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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의 상황 이해를 위한 몇몇 역사적 정황
정조의 여인들
정조에게는 정비인 효의왕후 외에 4명의 후궁이 있었다.
효의왕후는 노론 청명당 계열 청풍김씨 김시묵의 딸이다. 노론 청명당계는 당시 노론을 주도하던 가장 핵심적인 세력. 10살의 나이에 11살의 정조를 만났으며, 무척 사이도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상상 임신까지 겪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 들인 후궁이 원빈 홍씨. 홍씨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였던 홍국영의 동생(당시13세)이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후사 문제가 벌어지자 가장 먼저 나선 인물이 바로 홍국영. 여동생을 후궁으로 만들지만, 궁에 들어온 지 1년도 못돼 죽어버리매,
이에 격분한 홍국영은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동생의 죽음을 효의왕후의 독살로 단정하고,. 원빈 홍씨 처소의 나인 궁녀를 칼을 들이대며 취조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삽년세도를 마감하게 된다. <옛날 DBS에서 10년세도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지.>
이후 판관 윤창렬의 딸인 화빈 윤씨가 들어오지만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화빈 윤씨는 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성 송연과 정조의 만남을 이뤄지게 하는 매개 역할로 그친다.
드라마에 나오는 성 송연의 역할은 극화된 사실에 불과하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 송연 = 의빈 성씨는 화빈 처소의 궁녀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야사 등을 바탕으로 한 fiction이다.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모두 간택된, 쉽게 말하면 정치적 관계에 의해 궁에 들어온 인물임에 비해 의빈 성씨는 유일하게 정조의 승은 [承恩] 을 입은 후궁이었다.
의빈 성씨는 정조의 첫 아들 문효세자를 낳지만 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다시 임신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지구를 떠나고 만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이런 일련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죽음에 대해 지극히 애통해하고,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에 자주 거동했다고 한다.
다음은 수빈 박씨이다. 그녀는 순조의 생모이다. 이 후로 정조는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세 명의 후궁에게 2남 3녀를 얻었지만 살아남은 자녀는 수빈 박씨 소생의 순조와 숙선옹주 뿐이다.
정조의 삶에서 다른 측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바로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역할에 대해서는
한중록'에서 남편 사도세자를 극심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인 것처럼 묘사한 점과 노론 집안 출신인 그녀가 노론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 내지는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 논쟁이 많았다.
하지만 정조의 태도나 능행에서 보여준 혜경궁의 행동으로 미뤄볼 때 오히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막을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정순왕후는 끝까지 정조와 대척점을 이룬다. 정순왕후 김씨는 15세에 당시 66세이던 영조의 계비가 된다. 정조의 집권을 끝까지 방해했고, 마지막 정조가 승하할 때도 독살설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정조는 붕어 직전부터 줄곧 신하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대개혁을 단행할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회연교 [ 五晦筵敎 ]이다. 五晦筵敎 란 5월말에 황제가 신료에게 전교를 내렸다는 말. 그런데 그 내용이 이른바 노론벽파에 대한 숙청과 남인의 중용이라는 것.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낀 노론벽파가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얘긴데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이고
정조의 붕어 직전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은 영조 계비 정순황후(1745~1805) 김씨. 쿠테타의 최정점에는 정순황후가 있었다는 추측이다. 또한 황제의 침실에 태황비가 드는 것도 이례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정조실록을 보면 이때에 사관과 승지는 배석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의아한 부분 입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5년간 더 살면서 수렴청정동안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쥐고
신유박해를 통해 전국적으로 서학 =천주교100여명을 처형하고
실학파 등 정조가 20년간 조선의 르네쌍스를 꿈꾸며 길러낸 정약용을 비롯한 개혁세력들을 싹쓸이 해버린다. 정조의 미심쩍은 죽음과 그 아쉬움이 큰 것도 정순왕후라는 인물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촌수로는 정조의 할머니이지만 나이는 7살차.
정조와 홍국영
세손 시절 뿐 아니라 영조 승하 후 보위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위기와 우여곡절이 많았던 정조는 때마다 기막히게 자신을 돕는 홍국영, 특히 강목사건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 후사가 없던 효의왕후를 대신한 후궁 자리에 13살의 동생을 간택시키니 바로 그녀가 원빈 홍씨다. 원빈은 궁에 들어와 1년이 채 안 돼 죽음을 맞게 되고, 홍국영은 격분하여 바로 동생 죽음의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고 멋대로 칼까지 빼든 채 원빈 처소 나인과 궁녀들을 취조하고 감히 국모에게 대들고 반항하고 의심하는 등 왕실을 업신여기는(요즘 말로 직권남용일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다가 비록 실질적인 조선의 2인자였지만 , 결국 권불10년 화무십일홍 , 십년세도를 마감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강릉으로 유배간 뒤 홧병으로 숨지고 마는 홍국영.
