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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여요전쟁 2차때 개경이 함락됐으나 3차때 귀주대첩에서 승리하다!
인접한 두 나라는 예외없이 원수지간으로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은 곧 두 나라의 국력이 비슷
하다는 것인데, 그중 한 나라의 국력이 강성해 지면 반드시 이웃나라를 핍박하며 군신관계
로 복속을 요구하고 듣지않으면 침략하는 것이니 인류 5천년사는 “침략 전쟁의 역사” 입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와 게르만족, 스페인과 영국,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오스트리아), 독일과
러시아, 러시아와 터키, 북방민족과 중국,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과 버마, 파키스탄
과 인도, 이스라엘과 중동은 원수지간으로 100년 평화가 드문데.... 1603년부터 1874년까지 270여년
동안 평화를 유지한 한국과 일본이 매우 드문 사례이니 12차례 통신사를 보내며 선린우호 했는가 합니다.
거란은 916년(907년?) 나라를 세운지 10년만인 926년에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공격
해서 무너뜨리고 만주지역을 장악한후.... 인접한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냈으나,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인식하여 사신
들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게 만드니 외교 관계는 단절 됩니다.
거란은 인구가 3~400만에 불과하지만 큰 꿈이 있었으니 중원에 자리한 송(宋) 나라를 침략해 정복하기
위해서는 후방의 안정을 도모해야 했고.... 아직 정안국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도 거란을 상대로 저항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방에 있는 고려와의 관계가 중요하니 친교하고자 했지만 고려는 멸망한 발해
잔존 세력을 흡수하여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므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려 건국시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만까지였는데 태조 왕건은 고구려인들이 모두 당나라로
잡혀간 결과 사람이 살지않던 황무지인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목책을 두르고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켰으니, 이후 고려는 북진 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에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북송)과 친선을 도모했고 4대 광종대인 960년에는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으니.... 이때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방에 주둔 중이던 거란에 대한 경략을 시도합니다.
926년 발해 멸망후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도 송나라와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으니 이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을 타개하고자 986년 정안국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고는 만주 전체를
장악한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따르지 않자 송나라
2차 북진을 간신히 격퇴한 7년후인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때 소손녕은 청천강 부근의 봉산을 공격해서 고려군을 무너뜨리고 윤서안을 포로로 잡아 봉산을
점령한 다음에 거란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향해 윽박
질렀는데, 물론 80만 대군은 소손녕의 허풍이었고 실제로는 6만명 정도 동원했다는게 통설 입니다.
거란 측 선봉장이었던 소손녕의 직책이 동경유수였으니... 동경유수 직위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최대 60,0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소손녕이 이끌고 온 거란군
의 규모도 그 정도이거나 더 적었다고 보는데, 청천강을 건너기 위해선 안주성을
공격하는 것이 더 빠르니 압록강을 건넜으면 안주를 거쳐 평양을 가는게 큰 길입니다.
소손녕은 봉산을 점령한후 안주성을 빙 돌아가 조그만 토성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대도수에게 패했는데,
고려 정규군 병력이 많이 있을 곳은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니 이 전략을 사용하면 수도인 개경 까지
속전속결로 가는 전략을 쓸수가 없으므로.... 1차 침입 때는 개성까지 쳐들어갈 생각이 없었다고 봅니다.
거란이 대군을 투입한 2차 침입 부터는 둘러가지 않고 개성으로 직진한 것과 큰 차이가 있는데, 안융진
전투 이후 거란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청한 것만 봐도 알수 있듯이..... 1차 침입은 무력 시위의
성격이 강했으니, 소손녕이 고려를 공격한 것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침공해 점령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송과의 대전을 앞두고 고려가 요나라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라 여겨집니다.
훗날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국 본토로 들어가 송나라와 싸우기 전에 배후에 위협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고... 몽골도 20만 대군으로 남송을 공격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위해 북만주
지방군 3만으로 고려를 침공했으며, 후금(청)의 태종도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침공을 통해 조선군이 배후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미리 조처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요군의 침입에도 고려는 매우 동요했으며, 80만 대군이란 말에 겁에 질린
신료들은 싸울 생각은 전혀 없고 항복하는 것은 당연한데.... 다만 "항복하자"(항복론) 주장과
"항복만 하면 받아주겠냐? 땅도 같이 떼줘야지." (자비령 이북 할양론) 로 나뉘었는데 이때
오로지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습니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군을 격퇴
하였음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은 비굴하게도 80만(실제는 6만 정도) 허풍설에 겁을 먹고는
요군과 싸울 생각일랑 전혀 없이 또 강화론으로 돌아섰으니 이때 소손녕이 다시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유일한 주전파인 서희는 단신으로 요나라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입니다.
전쟁에서 병력 규모를 부풀리는 것은 항용 있는 일이니..... 헤로도토스는 2차 페르시아전쟁 때에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를 240만으로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20만~50만으로 보며, 삼국지연의
에서는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은 70만 조조군은 40만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원소군 10만에
조조군 4~5만으로 보며 또 적벽대전 조조군을 100만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25만으로 추정됩니다.
