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왕산 관룡사와 불뫼의 고장 창녕으로의 답사
가는 곳곳에 아름다움이 있는 사찰 관룡사
제2의 경주라 일컬어지는 고장 창녕, 양파와 추어탕 생태계의 자연학습장 우포늪 화왕산 갈대제로 유명한 이 곳 창녕을 오랜만에 다시금 찾았다. 여러 번 다녀온 유적지이지만 다시금 그 현장들이 궁금해졌다.
먼저 관룡사를 둘러보고 창녕읍내에 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관룡사 가는 길은 창녕읍내에서 계성면쪽으로 향하다 보면 옥천리가 나온다. 군데군데 화왕산군립공원 표지판이 있어 찾아가기는 쉽다. 관룡사가 있는 관룡산은 화왕산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구룡산 자락이다.
관룡사는 이러한 구룡산 남서쪽 중턱에 있으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라 짓고,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 5년(583) 증법이 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었고, 748년 추담이 고쳐 지었고 조선 시대에 들어 1401년에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17년에 영운이 다시 세웠다. 숙종 30년(1704) 가을에 대홍수가 일어나는 천재지변으로 금당과 부도 등이 떠내려가 유실되었고, 승려 20여 명이 익사 당하는 재난을 겪었다. 그 후 숙종 38년(1712)에 대웅전과 다른 부속 건물들을 다시 세웠고, 1749년에 부분적인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경내 외에는 보물 제212호로 대웅전, 보물 146호인 약사전, 보물 519호인 석조약사 여래 좌상, 보물 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1호인 약사전 3층석탑,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인 석장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호인 관룡사 부도 등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입구 길목에 무엇인가 서 있다. 바로 석장승이다. 시멘트길이 포장된 길을 조금 올라가다 옆으로 난 옛 흙 길로 가면 양 옆으로 마주보며 남ㆍ여 장승이 있다.
올라가는 길목의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곳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이 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6호)은 옛 오솔길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듯 반갑게 맞이한다.
전라도 남원 등 전라도 지역에서 보이는 석 장승과는 또 다른 맛이랄까 느낌이 좀 새롭다.
더 친근하고 아늑하며 마치 동네의 할아버지처럼 편안하게만 보인다. 아직도 순수한 면이 느껴지는 청년과 여승이랄까?....
왼쪽에 있는 것이 남장승인데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왕방울 만한 눈이 마치 금방이라도 뚝 튀어나올 같고 약간 송곳니를 내 밀고 있는 곳이 남 장승이고, 콧잔등에 잔주름 2줄 나 있고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다. 오른쪽의 여장승은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남 장승과 여 장승을 책자마다 달리 설명하고 있어 명확한 구분은 없으나 일반적인 의견을 따라 설명 표현하였다.
장승은 사찰 입구에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ㆍ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이 두 장승 모두 몸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언제 만들어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신앙물로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돌장승을 지나 옛 오솔길을 따라 가면 개울 쪽을 바라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다. 주변으로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가 시원스럽기만 하다.
대나무 숲이 거의 다 끝나면 높은 계단 위로 나타나는 소박하게 보이는 돌 산문 하나가 관룡사의 시작을 알려주는 일주문을 대용하는 역할을 하는 듯 하다. 특이하게 많은 돌 무더기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는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이 곳으로 올라가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현재 사천왕이나 아무런 신장상은 없으며 "火旺山 觀龍寺"란 현판 글씨만 있다. 이 곳을 지나만 마치 요새와 같이 원음각이란 건물이 앞 길을 막아선다.
원음각 옆으로는 중층 누각의 범 종각이 있는데 마치 이 곳도 밑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또 다른 느낌의 한 건물이다. 원음각에서 방향을 돌리면 대웅전 영역이다. 곧 바로 보면 약사전 영역이다. 대웅전 주변으로는 명부전, 영산각, 응진전, 새로이 신축한 칠성각 등이 있다.
원음각 옆 지붕 부분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약간 방향을 돌리면 대웅전이 있다. 가람을 다시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상단에 정면3칸, 측면3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인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뒷면에 산신각(山神閣)이 있으며 정면 좌, 우측에는 요사(寮舍)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정면 한단 아래에는 정면3칸, 측면2칸, 누각건물인 원음각(圓音閣) 및 좌측에 약사전(藥師殿), 삼층석탑이 구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라고 책자마다 설명되어 있으나 사실 막상 가서 보면 이 곳에도 석가모니불상이 모셔져 있다. 왜 이러한 문안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있으나 아마도 어느 순간 불상을 달리 모셨거나 아님 전체적인 설명을 누가 잘못 인용한 오류가 아닌가 싶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5년(1749)에 세 번째 중창했다는데 이 때는 부분적인 보수로 생각된다. 그리고 1973. 11. 3~12. 28일 해체복원. 1998년과 2001년 부분 보수공사 및 단청작업을 새로이 하였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불단에 마련된 수미단의 조각이 화려하고도 다채로워 볼만하다.
