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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의 성경 묵상
(캐나다 소금과 빛 가톨릭 미디어재단과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CEO,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 고문)
8기 윤영학(아오스딩) ofs 역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제1독서: 말라키 예언서 3,19-20ㄴ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제2독서: 테살로니카 2서 3,7-12
형제 여러분,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1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12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복음: 루카복음 21,5-19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의 연중제33주일 성경묵상 (2013.11.17.)
하느님의 더 큰 상황에서 역사 보기
교회전례력의 마지막이 되면서, 주일 독서는 강하고, 정직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어서 우리를 겁나게 하는 묵시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묵시적 글은 1,000 년 동안 교회에서 일반화되었었다. 일반적으로 큰 역사적 위기가 묵시적인 생각을 유발하였다. 이 모두는 꼭 “묵시적”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문학으로 분류된다. 성 바오로는 자신은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복음을 받았고(갈라티아 1,12), “계시”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교 지도자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갔다(갈라티아 2,2)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종의 문학으로서 묵시는 계시 또는 일련의 계시를 다룬다. 계시는 보통 천사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세상을 드러낸다.
초점은 종말론,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세상의 끝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시작에 맞춰진다. 보통 변화는 규모나 본성이 우주적인 변모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실패한 사람이나 기관의 심판과 성인에 대한 옹호가 수반된다. 어떤 묵시록은 다른 세상으로 오르는 것을 포함하지만 요한의 묵시록과 루카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묵시록적 설교는(마르코 13; 마태오 24,1-38) 역사적 사건을 역사 너머에 일어나는 일의 묘사와 연결한다. 다시 말해서 일어나는 일과 정말 일어나는 일 즉 하느님 뜻의 더 큰 상황에 놓여있는 역사가 섞여있다. 모든 것이 상징, 표시, 신비로운 비유적 표현으로 장식된 역사적인 묘사를 다룬 비범한 글이다. 이런 문학이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만큼, 그것은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 있는 끈질긴 믿음과 희망에 대한 극적인 증거이다.
상황
예루살렘의 파괴는 오늘복음 구절의 예수님의 묵시록적 말씀을(루카 21,5-19)초래했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를 들어서 마르코는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모독을 세상의 끝과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동반하는 묵시록적 상징으로(다니엘 9,27; 12,11) 묘사하였다(마르코 13,14). 그러나 루카는(루카 21,20-24) 묵시록적 장면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의 역사적 파괴와 사람의 아들의 오심의 표시를 분리시키고 그 사이에 소위 “이방인의 시대”라는(루카 21,24) 기간을 두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루카 21,5-36) 예수님의 종말론적 설교는 마르코 복음 13장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루카는 마르코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주었다. 루카는 세상의 끝에 대한 초기의 기대를 견지하지만, 마르코 복음 13장의 종말의 표시에 대한 뜻을 재해석함으로써 복음전체를 통해서 매일 매일의 예수님 따르기의 중요성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렇게 루카는 초기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재림의 지연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인다. 재림은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종말의 표시
제자들의 박해와(루카 21,12-19) 예루살렘의 파괴를(20-24) 다루면서, 루카는 이미 완성된 종말론적 표시를 가리킨다. 루카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리고 올리브산 위의 성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설교의 청중은 “모든 백성”이며, 사적인 제자들이 아니며(마태오 24,3) 처음의 4제자가(마르코 13,3)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21,5-19) 종말의 표시는 셋이다. 거짓 메시아와 시간과 장소를 얘기하는 거짓 예언자의 등장(8절), 전쟁, 폭동, 국제분쟁(9-10), 그리고 우주적 공포를 동반한 자연재해(11)가 그것이다. 하느님 목적의 결말의 도래는 이스라엘뿐 만아니라 모든 나라들, 나라들뿐 만아니라 전체 우주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의 완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있는 하느님의 피조물의 영역은 없다.
충실한 증언을 할 때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사건들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비를 조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시간 장소를 확신한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포에 떨거나 빗나가지 않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종말 전에 증언의 시간이 있다는 것(12-19)을 유념하는 것이다. “때가 왔다(카이로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8) 때의(크로노스 = 달력의 때) 계산만 가지고 하느님 시간의 완성을(카이로스)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은 증언을 할 때이다(13). 지금은 전체 세상에 충실한 증언을 할 때이다.