국내에서도 나당전쟁 매초성 당군이 20만이라지만 이근행의 말갈병 1만을 합쳐 4~5만 정도며
임진왜란때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명의 돌격에 몰살당해 수습돤건 광주유수
권율의 1천과 황진의 수백명에 불과할 정도로 패배한 이광의 남도근왕군을 10만이라고
했지만 6만 정도이고, 병자호란 경기도 광주 쌍령 전투에서 참패한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의 병력이 3~4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8천이며...... 또는 2천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만 서희가 파견된 것은 고려 내부에서는 어차피 거란에 빼앗길 것이니 서경(평양) 곡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뿌리고 남은건 태워버리라는 명령에 반발해.... '그 곡식으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데 버리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자 '그럼 말을 꺼낸 네가 가서 협상을
해봐' 라며 비웃듯이 파견된 것이니..... 고려 군신들이 하나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으니 이른바 “의전 분쟁” 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의전 싸움으로 인해 회담 자체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으니, 소손녕
과 서희는 회담의 성격을 결정하기 전에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에 대해 의전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서희가 주장한 동등 의전을 관철함으로써 의전 분쟁에서 승리합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 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라고 당당히 되받아 쳤습니다.
소손녕이 계속 이를 고집하자 서희도 숙소로 철수하는 방식으로 응답하니 결국 소손녕이 한발
물러나서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는데.... 소손녕의 진짜 목적(회담 타결)과
약점(병력이 적었음)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니, 소손녕이 진짜
고려 침공을 각오했다면 서희를 처형한 후에 그대로 진격했을 것이니 이 시점에서 '거란군
은 남하할 생각은 없는 것 같네? 그럼 더 뻗대도 되겠다!' 라는 감을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요나라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중국 송나라였고,
고려 침공은 송나라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었는데.... 회담은 고려가 어느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는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삼았습니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 군영으로 갔는데, 동등한 예로 대하면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면서 서희에게 말하기를,“너희 나라는 신라(新羅)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 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수 있을 것이다.”
소손녕이 고구려땅이 자기들 소유라는 것은 발해를 취했다는 것이고,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는 말은....... 고려초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만인데 당나라가 평양 등의 고구려인을 모두
잡아간 탓에 황무지로 변해 방치된 빈 땅인 평양을 왕건이 사람을 보내 목책을 쳐서 차지하더니
여진족(발해인)들이 사는 평안남도까지 야금야금 줏어먹으면서 청천강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
을 정한 것입니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우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의 영역 안쪽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朝聘)의 예를 갖추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신의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
하신다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므로
소손녕도 억지로 하지 못할것임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갖추어서 아뢰니,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들을 철수시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서희가 거란
군영에 7일간 머무르다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강나루로 나와 맞이하고, 곧 시중 박양유
로 하여금 예폐사(禮幣使) 가 되어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여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조정에 들어가 뵙고 통교를 할수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겨우 강(압록강) 안쪽만을 수복하였으니, 강 바깥쪽까지 점령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의 예를 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오랫동안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될까 두렵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보내었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2년 10월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평안북도 서쪽 일대인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는데 7일 중에
대부분은 전권대표들이 아닌지라 본국과 연락하며 협상 조건이 본국 방침에서 수용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과, 수정 제안을 위해 회담 실무진과 수석대표 간 사전조율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강동 6주는 정확히 말하면 요나라의 영토라고 볼 수 없는 옛 발해땅으로 미개발 상태로
일정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여진족(말갈)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영토 할양이라기
보다는 고려가 여진(말갈)인들이 300년 이상 대를 이어 오래토록 살아온 압록강 하류
강동 6주를 공격해 점령하더라도 거란이 이것을 인정하겠다는 뉘앙스의 담판 이었습니다.
이때 요나라는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는 여진(말갈)인들이 무려 300년 이상 대를 이어 살아온
지역이니 고려가 그렇게 쉽게 평정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겠지만, 고려는 그렇게
점령했으며 험한 지형에 방어 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훗날 거란이 2번이나 고려를 쳐도 이
요새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강동 6주의 요새들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국내 위인전이나 역사서에서는 소손녕이 멍청해서 서희한테 말에서 졌다거나, 혹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명분론 주장에 일리가 있다며 물러났다는 내용을 싣지만... 말 몇마디
에 자기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돌아간다는건 있을수 없고 소손녕이 자기 마음대로
강동 6주를 넘겨줬다면 거란 황제가 소손녕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며 고려의 반박에 소손녕
이 순순히 물러났던 것은 거란의 진짜 목표가 고려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요나라는 송나라와 처절한 전쟁 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뒤에서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고려와 친교협상을 맺거나
적어도 송나라와의 관계를 접게 만들어야 했으니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소규모
전투만을 반복하다가 안융진전투 이후로 거란쪽에서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후 고려는 요나라의 요구대로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
주었는데.... 서희는 이걸 간파하여 고려가 강하게 나가도 된다고 파악한 것이니, 그리고
강동 6주는 애시당초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고 본래는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후에도 거란행정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이곳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된 곳입니다.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거란에 끌려가거나 고려에 투항한후 평안북도는 미개발 상태로
여진인들이 구심점도 없이 대를 이어 살고 있었으니.... 서희는 요나라와 고려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형식을 갖추겠다는 뜻입니다.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당시 요나라의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으며 또한 거란도 고려가
사신을 통교하기 위해 압록강 동쪽 여진족을 축출하는 동안, 역시나 사신을 통교하기 위해
압록강 서쪽(북쪽 만주지방) 여진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결과적으로 고려와
거란 모두 윈윈이 된 외교 담판이 되었으니 새우등 터진다고 여진족만 날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994년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기를, “황제의 명[宣命]을 받들기를,‘ 고려 신의와 호의로써 통교
(通交)하였을뿐 아니라 국토도 맞닿아있다.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데에 규범과 의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작을 잘 궁구하여 잘 맺는 길은 모름지기 우호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데에 있다.
