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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합된 힘의 결실
부녀지도자반 제62기 정 현 모
(충난 논산군 성동면 삼산2리)
저는 충남 논산군 성동면 삼산2리 부녀지도자 정현모입니다.
저희 마을은 67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앞으로 기름진 옥토가 넓은 들판을 이루며 펼쳐져 있어 4km 밖에 있는 논산 군청 소재지의 모습이 먼 눈으로 그림처럼 바라보이는 평야 마을입니다. 저는 지난 69년에 결혼을 해서 이 마을의 주민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체신 공무원으로 일하시는 남편을 섬기면서, 두 아들의 엄마로써, 또 7년간의 경력을 쌓은 새마을 지도자로서 바쁘고 보람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마는 저의 가슴엔 아직도 지난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저의 고향은 같은 고장인 논산군 양촌면 산직리라고 하는 두메 ㅁ을입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삥 둘러 있고 한 발자국이라도 외처(外處)에 나가려면 높은 재를 넘지 않고는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그런 산골이었습니다.
이 가난하고 옹색한 촌락에서 빈농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미개한 농촌 환경에 시달려 지쳐야 했고, 가난의 아픔에 어린 가슴을 멍 들여야 했습니다. 높이 100m가 훨씬 넘는 산 고개를 넘어 십리 밖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중충하니 흐린 날 솔밭에서 튀어나오는 산짐승한테 놀라 기겁을 했었고 눈보라가 안개같이 몰아치는 산마루에서 눈 쌓인 비탈길을 더듬다가 산골짜기로 뒹굴던 정말 고통스런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 태어나 자라는 저는 그까짓 육신적 고통쯤 낙으로 알아야 했습니다.
<가난으로 배움을 중단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중학교 진학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에 혼자서 입시(入試)에 응하고 합격하여 가까스로 입었던 중학교 교복을 3년을 못 채우고 벗게 되었을 때 저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저의 향학열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고, 소화(消火)되지 않는 불길로 괴롭기만 한 가슴 속엔 미개한 농촌 문명에 대한 불만과 의아심이 구름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당연한 권리로 걸어갈 수 있는 배움의 길, 열심히 배워야 할 시기에 저는 가난에 쪼들려 주저앉아야 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농촌이 가난하고 미개한 탓이라고 생각한 저의 가슴은 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고 배움에 한(恨)이 맺힌 가슴을 강의록과 천자문 습득(習得)으로 달래며 살았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
그러나 도시에 대한 그토록 진한 동경과는 반대로 저의 스물 네 살 되던 해 같은 농촌인 이곳 성동으로 출가를 해 왔습니다. 첩첩 산 속의 고향 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사방이 들판으로 훤하게 트여 있었고, 시간마다 마을 안으로 드나드는 버스며, 좁은 저의 신방(新房)을 대낮처럼 밝혀주는 눈부신 전깃불 아래서 새까만 촌 색시인 저의 가슴은 환희에 젖기까지 했습니다.
“이만하면 그래도 시집을 잘 온 것 같다.”고……. 그러나 이 마을 주민이 되어 얼마간 살아보니 처음 환희에 찼던 제 가슴은 점점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넓은 들판 속의 마을답지 않게 생활수준이 얕아서 집집마다 거의 대문이 없으니 마당과 한길의 구분이 없었고, 해마다 담장 대신 둘러지는 섶 울타리들은 그 해가 가기도 전에 낡은 모습으로 주저앉아 버려서 좁은 골목길은 쓰레기장으로 변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실정은 당시 우리 농촌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정작 저를 실망시켰던 큰 문제는 자연부락간의 갈등이었습니다. 한 마을이 두 개 이상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 비단 저희 경우만은 아닐 텐데,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그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벌여 온 싸움을 오늘날까지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두 부락의 형태를 살펴보면 아래, 위뜸이 공평하게도 마을 총 호수의 절반인 30여 호씩 나뉘어 있으니 서로지지 않으려고 으르렁대고 자기 쪽이 우세하려고 드는 태도가 강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행정 담당자인 이장 선출 문제만 해도 서로 자기네 편에서 세우려고 엉터리 주장을 했고, 누가 이장이 된들 상대 쪽에서 공연히 이장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물고 늘어지며 시비를 해서 이장이 자기 소신껏 일을 할 수도 없었고 마을 총회는 으레 싸움 장으로 변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민들은 누구 하나 이 현실을 이상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고 옛날부터 그랬으니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는 저의 눈에 이러한 마을의 인심이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한심스럽기만 했지만 그보다 저의 현실은 더 각박했습니다. 저는 6남매 중의 맏며느리였습니다.