약사전(보물 146호)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단아한 맞배지붕의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한 칸 건물이며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다. 안 벽면에는 "사군자"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내부에는 보물 519호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겉옷 안에는 두 가닥의 접힌 옷자락이 역시 도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는 독특한 손모양이며 왼손 위에는 약 그릇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연속된 거북이 등 모양으로 연꽃을 표현하고 있는 상대가 특이하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호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현재는 호분을 다 벗겨 놓은 상태여서 예전에 보았던 불상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약사전 앞에 있는 작은 3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1호)은 암반을 이용하여 하층기단 면석에는 두 우주(隅柱)를 모각 하였으며 옥개석과 탑신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규모도 작고 지붕돌 받침도 3단으로 줄어 든 점 각 부분의 양식이 간략해진 모습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97년 현재와 같이 보수하였다.
이제 흔히 반야용선이라 말하는 용선대로 향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은 부처님의 세계로 끄는 배라는 뜻이다. 명부전과 요사채 사이로 700미터 거리에 있다. 처음 찾는 이들에게는 표지판(이정표) 방향이 입구부터 잘못되어 있어 자칫 등산로쪽으로 빠져들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10여 분 가파른 길을 오르니 큰 바위가 서서히 나타나는데 가까이에서 보는 부처님의 모습은 당당함이 풍기지만 용선대 바로 옆 능선 바위 위에서 보는 용선대의 모습은 거친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마치 배의 모양과 같다. 보물 제295호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산 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모셔졌으며 광배(光背)는 없다.
머리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풍만하고도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천년의 세월을 이기고 버티어 온 탓인지 마멸이 심하다.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은 일품이며, 밑에 옥천사지는 관룡사 만큼이나 큰 사찰이라고 옆에 사람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불상은 양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도식적인 옷 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반대편 거북바위에서 이 곳을 보면 거대한 바위가 마치 극락세계의 하늘 나라로 떠나는 것 거대한 배와 같다. 누가 이 불상을 타이타닉 불상이라 표현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참 그 말도 맞을 듯 하다.
관룡사에는 총 7기의 부도가 있다고 한다. 그 중 특이한 부도 1기를 찾아갔다.
부도들은 대홍수로 산사태가 크게 일어났던 조선 숙종 30년, 그 당시 사망한 22명의 승려들의 무덤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청련암으로 향하는 등산로 길로 접어들다 보면 입구 약수터 근처에 소박하면서도 윗 부분이 특이한 부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 호) 1기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단의 바닥 돌 위로, 아래ㆍ가운데ㆍ위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을 쌓고, 공 모양의 탑 몸돌을 올린 후 사각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에 비해 윗 부분의 몸집이 더 커 보인다. 조각솜씨들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더 한 20여분 올라가 창련암에서 바라다 보는 관룡사 전경과 주변 풍광은 뛰어나며 이 곳의 약수 물 맛은 일품이다. 이제 관룡사는 뒤로하고 창녕 읍내로 간다.
주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문화재
창녕 읍내에 있는 유적들을 찾아 나섰다. 다 도보로 이동 가능하나 여유가 없어 차로 이동을 하여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보물 310호인 석빙고를 맞이한다. 석빙고는 현재 도로변에 있으며 바로 앞에 유명한 설렁탕 해장국집이 있다.
창녕군 교육청에서 가까운 거리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은 1.48m×0.62m이며 "숭정기원후재임술이월초일일여사월초십일필(崇禎紀元後再壬戌二月初一日如四月初十日畢)"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모처럼 입구의 문이 개방되어 있어 내부를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였으나 조명이 전혀 없이 어두워 사진은 담지 못하였으나 구조는 경주 석빙고와 거의 똑 같았다. 석빙고 바로 앞 도로변에는 설렁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
다음으로 창녕읍내 읍사무소와 경찰서가 마주해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거나 도로변에 송현동석불좌상 표지판을 보고 따라 올라가면 만옥정 공원이 나온다. 이 곳은 현재 시민 공원화로 조성되어 분위기가 아늑하다.
가장 먼저 눈에 뒤는 것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창녕진흥왕척경비(국보 33호)이다. 이 척경비는 다른 곳(황초령, 마운령, 북한산)의 비에 비해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졌는데 다른 비문에서 보이는 '순수관경(巡狩觀境)'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아 '순수비'가 아닌 '척경비'로 불린다. 즉 영토의 확장을 알리는 척경비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어 원래 세워졌던 화왕산 기슭 목마산성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 옮겨 세워졌다.
비는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 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임을 알 수 있다.
