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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원문보기 글쓴이: 창비
"여보세요? ... 응. ... 그래. 응. ... 알았어. .... 아니, 메모 좀 하자. ... 얘기해. 괜찮아. ...
그래."
남자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잠시 서 있는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지나온 자리를 하얗게 지워버린다. 현기증. 남자는 손을 창문턱에 올려놓는다.
'그래. 거기 있단 말이지. 해외, 네가 그리도 가고 싶어 했던 지중해도 아니고 속초에
있단 말이지. 지금까지 거기에서 숨어 살았단 말이지.'
햇살이 남자의 눈에서 잘게 부서지다가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이건 반가워서 나오는 게 아냐. 분해서 그런 거라구.'
남자가 다시 전화기를 잡는다.
"응. 나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 아니.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안 돼. 아버지
제사야. 내일 일찍. ... 그래. 나중에 술 한잔하자."
한계령? 남자는 한계령을 떠올리지만 그쪽 길이 썩 내키지 않는다. 주말이다. 한계령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을 것이다.
남자가 지도책을 꺼내 든다. 아직 서울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지도 먼저 꺼내는 것이
스스로 못마땅했는지 남자의 손이 조금은 거칠게 움직인다. 백두대간을 따라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이 차례대로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미시령! 그래. 미시령이 있었어.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담. 넘어가면 곧바로 속초로
이어지지. 오른쪽으로 장군바위를 끼고돌며 말이야.'
남자의 손이 이번에는 날렵하게 책을 덮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양평까지 웬만큼 접히지 않던 차선이 홍천쯤부터 순식간에 뒤로 말려 지나간다.
남자는 그제야 긴 숨을 들이쉰다. 그렇지만 봄바람이 살랑살랑 눈섭에 내려앉자 남자는
휴게소 이정표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하긴 세 시간여 동안 차 안에 갇혀있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야.'
남자는 휴게소에서 산 커피를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 넣으며 다짐을 챙긴다.
'이별은 상대방에 대한 실망보다 쓸데없는 자존심부터 시작하지. 사람이란 타인에게
상처 줄 준비가 얼마나 철저히 되어있는지…….'
봄바람이 다시 남자의 주변에 인다. 바람은 땅에 누운 것들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다시는,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겠어.'
떨어져 살기에 너무 많은 세월을 하릴없이 보내버렸다. 어쩌면 지나간 세월이
그녀와의 재회에 마른침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곳이 속초라는 것,
느낌이 좋다. 속초, 여행의 시작을 언제나 속초로 뒀었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
설악의 봉우리 길길이 뛰오르면 거기, 바다는 더 넓은 가슴으로 남자의 시선을 맞춰주곤
했었지. 그런 속초에 대한 애정을 얼마나 누누이 여자에게 얘기했던가.
'내 여행의 마지막은 다시 속초로 가는 거야. 거기서, 아니, 속초에서 조금 벗어나서,
등대가 보이는 포구를 두고 자그마한 공간 하나 만들고 싶은 게 내 꿈이지. 너무 감상적
이라고? 아냐. 보편적인 삶의 색깔에서 잠시 일탈하는 거지. 그 일탈이 연속성을 갖는
다면 그것 역시 삶 아닌가? 어느 날 내가 만약 너에게서 도망간다면, 후후, 거기서 숨어
살고 있다고 보면 될 거야.'
여행자는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사이드미러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하긴 저 큰
배낭을 메고 뛰기는 힘들겠지 하며 남자는 나름대로 이유를 준다.
용대리. 황태 덕장으로 유명한 곳. 또한,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각지. 고개만
넘으면 속초가 눈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이 남자의 마음을 푸짐하게 부풀렸을 것이다.
용대리에서 한 여행자가 차로 옆에 서서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남자는 삼십여
미터를 지나쳐 차를 세웠다.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전 미시령 넘을 건데요?"
앞에 삼각지가 보이자 남자는 아차 싶어 뒤에 탄 여행자에게 물어본다. 진부령 방면
으로 가는 사람을 태웠다면 이만저만 난감한 일이 아니다.