정조가 자신의 최측근마저 내침으로서 노론을 경계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조와 정후겸
홍국영과 대치하며 세손을 음해하는 세력의 선봉장, 정 후겸. 그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비록 인천 생선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6세에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큰 꿈을 품게 된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나 속은 차가운 성격의 만만하였다.
18살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19살에 정5품인 사헌부 지평, 20살에 당상관인 승지가 되는 등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한 인물이다. 화완옹주를 너무나 좋아하던 영조의 눈에 들었기 때문에 이같은 승진이 가능했으리라. 그러는 동안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영조임금의 가짜 유언을 만들어 세손의 후사를 조작하는 등 노론과 손을 잡은 그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 결국 정조는 즉위하고 그 해에 경원(慶源)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숨지고 만다.
◆ 강목(綱目) 사건
爾母婢也(이모비야)=네 에미는 계집종이었다. 爾 =너 이 婢=계집종 비
영조는 아버지가 숙종이지만 어머니 숙빈 최씨가 원래 무수리(궁녀의 시중을 드는 여종)였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대궐 내의 비웃음을 알게 모르게 받았다죠.
때문에 그분은 명문거족 출신의 신하들에게 열등감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강목>이라는 역사책에는 중국의 패악무도 한 왕을 신하가 몰아내면서
“이모비야(爾母碑也) = 너의 어머니는 계집종이다.= 너는 돌아가신 황제의 계집종이 낳은 아들이다."라고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는 이 대목을 광적으로 싫어하여 그 책을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읽지 못하게 했다.
영조가 싫어했던 또 하나의 대목은 수나라 양제가 문제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일이다.
영조가 이 둘을 싫어하는 이유는 영조 자신이 서자인데 그냥 서자가 아니라 아버지는 왕. 어머니는 무수리(후궁의 수발도 아닌 궁녀의 수발을 드는 계집종)로 어머니가 극히 천한 신분이라 뒷소리로 자기를 많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의 손자인 왕세손(훗날의 정조)이 무심코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영조의 질문에 그만 강목을 읽는다고 대답했는데.
영조는 불같이 진노해서 세손을 추궁하자 세손은 아차, 싶어서 할바마마가 싫어하시는 부분은 읽지 않았다고 찢어 버렸습니다. 라고 둘러댄다. 깐깐한 영조는 별감을 시켜서 그 책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지. 별감이 가져온 <강목>에는 실제로 그 대목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세손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실 이 세손의 시강원 설서(글공부 선생)였던 홍국영의 눈치 빠른 솜씨의 결과였다. 세손이 위기에 처할 것을 알자 미리 대처해 놓았던 것이다.
별감이 급하게 들어와 강목을 찾자 사태를 직감한 홍국영은 영조가 싫어하는 그 부분을 찢어버린 뒤에 책을 내준 것이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세손은 홍국영을 얼싸안으며 감격에 찬 일성을 내뱉었다 한다.
"그대가 곧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오! 앞으로 역적 모반을 하지 않는 한 사약을 내리지 않겠소."
이때 세손의 시강원 설서(글공부 선생)였던 홍국영은 .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영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참, 어린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께서 과민반응(?) 그런데 그 부분이 발견되지 않으니 영조는 크게 웃으면서 세손을 칭찬했다지요.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면서도 출생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니.
또 한 가지 일화는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그냥 연잉군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훗날의 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해서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했다네요.
그러자 연잉군 부인 서씨는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했답니다. 소박은 여기서 아내와 동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해서 화가 난 거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살았을 적에 맨발로 물지게를 많이 지고 다녀서 항상 손과 발이 아프다고 했으며, 발이 거칠어서 버선이 안 들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영조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이후로도 아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후궁들만 찾았고,
그래서인지 어쩐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성왕후는 66세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식을 한명도 낳지 못했다. 영조의 후궁들은 모두 대궐의 궁녀나 여종 출신인데, 특히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 사도세자와 화원옹주를 낳은 영빈 이씨 역시 대궐의 여종이었다고 한다. 콤플렉스란, 참 무서운 것?.
영조가 좋은 업적을 많이 쌓기는 했어도 사적으로는 이러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을 가차없이 처단했습니다. 원문보기 : 영조
●강목(綱目)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줄임말로, 송나라 때 주희가 쓴 역사서책. 대략적으로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 진, 전한, 후한, 3국, 진, 남북조, 수, 당의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책이다.
여기서 영조가 싫어하는 구절? 바로 한나라 문제(漢文帝)가 말한 "너는 고황제의 계집종이 낳은 아들이다." 라는 대목이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점에 크게 콤플렉스로 느끼고 있어서, 서족이니 서자니 하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세손은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영조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만 셈이 되었다. 순간 그 의미를 깨달은 세손은 얼른 둘러댄다.
《정조의 삶 》
(1)드라마틱한 삶
정조(1752~1800)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다. 8살에 세손에 책봉되고, 11살이 되던 해 2월에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으며, 그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봐야했다.
