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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 「수희분」
~~~부처님은 일체를 초월한 불이로 계시오며, 일체 중생을 하나로 하신 곳에 계시옵니다. 일체와 화합하고 일체와 둘이 아님을 쓰는 데서 저희들은 부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사옵니다. ~~~
금주의 법어--21세기 중화권 불교의 현황과 전망
금주의 법사--연세대 중국연구원 전영숙 박사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제가 몇 년 전에 전법학술상인가 제 논문을 뽑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여기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부처님을 모시고 이 자리에 서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인연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으리라 생각하고 오늘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기쁘겠다는 마음으로 중국 불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 내부적인 문제 한국불교 안의 생각할 문제도 산적해 있는데 어찌 외부에 마음을 돌릴 여유가 있겠는가 생각한다면 시간이 지난 뒤에 그런 과보가 우리에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내부의 현안 문제도 고민하면서 항상 넓은 시각으로 나 아닌 나로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의 할 일을 또 한 걸음씩 나가며 살아가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중국연구원에 근무한다고 방금 소개드렸는데 중국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법을 만나게 되면서 중국의 많은 사람들과 그동안 교류를 해오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다른 일로 교류하다 보니 사람들마다 뭔가 품행이 다르고, 기품이 있고, 드러나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많은 분들이 채식을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하다보니 그 분들이 대부분 불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불자라고 얘기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그 후로는 일뿐 아니라 일상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중국에 갔을 때 다른 법우들을 같이 모시고 절에도 다녔습니다. 중국을 포함해서 대만,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 미국의 불자들을 만난 적이 있고 지금도 대만, 홍콩, 대륙의 불자들과는 자주 교류하면서 그 분들의 생활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책에서 조금 찾아본 것과 제가 직접 본 부분을 비중있게 공유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순서는 제가 아는 세계의 불교 흐름과 현황 그리고 한국불교와 중국불교가 역사적으로 같이 한 시간과 따로 보낸 기간, 최근 20세기 후반부터 중국불교의 변화를 알려드리고 제가 느낀 교훈도 공유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알고 있는 세계불교의 흐름은 그동안 남방불교와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 티벳 불교가 전통 불교의 범주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불교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1800년대 후반에 이민자를 통해서 일본과 중국의 사람들이 들어가고 스님이나 재가불자 소수에 의해 불교가 들어가서 1900년대 중반까지는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미국에서 백인에게까지 불교가 전파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종교는 유대교와 카톨릭을 지니면서 불교의 명상을 하는 종교 혼합주의가 성행합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와 틱낫한 스님 덕으로 남방불교와 티벳불교가 많이 전파되었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미국에서 종교로서의 불교보다는 과학적인 검증과 함께 실용적으로 명상을 하는, 불자가 아닌 사람들이 불교를 주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서 중국이 이룬 불교의 응집력과 베트남 불교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이것이 10~20년 후에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고 봅니다.
반면에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에서는 여전히 굉장한 응집력을 갖고 사회에서 큰 힘으로 차세대도 자력에 의해 끌려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있는데 티벳불교도 작년에 부탄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수계가 있을 정도로 어려운 상태여서 앞으로 불교가 힘을 갖고 후세대에 불법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그 이후에도 많은 고승이 중국과 서역인 인도로 가서 불경을 갖고 오기도 해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중국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았는데 반면 중국은 단기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나칠 때는 탄압이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 없이 흘러갔습니다. 조선은 중국과 불교의 교류기회가 차단되면서 자체적인 역량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스님에게 도첩을 주고 3년마다 반야심경, 금강경, 능가경으로 시험을 봐서 떨어지는 분은 강제 환속을 시키기도 하면서 경전과 수행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명나라 때 능엄경에 대한 연구서가 문화대혁명의 훼손을 거치면서도 10여 종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 통치를 했지만 불교는 역시 환영을 받아서 티벳불교와 한족의 불교도 성행을 했고 출가자 수가 견륭제 때 제한을 풀면서 그전에 11만 명에서 청나라 말에는 80만 명까지 늘었다고 합니다.