사신의 왕래가 도중에 막히게 될까 염려되니 요충지가 되는 길목에 성(城)과 해자(垓子)를 조성하도록 하라.’
황제의 명에 따라서 압록강 서쪽 마을에 5개의 성을 축조하면 좋을 듯하여, 3월 초에 축성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대왕께서 안북부(安北府)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280리 사이에 답행(踏行)하여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시고, 성을 쌓도록 명하여 역부(役夫)들을 징발해 보내어 시작하게 하시며, 쌓아야 할
성의 총 수를 회신해 주십시오. 중요한 일은 수레와 말이 오가게 하여 조공을 위한 길을 열고 영구히
조정을 받들어 편안하게할 계책에 화합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3년 2월
그로부터 11년 후인 1004년에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전연의 맹을 맺은 요나라는 기존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훗날 후금이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듯) 필요성을
느꼈으니....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요를 사대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와,
고려 국왕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하여 고려 현종시대에 2차 침략을 감행합니다.
고려는 평안북도 강동 6주를 얻음으로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 방어의 중심지
로서 여요전쟁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그리고 윤관의 여진족 정벌 이후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되는데, 서희는 압록강 바깥 여진족들이 사는 우리 옛땅(고구려)까지
취한 다음에 사신을 보내도 늦지 않다고 말하니 성종은 "그럴때 까지 거란이 기다려줄까? 시간 끈다고
트집잡혀 전쟁나면 곤란하다." 며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 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국교를 맺었습니다.
서희(徐熙)가 얻은 청천강 이북 강동 6주는 여요전쟁 및 대몽항쟁에서 제대로 된 방어전을 펼 수 있었던
곳이니.... 흥화진(의주), 귀주 등의 지명은 이후 여진과의 전쟁, 대몽 항쟁, 홍건적과의 전쟁 등 고려의
대외 항쟁사에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이 등장하니 가히 고려 국방 전략상 가장 중요한 곳으로 됩니다.
고려는 994년 즉각 북송과 국교를 끊었으나 성종은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 는 국서를 보내 변명했으며, 성종이 승하한 후에도 목종이 997년에는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내는 등 계속해서 북송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후 하공진은 강조에게 협력한 대가로 동료 유종과
함께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되자 1010년(현종 1년) 봄, 조정의 명도 받지 않은채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가 패전하는데.... 이에 당시 화주를 맡고 있던 유종이 앙심을 품고,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고 화주에 들어와있던 여진 추장과 수행원 95명을 비겁하게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훗날 1107년에 윤관이 17만 대 병력을 거느리고 함경도로 진격해 여진족 부락들을 침략할때 여진
추장들에게 사자를 보내 화의를 하자면서 고려진영에 잡아두었던 여진족 허정(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고 거짓통보를 하자 여진족 추장등 400여명이 왔는데 미리 매복한 고려군이
이들을 모조리 붙잡아 죽이고는 진격하니.... 추장을 잃은 여진 부락들이 패주했던 일과 유사합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학살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대신 원한
을 갚아줄 것을 호소하니 여진의 협력을 얻게 된 요성종은 한 껏 자신감을 얻었는데..... 본시 거란도
고려보다 오히려 여진 세력부터 제거했어야 했으니 실제로 이후 여진에 대한 제어가 느슨해지자
거란이 여진(금나라) 에게 처참히 몰락한 것이 바로 고려의 여진 정벌 실패로 부터 시작된 것 입니다.
현종이 즉위하고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린 것을 비롯하여 몇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요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려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사신을 파견하여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이유를 정식으로 물어왔는데, 고려는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9월
에는 거란의 수도인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냈으나 거란의 강경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조정은 1010년 10월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하고 고려 전역에서 병력을 긁어모아
30만 대군을 꾸려 통주로 보냈으며... 이등병으로 불명예 제대시킨 박정희를 6.25가 터지자
복직시켜 대대장으로 임명했듯, 귀양보냈던 하공진과 유종도 복직시켜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토록 했는데... 총사령관 강조는 통주에 진을 치고 주둔하며 거란군을 기다렸는데
조정이 명했다는 것은 요식행위였고 실권자 강조가 직접 작전을 짜고 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라 권력 기반도 불안정한 상태였고 본인이 아니면 30만 대병력
을 총지휘할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도 문제였으며... 게다가 거란의 침공 명분도
강조의 쿠데타였으므로 이 명분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
했으니 장렬한 최후와 연계해보면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 성종은 친히 보기(步騎)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며 거란군을 진두지휘
했는데, 실제 군세를 주도하는 도통(都統)에는 대송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였던 소배압을 임명했고 사신을 보내 미리 출병 사실을 통지하는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고려 조정내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을 유도한 전술적 행동이라고 봅니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기존에 알려진 진군로를 따라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까지 행군하였는데, 이곳은 강동 6주로 거점이 모두 요새화된 지역이었으며
특히 흥화진은 11월 중순경 부터 일주일 이상 공략하고도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요 성종이 수비군 20만을 무로대에 남기고 남진을 결정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아무리
흥화진에서 고전했다고는 하나 총병력 40만중 절반이나 되는 20만의 대병력을
후방에 두고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대결했는데, 내원성이 고려 침공의
중간 기지였다는 점이나 거란군 특유의 기동전 선호 등에서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거란이 북송과 전쟁에서 전연의 맹때 남진한 병력이 20만이니 그후 20만 넘게 동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후방에 남긴 20만은 상당히 부풀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 25만 정도가 실제 병력으로 여겨지니,
설사 40만이라고 하더래도 후방의 20만은 허약한 잡병이니 원정군 입장에서는 보급 물자의 소모도
계산해야 하고 또 잡병은 전투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노무자들을 예비군으로 끌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통주(평북 선천)에서는 30만 강조군이 초전에서 거란군을 격퇴시켰지만 강조가 탄기(彈棊 바둑?)