2년 뒤 정조는 영조의 맏아들(10세에 죽음)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돼 종통을 잇게 된다. 비록 혈통 상 아버지는 사도세자이지만
족보상 그는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왜 그의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고,
세손 시절 숱한 암살 기도에 시달리면서
큰아버지의 양자로 왕위를 잇게 됐을까?
세손에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르기까지 17년의 기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비록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았지만 세손 시절부터 수차례 암살 위협을 받았고, 실제로 궁내부로 괴한들이 난입해 목숨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증조할아버지인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숙종은
노론이 지지하던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소론이 밀던 희빈 장씨를 총애하며 정국을 주도했지만
희빈이 사사되고,
인현왕후가 복권하면서 노론들은 원자인 경종을 몰아내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종은 1721년 왕위에 오르고,
경종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李廷積)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뒷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燎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숙종의 두 번째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매
여기서 잠시<1699 숙종25년 연잉군으로 봉해졌으나 생모가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므로 노론의 김창집의 종질녀로 숙종의 후궁 寧嬪 김씨의 양자가 되면서 노론의 보호와 지지를 받게되는 계기가 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수리=궁녀의 하인으로,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왕세자(경종 : 장희빈의 아들)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그 반대세력 소론세력들은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필두로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빌미로 시기상조라 반대했지만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고 노론은 도에 지나치게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은 역공의 명분을 얻어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고(신축옥사).
1722년 소론은 기세를 몰아 영수 김 일경 등이 남인 목 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는 등
노론과 소론이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1722년에는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신임사화)되고, 170여 명이 유배 또는 유죄를 받았는데
여기에 왕세제 연잉군(뒷날 영조)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연잉군은 김 대비에게 세제의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1724년에 경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즉위 4년 만에 병으로 승하 하면서
연잉군은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듯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해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영조가 진상한 게장을 먹고 병석에 있던 경종이 승하하셨다. 노론과 영조가 경종을 독살시켰다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
이복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비난을 받고 이인좌의 난까지 일어나는 등 어수선했다.
아울러 영조의 어머니가 궁중에서 잡일을 보던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왕위 계승의 정통성마저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런 정치적 혼란상황을 잠재운 것이 바로 노론 세력이었고, 이후 영조는 탕평책을 펴며 소론이나 남인을 요직에 등용하며 노론을 견제하려 하지만 '누구 덕분에 왕이 됐는데?'라는 노론의 명분 내세우기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이렇듯 영조는 노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임금이 되고 탕평을 한다 했지만 자신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부정하는 소론이 이쁠 리가 없고 하므로 워낙 뿌리 깊은 노론에 밀착 상황일 수밖에.
사도세자는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곳에서 자라는데 장희빈이 살던 취선당과 근처로 그 곳의 궁녀들은 장희빈과 경종을 따르는 사람들로 영조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사도세자가 성장하면서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등극과정을 알게 되고 또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오만방자한 노론에 환멸을 느끼고 반김을 갖게 되면서
몸을 사리고 조심하는 소론을 좋아했던 같다.
영조는 겉으로 보면 탕평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신의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론을 밀어줬는데
사도세자는 음모만 꾸미고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한 노론을 싫어하고 소론을 더 좋아했다.
이를 눈치 챈 노론 세력들은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은 축출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노론세력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을 하고
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원옹주도 가세하고
영조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도세자를 끔찍히 미워하고 병적으로 구박과 미움에 시달리며
요즘말로, 외척, 노론, 화원옹주.... 아버지 영조로부터까지 지독한 왕따 당하던 사도세자가
급기야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 급기야는 뒤주에 갇히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할 아들이란 점을 잊은 듯하고...
바로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 11살 나이에 이런 일련의 사실을 목격한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노론에게 정조는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정치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인물로 온갖 위해를 가하는 노론과
영조와의 갈등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2)뛰어난 처세술
정조는 인내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비록 즉위 직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지만
뿌리 깊은 노론세력 모두 축출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군사적 대세는 노론이 쥐고 있었기 때문.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조는 20년 넘게 준비 작업을 펼친다. 자신을 지지하는 학자를 길러내고, 아울러 자신의 친위부대를 편성해 왕권을 강화한다. 장용영 [壯勇營](클릭) 을 만들고 규장각을 설치가 바로 그 것.
노론 손아귀에서 놀던 훈련도감 등 군을 재편해 장용영을 만든다.
또 영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노론과 담합하며 정치자금의 근원이 된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행통공을 발표하며 세제 개혁을 이룬다.
노론, 소론, 남인에 상관없이 우수한 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한다.
당시 노론은 규장각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상소를 검열하는 기관인 사간원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즉 왕과 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부서였기 때문이다. 노론은 이미 숙종 시절부터 언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사간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규장각의 설치는 정치적으로 노론을 견제하는 동시에 정조의 지지 기반이 되는 새로운 세력을 키워내고 막강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정조의 열렬 지지자인 남인 중 정약용, 채제공을 발탁해 수원성을 쌓게 한다. 당시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음으로서 노론에게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이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었다. 아울러 웅장한 능행을 통해 견고한 왕권을 보여주고, 능행에 동원되는 군사들을 합법적으로 훈련시킨다.