스님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타락이 있었는데 청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 불교계가 다시 깨어나야 한다고 운동한 분들이 바로 재가자들이었습니다. 재가자들이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고 불경에 대한 공부를 하였고 뼈를 깎는 각오로 수행하자고 하는 말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서 먼저 나왔습니다. 앞에서는 신심 높고 수행 잘 된 스님과 재가자들이 끄는 것 같지만 큰 역할을 하는 뒷바퀴에서는 대부분 세계 무대에서 사업하는 분들이 힘을 모아서 스님을 모시고 절을 지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절에서 스님을 모시고 중국의 선종 사찰로 순례를 갔는데 선종 사찰은 대체로 농촌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길이 좁아 차가 나무에 긁혀서 버스 기사님이 손해배상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보니 정토종이나 복을 비는 민간신앙을 믿는 분들만 있어서 스님은 중국 불교는 선기가 없어서 깨어나려면 30~40년 더 걸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중국의 불자들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냈을까 싶을 만큼 자기라는 것이 없이 즉각적으로 발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젊은 불자들이 갖고 있는 걸 보고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중국에서 천 년도 이전에 유명했던 선종사찰은 이미 무너진 곳인데 지방정부에서 관광을 목적으로 여행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겉만 멋있게 지어놓은 사찰이라 거기에서 복을 비는 모습을 보고서 스님은 중국의 불교를 다 봤다고 생각하셔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도시의 불교 공동체를 보실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스님께 중요한 건 임제, 마조, 혜능선사들이어서 더 마음을 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닫혀있다가 겨우 1900년대에 들어와서 다시 일어서는데 그때의 중국은 우리와 만나지 못하고 공산화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완전히 불교성지를 때려부수면서 탄압하는 문화대혁명이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저는 중국의 불자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로 책과 글에만 의지하며 저는 중국은 제대로 된 불자들이 나오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청나라가 망할 때 많은 사람이 먹고 살 길이 없어 탈출하는데 그 1세대들이 동남아시아, 즉 싱가폴 말레이시아 홍콩의 화교입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제일 많이 간 곳이 대만과 홍콩입니다.
청나라 말기에 스님 숫자는 많지만 공부하는 스님이 없어서 재가자들이 어려운 시점에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서 불경책을 찾아봤는데 책도 제대로 없어서 재가자들이 힘을 모아 남경을 중심으로 불경을 판각하는 작업을 합니다. 절 마다 재산은 많은데 그 안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재가자들이 분노하며 상하이와 북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일으키자고 그룹을 만듭니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들의 정신세계를 검토하니 확신이 안 서고 불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고 기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크게 후원을 하고 함께 공부했습니다. 소수의 스님들이 재가자들과 힘을 합해서 상해를 중심으로 불교개혁 운동에 동참하고 불교 교육 프로그램도 개조합니다. 중국은 남녀 차별 없이 모두 거사라고 불러서 거사는 재가불자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가자들 위주가 되고 재가자들이 법문과 의식을 하게 되니 개혁을 하려했던 소수의 스님들은 서운해 하면서 수행과 공부를 재가자보다 더 잘하려고 무문관(폐관)에 들어가서 몇 년씩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꽃이 피려는데 공산화되면서 대만으로 쫓겨 가는데 대만의 원주민과 쫓겨 간 한족 모두 거의 공황상태가 됩니다. 국민당 정부는 기존의 원주민을 통제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종 방책을 구사했는데 불교 수계도 이런 수단 중의 하나였습니다. 기존에 대만에서 스님으로 지내던 사람들도 국민당이 지정한 스님과 공간에서 다시 계를 받도록 규정을 정했고, 이 때문에 초기에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수계 신청을 안 한 분들은 모두 스님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했고, 이 때문에 불교의 수준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만 사회가 점차 안정을 되찾으면서 대륙에서 스님 생활을 했거나 독실한 재가불자였다가 국민당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 그 중에는 군인도 적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들이 퇴역을 하고 재출가를 해서 큰 스님이 되거나 훌륭한 거사가 됩니다. 법고선사의 성엄스님도 대륙에서 스님으로 지내다가 군인으로 대만에 와서 훗날 재출가하신 분입니다.
