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음악이 아니면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19세기 말의 기분을 차이코프스키만큼 대표하는 작곡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진리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세대에 속했다. 그는 낭만운동의 마지막 단계에 수반된 비관주의를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시골 보딘스크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관리로 만들 생각이었다. 19세에 페테르스부르크의 귀족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23세에 그는 그 자리를 사직하고 페테르스부르크 음악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좋은 음악가가 되어 생계를 이어 가는 것이 그의 소박한 목표였다.
그는 3년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고 그 곳의 교장이었던 안톤 루빈스타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2년 동안에 그는 가장 성공적인 작품 몇 가지를 내놓았다. 매우 감성적인 차이코프스키는 불규칙한 사생활의 영향도 겹쳐서 우울증에 걸리곤 했다.
다소 안정을 바라는 생각에서 그를 절망적으로 사모하던 제자 안토니나 밀리우코프와 결혼했다. 안토니나에 대한 그의 동정심은 곧 억제할 수 없는 혐오로 바뀌었고 절망에 빠진 그는 모스크바의 얼음같이 찬 물 속을 헤메었다. 며칠 후 그는 심한 신경쇠약 직전에 형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와 같이 절망적인 시기에 그는 발레에서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동화에서처럼 그에게 친절한 후원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외유를 하게 했고, 교수로서의 직책에서 그를 해방시켜 작곡가로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했다.
그녀가 기업가의 미망인인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그녀는 오만하면서도 감정적인 여인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에 앉아서 자신이 소유한 철도를 운영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11명의 자녀를 돌보며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그 시대와 그녀의 계급의 강직한 풍습에 묶이어 그녀의 정열이 순전히 예술가에 대한 것이며 그 인물에 대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해야 했으므로 자기의 보조금의 수령자와 결코 만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이 시작되어 편지로만 교환된 유명한 우정은 곧 정열적인 애착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 후 13년간 더할 나위 없는 헌신과 요령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고 차이코프스키의 성공만이 그녀의 생활에 초점이 되었다. 그녀는 그들의 관계가 이와 같은 이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모든 유혹에서 이겨냈다.
오페라에서, 혹은 드라이브 도중에 우연히 잠깐 마주친 일 외에는 그들은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 편지 왕래를 통해 우리는 차이코프스키의 작곡하는 방법을 통찰하게 된다. "당신은 내게 어떻게 악기편성을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나는 결코 추상적으로 작곡하지 않습니다. 나는 악상과 악기편성을 동시에 창안합니다."
폰 메크 부인은 그녀에게 바쳐진 제4교항곡이 명확한 뜻을 가졌느냐고 묻는다. 거기에 대해 차이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명확한 제목이 없는 기악곡을 작곡할 때에 경험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순수하게 서정적인 과정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정적인 시인이 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듯 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는 음악을 통한 영혼의 고백인 것입니다. 차이점은 음악이 훨씬 풍부한 표현수단을 가졌고 더욱 미묘한 매체라는 점입니다. 하이네가 말했듯이 '말이 끝나는 데서 음악이 시작됩니다.'"
그들 사이에 서신이 오고 가는 여러 해 동안에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로서 서방에서 그의 음악이 인기를 얻게 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1891년 그는 카네기 홀의 신축을 기념하는 음악회에 참석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그는 뉴욕으로부터 이렇게 써 보냈다. "이 미국인들은 매우 비범한 사람들이어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정직과 진실, 관용, 성의, 그리고 두 번 생각없이 남을 도우려는 신속성이 매우 기분 좋습니다......... 도심의 집들은 매우 거대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13층에서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나는 이러한 집의 지붕에 나가 본 적이 있는데 전망이 아주 훌륭했습니다만 브로드웨이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습니다.....내가 유럽에서 보다 미국에서 10배는 더 유명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의 만년의 편지들은 꿈에서 깨어난 환멸과 이제는 그가 더 할 말이 없다는 의심을 나타낸다. "내가 할 말을 완전히 다 써버렸을 수도 있을까요? 내게는 이렇다 할 착상도, 의향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 두 편을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여섯 번째 교향곡 <비창>을 마치자 곧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그 곡을 지휘했다. 이 곡은 미온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그것은 대중 앞에 서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수줍은 차이코프스키가 도무지 자신없는 모양으로 그의 음악을 지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후 53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과 마지막 교향곡의 비극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창교향곡(Symphonic pathetique)은 당장에 열광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