"예. 저도 속초 갑니다. 그런데 엊그제 눈이 많이 내려서 지금 미시령 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요? 차라리 진부령으로 가시지요?"
"그래요? 그런데 전 진부령이 초행이라서요."
"이렇게 눈이 온 다음엔 진부령을 넘는 게 좋습니다. 진부령은 고개가 낮거든요."
"아, 예에."
남자는 거울에 비친 여행자를 힐끗 쳐다본다. 삼십 대 후반? 겨울산행을 하는 사람답게
몸 역시 군살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행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이 근처 지리에 익숙하신 걸 보니요."
여행자는 남자의 저의를 읽으려는 듯 잠시 호흡을 두고 대답한다.
"하하! 아뇨. 저도 진부령은 초행입니다. 아까 용대리에서 식당 아저씨가 한 말을
주워듣고 알은체한 겁니다. 하하!"
남자도 여행자의 마른 웃음에 맞받아 웃어준다. 뭐랄까, 여행자 특유의 넉살이랄까,
넉넉함이 배어난다.
산에는 눈이 있었다. 진부령으로 접어들자마자 온 천지가 눈이었다.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 산비탈부터 왼쪽, 벼랑 저 아래 황태 덕장이 있는 마을까지 하얗게,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다. 두름으로 눈바람을 맞으며 말라가는 황태들이 일제히 '고오~' 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기압이 낮아져 발생하는 이명이련만 구름이 츠츠츠츠,
남자의 뒤를 따라오며 눈꽃마저 지워나가자 남자는 자신이 현실이 아닌 곳에서 운전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어 발작하듯 기침해댔다.
"괜찮으세요?"
"아, 예. 쿨럭! 사래들린 모양입니다. 쿨럭!"
"예에."
남자는 자신의 머쓱함을 얼른 덮으려는 듯 여행자에게 말을 건넨다.
"여행은 다 하신 겁니까?"
"아뇨. 원래는 백담사로 해서 속초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눈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속초엔 온 김에 바다나 볼까 하고 갑니다."
"예에."
"하하. 선생님은요? 속초에 사시는 분은 아닌 듯싶은데요?"
"사람 만나러 갑니다. 그 부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예에. 아는 사람이 바닷가에 산다는 건 흐뭇한 일이지요."
"후후. 그럴까요?"
"예. 전 속초가 좋습니다. 산과 바다가 이웃해 있잖아요. 그래서 언제나 여행의 시작을
속초로 합니다."
"예에......"
남자는 여행자와의 대화를 거기서 멈추기로 한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다.
뭐랄까, 사람을 더 알아간다는 것, 결국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되돌아올
것 같다.
간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위가 컴컴했다.
남자는 진부령으로 넘어온 김에 간성부터 해안을 훑으며 속초로 내려갈 생각을 한다.
여행자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는 흔쾌히 그곳에서 내려 속초까지 버스를 이용하겠노라고
한다.
여행자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 남자는 문득 그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부러
그를 돌려세우지 않는다.
'형! 누나 말이야. 속초에 있대. 아니 속초 인근에. 우리 와이프, 이 미련한 여자가 육
개월 전에 온 전화를 제 딴엔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함구한 거야.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말이지. 와이프에게도 정확한 위치를 얘기해 주지 않은 모양이야. 그냥
거기 있다고, 거기서 자그마한 공간 하나 마련해서 있다고. 술 한잔한 목소리더래.
오른쪽에 등대가 있다는 걸 보면 포구 아닐까? 그럼 찾기도 쉽잖아? 아, 잠깐만? 형!
백사장도 있고 삼 층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참 좋다고 했대. 삼 층, 이거 대단한 힌트
아냐?'
남자는 어제 전화를 해 준 후배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래. 찾기 쉽겠지. 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속초 인근이라면 속초항은 아닐 것이다.
근처 자그마한 포구. 여기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며 포구마다 다 들르는 거야.