만옥정 공원에는 이외에도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0호)이 있는데 원래 창녕읍 퇴천리 398번지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옮겨 세웠다. 2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위ㆍ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는 관아 건축물로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31호)가 있는데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 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ㆍ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12월 당시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5월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ㆍ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
척경비를 보기 전 작은 돌 비석 같은 것이 있는데 바로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창녕척화비(경상남도문화재자료 218호)가 있다. 척화비는 현재 경북 경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내), 포항, 장기, 구미, 순흥, 봉화, 청도, 군위, 성주,(성주여자종합고등학교내), 경남 함양, 양산, 산청(산청 초등학교내) , 부산시립박물관내, 기장읍, 충남 홍성, 아산 신창, 충북 옥천, 전남 함평, 전북 고창 읍성내에도 남아 있다. 이처럼 전국에 각 시ㆍ군에 한기 정도 남아 있어 중요성이 많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이라 새겨져 있다.(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므로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이 비는 땅위로 드러난 얇은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그 앞면에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담긴 강한 어투의 비문을 적어 놓았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으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주변에는 UN전적비, 창녕현감비군 등이 있다.
송현동 석불좌상 표지판을 따라가면 사실 석불좌상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이정표가 방향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화왕산 입구에 큰 천태종 사찰이 있다. 그곳에서 약간 걸어 올라가면 작은 한 단칸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마애불이다.
송현동석불좌상(보물 75호)은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하여 바위 자체를 광배(光背)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이 곳에서 다시 읍내로 내려가면 멀리 고분군이 보인다. 바로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이다. 작지만 창녕 박물관이 있어 관람을 하는 것도 좋으며, 야외에 원형으로 된 둥근 유리돔에 한 고분을 발굴한 것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적 80호 교동고분군은 가야시대 무덤들로, 1918년 일본사람들이 일부 발굴하여 보고서도 없고 유물도 잃어버렸다. 1993년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목마산 기슭 무덤 5기를 발굴조사 하였다. 내부시설은 모두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1호와 4호에는 추가하여 주검을 매장한 흔적이 있고 1호와 3호 무덤에서는 딸려묻기(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여러 토기류와 금ㆍ은제 장신구, 무기류, 마구류 및 철제 농기구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태와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만들어진 창녕지역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여진다. 길 건너 맞은 편 박물관 교동 고분군 뒤편에 고분들이 사적 81호인 송현동고분군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2지역은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만들어진 무덤들이라 추정한다.
주변에는 또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그 중 한 곳이 이름도 길어 외우기도 어려운 탑금당치성문기비(보물 227호)이다.
비면의 내용은 유월 삼일 ○표아찬 김○○원문기지신해인양사종성 신유년육사 ○ ○식이백육석.......(元和五年 庚寅 六月 三日 ○表阿飡 金○○願文記 之辛亥仁陽寺鍾成 辛酉年六寺 ○○食二白六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원화 5년은 입비년(立碑年)이며 신라 혜덕왕 2년(810)에 해당된다.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비는 직사각형의 바닥 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커다란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찰 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님(승려상)은 애띤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이며, 사람의 몸을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곳에서 약 10분 남짓 시장 골목을 걸어내려 오면 주변에 인가가 둘러 서있는 곳에 예상치 않은 탑이 있다.
바로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34호)이다. 이 석탑은 과히 불국사 석가탑에 견줄 만큼 그 예술적 기교가 뛰어나다. 2중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ㆍ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된다. 탑 주변에는 2002년 10월 김종규 군수님께서 문화 공보과 직원을 통해 동탑 옆에 임시 보호소를 주어 '동탑보호소'의 혜일스님께서 이 탑을 보호하고 계신다.
여기서 조금은 떨어진 곳에 보물 520호인 술정리 서삼층석탑이 또 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일반형 석탑으로 2중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탑은 아래ㆍ위층 기단을 8개의 돌로 구성한 특이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은 바닥돌과 한돌로 붙여서 만든 8개의 돌을 짜 맞추었는데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그 사이로 가운데기둥을 2개씩 새겨 놓았다. 위층 기단도 8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마다 중간에 작은 널돌을 한 장씩 끼웠으며, 모서리기둥을 두지 않고 4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얇고 평평하며 밑면의 받침은 5단씩이고,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만옥정 공원에서 화왕산을 바라보며, 예전에 갈대제를 본 기억과 구름이 걷히는 듯 운해에 가린 화왕산을 올랐던 기억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창녕 한 장소에 많은 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는 이 곳도 경주 못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떠날 볼 수 있는 그런 고장이다. 아직은 순박한 많은 이들이 있기에 늘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그 곳 창녕으로 한번쯤 떠나 보길 권해 본다.
<붓다뉴스> 김환대 2003. 9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여여님^^
관세음 보살! _()_
관세음 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