아울러 정조는 그림과 글씨에 빼어난 예술가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왕을 교육하는 '경연'에서 오히려 정조는 신하들을 가르치는 경지에 이르렀고, 천재 중의 천재로 꼽히던 정약용과도 대등하게 학문을 논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정조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수완이 뛰어난 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기를 만들어냈고, 학문이나 예술면에서도 조선 어느 시기에 비해 풍성한 결과물을 낳게 한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에서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내시들 중 어느 하나를 가까이 두지도 않고, 사냥도 즐기지 않고, 사치스런 물건을 좋아하지도 않고, 오로지 학문하는 신하만을 귀히 여기고 또 성품이 온유해서 비록 왕이지만 성을 내거나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어 어느 신하이건 임금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다.'라고 정조를 표현하고 있다.
정조의 어필
정조의 국화도
정조의 파초도
죽음이 안타까운 만큼 그 죽음을 둘러싼 의혹도 커지게 마련이다.
정조에게 우호적이던 남인이 많이 살던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회자되던 정조 독살설은
1993년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의 인기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후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가 펴낸 '조선 왕 독살사건'을 통해 구체적인 정황 증거들이 제시되고, TV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도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왕의 독살을 언급한 구절은 전혀 없다. 다만 야사에서는 왕의 독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특히 정조의 독살은 최근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사건이다.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한 뒤 불과 20여일 후에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혔고, 아울러 남인을 중용할 뜻을 표명한 일이었다. 정조는 종기가 악화돼 그 해 6월 24일 훗날 논란이 되는 민간요법 '연훈방'을 사용했으나 일시 증세가 호전됐을 뿐 혼미상태에 빠진다. 이 요법은 급성 수은중독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흘 뒤인 6월 28일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구급 처방의 일종인 '성향정기산'을 직접 올리겠다고 실내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정조는 운명했다. 당시 예법에도 어긋나는 처사이고, 정조와 평생을 정적 관계에 있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혹은 더욱 커진다. 정조는 왕대비인 정순왕후가 들기 전에 '수정전'(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는다. '수정전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독살설의 유력한 증거로 보는 이도 있고, 후사를 당부하기 위해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를 부르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찌 됐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가 펼쳤던 개혁정치는 원점으로 되돌린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왕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를 통해 독살이란 표현을 남긴다. 물론 독살 여부는 아직도 미지수다.
정조 시대에 미국은 독립선언, 프랑스 대혁명, 영국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변혁의 시대였었는데--------- 조선도 세계흐름에 맞추어 실학이 일어나고 개혁의 길로 잘 들어섰는데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완벽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지만 시파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막지 못했는데 1804 순조 15세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순조의 친정이라지만 연안 부원군 김조순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수렴청정을 거두고 1년만에 1805년 벽파는 완전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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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연교(五晦筵敎)= 晦 : 그믐회 / 筵 : 연회연 : 5월 그믐(정조 24년 5월 그믐)에 연회장에서 내린 교지 : 참다 참다 못해 오늘 하교한다. 아버지 사도제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고 개혁을 반대하는 노론을 척결의 의지를 밝히고 아울러 남인을 중용할 뜻을 표명한 일이었다. 신하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
●화완옹주는 왜 ?
■ 화평옹주
화평옹주는 영조의 제 3녀로 영빈 이씨 소생이며 1738년 금성위 박명원에게 시집을 갔는데, 영조는 이 딸을 총애하여 출가시킨 후에도 궐 안에서 살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그러나 화평옹주가 1748년 6월 24일 첫 딸을 낳다가 죽자 영조는 심한 충격과 비탄에 빠져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화평옹주는 심성이 곱고 너그러워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받는 사도세자를 항상 위로하는 등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화완옹주
화완옹주는 영조의 제 9녀로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영빈 이씨의 4녀1남중 막내로 사도세자와는 동복의 남매이다. 화완옹주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언니인 화평, 화협 ,화순 세 언니까지 세상을 떠나게 된다.
1749년 일성위 정치달에게 시집갔는데, 화평옹주와 달리 화완옹주는 애교가 많아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오만방자하고 질투심이 많은 심술궂은 성격이었습니다. 화평옹주를 잃고 마음을 붙일 데가 없다가 막내딸인 화완옹주에게로 사랑이 옮겨져서 특별히 영조의 총애를 받고
옹주는 딸이 하나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고 남편정치달도 요절하여 23세에 과부가 되어 남편의 먼 일가인 인천 생선장수의 서자 정 후겸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영조가 화완옹주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는 화완옹주가 시집간 지 8년 만에 지아비를 잃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몸소 옹주의 처소로 거동하여 위로했고
영조의 눈에는 가여운 옹주이니 사가로 나가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외로움을 탈까봐 더 애틋하고 애지중지하며 궁 안에 머무르게 했을 정도이니
노론권신들은 그녀에게 몰려들어 임금에게 청할 것을 그녀에게 주청하게끔 부탁했고,
그러면서 화완옹주는 차차 권력에 맛 들이는 가운데 .