위로는 층층시하 어른을 모시는 어려움 속에서 아래로 초·중·고에 다니는 시동생들은 숨 쉴 사이 없이 학비 타령을 했고, 그럴 때마다 얼마 안 되는 농토에서 생산한 쌀을 일일이 시장에 내고 일 년 동안의 식량에 위협을 받으며 가슴을 죄야 했습니다. 게다가 저희 집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 오두막집으로 그 안에 열 식구나 되는 대가족이 복작대는 어려움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고초였습니다.
<새 집 짓기 계획을 세우고>
이러한 가운데서 저는 시집오던 이듬해에 첫 아들을 낳았고 그때까지 실업자 신세였던 남편은 체신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쪼달리는 가정 경제 때문에 고달픔은 더욱 커가기만 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저는 남편과 같이 “새 집 짓기” 계획을 세우고 근검·절약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남편의 월급을 쪼개서 계를 붓고 적금을 넣고 가고 싶은 친정 나들이를 참아가며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 매고 저축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소득원이 없이는 좀 체로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제게 의논을 했습니다. 소득 작물로 약초 재배를 했으면 하는데 종근 값이 워낙 비싸서 자본이 걱정이라고……. 여러 가지로 알아보니 재배하기에 별 애로도 없고 수확량이 많으면서 시장 시세도 좋아서 제법 재미를 보게 될 것 같았습니다.
<결혼반지 팔아 약초 재배 시작>
만류하는 남편을 설득해 가며 제 결혼반지를 처분하여 패모라는 이름을 가진 약초 종자 10근을 구입 해다가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종자 1근 값은 6,000원이었고, 사질양토로 토질이 좋은 밭에 늦여름에 심어 이듬해 초여름에 캐보니 무려 다섯 배인 50근의 생근을 캐낼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금방 부자가 되는 비결이라도 발견한 양 신이 나서 해마다 약초 재배에 열을 올려 적지 않은 소득을 보았지만, 패모라는 건 원래 연작(連作) 재배를 할 수 없는 작물이었습니다. 논이 많고 밭이 적은 마을 여건 하에서 할 수 없이 몇 해 거듭 연작을 했더니 그 영향이었는지 기껏 수확한 패모가 한 여름에 저장된 사태에서 푹푹 썩어 나가는 고충을 겪고 저희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뜨거운 울음을 운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약초 재배는 소규모로 계속하기로 하고 대신 딸기 재배를 겸하기도 했습니다.
<고소득 작목에 눈 뜬 우리 마을>
당시 우리 마을은 일 년에 한 번 벼농사를 끝내면 다른 할 일이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저희 남편은 가까운 채운면에 가서 딸기 뒷그루를 한 포기에 15원씩 주고 한 보따리 사다가 새순을 길러 재배에 들어갔습니다.