를 하며 방심한 사이 크게 격파당하니 많은 장수가 전사하였고 강조를 비롯한 부통사 이현운
(李鉉雲) 등 장병들이 거란의 포로가 되는데, 이현운이 배신하고 거란을 섬긴다고 하자.....
강조는 그에게 욕하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때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서 강조를 꾸짖고, 강조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이야기
가 정사인 고려사에 나오는데... 물론 실제 혼령이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굳이 사실이라고 본다면,
항복을 거부하며 장렬하게 죽은 강조의 모습과 연관시켜 볼 때 자신의 잘못이 고려의 파멸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목종을 떠올리면서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추정 합니다.
고려군 전사자는 무려 30,000명에 이르렀으니 이 처절한 패배로 사실상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 주력
은 여기서 소멸했는데, 이는 2차 여요전쟁 때 3차 여요전쟁과 달리 고려군이 거란군을 상대로 야전으로
승부를 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으며 개경을 그대로 방폐하고 임금이 피란간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서경(평양) 공방전에서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으니 현종은 거란군을 막기
위해 동북면 도순변사 탁사정과 함흥의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급파했는데....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탁사정과 합류해서 서경으로 입성하기 위해 서경 인근
성천에서 대기하는 동안 서경 유수 원종석은 이미 거란에 항복을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지채문이 급히 서경에 도착했으나 이미 항복 분위기로 돌아선 서경 군민은 성문을 닫고 열어
주지 않았으니, 마침내 지채문 막하에 있던 최창이 서경 내에 사는 조자기와 연락해 성문
을 열었지만 이미 평양의 항복 문서는 서경을 뜬 상황이라 결국 지채문은 극단적인 방법
을 택하기로 결정하고는 항복 사절을 급히 추격하여 그를 죽인 뒤 항복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이 극약 처방에 서경 민심이 "지채문 저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 며 극도로 흉흉해
졌고 이기지 못한 지채문은 다시 서경 성내에서 쫓겨났으며... 게다가 이 순간 거란군 진영에
현종의 시간 끌기용(?) 항복 표문이 도달하니 요성종은 스스로 서경유수와 부유수를 임명해서
파견하였으니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용이었지만 서경이 함락됐다면 진짜 항복 사절이 됐을 것입니다.
서경의 장수들과 병사 그리고 성민들은 모두 항복을 결정했고, 거란의 새 서경유수 일행이 남하하던 그
결정적인 순간에 탁사정의 동북면군 주력이 도달했으니 지채문은 탁사정을 만나서 정세를 이야기
하고, 대군을 이끌고 온 탁사정에 의해 매국노 원종석은 처단되고 서경의 혼란(항복)은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서경에 강화 사절의 선발대로 새로운 서경유수(?)인, 거란의 한기가 이끄는 기병 200기가
도착했는데 만약 탁사정이 단 하루만 늦었더라면 서경은 함락되고, 전투는 여기서 끝이었을 것인데...
전투가 다 끝난 줄 알고 여유만만이던 이들은 매복한 고려 기병의 기습에 반은 죽고 반은 포로로
잡혔으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 덕분에 사절 본대인 서경 부유수 울름의 기병 1,000기
역시 그후 고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궤멸당하자 분노한 성종은 거란군에 서경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거란군의 공세가 거세어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탁사정은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공격해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자기가 이끄는 주력이 서문에서 출격해 거란군을 기습하자는 작전을 내놓았
는데.... 그런데 탁사정은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커녕 임진왜란때 경상좌병사
이각이 동래성을 나와 도주했듯이, 남쪽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으니 그는 기껏 패전을 막은 영웅
에서 하루 아침에 졸장부로 돌변했고 배신당한 대도수는 결국 분전 끝에 패배해 거란에 항복합니다.
고려군 지휘부와 주력군이 하룻밤 새에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은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중간급 간부이던 통군 녹사 강민첨과 조원의 활약으로 서경을 지켜낼 수 있었으니
이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은 후일 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에 다음 가는 부원수의 자리에 이릅니다.
