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은 험한 조령을 방어하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배하여 우둔한 장수로 매도당했습니다. 특히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신립을 성질이 사납고 부하장수를 업신여겨 함부로 대하고 충언을 듣지않고 자신의 용맹만을 자랑하는 필부로 묘사하여 신립장군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일어나기 9년 전에 제출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평화시기에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정책이라고 배척한 사람이 유성룡이었습니다. 당시 200만섬의 곡식이 비축되어 있을 때라 충분히 10만명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반드시 일본은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보고 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절대 일본은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서 당시 집권당이었고 김성일과 같은 당파였던 동인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전쟁준비에 소홀했었습니다. 거기에 적극 동조한 사람이 유성룡이었습니다. 물론 성곽을 수리하기도 하고 이순신같은 사람을 추천하여 수군절도사로 임명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군대를 정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서상으로는 20만 병사가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 이일이 경상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서울에서 상주로 내려갈 때 300명의 군졸도 마련하지 못하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자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장군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고 삼천기병을 이끌고 내려가게 했지만, 기병이 준비되어 있을 턱이 없어 갑자기 말을 구하여 민간에 있던 말, 노새, 나귀를 징발하여 3000을 채웠고, 훈련안된 농부, 머슴등을 억지로 징집해서 3000명을 채운 것이었습니다. 신병을 쓸만한 군대로 만들려면 100일 동안 훈련을 해야했지만, 훈련할 시간이 열흘도 없어 시간나는 대로 하루 이틀 훈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신립장군의 벼슬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이었고 군대와 무관한 자리였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군대는 당시 조정의 판단과 정책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군대는 100년 동안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단련된 정예병이었고 조총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총 15만 7천8백명이었고, 200년동안 전쟁없는 평화시대를 살아 군대에 소홀했던 조선으로서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셈이었습니다. "왜병은 신병이라 당할 도리가 없다"라는 이일의 장계가 올라와서 조선군대의 사기는 떨어져서 모두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신립장군이 4월 24일 충주에 도착했을 때, 충청도에서 모여든 병사들을 합해서 8000명이 있었습니다. 이를 양분해서 기병 4000명은 단월역 평지에 배치하고, 보병 4000명은 조령에 배치해서 적을 막기로 했습니다. 조령에 곳곳에 병사들을 배치했는데, 대낮인데도 두려움에 전염된 40명이 험한 산세와 밀림을 이용해서 도망갔습니다. 밤이 되면 몇명이 도망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장 김여물장군이 말렸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로 내려왔는데, 패배한 이일도 합류하여 전쟁대책을 논의하니 여러 장수들이 조령을 포기하면 안된다고 논의하여 다시 조령으로 가기로 했지만, 그 다음날 또 1000명의 병사가 도망가는 것을 시작으로 신립장군이 서울에서 데려온 3000명의 병사들 외에 곳곳에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부하 장수들은 서울로 되돌아가서 한강을 방어해야 한다고 했지만, 신립장군은 여기에서 죽기로 마음먹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칩니다. 평지에 배수진을 치면 병졸들이 도망갈 수 없었고 오합지졸의 군대이지만 자기 목숨을 위해서라도 용감히 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일본군의 공세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이일은 또 도망갔지만 일본군에게 신체를 넘겨 욕을 보기 싫었던 신립장군과 부장 김여물장군은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싸우기도 전에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누구하나 제대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립장군이 비록 패배했지만 비겁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자결한 분이고, 지혜가 없고 무모해서 조령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성한 작가의 역사소설 '7년 전쟁'을 읽고나니 신립장군을 위해 변호하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