약초보다 인력과 공(功)이 많이 들었지만 첫 해에 제법 소득을 보고 장기 재배에 들어가자 주민들도 한 집 두 집 모를 얻으러 왔고, 이제는 봄이면 온 마을이 딸기의 달큰한 냄새로 흠뻑 젖을 만큼 구석진 비탈 밭에 까지 딸기 모가지라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을 해 온 덕분에 시집 온 지 6년 만에 저희 집은 1,400평의 농토를 2,700평으로 늘릴 수 있었고, 초가삼간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23평짜리 아담한 집을 지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때가 왔다 싶어>
제가 시집오던 이듬해, 전국 방방곡곡에 강한 열기로 퍼지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어릴 때부터 농촌 개발에 소망을 걸었던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우리 농촌에도 때가 왔구나 싶어 마음이 급했습니다. 새마을이 무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농촌이 잘 살게 되는 운동이라니 우리도 빨리 해 보고 싶은데, 우리 마을은 그 운동에서 제외라도 된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지도자를 뽑고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마을은 낮잠만 자면서 1년 2년이 흘러도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부녀회 활동 시작>
저는 우리 여자들끼리 모여서 부녀회만이라도 했으면 하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마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 동네에서 하는 친목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우연히도 계와 부녀회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도 부녀 활동을 해 보자는 제의를 하니 강한 어조의 반대 의견과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무관심파의 두 가지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다른 선진부락의 얘기를 해 주면서 계속 설득을 했더니, 그 중에는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가슴을 죄며 수줍게 내놓은 제안에 동조자를 만나자 저는 용기 백 배 하여 이장님과 상의 끝에 20세 이상 60세 미만의 부녀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입을 해야 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총 56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지난 73년 3월 19일에 우리 부녀회는 고고의 성을 울렸습니다. 여러 사람의 추천에 의하여 주동자인 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우수한 부녀회로 육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제 가슴은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녀자들의 작은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매월 15일에 마을 대청소를 하고 위치가 좋은 곳에 새마을 꽃동산을 만들어 가꾸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그 역시 순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회의 소집을 하고 보면 56명 회원이 고작 1/4 정도 출석을 하고 대청소 때는 조무래기 몇 명만 나와서 저는 흡사 골목대장이 되곤 했습니다. 이토록 저조한 참여율의 원인은 따져 볼 것도 없이 기금 때문이었습니다.
<참여율 재고 위해 기금 조성>
한 푼의 기금도 없는 부녀회에 회원들이 애착을 가질 수가 없음을 인식한 저는 매월 100원씩의 회비를 걷어 50,000원짜리 적금을 넣었고 모내기, 벼 베기 등의 공동 작업을 실시하여 1인당 이틀 분씩의 노임을 부녀회 공동 기금으로 유치했습니다. 그 성과로 기금은 재미있게 불어났지만 추진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갖가지 사연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의 부녀 활동을 이해 못하는 남편과 아내가 공동 작업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보따리를 커다랗게 싸서 머리에 인 채 집을 나가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회원 집에 모든 죄를 혼자 지고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빌던 일, 부녀회는 할 일 없는 여자들의 심심풀이가 아니냐고 빈정대던 어느 아저씨의 입에서 “부녀회 할 테면 아예 우리 집에 오지도 마슈” 하는 냉소담은 면박이 떨어졌을 때는 주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좌절감을 느꼈지만, 그런 한편으로 어떤 오기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밑으로 세게 내리치면 칠수록 높이 튀어 오르는 공의 원리에 비유할까요?
나를 냉대하는 저 사람들이 놀랄 만큼 훌륭한 부녀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결심이 굳어만 갔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고난과 역경의 세월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의 기금도 한 푼 두 푼 쌓여 가던 어느 날, 산 넘어 산이라더니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연약한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때 저는 모아진 자금을 가지고 주민들을 상대로 이자놀이 형식의 자금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 딴에는 제법 열심히 성실하게 하고 있는데 왜 그런지 갈수록 단합은 자꾸 어려워만 가고 회원들은 저를 경계하며 불신하는 태도였습니다. 심지어 “부녀회 기금은 회장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이라는 수군거림까지 들려 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이야말로 금전이 빚는 오해였습니다. 결산 보고의 필요성을 재빨리 간파한 저는 이때부터 자금 관리에 따른 상세한 결산 보고를 매월 월례회의 때마다 해 주었습니다.