증언 때문에 제자들은 회당, 총독, 그리고 왕 앞에 끌려 갈 것이다(사도행전에서 실현되었다). 친척과 친구들의 증오와 배반 그리고 죽음이 그들을 기다린다. 여기에는 현대의 계시자에게 가끔 보거나 듣는 바보스런 오만은 찾아 볼 수 없다. 그 오만은 신자들을 박해와 고통 위에 들어 올리는 황홀한 문헌에서 나온다. 제자들은 고통을 면하지 못한다. 위기와 폭풍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해야 할 적절한 메시지를 위한 “입과 지혜”를 (15) 받을 것이다. 루카복음에서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건축물에 대한 찬사를 넘어
오늘복음장면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즈음이며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가장 거룩한 땅에 예수님과 함께 서서 유태인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장엄한 성전을 바라보고 있다. 그 성전은 유태인을 달래기 위해 세운 헤로데의 걸작품이다. 성전은 영혼을 흔들 정도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성전에 나들이 한 이 그룹이 갑자기 심각하게 되었다. 건축물에 대한 찬사가 제자직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지닌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적 조망으로 변했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들 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공적 박해와 배반을 초래할 것이다. 이제 오래 동안 기다렸던 메시아 예언자가 오셔서 세 번째로 다시 지어진 성전에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의 현존이 바로 하느님의 방문이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체포, 박해, 평결, 배반을 포함한 지구를 흔드는 재앙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시대와 우리 시대의 큰 재앙을 빠르게 고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사칭하여 올 많은 사람들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아직 어슬렁대는 무서운 세력들을 잘 아신다. 그들의 테러행위는 우주적이든 개인적인 규모이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아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확신이 믿을 가치가 있게 하시려고 십자가로 가셨다. 우리가 “영혼의 증가”를 얻는 것은 엄격한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약속을 믿고 충실히 의존할 때 가능하다. 그분의 약속은 약할 때도 충분한 은총, 영혼의 증가를 위해 모든 것에 작용하는 은총의 약속이다. 예수님의 신적인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일 것이다. 반면에 그분의 자애로운 통치 아래에서 견디는 것은 “너희의 영혼을 증가”시킬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정된 영혼이 아닌 “증가된” 영혼을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라. 그 영혼은 내적 능력으로서 그 안에 하느님과 인간이 정착, 성숙, 인내의 일생에 걸친 과정 안에서 연결된다. 인내는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름에 무엇이?
묵시록적인 문헌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안이한 신앙, 생활과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 시간이 짧다는 것, 주님께서는 진정 밤에 도둑처럼 오신다는 것, 내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가 급격하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지 모른다. 오늘복음의 예수님 말씀의 주제는 자신의 “이름”(그분의 사명과 인격과 동등한)이 분열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용기를 갖지 못해서 모든 형태의 갈등이나 싸움을 피한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할까봐 또는 크리스천 또는 가톨릭의 꼬리표를 달까봐 가톨릭 크리스천 정체를 숨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은 싸워서 쟁취할 가치가 있다는 것, 죽기까지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멈추어 본 적은 없는가? “그 이름”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박해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잊었는가?
교훈
오늘의 제2독서인 테살로니카 2서(3,7-12)에도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성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에게 그들 공동체의 특정한 문제에 관해서 경고한다. 그 문제는 극도의 종말론적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하지 않고 대신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6-15). 공동체의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거나 주님의 새 시대가 이미 왔다고 생각해서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중지했다. 그들은 장래에 관한 두려움과 마비로 녹초가 되어서 현재의 갈등과 고통에서 즉각적으로 구원 받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실상 포기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그들의 충실하고 용기 있는 증언으로써 변화시키는 것을 재림을 핑계로 중지하였다. 그들은 모든 옳지 않은 일에 빠져있다.
전례력의 끝에 가까이가고 오늘 독서의 궁극적인 사안을 대면하면서, 일상생활을 통해서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을 잊지 말자. 아프고 오래 지속되는 고통 가운데에서 예측 가능한 역사의 수평 위에 재앙으로부터의 해방이 보이지 않을 때, 신앙은 하늘은 향한다. 하느님 뜻의 계시를 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현재의 괴로움의 끝과 다가오는 시대의 시작을 보기 위해서 하늘을 향한다. 그 생각만으로 우리 시대의 폭풍 가운데에서, 위로, 기쁨, 희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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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은 캐나다 소금과 빛 가톨릭 미디어 재단과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CEO이며, 교황청 사회홍보 평의회의 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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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third Sunday in Ordinary Time (November 17, 2013)
Reading 1: Mal 3:19-20a
Lo, the day is coming, blazing like an oven, when all the proud and all evildoers will be stubble, and the day that is coming will set them on fire, leaving them neither root nor branch, says the LORD of hosts. But for you who fear my name, there will arise the sun of justice with its healing rays.
Reading 2: 2 Thes 3:7-12
Brothers and sisters: You know how one must imitate us. For we did not act in a disorderly way among you, nor did we eat food received free from anyone. On the contrary, in toil and drudgery, night and day we worked, so as not to burden any of you. Not that we do not have the right. Rather, we wanted to present ourselves as a model for you, so that you might imitate us. In fact, when we were with you,
we instructed you that if anyone was unwilling to work, neither should that one eat.