뿐만 아니라 외척들과 가까이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는 아버지 영조는 노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임금이 되었고 탕평을 한다 했지만
속내는 노론에 밀착되어있는 형편이었으니
아버지 영조의 뜻에 받드는 일이라 생각했을 법도 하다
헌데 그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외척들을 탐탁찮게 여기고 소론을 중히 여기는 오빠인 사도세자와의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야말로 사도세잔 왕따되었다고나 할까?
사도세자를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곳에서 자라는데 장희빈이 살던 취선당과 근처로 그 곳의 궁녀들은 장희빈과 경종을 따르는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면서
석연치 않은 아버지 영조의 등극과정을 알게 되고
또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오만하고 건방진 노론신하들보다는
몸을 사리고 조심하는 소론을 가까이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 뜻과는 달리 엉뚱하게 소론을 좋아하고 영조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도세자를 끔찍히 미워하고 병적으로 구박하기 시작하매 아버지로부터 미움만 받고 구박에 시달리던 사도세자가 급기야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할 아들이란 점을 잊은 듯하고...
화완옹주와 외척들과 노론은 장차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자신들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을 우려 때문에 사도세자를 모함하고 영조로 하여금 죽이게 작전을 했고
급기야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옹주는 노론벽파와 함께 자기의 같은 배 오빠인 동시에
생질 조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하면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사도세자의 하나뿐인 아들 세손 이산도 화근이 될 것을 미리 싹을 잘라야한다는 신념으로 세손에게 위해를 가하면서 정조의 즉위를 극력 방해하면서 은전군을 옹립하려 하지만
숱한 모략과 위해를 견디고 왕에 오른 이산 정조는 일단 가장 위험세력이었던 노론의 핵심인물 몇 명을 숙청시킵니다.(여기에는 정후겸과 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오라비도 포함되어 정순왕후는 정조를 더욱 극도로 싫어하게 된다.
이에 화완옹주는 정조가 빨리 죽으라고 남몰래 저주를 일삼다 그것 역시 걸리는 바람에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사도세자 원문: http://cafe.daum.net/64woori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아주 총명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모두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했다. 대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두었다. 영조는 그의 나이 35세가 되었을 때 하나뿐인 아들 효장세자를 잃었다. 이미 세자빈까지 맞아들인 10세가 된 세자의 죽음은 그에게 말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7년 뒤인 42세에 다시 얻은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였으니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자신의 모든 소망을 아들에게 집중시켰다.
하지만 영조는 義에 대한 강박적 성격 때문에 아들에 대한 사랑을
주로 세자에 대한 왕의 의리라는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 아들에 대한 사사로운 정리보다는 세자에 대한
위의(威儀)와 체모(體貌)가 앞서게 되어 부자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영조는 세자가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자 세자를 생모의 품에서 떼어내어 저승궁(儲承宮)으로 보내어 위의(威儀)를 갖추게 하였다. 이로서 어린 세자는 저승궁에 격리된 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나인들의 품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영조가 이렇게 한 것은 세자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삼백년 종사를 이어갈 세자로서의 체모를 보다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저승궁이 나인들이 경종을 모셨던 나인들이었기에
영조는 자신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경종에 대한 미안함과
경종독살설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종식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어린 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왕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삼백년 종사가 의미있게 받아 들여 질 까닭이 없었다.
저승궁에서 경종을 모신 나인들은 원래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보다 윗전 나인들이었기 때문에
점차로 영빈을 업신여기고
영빈에게 “비록 세자를 낳았지만 사친 [私親]이기 때문에 군신의 의가 있다.
따라서 번번이 세자를 보게 해서는 안 되며 볼 때에는
반드시 빈이 正殿을 뵙는 예를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영빈이 세자를 보러 가는 횟수가 자연히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영조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나인들이 보기 싫어 세자에게로 가는 것을 꺼렸다.
이러한 가운데 세자는 나인들의 품에서 놀이 등에 빠져 들어 차츰 부모의 눈치를 살피고
부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조급하고 민첩한 성격의 영조에 비해 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편이었다.
이러한 세자의 모습이 영조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했고, 그렇게 누적된 불만은 부자 사이를 더욱 벌려놓았다. 무엇이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영조는
세자의 우물쭈물하고 민첩하지 못한 행동을 볼 적마다 즉석에서 화를 내고 꾸짖었고,
세자는 부왕의 이러한 점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반발하게 되었다.
