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주이자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비,
발루아 여공작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1553년 5월 14일 생 제르망 앙 레이에서 출생
1615년 3월 27일 파리에서 사망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
어머니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타리나 데 메디치)
1572년 8월 18일 파리에서
나바르 국왕 앙리 3세(훗날 프랑스와 나바르의 국왕 앙리 4세)와 결혼,
1599년 12월 17일 이혼

마르그리트는 200년간 프랑스를 지배해온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세대로 태어났다.
마르그리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데 메디치의 세 딸 중 막내였으며,
오빠들로부터 'Margot(마르고/마고)'라는 별칭을 얻었다.
앙리 2세와 카트린이 네 아들을 낳은 뒤로 프랑스 왕위는 확고한 듯이 보였다.
언니들처럼, 마르그리트 역시 프랑스에 유용한 동맹이 될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고,
여러 결혼이 고려되고 거절당했다.
그러나 1570년 마르그리트의 아버지와 큰 오빠가 죽었고,
남아있는 형제들 중 그 누구도 후계자를 생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카트린 데 메디치와 그녀의 차남인 샤를 9세는
마르그리트와 앙리 드 부르봉을 결혼시키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앙리 드 부르봉(앙리 드 나바르)은 발루아 가문에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프랑스 왕통을 이을 수 있는 "왕족의 첫번째 왕자"였다.

프랑스는 8년간 구교와 신교 간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발루아 가는 구교였고 앙리의 부르봉 분가는 신교였지만,
카트린은 앙리를 발루아 가의 종교로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반면에 앙리의 어머니인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는
마르그리트가 신교를 택하길 바랬다.
-양쪽 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572년 잔 달브레가 세상을 떠났고,
이에 따라 나바르의 국왕이 된 앙리가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프랑스로 왔다.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 신부와 신랑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뿐,
절대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추기경이 마르그리트에게 '앙리를 기꺼이 남편으로 맞이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마르그리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빠인 샤를 9세는 여동생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는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이는 동의의 표시로 받아들여졌다.
그로부터 6일 후, 프랑스의 칼뱅교도-이른바 "위그노"-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앙리는 목숨을 건졌지만,
앙리와 마르그리트는-표면상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러나 사실상 죄수로서-궁에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1574년,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앙리 3세가 즉위하였다.
당시 앙리 3세는 마르그리트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매제인 앙리나 친동생인 알랑송이 위그노와 화해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듬해,
앙리 드 부르봉은 탈출하여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르그리트가 앙리를 따라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578년 무렵, 발루아 가에는 여전히 후계자가 없었고,
이런 이유로 마르그리트는 합법적인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의무 아래
가스코뉴에 있는 남편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와 앙리는 4년이나 함께 지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당시 앙리의 정부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아이를 낳았다).
나바르 왕 앙리는 여전히 위그노의 편에 서서 싸움을 계속해나갔고,
1582년 마르그리트는 나바르 왕과 프랑스 왕이 화해하길 바라면서 앙리 3세의 궁정을 방문했다.

마르그리트는 오빠의 궁정에서,
Champvallon의 영주인 Jacques de Harlay와 사랑을 나눴다.
1년 후, 마르그리트는 추방되었다.
앙리 3세는 마르그리트의 음탕함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마르그리트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계속해서 알랑송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마르그리트는 가스코뉴로 돌아왔고,
여전히 아이를 갖길 희망하고 있었지만,
앙리는 오로지 자신의 정부들만을 찾았다.
1584년 알랑송이 세상을 떠났고,
이는 나바르 왕이 프랑스 왕위의 추정 상속인임을 의미했다.
앙리 3세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고,
앙리 3세와 카트린이 직접 나서서 나바르 왕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중개인 역할을 하던 마르그리트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마르그리트는 나바르의 궁정을 떠나,
옛 애인이자 오랜 친구인 기즈 공작의 과격한 구교파 쪽으로 돌아섰다.
그 뒤 2년 동안,
마르그리트는 앙리 드 나바르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들 중에는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586년 말 마르그리트는 앙리 3세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가 어머니인 카트린에게 편지로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베르뉴에 있는 위송의 왕성에 수감되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되었다.
앙리 3세는 죽기 전, 앙리 드 부르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새로 즉위한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구금 생활의 가혹함을 줄여주었지만,
여전히 아내를 계속 위송에 가두어 두었다.
이 무렵 마르그리트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1599년 마르그리트와 앙리 4세의 결혼이 무효화 되었지만,
마르그리트는 왕비라는 칭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혼 뒤 얼마 후 마르그리트는 연금을 받게 되었다.
앙리 4세는 즉시 마리아 데 메디치(카트린 데 메디치의 먼 친척)와 결혼하였고,
마리아는 5명의 자녀를 낳았다.
1605년 파리로 돌아온 마르그리트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앙리 4세와 재회하였으며,
마리아 데 메디치와는 친구가 되었다.
이 기간에 앙리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마르그리트는 앙리를
"Roy mon seigneur et frere"라고 불렀다.
마르그리트는 파리에서 여생을 보냈고,
그녀의 집은 문학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되었을 때,
마르그리트는 마리아 데 메디치의 섭정을 지지하였다.

마르그리트는 1615년 3월 27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르그리트가 죽은지 수년 후, 그녀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회고록에서 마르그리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더불어,
두 오빠와 이중으로 근친상간을 범했던 일을 참회하기도 했다.
강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미인이었던 마르그리트에게는 조제프 보니파스 드 라 몰,
뷔시 당부아즈, Jacques de Harlay를 비롯하여 많은 애인이 있었다.
알레상드르 뒤마가 쓴 소설 "여왕 마고"는
앙리 드 나바르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술을 소설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각색되어 1994년 프랑스에서 "여왕 마고"로 영화화되었다.

"나는 어느 편의 승리도 바랄 수 없었다"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