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수련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면 대장부
효봉스님의 법맥을 잇고 조계총림을 개원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구산수련(九山秀蓮, 1909~1983)스님.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한편 늘 자상한 미소와 친절한 가르침으로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에 도움을 준 선지식이다. 구산스님의 수행일화를 문도들이 펴낸 법어집 <구산선문(九山禪門)> 등을 참조해 정리했다.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면 대장부”
효봉스님 법맥 이은 조계총림 초대 방장
정화불사 적극 참여 한국불교 수호 앞장
○… 구산스님은 불일회(佛日會)를 결성하고 재가불자들의 수행정진을 도왔다. 스님은 재가자들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방편으로 일주일을 ‘칠바라밀’로 다시 정했다. 육바라밀에 만행(萬行)을 추가한 것이다. 월요일은 베푸는 날(보시), 화요일은 올바른 날(지계), 수요일은 참는 날(인욕), 목요일은 힘쓰는 날(정진), 금요일은 안정의 날(선정), 토요일은 슬기의 날(지혜), 일요일은 봉사의 날(만행)로 정했다. 스님은 송광사 달력에 칠바라밀을 표기해 불자들의 정진을 독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취지를 밝혔다. “‘나’라고 하는 정의와 한계와 가치와 의무를 알고 참나(眞我)를 깨달아 ?瓚� 굴레를 벗고, 올바른 길을 택해 진실한 희망의 길로 나갑시다. 그 길은 곧 생활불교의 길인데, 칠바라밀을 7요일(七曜日)로 나누어 매일 실천하는 신행생활(信行生活)을 한다면 올바른 인생(人生)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주창한 정혜결사의 정신을 이어 ‘제2 정혜결사’를 전개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지눌스님의 선풍을 계승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잇고, 수행정진의 풍토를 조성하겠다는 발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산스님이 평소 “승려가 본분인 ‘마음 닦는 일’에 전념하고, 절에 있을 때나 절 밖에 있을 때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원력에 따른 것이다.
<사진>송광사 삼일암 미소실 앞에서 미소를 짓는 구산스님. 사진출처=<구산선문>
○… 구산스님은 정화불사의 완수를 위해 헌신했다. 정화불사의 바람이 전국을 몰아치기 시작한 1954년 11월 조계사에서 구산스님은 사부대중의 동참을 호소하고 정화불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무려 500자에 이르는 혈서는 조계사에 운집한 비구.비구니 스님들을 숙연하게 했다. 범어사의 지효스님은 구산스님과 같은 의지를 드러내며 할복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때 ‘소단지(蘇斷指) 김할복(金割腹)’이란 말이 나왔다. 구산스님의 속성이 소 씨이고, 지효스님의 속성이 김 씨에서 비롯된 말이다.
○… ‘소단지’라는 별명 외에 ‘일수좌’라는 별칭도 스님을 따라 다녔다. 어느 도량에 머물든지 한시도 쉼 없이 일하는 가풍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사 창건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전소(全燒)된 송광사 복원불사에 스님은 모든 것을 투여했다. 참선 수행을 하면서 절을 짓고, 다시 세우고, 가람을 수호하는 것이 스님의 또 다른 수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일수좌’였다. ‘일하는 수좌’라는 의미다. 또한 스님은 은사 효봉스님을 극진히 모신 ‘효상좌’로도 유명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모셨기 때문이다.
○… 스님의 방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문턱이 낮았다. 생사의 문제나 생활의 고민을 갖고 찾아온 불자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명의 어둠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스님은 한결같이 ‘이뭣고’ 화두를 방편으로 법문을 전했으며, 직접 쓴 붓글씨를 선물하여 부처님 인연을 맺도록 했다. 전국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송광사 여름수련회도 구산스님이 방장으로 있으면서 처음 시도한 것이다. 이때도 스님은 수련생들을 일일이 만나 고충을 들어주고, 삶의 방향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 1983년 12월16일 송광사 삼일암 미소실에서 구산스님은 평소 참선하던 모습 그대로 원적에 들었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네 가지 유훈을 남겼다. “내 몸에 주사를 놓지 마라. 좌선하는 자세로 장례를 치러라. 화합하며 살아라. 선풍(禪風)에 누가 되지 않게 하라.”