세자의 성격이 급격이 異常으로 치닫게 된 것은 세자의 부왕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과 함께 부왕에 대한 불신이 싹트면서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훈, 자성편, 심감 등의 책을 저술하여 세자에게 주면서 훌륭한 군왕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 것을 훈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체모와 위의를 좋아하는 영조의 형식적인 사랑일 뿐
세자를 조용한 때에 친근히 앉혀놓고 진정을 가르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대부분 자기자랑 비슷한 애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책들을 세자에게 지어줌으로서
오히려 심적인 부담만 가증시켰다.
한편으로 세자는 활을 쏘고, 칼을 쓰며, 말을 타고 그림을 그리고 경문잡서(經文雜書)를 읽는 등 놀이와 잡기에 몰두하여 부왕이 요구하는 세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자는 부왕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부왕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실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세자의 나이가 열서너 살이 될 때부터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세자에 대한 부왕의 질책 또한 심해졌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세자에 대한 실망이 차츰 미움으로 변하여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부왕은 세자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었다.
영조는 미워하면 지극히 미워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세자에게 일반의 부모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자에 대한 미움을 표현했다.
부왕은 세자를 신하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친인척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꾸짖고 질책하는가 하면
좋지 못한 사건은 세자가 처리하도록 맡기며,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것을 세자의 잘못으로 돌리는 등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다.
이렇게 되자 세자는 차츰 자신에 대한 부왕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의 문씨가 임신을 했다. 세자는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영의정인 소론 이종성은 이러한 세자의 처지를 동정하며
적극적으로 세자 보호를 주장하고 나섰다. 세자의 입장에서 이종성은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당대의 석학 소론의 이종성, 전설적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 문수로부터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숙의 문씨가 다행히도 옹주를 낳게 되어 한 고비를 넘기는 듯했지만
노론 내부에서는 세자의 자질을 거론하고 나와 세자의 위치는 또다시 위태롭게 되었다.
이 무렵에 제자의 생활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세자가 부왕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자 세자의 부왕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차츰 공포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세자는 부왕에 대해서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병으로 발전하여 세자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왕도 세자의 공포증이 병이 되어 세자의 몸을 헤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자의 부왕에 대한 반발은 부왕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하나하나 구체화 되어 갔다. 세자는 주색에 탐닉했고 짐승은 물론 죄 없는 사람가지 죽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세자는 주색에 빠진 것이 발각되어 심한 꾸중을 들어 분하다고 우물에 뛰어드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세자의 비행은 잦아졌고, 민간에 끼친 피해마저 늘어 세자의 비행은 온 도성안의 화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새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이 적극적으로 가세하자 세자는 더욱 불안에 떨게 되었다. 세자에게 동정론을 펴던 소론의 이종성마저 죽고 없었다.
조정의 중론은 세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있었고, 홍봉한조차도 세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홍봉한이 보호되어야 할 대상은 이제 세자가 아니라 세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62년(영조 38) 5월 22일, 나 경언이 형조에 고변서를 올렸다. 고변의 내용은 국왕 주위의 내시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변서를 본 영조는 즉시 친국을 실시했다. 친국 도중 나 경언은 그의 옷 속에서 한 통의 글을 꺼내 왕에게 올렸다. 글에는 세자의 비행이 십여 조목에 걸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왕손(은전군)의 어머니를 죽인 일,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유람을 하는 등 세자의 비행 전모를 알게 된 영조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대신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영조에게는 대부분이 금시초문인 사실들이었다. 영조는 대신들의 청에 따라 나경언을 죽이고, 제자의 비행에 가담한 사람들을 죽였는데
어찌 보면 세자의 죽음은 세자주위에 소론 대신들이 있음을 좌시하지 않은 영조와 노론일파의 정치공작일 가능성도 높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 25) 15세가 되던 해 영조의 명을 받고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함께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하여 무고하는 등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 내리고자 하였다.
어찌되었던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영조는 칼을 휘두르며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세자는 오히려 “부왕께서 죽으라면 죽겠다”고 했다. 영조는 대성통곡하는 신하들을 쫓아내고 다시 세자에게 칼을 던져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시늉을 했고, .. 그러기를 여러 차례,
세자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세손과 이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조는 아비를 살려달라는 세손의 애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뒤주의 뚜껑에 자물쇠를 채우고 못을 박았다. 사도세자는 8일 만에 끝내 굶어죽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자신이 직접 세자의 시호를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례 절차 또한 손수 신하들에게 지시했고 세자의 묘지문도 직접 지었고 세제의 장례날에는 직접 묘에 나가 곡을 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그 날의 처분을 “의(義)로써 은(恩)을 제어한 것이며, 나라를 위해 의로써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일체 이 사건을 재론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1777년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자주 능행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광무(光武) 3년(1899)에는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은전군 : 사도세자의 후궁 박씨 소생.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머니 박씨를 의대로 쳐서 때려 죽였다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원망과 반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정조를 없애고 은전군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실제로 나중에는 역모에 연루 되어 죽는다.