한편 흥화진을 고수하던 양규는 정예 기병 700기를 뽑아 출격해 일단 적에게 빼앗겼던
곽주를 탈환하여 주둔하고, 성 주민 7,000여명을 통주로 옮겨 작전 지역을 넓혀
나갔으니.... 이에 전국(戰國)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고 하는 거란군은 곽주,
통주, 서경의 요충지들을 후방에 그대로 방치해 둔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해 왔습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무척이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왕의 피란을 전격 결정했는데 그러나 이 피난길에서 임진왜란때 선조
처럼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고 현종과 두 왕후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명이 전부였으니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 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적성현(경기 연천)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
(임금)을 범하려 하므로 지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 길을 막았는데, 지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현종조 원년
밤중에 적도 (賊盜 고려 지방의 아전과 백성)들이 다시 오니 시종하던 신하와 환관, 궁녀들은 모두 도망쳐
숨고 오직 현덕 왕후와 대명 왕후, 시녀 2인, 승지 양협과 충필 등만 시종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
왕은 몽진 도중에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비롯해 신변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는데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는 처음 파주에서 굶주린 호위 병사와 종들이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음식을 덥치는
등 사건을 제외하고는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는데..... 당시 고려는 강력한 중앙 집권제에
유교가 정착된 조선과는 달리 지방 분권에다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 입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 드는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그런데 실상은 임용한씨의 말과는 달랐으니 선조 몽진시 장병들이 탈영하자 수성위장들은
일부 탈영병들의 목을 베었지만 탈영은 계속되었고, 부위, 교위등 장교들의 탈영에
이어 오위장과 각 위장(衛將)들도 전부 도망치고 가마꾼들이 달아나니.... 후궁과 왕자,
공주들도 가마를 타지 못하고 빗속에 걸어가야 했으며 도중에 마중나온 군수가
밥을 지었는데 임금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병사와 종들이 부엌에 난입해 먼저 퍼먹었습니다.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자 배를 불살라 함께 피난중이던 일행들 조차 건너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피난 행렬에 백성들은 돌이나 물건을 던졌고, 궁궐의 내관, 궁녀에다가 당상 당하의 관료들
에게도 돌과 흙을 던지고 물건을 던졌으며 어가가 떠난뒤 백성들과 노비, 광대, 서얼 등은
서울 궁궐에 불을 질렀고, 호조에 있던 노비문서와 호적이 상당수 화재로 전소되니 일부
공노비들은 자신의 신분, 호적을 날조하거나 종전후 다시 신고하는 식으로 노비에서 벗어납니다.
개성에 체류중 한 백성이 선조를 향해 “상감은 그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 배 불리기에만
열중했고, 후궁 오라비 김공량만 사랑하는 것을 제일 계책으로 삼다가 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느냐” 고 아우성치기도 했으며.... 평양에서 떠날 때도
백성들이 가로막으니 목을 베었고 떠나지 않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뒤 다음날 기어이 달아납니다.
다시 여요전쟁 2차침공시 약탈하기 위해 왕의 행열을 추격하는 현지 고려인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고 시건방지게 거만을 떨었으니...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지방업무를 담당하던 지배계층 이었으며,
중세 유럽으로 치면 중앙의 왕조와 사이가 좋지않은 지방 소영주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고려 현종은 일개 지방 아전의 무례함에 화가 머리꼭지 까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침묵하는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고,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라고 답합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집어먹었으니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에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
이었으니....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수없는 적이 공격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립니다.
경종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와 시녀 2명, 승지 몇명만이 남았으며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 때 임신중이었으니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왕을 수행하던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으니 《고려사절요》 현종조 원년 기록입니다.
새벽이 되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채충순이 뒤따라 왔다. 지채문
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하공진이 아닌 듯 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지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는데....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임금에게 반역하였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하였으며 이에 지채문
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았겼던 말과 안장을 되찾아왔습니다.
이처럼 고전을 거듭하였지만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는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으며....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으니 이때 대량의 고서적과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이며,
하공진은 스스로 요성종에게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사신으로 북쪽으로 향했는데 현종
은 남쪽으로 떠났으니 당시에 현종 일행은 앞서의 창화현(경기도 양주) 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했으니 실로 고려사에서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거란 선봉과 현종 일행
의 거리는 십수리에 불과하였으니....... 만약 여기서 붙잡혔다면 한국사에서 왕이 북방
유목민족의 군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병자호란 보다 수백년 전에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거란 황제 성종을 만났으니...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였는데, 강동 6주와 평양이
함락되지 않고 건재한지라 보급 문제에다가 퇴로가 위험하니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거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했습니다.
훗날 하공진은 결국 요나라 성종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그 이유는 요 성종이 하공진을 회유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하공진은 고려로 탈출하려다가 실패하여 잡혔고, 이때도 하공진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니.... 기록에 따르면 하공진을 죽인 후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 초기로 시계를 되돌려 개전 초기, 흥화진(興化鎭) 을 지키던 서북면 도순검사 (西北面 都巡檢使)
양규(楊規)는 거란 성종의 거짓 항복 편지에 "난 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므로, 조의 명은 받지 않는다.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는 패기 넘치는 답변으로 사신을 돌려 보냈고, 흥화진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契丹)의 군주가 스스로 보병과 기병 400,000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
(義軍天兵)이라 호명하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순검사
(巡檢使)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양규(楊規)가 진사(鎭使)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
부사(副使)인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인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
와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원년 11월.
단 3,000명의 군대로 400,000명(?) 대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양규는 성종의 군대가 빗켜 내려가자 12월
16일 700명 흥화진 병력을 차출해 내려가 통주전투 패잔병으로 보이는 병사 1,000명을 수습해 1,700명
병력을 모으게되니 양규와 1,700명의 타격대는 여요전쟁의 흐름을 뒤바꾸는데, 거란군 6,000명이 지키고
있던 곽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양규는 흥화진과 통주성을 바탕으로 거란의 후방을 거침없이 공략합니다.
곽주성은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압록강을 건너서 구축한 유일한 중간기지 이니
그 병참기지가 뺏겨 버리면 전방에 나가있는 군사, 본국에서 지원오는 병사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흥화진과 곽주성이 아직 막혀 있으니까....