포구 중에서도 오른쪽에 등대가 있는 포구, 그리고 삼 층. 가만, 삼 층이라면 커피숍
이나 식당은 아닐 테고. 카페? 포구에서 카페가 되나? 그 생각에 이르러선 남자는
고소를 짓는다. 다 무슨 소용이람. 가서 찾아보면 알 일이다.
남자가 다시 시동을 건다. 차창 밖으로 그녀가 불쑥 지나갈 것도 같다. 액셀러레이터
위에 올려놓은 남자의 발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나 사랑해요? 내가 세상 끝까지 도망가더라도 나 찾아올 수 있어요?'
여자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사 년 전에 홀연히 남자 곁을 떠나버렸다. 죽도록 사랑
했었다. 서로 죽일 듯 상처 주고 갈구하고 다시 상처 주고 헤어지고......
남자가 차에서 나와 담배를 꺼내 문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다리가 후들거려온다. 도로와 인도를 가르는 경계석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간성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포구와 해수욕장마다 들렀지만, 오른쪽에
등대가 있고 3층 건물에 자리를 튼 곳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포구가 왼쪽에 등대를
두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2층, 또는 단층에 가게를 낸 곳들도 들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속초를 지척에 뒀을 때 남자는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속초 인근이라는 것이 혹시 북쪽이 아니라 양양 쪽으로, 남쪽이 아닐까? 그러다 봉포를
발견했다. 봉포로 진입하면서 남자는 느낌이 좋았다. 천진, 봉포 등, 해수욕장을 두
개나 끼고 있는 데다가 오른쪽에 등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3층 건물의 3층에 카페가 하나 있었다. 카페 이름은 시실리(時失里)였다.
'하필 왜 시실리야? 이름이 그렇게 없었나? 도시에서 흔히 보는 상호잖아?'
남자는 자신의 여유에 은근한 핀잔도 일지만 자신의 유치에 너그러워지기로 한다.
어쨌든 찾아왔지 않은가. 그렇게 남자는 저 카페, '시실리'가 그녀의 공간이라는
확신을 한다.
남자가 경계석에서 일어나 걸음을 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은 후들거리는
남자의 걸음걸이를 흉내 낸다. 그래도 역시 느낌이 좋다.
커피를 주문한 다음 남자는 시트에 깊이 몸을 묻는다. 긴장이 풀린 몸은 아래로,
시트 속을 비집고 한없이 내려간다. 발끝이 시리다. 한숨을 길게 내쉬자 체열이
같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알코올로 몸을 데워주고 싶지만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속초 인근... 양양까지는 아닐 테고... 내 기억으로 속초와 양양 사이에 항구가
없는데? 대포? 해 돋는 마을이란 대포?'
남자는 일순 긴장이 올랐지만 다시 툭, 하고 풀어놓는다.
'대포는 아닐 거야. 대포는 백사장이 없잖아?'
딸각, 하고 찻잔 내려놓는 소리에 남자의 생각이 깨진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에 남자의 몸이 움찔, 하며 반응한다. 돌아서는 여자의 엉덩이와 남자의 눈높이가
같다. 남자는 머쓱해 하며 몸을 좀 더 곧추세운다.
뭐랄까, 좀 특이한 카페다. 열서너 평쯤 되어 보이는 공간에 테이블이 다섯 개.
장식도 별로 없다. 그런데 테이블 칸막이가 책장으로 되어있다. 그러고 보니 사방이
책이다. 입구 쪽 선반에도 책이 반은 차지하고 있다.
남자의 시선이 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에게 가 멈춘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
여자의 긴 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느낌에 서른을 넘긴 것 같지는 않다.
바닷가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북, 카페', 그런데 창가 테이블 쪽에서 엠티 얘기가
나온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 모양이다. 남자는 그제야 이해를 준다.
"얼마죠?"
책을 읽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벌써 다 드셨어요?"
여자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실었던 남자가 커피를 내간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자리를 터니 조금 놀랐던 모양이다.
"예에. 길이 멀어서요."
여자가 예의 상 고개를 끄덕거리며 삼천 원이라고 얘기한다.