■ 어록 ■
“세간을 벗어난 납승(衲僧)들이 바른 길을 정하지도 못하고 미로(迷路)에서 방황한다면 그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 가사를 걸치고서도 사람 몸을 잃게 되면 이것은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이 몸뚱이가 있기 전에나 이 몸뚱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주인이 있으니 그걸 찾아야 산 목숨이다.”
“설산(雪山)은 그만두고 지구 전체가 진금(眞金)이라 해도 나 자신과는 바꿀 수 없다.”
“불자들이여,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 참된 자기를 발견하고 완성하라. 스스로 진성(眞性)을 깨닫고 또한 남도 깨닫게 하면 이 어찌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 효봉스님에게 인가받은 구산스님 ■
1951년 정월 보름, 동안거 결제 후 구산스님은 부산 금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효봉스님을 찾아 게송을 지어 올리고 경지를 인정받았다. 이때 구산스님이 효봉스님에게 올린 게송과 효봉스님이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大地色相本來空(대지색상본래공) 대지의 색과 상이 본래 공한데
以手指空豈有情(이수지공기유정) 공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어찌 정이 있으리오
枯木立岩無寒暑(고목립암무한서) 마른 나무 서 있는 바위엔 추위와 더위가 없건만
春來花發秋成實(춘래화발추성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열매 맺도다.
贈九山法子(증구산법자) 구산법자에게 줌
裁得一株梅(재득일주매) 한 그루 매화를 얻어 가꾸라 했더니
古風花已開(고풍화이개) 옛 바람에 꽃을 피웠구나
汝見應結實(여견응결실) 그대 응당 열매를 보았으리니
還我種子來(환아종자래)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
■ 수행이력 ■
한국불교 세계화 관심 각별
500자 혈서 정화불사 ‘앞장’
1909년 12월17일(음력) 전북 남원군 남원읍 내척리 509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소재형(蘇在衡)선생과 모친 최성녀(崔姓女)여사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소봉호(蘇鎬). 본관은 진양이다.
어려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하다, 1923년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가사를 책임졌다. 이 무렵부터 남원 용성보통학교 정문 앞에서 명치(明治)이발관을 운영했다. 부처님 10대 제자로 이발사 출신인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존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진>구산스님이 주석한 조계총림 송광사 전경. 불교신문 자료사진
20대 후반에 병고가 찾아온 후 생사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한 지인(知人)의 권유로 지리산 영원사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했다. 그 뒤로 불법(佛法)에 귀의해 송광사 삼일암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가 1937년이었다. 효봉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이듬해인 1938년 통도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후 송광사 삼일암 선원, 백양사 운문사 선원, 통도사 백련암 선원에서 정진했고, 1943년에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 정각토굴에서 용맹 정진했다. 1946년 가야총림 개설 당시 은사 효봉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되자 도감 소임을 보았다. 1947년 합천 가야산 법왕대에서 정진 중 깨달음의 경계에 들었다. 1951년 효봉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法脈)을 이었다.
1953년 통영 미래사를 창건하고 은사 스님을 모시며 불법을 폈다. 정화불사가 발발하자, 500자 혈서(血書)를 써서 당위성을 알렸다. 1955년 초대 전남 종무원장을 거쳐 조계종 중앙감찰원장(1956년, 1967년), 중앙종회의원(1960~1967년), 팔공산 동화사 주지(1962년) 소임을 보면서 정화불사를 완성하고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1957년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안거를 했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69년 5월30일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원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같은 해 불일회(佛日會)를 창립해 총재 겸 총회장을 맡는 등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 구산스님은 1976년 동국대 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눈을 돌려 미국 LA 고려사(1979년), 스위스 불승사(1982년)와 미국 카멜 대각사를 창건했다. 1973년에는 조계총림 불일국제선원의 문을 열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83년 은사 효봉스님의 유훈을 계승해 제2정혜결사운동을 발원하고, 제8차 중창불사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12월16일 조계총림 삼일암에서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47세. 저서로 영문판 법어집 , 법어집 <석사자> <칠바라밀> 등이 있다. 법명은 수련(秀蓮), 법호는 구산(九山)이며, 별호(別號)는 석사자(石獅子)와 타우자(打牛子)이다. 상좌로 보성.원명.현호스님 등이 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