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이 성탄절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탄의 계절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거리에서 캐롤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새벽송도 사라졌는데, 이제는 캐롤까지도 울리지 않는 “침묵의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고요한 성탄절입니다. 하지만, 매년 성탄의 계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온 세상의 성도들이 가장 많이 부르며, 또, 위로도 받고, 은혜도 받는 찬송가 중의 하나가 305장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일겁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적은 사람은, 잘 아시는 것처럼, 세상에서 험악한 삶을 살았던 존 뉴턴입니다. 이러한, 그에게는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 여사처럼, 그의 곁에서 늘 기도하였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는 험악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선원이었던 아버지와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험악한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민감한 청소년 시절을, 폭력으로, 도박으로, 불량소년으로 살다가, 흑인들을 잡아 판매하는 노예상인이 됩니다. 그러던 중, 23세 때, 노예들을 싣고, 팔러 가는 길에, 배가 풍랑으로 위험에 처합니다. 이 때, 그는, “이 풍랑에서 저를 구해주시면, 이제부터는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면, 평안할 때, 경험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죽음의 자락에서, 또, 고난의 밑바닥인, 최악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자리에 가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면, 고생하지도 않고, 아픔을 겪지도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에덴에서의 삶을 살게 될 텐데, 이것을 아는 이들이 매우 적습니다. 존 뉴턴은 기도를 마치고, 풍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는, 기도한 것처럼, 노예상인으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풍랑 속에서, 자신에게 오신 하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비문에는, “심부름꾼 존 뉴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했던 자신을 찾아오셔서 살려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를 전하다 간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여러분, 죤 뉴턴의 경우를 보면, 내가 결정해서, 교회를 찾아오고, 주님을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교회를 찾고,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던 겁니다. 나의 환경, 나의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은 내게 먼저, 찾아오신 겁니다. 이것이, 성탄의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렀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는 말처럼, 만일, 성자께서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신 성탄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구원과 천국 또, 영생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성탄은, 단순히 아기예수의 탄생으로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귀한 절기이며, 성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성부께선 이러한 성탄을, 시급하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성부께선, 에덴에서 첫 사람들이 죄를 범하자,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일 맞이하는 성탄절에 대해, 성도된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병석에 누운 김일 선수를 보니, 힘이 좋고, 체구가 커도, 젊었을 때입니다. 지식이 뛰어나도 젊었을 때입니다. 건강해도 한 때입니다. 모든 것이 한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존 뉴턴이 큰 풍랑을 만났어도 살아날 수 있었고,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중,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남으로, 모두가 죽음의 절망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은 사도 바울로 인하여, 276명 전원이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성탄의 축복이 임함으로, 임마누엘의 복과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8 – 19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약혼”이란 말은, 헬라어로, “므네스튜오”라고 합니다. 이를, 직전 성경인 개역 성경에서는 “정혼”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결혼에 따른 절차가 세 단계를 걸치게 되어있었습니다. 첫째는, “약혼”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들끼리 결혼을 약속하는 겁니다. 둘째는, “정혼”입니다. 어렸던 자녀들이 성장해서, 결혼 정년기가 되면, 부모님에 의해 약혼관계였던 당사자가 랍비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결혼에 대해, 서약을 합니다. 그래서, 정혼이 성사되면, 이때부터는, “법적 부부”입니다. 그래서, 19절을 보시면, “그의 남편 요셉”이라고 한 겁니다. 셋째는, “결혼”입니다. 정혼을 한 뒤, 1 – 2년 정도 지나면, 결혼식을 행함으로, 동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혼 절차 속에서, 마리아는 결혼 전인, 정혼단계에서 잉태를 한 겁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또는, 요셉이 결혼을 거절한다면, 마리아는, 여러 사람 앞에서, 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아는 요셉은, 마리아를 보호하면서, 마리아와 헤어질 준비를 합니다. 19절을 새 번역으로 보시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라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첫 단계로,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인들과 같은 자연출생이 아니며, 유전자 조작도 아닌, 성령 잉태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정확하게 알기위해, 이성이나 과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줄기세포가 있습니까? 복제기술이 있습니까? 인공수정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믿음” 뿐 입니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창 1: 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도 불가능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천지창조의 사건을 목격한 자가 없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하는 겁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속의 요셉도, 천사가 현몽하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마리아의 성령잉태는,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경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우리의 이성과 주장을 앞세워,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명하려한다는 겁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보다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이 훨씬 쉬울 겁니다. 성경전체는, 마리아의 성령잉태와 함께,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그가 기록한 시 51: 5을 보시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자신은 죄 중에서 출생하였기에, 죄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행 13: 22을 보시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해, 죄 중에서 출생한 죄인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죄 중에서 출생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묻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요 3: 4 – 5을 보시면,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성부께선 성령을 통해, 마리아가 잉태케 하였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는, 성령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 – 21절을 보시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로 인해, 고심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현몽을 합니다. 그리고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사건이기에, 마리아나 요셉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마리아에게 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로 부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 또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사 7: 14을 보시면,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합니다. 근래에 와서, “12월 25일이 성탄절이다 아니다”라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자들과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논리에 현혹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성탄절의 날짜를 문제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르게 알아서, 더욱 잘 지키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기성교회들을 해체시키려는 겁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이단자들이 나와서 한 일은, 정통 교회를 흔들어서 해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성탄절의 날짜에 대해 문제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날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탄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성탄절을, 쾌락의 날로, 유희의 날로 보낸다면, 성탄절을 맞이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죄 중에서 출생하여, 죄 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던 존재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이 있음으로, 이제는, 이러한 죄악의 사슬을 끊었습니다. 그러므로, 날짜를 문제삼고, 날짜로 성탄의 관심을 몰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성탄의 의미를, 우리의 믿음을 강탈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출생년도와 날짜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서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임마누엘하신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성탄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께 감사하시며, 이 땅에 오신 성자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남으로, 사람들이 잊고 있었습니다. 이 때, 메시야의 탄생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잊는 겁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향한 주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을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요 13: 1을 보시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합니다. 요 1: 11에서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합니다. 또, 17: 11을 보시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 7: 21을 보시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또, 마 12: 50을 보시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막 2: 17을 보시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합니다. 또, 딤전 1: 15을 보시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합니다. 눅 19: 9 – 10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에, 우리는 잃어버린 자로, 죄인의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고하신 축복의 선물, 영광의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목적으로 사명을 받아 이 땅에 오셨음을 알리신 겁니다. 이 성탄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요 1: 13을 보시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잃어버린바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기 위해, 성자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사건이며, 또,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내일 맞이하는 성탄이, 유희와 쾌락적 기쁨에 잠기기보다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됨으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독생자를 보내신 성부께 감사하는 감사의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 – 23을 보시면,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임마누엘의 이루심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들의 범죄로 인해,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때도,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요단도 가를 수 있지만, 언제나, 사람을 통해 행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은 홀로 행하지 않습니다. 늘, 사람과 함께 행하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직후부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창 3: 8을 보시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계 3: 20을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이루는 것이, 임마누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성탄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준비하심으로, 내일 맞이하는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은혜로운 주님의 말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 잘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너무나 감동스럽습니다. 아름다운 신목교회의 거룩한 성도님들의 영혼속에 주님의 말씀이 더욱 더 자라나시길 빕니다^^
은혜롭다니감사합니다허나제게주신은혜를나누는것뿐입니다말씀을통해산과들님께은혜주신하나님께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