스님들이 재대로 된 수행을 하면서 신도들이 모이고 또 대만이 경제 부흥이 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사람이 옮겨옵니다. 그렇게 근대화가 되고 빠른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다보니 농촌에서 혈연관계로 따뜻한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도시에서도 공동체가 필요한 시기가 맞아 떨어지면서 도시에서는 큰스님이 필요했고 대만의 4대본산이라는 큰스님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큰스님들이 탄생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군인 등을 하면서 동고동락을 많이 하고 재가자나 사바세계에 대해 이해를 잘 하면서 수행을 하신 분이다 보니 재가자에 대해 스님으로서 갖고 있는 편견이 거의 없었습니다. 재가자 가운데 건축이나 경제 등에서 뛰어난 분을 다 수용해서 당신이 배운 수행법으로 가르쳐서 삶의 진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을 통해 홍보를 하면서 불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보시금이 늘어나면서 큰 절도 짓게 된 겁니다.
대만의 불자들은 어머니대부터 자식대까지 봉사를 오래 하는 분이 많습니다. 대만불교가 파죽지세로 확장을 하는 시점에도 대만의 불자와 스님들은 대만불교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이 기업가와 동시에 대만불교계였습니다. 공산당은 가진 게 없고 국민은 가난한 시점에 자존심은 건드리면 안 되겠죠. 그들 나름대로 맑시즘이라는 주체의식이 있으므로 몇 개의 공약지점을 정했습니다. 대만에서 가까이 갈 수 있고 불교가 마지막까지 흥했던 남동지역의 바닷가인 복건성을 중심으로 종교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관광을 중심으로 돈을 풀어줬습니다. 절을 짓는데 보시하거나 불자들이 관광 가서 불화와 같은 물건을 사주고 어떤 여성 재가불자는 삼보일배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현금을 주며 불교가 꽃 피기를 기도했다고도 합니다.
불광산사의 성운스님은 밀반출된 문화재를 많이 사서 중국 지방정부에 연락해 절에다 그저 돌려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 것을 계기로 그 스님들을 대만으로 초청하여 정치적인 이야기는 안 하고 대만의 불자들이 그 분들을 공경하면서 불상 이운법회를 했다고 합니다.
불교행사를 빌미로 삼아 교류의 폭을 넓혀갑니다. 불사나 교류를 많이 한 곳은 불광산사이고 자제공덕회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대륙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곧장 달려가서 전혀 티 내지 않고 뒤에서 조용하게 했습니다. 법고산사는 성엄스님이 일본에서 학위 받은 박사스님이어서 초반에는 학술을 중시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회과학원과 함께 학술대회를 하는데 대륙으로 못 오게 하면 제3지역, 하와이에서 열기도 했습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대만을 중심으로 결집이 되고 미국에 있는 불자들과 동남아의 화교들이 많은 금액의 지원을 했습니다. 중국의 불자들은 순수한 불교사상에도 깊이 몰입하지만 일상 생활 영위에도 도움을 많이 받는데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큰 불자가 많습니다.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는 분들과 함께 자금을 대고 앞에서는 절이나 기관이 나서면서 조금씩 대륙의 문이 열렸습니다. 공산당이라고 마르크스는 겉으로 떠드는 것이고 마음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임을 할 때도 앞에만 그런 얘기를 하는 건데 절 앞에 인공기를 세운 것을 보고 중국불교를 수준이 낮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판입니다. 공산당에서 심하게 개입하는 절이 아니면 정말 불심이 깊어서 우리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뤄질 수 있기까지 앞서 간 대만불교계와 동남아와 미국에 가 있던 불자들이 큰 마음을 내고 판을 크게 키워 대륙에도 언젠가는 불교의 싹을 키우겠다는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도 마르크스로는 안 된다는 걸 다 알아서 가장 먼저 돈을 투자한 곳은 유교여서 유교로 대체해보자고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유교에는 많지가 않아서 불교와는 비교가 안 되니 결국 불교에 문호를 열어주게 된 겁니다. 중국 정부에서 정한 규정을 넘어서지 않는 한에서는 불교적인 활동은 뭐든지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국 대륙에서 불교가 꽃을 피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현대 중국불교는 공산당이라 맨날 시키는 대로만 해서 글렀고 대만불교가 배울 만하다고 하지만 대만불교도 이미 성장기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단계입니다. 