●은언군 그리고
정조의 權道論(국왕의 권위를 세우는), 尊王論(국왕을 존경하는)
국왕의 권위를 세우는 권도론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정조가 즐겨쓰는 논리의 하나가 되었는데, 정조의 권력강화와 더불어 권도론은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정조 집권 중반기에 발생한 역모사건에서 연루된
이복동생 은언군을 끝까지 보호한다.
1786년(정조10년)에 왕대비 정순왕후는 상계군 역모사건을 공표했다.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이 갑작스럽게 죽자 정순왕후는 이 죽음이 독살로 판단되는 의문의 죽음이며, 역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진짜 역적을 찾아낼 것을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홍국영이 상계군을 차기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었는데 그 잔존세력이 과거의 사실이 누설될까 우려해서 상계군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특히 정순왕후는 이에 깊숙이 개입한 은언군의 죄상을 철저히 조사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단식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정순왕후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을 제거하고자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단식을 하면서까지 역적의 우두머리인 은언군의 처형을 주장했고 대신들을 독려했다.
은언군 처형을 주장하는 정순왕후의 단식과 신하들의 강력한 요구에 대항해서 정조 역시 단식하면서 상소문을 불태우면서 "나라가 망하더라도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맞섰다.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희생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이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마저 죽일 수 없다는 완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정조는 은언군의 처형을 요구하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대신 이하의 관원을 모두 파직하고 대궐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하면서 신하들에게 욕설을 퍼붓기까지 하면서
은언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결국 당시 영의정 김치인을 비롯한 대신들이 은언군을 제주도로 유배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정조는 이 주장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거부하다가 강화도로 귀양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때는 이미 강화도에 은언군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 가족들까지 이주시킨 후였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혈육을 가까운 곳에 두고 보호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은언군의 강화도 유배 후 정조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만났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형제의 정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들에게 적용되는 역적의 죄를 종친에게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언군 유배 후 8년 뒤에 정조는 비밀리에 은언군을 서울로 불러들였는데, 이에 대해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신하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읍소했고, 강극성(姜克成) 같은 이는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 밖에서 "역적 이인(은언군)의 머리를 베어 종묘사직을 편안히 하지 않는다면 도끼에 엎어져서 죽겠다"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서 정조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와 경기 감영에서 은언군을 만났으며, 이 사실을 듣고 정순왕후가 가마를 타고 궁궐 밖으로 떠났고, 이에 정조가 은언군을 도성 내 그의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음 날 정조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은언군 문제에 관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즉 매년 한 번씩 데려다 만나되 만나고는 즉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면 '공적인 의리'와 '사적인 은정'이 둘 다 행해질 수 있다" 는 것이 정조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몇몇 신하들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정조는 끝내 국왕의 권위와 권도론을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정조는 이로써 힘을 갖춘 국왕임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자신감을 얻은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왕 중심의 비타협적 논리로서 존왕론(尊王論) 을 내세웠다. 존왕론은 1798년(정조22년)에 처음 등장한다. 그 동안 권도론으로 보호하던 은언군 문제를 존왕론으로 강력히 대처했다.
1798년 충청도 지역에서 은언군을 두둔하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강화의 죄인(은언군)이 오래도록 섬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실로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또는
"강화의 죄인을 서울로 들여보내면 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등이다.
신하들은 이를 역모로 간주하고 철저한 배후 조사와 함께 은언군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역적을 토벌하는 것도 국왕을 높이고(존왕) 백성을 보호하는 의리인데, 국왕이 높지 않으면 ... 역적 토벌을 어디에 쓰겠는가" 라고 반문했다.
정치적 힘을 토대로 자신감을 지니게 된 정조는, 이 시기에 이르러 과거와 같이 은언군 보호를 국왕의 사적 친분에 따른 예외 사항으로써 신하들에게 양보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국왕의 권한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신하는 국왕에 대해 마치 "여자가 정절을 지키듯이" 무조건적으로 절대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은언군 문제에 대해서 신하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금령(禁令, 논쟁의 중단)을 내렸다.
이와 같은 정조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신하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심환지(沈煥之)는 정조의 주장을 오직 요ㆍ순과 같은 전설적인 성왕(聖王)에게만 해당하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조는 성왕이 아니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심환지는 요ㆍ순과 같은 성왕일지라도 금령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주장을 폈다.
그는 정조의 존왕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신하들이 "의심을 품고 억지로 따르게" 해서는 국정이 올바로 수행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논쟁을 해야만 한다는 공론정치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정조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은언군 문제와 관련해서 대신들이 제출한 차자(箚子, 의견서)를 불태운 다음 그 재를 봉투에 담아서 되돌려 보냈고, 대신들의 면담요청을 일체 거절했다.
심지어 정조는 우의정 이병모가 어전에서 금령을 비판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내쫓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만두어라! 금령 두 글자도 듣고 싶지 않다. 다시 이것을 거론하면 대신이라도 용서받기 어려울 것이다."
