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의리선(義理禪) / 윤창화
이성적 사유로 깨달아보고자 하는 선
여래선과 문자선도 이 의리선의 일종
‘의리선(義理禪)’이란 공안이나 화두, 선(禪)을 실참을 통하여 온몸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적 사유에 의한 사량 분별심, 혹은 지식적으로 접근하여 깨달아보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학문적, 언어 문자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 이치적, 논리적으로 탐구(참구)하려고 하는 것,
또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 설명, 풀이하는 것 역시 의리선에 속한다.
의리선(義理禪)이라는 말은 의로(義/意路)와 이로(理路) 두 단어가 합해진 말이다.
의로(義/意路)는 ‘뜻풀이 방법’, 이로(理路)는 ‘뜻풀이 방법’ 혹은 ‘이치적인 방법’이라는 뜻인데,
모두 동의어로, 선을 사량 분별심과 언어 문자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 깨닫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선에서는 ‘의로부도(意路不到)’라고 하여 의리선을 강하게 비판한다.
공안이나 화두, 선의 세계는 언어문자로는 원래 불가능하며(言語道斷),
깨달음의 세계는 말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 편에 있다는 것이다(言詮不及).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大慧禪師, 1089~1163)는
왕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의로와 이로가 끊어져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만약 곧바로 쉬기를 원한다면 이전까지 공부가 좀 되었던 곳을 일체 놔두고
오리어 모색할 수도 재미도 없던 곳(어려워서 엄두도 못 냈던 곳)에서
다시 한번 생각을 붙여 보십시오. 만일 생각을 붙일 수도 없고, 모색할 수 없다면
그곳이 더욱더 중요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路)에 심의식(心意識)이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마치 토목와석(土木瓦石, 무정물, 무심의 경지)과 같게 될 때,
그 때가 (대오에 가까운 것이니) 공(空)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서장’ 答王敎授)”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意路)에 심의식(心意識)이 모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안이나 화두는 아무리 이치적 또는 생각이나 뜻으로 알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토목와석(土木瓦石, 무정물)처럼 될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심의식 즉 사량 분별심이 완전히 정지되어 마치 무정물처럼 될 때,
그 때가 비로소 깨닫게 되는 때이므로, 혹시라도 공망(空亡), 공무(空無)
또는 ‘이게 헛고생만 하고 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대혜보설(大慧普說)’15권에서는
“남양혜충국사(?∼775)와 대주화상(大珠和尙)의 설법에 대하여,
제방에서는 모두 ‘진흙에 빠지고 물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것은 경절(徑截, 곧바로 깨닫는 것)의 가르침이 아닌 의리선을 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화상께서는 그 진위를 명확히 판결하셔서 대중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대혜는 “두 분의 설법은 매우 자상한 데,
그것은 납자들을 이끌고자 하는 노파심 때문이지 의리선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혜는 또 무자화두 참구법(즉 無字話頭十種病)에서도 의리선에 대하여 매우 경계하고 있는데,
‘화두를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語路上作活計)’, ‘경전 등
문자를 끌어다가 고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文字中引證)’라고 말하고 있다.
의리선의 문제점은 공안이나 화두를 정면으로 타파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식과, 지능, 언어 문자적으로 분석하여 터득해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리선도 학문적인 공부를 좀 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여래선, 문자선도 의리선의 일종이다.
2012. 10. 30
윤창화 민족사(출판) 대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