그 분들이 갖고 있는 신심이나 자질은 거룩하지만 대만불교의 문제점은 젊은 세대가 들어오지 않는 데 있습니다. 같은 옷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거나 규격화된 것을 젊은이들이 안 좋아하는데 그것을 빨리 변화를 시켰어야 하는데 큰스님 몇 분을 위주로 운영하다보니 지금 시류에 부합하기가 힘듭니다. 지금 대만불교에서는 티벳불교가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는데 사대본산은 탄탄하기는 하지만 최성기에 비하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체 중화권을 본다면 대륙의 불교가 훨씬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불교에 차이는 커서 저쪽에서는 질 떨어지는 기복불교를 하는 절도 있고 또는 세계 어떤 불교보다 선진적으로 나가는 절도 있습니다.
우리가 500년 동안 탄압을 받았던 그때에도 중국불교는 계속 전진을 했고, 대륙에서 쫓겨났을 때도 소수의 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분들이 자기를 버린 마음으로 오로지 불교를 위하는 대보살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이 축적이 되고 계승되어서 전반적으로 중국불교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현재 중국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조덕왕이라는 기부왕이 있는데 어려서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으나 앞으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자만 나던 마을의 특수유리 공장을 인수하여 자동차 유리 생산공장으로 전환해서 크게 성공한 분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복건성 복청에 황벽사를 짓는데 440억 정도의 돈을 혼자 기부했습니다. 지진이나 어려운 일에 몇 년 전까지 기부한 금액만 해도 2조를 훌쩍 넘긴다고 합니다.
중화권에서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층 중에 기부하는 사람이 불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니 정보력도 대단하고 여러 가지로 서로 도움을 주겠죠. 중국 불자 가운데는 이공계 출신이 많은데 불교가 과학과 부합되는 좋은 종교임을 알아서 앞서 이끌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인물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빨리 이용해서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한 포교가 빨리 이뤄졌고 해외의 불자들과 같이 예불을 하기도 합니다.
전통 문화를 활용하고 불심 깊은 사람들이 헌신하면서 중국의 불교를 키워나가기 위해 애쓰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중국에서 아무리 독재를 한다고 해도 불교의 뿌리는 더 강해져서 어떠한 여건에도 중국불교는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싱가폴의 거사림을 보면 항상 사회복지 분야에서 헌신부터 하고, 드러내지 않고, 오랜 시간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그런 부분은 배울 점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북한을 생각하면서 대만과 중국대륙의 불교 교류에서 배울 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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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바라밀님, 힘든 내용 작성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중국 불자님들의 바라밀행을,
한국의 불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찰 스님들께서도 공감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래전 대만 갔을 때,
주민들의 모든 생활을 공유하고 교류하던 대만의 불광산사를 보면서 우리 불광사도 크게 불사하면 그런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불사에 집중했었는데.. 지금처럼 가슴 아픈 일들이 있을 줄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하루속히 잠실벌. 아니 서울 시민들과 공유 및 교류할 수 있는 불광사로 거듭나기를 발원합니다.
법문 내용 중에서 녹음 내용과 조금 다른 부분은 박사님께서 추가로 보내주신 메일을 보고 수정한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보는 사람이 한정된 공간이지만 꼼꼼하게 수정을 바라시는 학자님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