그렇다면 거란의 선택은 단 하나 뿐이니 바로 회군하는 것이라 양규는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당시 거란군은 서경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곽주가 탈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니
거란 지휘부에서는 난리가 났으니.... 이것은 서경이라는 가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창이 겨누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 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시기 그들의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는데,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물경 30,000명에 달하며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급을 베었습니다.
양규는 거란군을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명을 되찾았고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해 석령까지 가서 2,500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000여명을 되찾았
으며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1,000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명을 되찾았으니 이날
세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싸워 1,000여 급을 베었습니다.<고려사 양규 열전>
전력이 계속 갉아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 수는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이처럼 곳곳에서 거란군을 섬멸한 양규, 김숙흥 부대는 마침 회군중인 거란 성종의 주력 부대
와 조우전에서 분전하다가 마침내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니 거란은 자칫 주력군에 괴멸적인 손실을 입을
위험성이 있어 왕의 친조조건을 수락하면서 겨우 체면을 유지한채 회군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또 황급히 철군하는 그들이 양규 휘하 부대의 거센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으므로 강동의
성들을 점령할 수도 없었거니와 회군 후에도 명분상 즉시 강동 6주의 노른자를 요구하지
못한 것이니... 군사를 돌이킴에 항복하였던 여러 고려의 성이 다시 배반하였다. 귀주
남쪽 준곡령에 이르자 큰 비가 날을 연하여 내려 말과 낙타가 다 피로하였으며, 갑옷과
병기를 많이 내버리고 비가 개인 뒤에야 강을 건너게 되었다.《요사》 성종 본기 통화 29년 정월.
거란군의 악몽은 양규 부대로 끝나지 않았으니 압록강을 도강하여 고려 경내를 벗어날
무렵 흥화진사 정성의 고려군이 거란군의 후위를 급습하였기 때문인데, 이 기습
에 많은 거란군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니 정성이 (거란군을) 따라가서 후위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거란군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고려사》 현종조 원년
여요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는 물론 소배압 10만의 3차 침입시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지만...
2차 요나라 성종이 40만으로 친정했을 때 개성으로 진격한 적의 후방인 강동 6주에서 양규와
김숙흥에 정성등 고려 제장들이 성을 탈환하고 기습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고 퇴로를 차단해서
적의 본대가 전쟁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게 버금가는 전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급로가 얼마나 중요하냐? 한때 평안도에 설치했다가 요동으로 옮긴 원나라 동녕부를 공격하기
위해 1370년, 10월 공민왕은 요동성에 기사인테무르(기철의 아들)를 치기위해 총사령관
지용수와 부장 양바얀, 이성계, 임견미가 이끄는 군대를 파병했으니 11월 4일 요성
(遼城)을 함락했으나 군량이 떨어진데다가 나하추 군대가 남진하자 추격당할까 염려
해서 멀리 만주 남쪽 해안을 삥삥돌아 철수하니 머나먼 길에 굶어 죽은자가 부지기수 였습니다.
광해군때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파병했는데 군량 수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행군 속도가 느려져 명나라 양호의 동로군과 합세하지 못하고 뒤쳐졌으니 김응하의 일기에
“출정할때 조정에서는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다. 날은 춥고 길은 먼데 면포로 한기를 막고 흰쌀로
주린 배를 채워줄 생각을 못 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힘없고 가난한 나라였기에 줄수 있는게 없었다”
강홍립은 행군을 하루 멈추고 만주족 마을에 숨겨둔 식량을 수색해 죽을 끓여 병사들에게
먹였으며.... 명나라 동로군이 먼저 깨진후 뒤늦게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몰살당하니
17,600명 중에 전사 10,146명 포로 4,291명에 900명은 탈출하다가 굶어
죽었으며 훗날 포로 중에 살아남은자 2,700명이 귀국했으니 15% 만 생환했을 뿐입니다?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
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으니...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 왕의 친조를 약속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은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군사적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 성과이며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왕이 친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이 여진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고려는 수도 개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파괴에 포로와 방화가 일어나고 서북 지방이 초토화되는
엄청 큰 피해를 입었으며.....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많은 병력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장수를 뽑을 때 조금이라도 글만 읽으면 특채로 뽑아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것입니다.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300년간 조상 대대로 살고 있던 수많은 여진인 난민이 발생하였으니 고려는 이들
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상 “천민”으로 된 것 같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북송과 비밀리에 통교하였으며, 특히 1010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니 고려는 오래토록 송에 내왕도 일체 안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하는 뜻입니다.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때 군사적 예봉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거란군의 철수' 에 대응한 '국왕
의 친조' 라는 강화 조건을 제시했으며 아직 강동 6주 반환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그러나 이 두가지 요구는
실현하기 어려운 요구였으므로 결국 3차 침입의 구실이 되고 말았으니 고려 왕의 입조 요구가 고려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자 거란 성종은 야율행평(야율자충), 이송무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1012년 6월 전공지를 문후사로 파견하여 '왕은 병이 있어 친조가 불가능하다' 고 통고하자 분노한 요 성종
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 성명을 내고 직접적인 행동에 들어가 거란이 국경 지방에
소규모로 여러차례 공격을 가했으나 소득 없이 철병해야 했으니, 계속되는 군사침입의 실패는 요나라에
복속해있던 여진족이 고려에 연줄을 대기 위해 개경으로 조공 사절을 줄지어 보내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현종 6년 1015년 1월 거란이 용주(龍州)를 침공했으나 물리쳤고 9월 거란군이 통주(通州)와
영주를 공격했으나 막아냈으며 12월 거란군이 선화진(宣化鎭)과 정원진(定遠鎭)을
침공해 성을 쌓았으며, 1016년에는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
(郭州)를 침공해 대승을 거두고 물자를 챙겨 돌아갔으니 고려군 전사자가 수만명에 달했습니다.