말이 결산 보고지 그저 자금의 현황을 자세하게 보고해 주는 것뿐인 우스운 것이었지만 그 효력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의심이 풀린 회원들은 비로소 밝은 미소를 띠우며 양심 바른 우리 회장이라는 찬사와 함께 굳은 신뢰감을 저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망 속에서 활기를 얻은 우리 부녀회는 전 회원의 결의로 구판 사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려고 보니, 가게 운영으로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몇몇 영세 회원들 때문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매점을 열고 보면, 그들의 생활에 타격이 갈 것은 물론이겠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품은 불만으로 인하여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하는 부녀회에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뜻 있는 곳에 길이 있어>
이러한 부작용이 없이 회원들의 생활을 아낄 수 있고 부녀회에도 이득이 올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을까? 궁리 중인데 한 머리 좋은 회원이 좋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구판 사업이라고 굳이 매점을 열고 과자 봉지를 늘어놔야만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때에 따라서 우리가 필요한 물품을 공동 매입하는 것도 구판 사업의 일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 회원들의 찬성을 얻고 때마침 초겨울의 날씨가 쌀쌀한 때여서 취급 품목을 겨울 내복으로 정하여 10만 원 어치의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시장보다 싼 값으로 가격을 매겨서 회원들이 세 사람씩 조(組)를 짜서 머리에 이고 윤번제 행상을 실시하여 그 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판매가 끝났기에 결산을 보니 이득금 717,800원이 계산되었습니다. 여기에 재미를 느끼자 여름에는 메리야스, 명절 때를 이용해서 양말 등을 취급하여 이동 구판 사업을 착실히 해 왔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면하기 위해 선전지 견학>
부녀회 조직 5년만인 지난 78년도에는 우리의 기금이 300만 원을 넘어서게 되자 선진지 견학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좀 체로 여행의 기회를 갖지 못하던 우리 회원들은 고속도로 변에 아름답게 펼쳐진 새마을의 모습에 탄성을 올리며 감탄을 했고 각종 사업체의 우람한 발전상을 보고 새마을 사업의 필요성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선진지 견학은 우리의 연례행사로서 실질적인 새마을 교육에 임하고 있으며, 또 하나의 연례행사로 매년 어버이날에는 부녀회 중심으로 마을의 60세 이상 노인들을 모셔놓고 경로잔치를 베풀어 자식된 도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수 부녀회란 영광이>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우리에게는 우수 부녀회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이 붙게 되어 군수님의 표창을 받았으며, 78년도 새마을 서공 사례 발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운이 좋았던지 저는 그때 군(郡)에서 1등을 하여 우승기와 함께 1만 원의 상금을 탔습니다.
군청 새마을 계장님께서 “이것은 사업비가 아니고 회장님께 주는 상금” 이라고 말씀하시며 현금을 건네주실 때 그것을 받는 저의 가슴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돈이란 마물이라고 먼저도 얘기했듯이 제가 이걸로 인해서 수렁에 빠질 수도, 왕좌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수렁에 빠지는 것을 모면할 수 있을까? 순진한 우리 회원들의 가슴에 먹칠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만 원권 한 장을 듣고 어떻게 써야 할지 곰곰이 생각한 저는 그것을 둘로 쪼갰습니다. 새마을을 한답시고 살림을 모른 채 나돌아 다니는 며느리를 밉다 않고 말없이 도와주시는 시어머님의 은공에 조금이라도 보답이 될까 하여 치맛감이라도 한 벌 끊으시라고 그 한 쪽을 드리니 주름진 노안에 기쁜 미소를 띠우시며 반가와 하셨습니다. 나머지 한 쪽을 가지고 과자와 과일을 사서 우리 회원들을 새마을 회관에 모아 놓고 다과회를 베풀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우리 부녀회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여러분의 덕” 이라고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오늘 마음껏 즐겨 주시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며 우승기를 둘러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우리 회원들! 정말 즐겁고 보람있고, 또 우리 부녀회가 통통 영그는 순간이었습니다.
군 발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저는 또 도(道) 대회에 군 대표로 나가 2위 입상을 했습니다.
