 길게 뻗다보니..표정이 굳었음
살곶이 다리에서 500m만 가면 2호선 한양대역
한양대 역 육교 건너면 한양냉면이 있는데 학생들을 상대하는 집답게 양이 상당히 많다. 매운 냉면 맛이 특징이며 진짜 세수대야 모양 그릇에 나온다. 며 주인이 친절하다. 설렁탕, 닭칼국수도 요깃거리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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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 청계천과 넘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제대로 답사하지 못하는 게으름뱅이죠. 대장님 언제 봐도 멋진 사진과 글솜씨 대단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역시 대장님의 자세한 설명은 마치 제가 직접 걷고 보고온것같은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
그래도 다음엔 제눈으로 보고싶네요^^
신답역앞 우리집앞을 지나 가시는데...어쩌나~~현수막이라도 들고 있어야 회원일 터인데....교육으로 없는 날이니~~~~~~~~~아 쉽다.
나름 다녀왔다고 자부했는데 보지 못한게 많네..대장님의 안내도를 가지고 다시 한번 다녀와야 겠네요 담에 날 풀리고 시간되면...^^
저도 우울할때면 혼자 걷는 길이였는데 못 본게 많아요 어머나 역시 여행작가님께서 섬세 하세요
동묘에서 살곶이다리 까지는 이번 2월 답사때 가보고, 다른곳은 이미 그 전에 답사를 마친곳... 청계천의 야경 쥑기든데~ ^^*
갠적으로 가보았을때는 그저 설렁설렁... 놓친곳도 많고 대장님 안내도 뽑아서 꼼꼼히 체크해 가며 다시한번 족적을....
집안네 결혼식때문에 2월 답사도 눈물을 찍어가며 아쉬움과 탄식만 쏟아내고 있게된 신세랍니다.
대장님 안녕하세요~~^ 남매상인 여울이와 가람이 예쁜한복이 넘 이상적이네요~^ 산타옷 입었을때 봤는데..~ 광장시장도 여러번 갔지만 대장님만의 감각~ 따라갈 수없네요` 잘봤습니다.
저 어릴땐 광장시장을 동대문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광장시장이라고 해 첨엔 헤맸네요. 분유통과 환타병도 기억나네요.
시청옆 청계천쪽만 걸어보았는데 전구간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오니 참 좋습니다. 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여러번 갔지만 요로콤 설명에 사진까지 더 속속 들어오네요.... 요코스 그래도 함 가고 싶어지네요........... 냉면도 묵고싶고 ㅎ~~ 늘 수고에 편안이 감상합니다^^*
상세한 설명 넘 감사해요. 아이들이랑 꼭 가야겠습니다^^
퇴근 길 청계광장에서 시작 동대문까지는 서너번 걸어봤는데 살곶이까지는 걸어보지못했어요...기회가 되면 걸어보겟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곳!! 그러나 이젠 낯설은 곳이되었네요!! 관광공사와 시티은행사이에 있던 ~~~
자주 거닐었던 곳!!! 대장님의 ((태종의복수광통교)) 를 사내 게시판에 올려 모놀을 알리던게 기억나네요~~~
이렇게 끝까지 걸었던 적은 없었는데 직접 다녀온듯 하여 너무 기쁘고 감동스럽네요ㅎㅎ~ 날 풀리면 한번 쭉~ 걸어봐야겠어요~
와~~~~멋진경험이군요...
꼭한번가봐야할것같은 사명감이...
언제 날잡아서 청계천 걷고 싶어요
옛날의 청계천 기억합니다 (1958년도)
조은자료 감상 잘 하였습니다. 한번 다녀와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