현종 8년 1017년에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의 부대가 흥화진을 포위해 9일간 공격을 했으나
건일, 홍광, 고의가 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는데 이제 대규모 전쟁은 불을 보듯이 뻔했고...
고려는 대대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게 되니 개경의 방비를 점검하고, 송악산에는
산성을 새로이 건설함과 동시에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중앙군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중에 사단이 터지니 1014년 영업전을 빼앗겨 분개한 중앙군인 경군과 관직 체제의 문제로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훈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것인데... 아무리 국가 재정을
살린다지만 죽도록 싸운 무신들과 중앙 군대의 땅을 조정이 빼앗았으니 배은망덕한 것이며 더구나 빼앗은
영업전은 국가재정을 확보한 것도 아니고 문신들의 녹봉 확보용으로 들어갔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훗날 무신정권의 전조라고 할수있는 이 정변은 현종이 서경 유수 이자림과 짜고 반란을 주도한 고위
무신 19명을 잔치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전부 살해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난을 처리한 1015년, 고려는 북송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거절하였으며, 결국 요성종은 이 기회를 노려 고려에 대한 대규모 3차 침략을 결심하게 됩니다.
거란은 현종 9년 1018년 소배압(蕭排押) 을 도통으로, 소굴렬(蕭屈烈) 을 부통으로 삼아
2차때 40만(25만?)에 훨씬 못미치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였으니...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姜邯贊) 으로 상원수, 강민첨(姜民瞻) 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군의 2배 군사 20만 8,000 명을 이끌고 영주(寧州, 安州) 에 나아가 대기하였습니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의주)으로 나가 정예 기병 12,000기를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써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은후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수공을 가해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크게 격파
하였는데.... 이 일화가 너무 유명해서 흥화진 전투를 귀주 대첩의 일화로 잘못 아는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거란군의 기세가 여전한 상황으로 고려군이 매복 작전으로 큰 타격을 주자
소배압은 기존의 거점을 무시하고, 남진하여 그대로 개경을 위협하기로 결심하였으니
2차 침입때 개경으로 직진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때에도 남진을 꾀한 것인데... 이
시점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항전과 후퇴 사이에서 분명한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려사에 보면 여러 귀족들이 2차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고 후퇴를 이야기한 흔적들이 있으며,
실제로 옛 고려의 개경 성터에 관한 조사서를 보면 개경은 평시에 수도로서 기능하기에
최적이지만 평야지대의 성으로서 수성에는 좋지 않아 고려시대 전쟁이 일어나면 서경
중심으로 군사 거점을 확보하거나 강화도로 천도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2차때 몽진하면서 지방 아전과 백성들에게 몸서리칠 정도의 지독한 수모를 당한
것을 떠올렸는지 물러서지 않고 항전한다고 결정하니... 고려에서는 개경의 방어에 진력
하였는데 거란군이 무리하게 남하해 개경으로 향하였으므로,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타격을 주었고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이 계속 개경
으로 공격해오자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의 향림사(香林寺) 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하였습니다.
마침내 현종 10년 정월 3일에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이 개경에서 150리 정도 떨어진 신은현
(新恩縣 황해도 신계) 에 이르자,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서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토록한후 도성의 방비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제2차 침입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개경의 주산인 송악산에 산성을 구축하는 등 수도 일원의 경비가 굳건
한데다가 거듭되는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니,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00명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00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킵니다.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
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개경의 수비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며, 이 100기가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이었습니다.
따라서 저 100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정예 병력으로 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이 놀라우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좋은 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후퇴하던 거란군 10만(이때는 7~8만?) 은 전략, 전술적 길목인 귀주에서 기다리던 고려군 보병 + 기병 20만
과 대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수일간의 격전 끝에 등 뒤에서 튀어나온 고려군 10,000명에
의해 등짝이 쪼개지면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 대첩(龜州大捷) 입니다.
한국에서는 대첩이라고 하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대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귀주 대첩은 두 배
가 훨씬 넘는 20만 병력이 자신들이 의도한 전장에서 피곤하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7~8만 병력을 대파한
전형적인 대회전이었으니... 귀주 대첩이라고 하면 살수대첩과 섞이는 이유 중 하나가 주장의 특출난 전략
이 표현되지 않고 정면 충돌하다시피한 회전의 승리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배의 병력으로 밀어붙이다 포위해서 끝장냈으니 전투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전술을 모르는 말이니 소수로 다수를 이겨야만 가치가 있다는 발상은 무리한 요구로 전쟁의 기본은 적군
보다 다수 병력을 갖추고 잘 운용하는 것이니 적보다 더많은 대군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도 큰 능력 입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한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대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이 회전에 시간 맞춰 집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도로가 열악했던 시대라 대규모 병력은 항상 쪼개서 이동시켜야 했는데,
치밀하게 계획을 짜야 했으니 그렇지 못하면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거란은 자국이 보낸 10만 병력을 고려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요격하는
것을 보고 고려의 전쟁 역량을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고려에 대규모 전쟁을 걸지 못했는데... 무엇보다도 거란군은 대체로 주력이 기병이었던
반면에 고려군은 다 끌어모은 군대라 기병도 있었지만 보병 중심이니 전력은 2배가 아닙니다.