● 화완옹주 그리고 明義錄
1799년(정조23년, 정조 서거 1년전)에 발생했다. 화완옹주(영조의 딸) 석방사건이 그것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아홉 번째 딸이자 자신의 고모인 화완옹주를 석방했다. 화완옹주는 영조 말기에 정후겸 등과 함께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즉위저지 공작에 개입한 바 있는 정조의 정적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을 처형했지만
화완옹주에 대해서는
"선왕의 뜻을 추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처형하지 않았고, 제주도에 유배했다.
그 후 정조는 화완옹주의 유배지를 경기도 파주로 옮겼고 다시 서울로 옮겼다가, 급기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을 단행한 것이다.
정조가 화완옹주의 죄를 사면하고 그녀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노론 세력은 이를 정조의 정치적 책략으로 파악해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당시 좌의정 이병모는, 화완옹주의 석방을 계기로 『명의록(明義錄)』의 의리를 훼손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몹쓸 계책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력히 천명했다.
마찬가지로 우의정 심환지는, 정조의 화완옹주 석방이 국왕과 신하의 근본적인 의리를 훼손한다고 주장하면서 "죽으면 죽었지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면서 궁궐의 섬돌 아래 엎드려 관을 벗었다.
신하들의 강경한 반대론에 대항해서 정조는 심야에 사도세자의 경모궁을 참배한 자리에서
『명의록』의 의리문제를 재해석함으로써 노론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명의록에서 밝히고 있는 의리는 자신의 국왕즉위를 방해한 사건을 중심으로 의리문제를 다루었지만 사실상은 사도세자의 문제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그 동안 자신이 "창을 베개로 삼고 도끼를 가는 분노를 드날리며 ... 복수하는 큰 의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노론 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아가 정조는 화완옹주를 사면하는 일이야말로 "사도세자의 정신을 잘 계승하는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노론 세력에 대한 정면대응을 천명했다.
나아가 정조는 신하들이 주장하는 의리론에 반대해서 존왕론을 주장했다. 정조에 따르면, 신하들이 주장하는 역적의 토벌은 그 본래의 의미인 존왕을 무시하고 있다. 국왕의 가족을 보호하는 것 또한 존왕이기 때문에 역적 토벌의 의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정조는 의리의 본래 의미를 망각한 신하들이 계속해서 화완옹주 사면건을 시비삼겠다면 자신은 계속해서 몇 달 몇 년이라도 경모궁에 머물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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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록(明義錄)》 조선왕조의 계보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조선 21대 영조의 등극을 둘러싼 당쟁
균(뒷날 경종)은 1688년에 태어났고,
금(뒷날 영조)은 1694년에 태어났으니 그들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다.
왕자 균은 14세가 되던 1701년 생모인 희빈 장씨가 부왕 숙종에 의해 어머니가 사사되는 것을 보았는데 생모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균의 하초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 능력마저 상실했다. 그 때부터 병을 얻어 세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세자 균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자
1717년 노환으로 병약해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 금을 세자 균의 후사로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야 하겠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연잉군이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청정을 하라고 명했다.
연잉군의 세자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에 의해 일대 당쟁에 휘말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720년 세자 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그가 경종이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금의 세제 책봉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조정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소론측의 대대적인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하여 시기 상조론을 펴며 왕세제 책봉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측의 대세에 밀려 소론측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 때가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이었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노론은 실권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이번에는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론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자 경종은 일단 비망기 [備忘記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내려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은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간언했다. 이어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각 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청정 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청정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하교를 내렸다.
사실 경종은 이 때 노론측 백관들이 한 번 더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할 것을 기대했다.
관례상 세 번에 걸쳐 이 같은 청이 왔을 때 왕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왕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론측은 대리청정이 왕의 확고한 의지라고 판단하고 곧장 왕명을 쫓는다는 명분을 내걸며 숙종 말년의 세자 대리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노론의 태도가 이같이 급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세자 대리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조처였지만 경종은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이 같은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측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노론 대신들은 종전에 대리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또 다시 청정 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노론측은 이 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처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청을 하고, 다시 청정 명령의 하교가 내려지자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명분이 좁아지자 또 다시 청정 요구를 거둬들이고 청정 명령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노론의 이 같은 행동은 결국 소론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 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 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 연잉군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 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 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첫댓글 역사 공부 마이 되셨나여? 이산 보기가 훨~~` 수월할꺼에여..
애고..정말 힘드네..하하..
조선의 영정시대가 이러했거늘..하물며 다른 시대는 어떠하리..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네요..
시간 날 때 꼭 읽어봐야지.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읽어 내려가다 ..머리아포~~~~ 드라마보다 더 얽히고.. 옛여인들의 파워두 대단했군요..
현재 정치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게 없습니다.ㅠㅠㅠ
사극을 볼때며 무척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는데 나만 그런것이 아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