We hear that some are conducting themselves among you in a disorderly way, by not keeping busy but minding the business of others. Such people we instruct and urge in the Lord Jesus Christ to work quietly
and to eat their own food.
Gospel: Lk 21:5-19
While some people were speaking about how the temple was adorned with costly stones and votive offerings, Jesus said, "All that you see here--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a stone upon another stone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Then they asked him, "Teacher, when will this happen? And what sign will there be when all these things are about to happen?" He answered, "See that you not be deceived, for many will come in my name, saying, 'I am he,’ and 'The time has come.’ Do not follow them! When you hear of wars and insurrections, do not be terrified; for such things must happen first, but it will not immediately be the end." Then he said to them, "Nation will rise against nation, and kingdom against kingdom. There will be powerful earthquakes, famines, and plagues from place to place; and awesome sights and mighty signs will come from the sky. "Before all this happens, however, they will seize and persecute you, they will hand you over to the synagogues and to prisons, and they will have you led before kings and governors because of my name. It will lead to your giving testimony. Remember, you are not to prepare your defense beforehand, for I myself shall give you a wisdom in speaking that all your adversaries will be powerless to resist or refute.
You will even be handed over by parents, brothers, relatives, and friends, and they will put some of you to death. You will be hated by all because of my name, but not a hair on your head will be destroyed. By your perse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
Biblical Reflection for 33rd Sunday in Ordinary Time C by Father Thomas Rosica, CSB
Viewing History in the Larger Context of God
As we come to the end of the Church's liturgical year, our Sunday Scripture readings are filled with apocalyptic images that may well terrify us with their intensity, honesty, realism and practicality. Apocalyptic writing was popular in Christian circles for a millennium. Major historical crises most often triggered apocalyptic thinking. Not all uses of the word "apocalypse," however, have to do with a special kind of literature. St. Paul insisted that he received his gospel not from human sources but "by revelation" (Galatians 1:12) and that he went to Jerusalem to meet with other Christian leaders "by revelation" (Galatians 2:2). But as a kind of literature, apocalyptic deals with a revelation, or series of revelations, usually by means of an angel, which discloses the supernatural world beyond the world of historical events.
The focus is on eschatology, the end of the world as we now experience it and the beginning of a new world. Usually the transition is described in terms of transformations cosmic in scope and nature, along with judgment of failed persons and institutions and the vindication of God's saints. Although some apocalypses involve ascensions into another world, both the Apocalypse to John and the apocalyptic discourse of Jesus in Luke 21 (Mark 13; Matthew 24:1-38) join historical events with descriptions of what is going on behind and beyond history. What is going on is mixed with what is really going on, history being set in the larger context of God's purpose, the whole being an extraordinary writing with historical descriptions laced with symbols, signs, and mysterious figures of speech. As strange as this literature may seem to us, it is a dramatic witness to the tenacity of faith and hope among the people of God.
Context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is the historical event that prompted Jesus' apocalyptic speech in today's Gospel passage (Luke 21:5-19). Mark, for example, described the desecration of the Jerusalem temple by the Romans (Mark 13:14) as the apocalyptic symbol (see Daniel 9:27; 12:11) accompanying the end of the age and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Luke (Luke 21:20-24), however, removes the apocalyptic setting and separates the historical destruction of Jerusalem from the signs of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by a period that he refers to as "the times of the Gentiles" (Luke 21:24). Jesus' eschatological discourse in Luke (21:5-36) is inspired by Mark 13, but Luke has made some significant alterations to the words of Jesus found there. Luke maintains the belief in the early expectation of the end of the age but, by focusing attention throughout the gospel on the importance of the day-to-day following of Jesus and by reinterpreting the meaning of some of the signs of the end from Mark 13, he has come to terms with what seemed to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to be a delay of the parousia --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t the end of time.
Signs of the end
In dealing with the persecution of the disciples (Luke 21:12-19) and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20-24) Luke is pointing to eschatological signs that have already been fulfilled. In Luke's text, Jesus speaks in the temple and not away from the temple on the Mount of Olives. The audience for Jesus' discourse in today's Gospel is "all the people" and not the disciples in private (Matthew 24:3) or the original four disciples (Mark 13:3). In today's Gospel (Luke 21:5-19), the signs of the end are threefold: the appearance of false messiahs and false calculators of time and place (8); wars, tumults, and international conflicts (9-10); and natural disasters with cosmic terror (11). The coming to conclusion of God's purpose will affect not just Israel but all nations, not just the nations but also the entire cosmos. There is no area of God's creation so remote as to be unaffected by God's fulfillment of the divine intention.