고려군은 수만명의 포로를 얻고, 군마와 낙타, 갑옷, 병기 등을 무수히 노획했으며 게다가 거란군
가운데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에 불과하였으니.... 반세기에 걸친 여요전쟁 사상 유례
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 셈이라 요의 성종은 참패 보고를 듣고는 크게 분노 합니다.
사자를 소배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
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일 것이다”
라고 질책했지만 소배압은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씨의 일가였고.... 승천태후
소씨가 이룬 공적이 워낙 컸으므로 실제로 낯가죽이 벗겨지거나 죽지 않고 파직만 당합니다.
1019년 2월 5일, 고려의 국왕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으니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이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
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 과 식읍 300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
(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으니 한 마디로 국가를 구원한 '영웅' 이 된 것입니다.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고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등 방어에 신경쓰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값진 전성기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대 거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되니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만주 지역의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으며.... 탐라국이 곡물을 바치고 하얼빈 근처 흑룡강에 사는 흑수말갈의 추장이 찾아왔습니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갔으니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인데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졌으니 이제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고려판 병자호란이라 초반에 실수도 있었으며 처절한 패배도 있었지만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해
나갔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이 이후,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간의 삼강체제가 확립된다는 것이니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고려 영토에서 벌어진 전쟁인 만큼 상당한 규모의 거란인 포로들도 발생했고 전쟁 후에도 국경 문제로
여러차례 충돌하지만, 양국간의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전쟁 이후에 고려는 요 왕조와
“화친하고 사대(事大)” 를 했으니 요나라는 명분을 얻은데다가 그후 송나라 및 서하와의 전쟁 중에
고려가 요나라 후방을 침공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으니 배후안전을 도모한다는 큰 목적은 달성한 것입니다.
3차례 전쟁을 치루고도 거란과 고려 상호간의 분위기도 우리 생각보다는 꽤 괜찮았던지, 66년
후인 1085년에 고려 왕 선종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온 거란 사신 '이가급(李可及)' 이 제
날짜보다 늦게 당도하자.... 고려에서는 "이름은 (제때) 다다를[及] 수 있다[可] 고 해
놓고 제때 못[不] 다다랐네[及]? '가급' 이 아니라 '불급' " 이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거란은 이후 고려의 완전 병탄과 강동 6주 자체를 포기하였으며 포기뿐만 아니라 속자치
통감에서는 귀주 대첩에서의 대패 이후, 고려를 두려워 한다는 기록까지 나타
나고 있으니.... “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귀주대첩 패배 후에도 북송과 서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거란은 북송이 서하와의
전쟁으로 지쳐있는 것을 이용해서 관남 10현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며 북송을 압박했으니,
서하와의 장기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북송은 거란이 침공해 오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굴욕적이지만 세폐를 각각 10만냥씩 증액해 주는 식으로 사태를 무마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송은 거란이 군사적 압박을 가해올 때 마다 영토를 또 할양해 주어야 했으며...
그리고 거란은 서하와 싸워 2번의 대패를 당했으나.... 서하는 이 전쟁에서 국력이
고갈되어 거란을 더 이상 압박할 수가 없으니 대승을 거두고도 거란에 허리를 굽혀야
했으며, 거란과 서하는 전쟁 이후 오히려 혼인 동맹을 맺고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귀주 대첩 패배 이후에 서하와 북송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일부의 평가와는 달리 오히려
거란은 북송과 서하에 대해 과거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번영하다가.... 106년 후인 1125년에야 송과 금나라 2국의 양면 협공으로 망하는 것이니
그럼 귀주에서의 대 패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치명적이지는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3차에 걸친 여요전쟁 이후에도 국경 근처에서 소규모의 충돌이 몇번 발생했는데, 현종 연간에
요나라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발해 부흥운동의 하나인
흥료국을 일으킨 대연림(大延琳) 이 주도한 봉기로 흥료국의 대연림은 고려에 지원요청을 합니다.
이 일로 고려 조정은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참지정사 곽원은 강한 매파로
"압강(鴨江) 의 동쪽 땅을 거란이 차지해 막고 있습니다. 지금 가히 기회를 타 취해와야 합니다."
하지만 고려는 반대 기류가 강하였고 결국 곽원이 독단적으로 군사를 끌고 갔으나 두세달 만에
실패해 패전하고 돌아온 곽원은 부끄러움에 화병을 얻어 얼마 안가 등창이 나서 분사(憤死) 합니다.
덕종 연간에는 거란군이 정주를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고, 정종 연간인 1037년 10월에 거란
해군이 압록강을 침입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 갔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여요전쟁
의 외전 격으로 고려는 후에 한번 더 거란족의 침입을 맞게 되니 이것이 “대요수국의 난” 입니다.
이때는 이미 요나라가 망하고 거란의 남은 잔당들과의 전쟁이었으나..... 터전을 상실한
거란 잔당들은 절박한 발악으로 도주와 재침입을 반복하며 쉽게 고려 영내로 부터
소탕되지 않았으니.... 이를 구실로 몽골은 고려를 돕겠다면서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며 군사개입을 하였고 이는 몽골과 고려의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최초 접촉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