여자가 거스름돈을 챙기는 동안 남자는 여자 뒤에 있는 서가에 시선을 둔다. 이상,
현대, 동인 등 문학상 수상집들이 앞다투어 키재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낯익은 책
한 권이 남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안톤 체홉 평전. 남자의 가슴에 쿵! 하고 돌멩이가
내려앉는다.
"저어, 미안합니다만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잠깐 책 좀 구경하고 싶어서요."
거스름돈을 받으며 남자가 계면쩍게 말하자 여자는 처음엔 의아해 하는 표정이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그러세요." 하는 것으로 어색한 상황을 뭉뚱그려준다.
책을 건네받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한다.
"커피, 더 드릴게요."
'눈은 자신의 몸이 다 녹을 때까지 감싸고 있는 것들을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그녀에게 준 책이라면 첫 장에 그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사람의 내향에
대해 즉흥적으로 떠올린 느낌이 여자에게 건네받은 펜으로 그렇게 휘갈겨 쓰여
있을 것이다.
남자가 책을 열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그때, 바닷가 테이블 쪽에 앉았던
학생들이 계산하기 위해 우르르 일어선다. 그 소리에 채근을 당한 듯 남자가
서둘러, 그러나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긴다. 그리곤 ……, 이내 고개를 꺾는다.
남자의 흔적이... 거기에... 웅크리고 있었다.
여자가 커피를 비커째 들고 온다.
"저어, 잠시 여쭤봐도 될까요?"
남자가 바(bar)로 걸어가 여자에게 정색한다.
여자는 일순 당황한다. 이제 카페 안에는 남자 외에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남자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행객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혼자 있을 때 다가오는
남자는 적당한 경계가 필요한 법이다. 여자는 밝은 낯으로 애써 불안을 밀어낸다.
"예. 뭔데요?"
"혹시, 주인이세요?"
남자가 우회해서 다가간다.
여자는 자신의 불안한 예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웃는 낯을 펴서는 안 된다.
"예. 왜 그러시죠?"
남자의 시선이 책으로 간다. 여자도 따라간다. 남자가 고개를 들자 다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이거... 이거, 제 여자 책인데요."
남자는 변명하듯 첫 장을 넘겨 부연한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물을 찾다가 낯선 벽지를 보고 당황한다.
'아, 민박집......'
새벽에 여자가 속초 시내로 나가 숙소를 잡는 것보다 근처 민박집을 권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옷가지가 방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체홉의
평전도 반쯤 옷에 묻힌 채 놓여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창문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이 눈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은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 모공으로 파고들며 금을 낸다. 어지럽다.
남자는 창문을 닫고 등을 벽에 기댄 채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어제 여자가 한
얘기가 귀에서 윙윙거린다. 숨을 길게 몰아쉰다. 조금씩 울음이 숨에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맞아요. 여기, 언니가 했었어요. 전 손님으로 자주 오곤 했던 사이고요. 서울
에서 살다가, 음, 살다가 집에 내려왔거든요. 언니는 여길 참 좋아했어요.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었지요. 장사도 곧잘 됐어요. 이 근처에 대학교가 있거
든요? 봄, 가을은 걔들이 와주고 여름엔 피서객들도 만만찮았고요. 겨울이
문젠데 그때도 띄엄띄엄 들르는 관광객들로 대충 셈은 되었던 모양이에요."
여자 역시 남자의 궁금증을 해갈하는데 우회했었다. 그러다 남자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살피곤 그녀에게 접근해갔다.
"언니... 석 달 전에... 죽었어요. 저기, 방파제 보이지요? 등대도요? 등대 아래
삼발이, 방파제를 파도로부터 지탱해주는 콘크리트 더미 말이에요. 거기서 발견
되었어요.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얼마나 눈바람이 거셌던지 매일 같이
들르던 저도 그날은 집에서 나오지 않았거든요. 아마 언니도 눈이 많이 내리니까
손님도 없겠다,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여느 때처럼 산책 나갔다가... 아니, 왜
그런 날 거기까지 갔을까요?"