A time for bearing faithful witness
However, disciples are not to be so preoccupied with these events as to be terrified or led astray by those who claim to have probed the divine mysteries and ascertained the time and place. The important thing to keep in mind is that before the end there is to be a time of witnessing (12-19). Those claiming "The time (kairos=opportune time) is at hand (8) fail to understand that calculations of time (chronos=calendar time) do not lead one to know the fulfillment of God's time (kairos). The present moment is a time for bearing testimony (13). Now is the time to bear a faithful witness to the entire world.
Because of their witness, disciples will be bought before the synagogues and before governors and kings (both realities were fulfilled in the Acts of the Apostles). Hatred, betrayal by relatives and friends, and death await them. There is nothing here of the arrogance of folly we often see and hear in modern apocalyptists, an arrogance born of a doctrine of a rapture in which believers are lifted above the conditions of persecution and hardship. Disciples are not exempt from suffering. In the mist of the crises and storms the disciples of Jesus, then and now, will be given "a mouth and wisdom" (15) for the appropriate message to be delivered. Keep in mind that in Luke, one of the most important functions of the Holy Spirit is to inspire speech.
More than architectural admiration
Today's Gospel scene came at a moment late in Jesus' ministry, and the disciples stood with him on Jerusalem's holiest ground and stared at the majestic temple of Jerusalem, the centre of Jewish culture and religion, Herod's masterpiece of appeasement of the Jews. It was clearly a sight to stir the soul! And yet this group outing to the Temple Mount suddenly turned serious. What began with architectural admiration became a prophetic glimpse of what discipleship would cost those who would bear his name. It would bring public persecution and betrayal by those closest in the circle of family and friends. Now the long-promised Messiah-prophet had come and taken his place in a temple rebuilt for the third time. His very presence was the visitation of God. Jesus spoke about the earth-shattering catastrophes including the seizure, persecution, deliverance and betrayal of the disciples. He also spoke about the many who will come in his name to bring quick fixes to the great dilemmas of his and our time.
Jesus is clearly no stranger to the horrific forces still on the prowl in our world. Their terror, whether cosmic or personal, is overcome by the assurance that he knows his own, even the number of the hairs on their heads. He went to the cross to make that assurance trustworthy. It is not stoic determination that gets us "gain of soul," but faithful reliance on his promise of grace sufficient in weakness, a grace that works in everything for the gain of the soul. To reject the divine reign Jesus brought would be to bring down the judgment of God. To endure under his gracious reign would be "to gain your souls." Remember that Jesus spoke of the soul not as fixed but "gained." The soul is that inward capacity in which the divine and human connect in a lifelong process of anchoring and maturing and enduring--enduring that will not flinch in the face of suffering.
What's in a name?
If apocalyptic literature shocks us, it may well be for good reasons. Maybe we need to be lulled out of our complacent faith and beliefs, our way of living and acting, and realize that time is short, that the Lord truly does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that we must radically change our ways today, not tomorrow. The theme of Jesus' words in today's Gospel is that his "name" (which is the equivalent of his mission and his person) will be the cause of disruption. And yet we often remain so uncourageous, shunning any form of conflict and struggle. We hide our Catholic Christian identity for fear of "offending" others or of being labeled Christian or Catholic. Have we ever stopped to realize that maybe some things in this world are truly worth fighting for, and even dying for? Have we forgotten that those associated with "the Name" will endure persecution?
A lesson
There is also an important message for us in today's second reading from Paul's second letter to the Thessalonians (2 Thessalonians 3:7-12). St. Paul admonishes the Thessalonians about a specific problem in their community that has grown out of the intense eschatological speculation, namely, not to work but to become instead disorderly busybodies (6-15). Some members of the community, probably because they regarded the parousia as imminent or the new age of the Lord to be already here had apparently ceased to work for a living. They allowed themselves to be overcome with fear and paralysis about the future, and longed for imminent deliverance from the present struggles and suffering. They effectively gave up and used the parousia as an excuse to cease transforming the society in which they lived by their faithful and courageous witness. They busied themselves with all the wrong things!
As we near the end of the liturgical year and are confronted with ultimate things in today's Scripture readings, let us never forget that we are called to give witness through our daily living. Amid painful and prolonged suffering, when there can be seen on the horizon of predictable history no relief from disaster, faith turns its face toward heaven not only for a revelation of God's will but also for a vision of the end of the present misery and the beginning of the age to come. That thought alone is a cause of consolation, joy and hope in the midst of the storms of our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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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ian Father Thomas Rosica, chief executive officer of the Salt and Light Catholic Media Foundation and Television Network in Canada, is a consultor to the Pontifical Council for Social Commun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