<시상금을 기초로 변해 버린 마을 모습>
겹친 영광 속에 상 사업비로 하사받은 50만 원에 부녀회 기금 50만 원을 보태서 색깔이 퇴색한 지붕들을 다시 말끔히 도색하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탄생해서 어렵게 출발한 우리 부녀회에 충남 2위의 영광이 안겨지고 적은 액수지만 상 사업비까지 들어와도 그때까지 주민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새마을 사업이 될 리도 없었고, 어떻게 하면 침체 상태에 있는 새마을 정신을 불러 일으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근심으로 변해버린 78년 11월, 저는 소원이던 수원 연수원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마을 교육을 계기로>
일주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저는 너무나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으며 특히 원장님의 강의 중에서 “최약 보완의 원리”는 저에게 큰 감명과 함께 새 진로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주민간의 갈등이야말로 우리 마을의 새마을 사업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었으며 바로 우리의 취약점이었습니다.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 되는 것을……. 돌아온 즉시 부녀회 총회를 소집하고 제시한 안건이 “자기 남편 설득 작전” 이었습니다.
아래 윗마을 애경사에 서로 오가지 않는 남편들을 아내들이 설득해서 가시게 하고, 반상회에 자기 남편 내보내기 등을 시작했더니 자존심 강한 남편님들로부터 코웃음을 받았습니다. 누가 여편네 말 듣고 않던 짓 할까 보냐는 빈정거림이었고,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자기 남편이 말을 들을 성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민 총화를 이루기까지>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게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조종하는 건 여자가 아니냐는 자신감으로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원들은 그 동안 “아무개 엄마”로 부르던 호칭을 “형님, 동생”으로 바꾸어 부르며 우리가 먼저 우정을 맺고 정답게 지냈습니다. 오랜 노력의 결과로 주민들은 차차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마을 총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어 실력 위주의 이장 선출에 아무도 이의를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우리 주민 중에 홍수로 집이 무너져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사는 영세 가정의 아주머니라 마을 총회에서는 주민들의 힘으로 집터라도 닦아 주자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나와서 일을 시작하자는 이장님의 방송이 있기에 저는 조반 준비를 하다 말고 현장에 나가 보았습니다. 윗마을에서 생긴 일인데 아랫마을 사람들이 와 줄 것인가 해서였습니다. 과연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삽이며 팽이를 들고 와서 일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주민 총화의 기틀이 잡혀가고 있구나! 하고 저는 감격과 보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이것은 전에는 없던 일이기에 말입니다. 참으로 오랜 병을 치료하고 우리는 이제 한층 밝아진 햇빛을 보며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년이 가까운 그 세월! 결코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 세월 동안 우리 연약한 부녀자들의 작은 힘이나마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아낌없이 기여해 왔고, 그 성과로 오늘의 단합을 이룩해 놓고 보니 이제 우리는 어떤 난관이라도 뚫고 나갈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전 주민의 합심 하에 환경 사업 및 생산 기반 사업, 문화 복지 사업에 많은 성과를 얻어 마을의 모습을 일신시켰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욕심껏 모아온 부녀 기금 500만 원으로는 마을금고를 설립하여 지난 9월 6일 군 연합 마을금고에 가입을 했습니다.
<남은 청춘을 마을금고 육성에>
처음 마을금고 설립 안을 제의했을 때 회원들은 대부분 반대를 했습니다. 잘 될는지의 여부를 알 수도 없거니와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을 무엇하러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회원은 자기는 마을금고에 가입할 의사가 없으니 출자금으로 분배되는 몫을 현금으로 떼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을금고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면서 이 한 몸 다 바쳐서 열심히 일할 것을 주민들 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입하지 않은 회원이라고 해서 분배 몫을 현금으로 줄 수는 없는 일이며 부녀 기금과는 영영 무관(無關)한 입장이 되어 버리게 될 거라고 좀 과격한 말을 하니 모두 다 금고 가입을 희망하여 부녀회원 전원 가입을 결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이 마을금고 운영에 남은 청춘을 몽땅 희생하여 전국 제일의 금고로 육성 시킬 각오입니다. 주민들로 하여금 우리도 새 시대를 보람 있게 살고 있노라는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키 작은 해바라기처럼 발돋움해 왔던 지난날의 정열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