남자에게 따져 묻듯 쳐다보는 여자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다음날, 그것도 오후 늦게 횟집에서 나온 관광객들이 방파제에 올라가 보곤 발견
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몇 날 며칠 못 찾았을 거예요. 경찰에선 실족사로 처리
했고요. 언니네 오빠가 와서 수습했어요. 그때 가게도 제가 헐값으로 인수하게 된
거고요. 권리금 없이 고스란히......"
여자의 얘기를 들으며 거푸 술을 들이켰었다. 남자는 맨정신으로 그녀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한순간 자신의 호흡이 엇박자로 틀어지면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남자가 머리를 벽에 붙인 채 고개를 든다. 뇌까리는 소리가 목에 걸려 까끌까끌
하다.
"술을... 너무 먹었어."
눈물이 더 이상 볼을 타지 못하고 눈가에 갇힌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갑자기
고개가 꺾이며 갇혔던 눈물이 후두둑, 소나기처럼 방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해준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니에게 놀리듯 물었던 적이 있어요. 언니는 남자도 없느냐고요. 일
년을 넘게 언니를 봐왔는데 남자 긴 안 하길래 말이에요. 그러자 언니가 그 책,
책을 펴더니 글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 책을 준 남자가 내 남자라고요. 그리고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닫았지요. 언니의 표정이 화석처럼 굳어버려서
저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고요."
내 남자... 남자와 그녀는 타인에게 서로를 소개할 때 언제나 '내 남자', '내 여자'
였다.
강원도. 눈이 내리는 나라.
남자는 차 시동을 걸기 전에 창문으로 부딪쳐오는 눈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산 저쪽은 봄바람에 땅이 일어나는데 여긴 여전히 겨울이다. 그렇다. 이국
(異國), 그녀는 이국에서 죽었다. 담배를 끄며 남자는 서둘러 시동을 건다.
남자는 습관처럼 미시령 쪽으로 길을 튼다. 그러나 미시령은 이미 차량 제가
시작되어서 스노체인이 없는 차량은 진부령으로 우회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
남자는 스스로 헛헛한 조소를 보낸다.
돌아 나오다가 남자는 속초 입구 삼거리에서 어제 만난 여행자가 건널목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창유리가 반 코팅 상태인 데다 흩뿌리는 눈 때문이었는지 여행
자는 시선을 남자 쪽으로 잠시 뒀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신호를 받자 남자
는 여행자를 그대로 지나친다.
간성을 지나 진부령으로 들어가는 길은 의외로 한적하다. 갈 길 바쁜 몇 대의
차량만이 남자의 차를 추월했을 뿐, 뒤에 꼬리를 물지 않는다. 하긴, 이렇듯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선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진부령으로 들어서니 눈이 아예 장막을 친다. 남자는 와이퍼를 최고조로 올린
다. 눈은 그 일순에도 차창을 하얗게 덮는다. 꼭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서 와이퍼에
닦일 때마다 뿌드득, 하는 마찰음이 눈들의 비명처럼 들린다. 남자는 어제 들었던
황태들의 비명을 떠올린다. 몸서리를 친다. 결국, 양보 차선에 이르러 차를 세우고
만다.
'가만있어 봐요. 내가 뒤에서 안아줄게요. 그럼 당신은 내 세상의 시작인 셈이
되잖아요. 나는 당신 세상의 끝이고. 이러길 바래요. 난... 우리가......'
남자가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선다. 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몸에 다닥
다닥 달라붙는다.
'나 사랑해요? 내가 세상 끝까지 도망가더라도 날 찾아올 수 있어요?'
남자가 도로를 가로질러 낭떠러지 앞에 선다. 계곡을 휘올라오던 눈이 너머
산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그래. 넌 내 세상의 끝에 있었어. 언제나 내 등 뒤에 있었지......"
남자가 결국 허리를 꺾는다. 오열이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른다. 그런 남자
의 몸 위로 눈은 서둘러 겹겹이 옷을 입힌다. 사르락, 사르락, 마치 자신의 몸이
다 녹을 때까지 감싸고 있는 것들을 결코 내보이지 않을 것처럼. 사르락, 사
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