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은 22일로 예정되었던 철수작전을 하루 앞당겨 감행하게 된다. 전남대 내에 주둔해 있던 3공수는 오후 2시경 철수명령을 하달받고 교도소로 이동했으며, 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중이던 35대대와 11여단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 길목의 주남부락으로 철수했다. 시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을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되기까지 광주 외곽도로 차단 및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
계엄군의 퇴각을 모르고 있던 시민들은 뒤늦게야 총소리가 멈춘 사실을 깨닫고 총을 쏘며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은 계엄군이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시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피의 항쟁 4일째, 드디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16:30 광주지역 공수대원 철수명령 하달
- 17:35 3공수 전남대학교 철수, 광주교소도로 이동.
⼔화기 : 소방차 1대, 경찰 가스차 1대, 1/4톤 2대 - 전남대 앞 시위대와 대치중 16:00에 교도소로 이동 명령을 접수하고 철수준비, 철수준비가 완료되자 전차량은 출발대기선에 집결. 본부 및 1개 대대는 후문 배치, 1개 대대는 차량의 엄호를 위해 선두에서 이동하는 계획을 수립. 16:30분 철수준비가 완료되자 선두부대와 차량이 출발과 동시에 정문지역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고 공격하여 2킬로 지점까지 퇴각시키고 후문으로 이동하여 교도소로 철수 완료. 선두인 15대대는 폭도의 사격으로 1명 경상. (특전사 전투상보)
16:40
-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3여단에 교도소를 사수하라고 명령 하달(당시 교도소 인원 3,700여 명)하였다. 이때 조선대에 주둔한 제11여단에도 주남마을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7공수여단에게도 주남마을로 철수 명령 하달. 제11여단은 19시 30분, 제7공수여단은 17시 30분에 철수 완료하였다. 이렇게하여 제33대대는 녹동마을을 숙영지로 삼고, 제3여단은 광주교도소에, 제7, 11여단은 주남마을에 주둔. (말, 1988. 5)
- 16:00경 도청 철수 지시를 받은 35대대와 11여단은 APC로 폭도를 견제하면서 11여단, 35대대순으로 철수한다.
- 16:30분경 35대대는 습격대, 본부, 11지역대, 12지역대순으로 철수 시작.
17:50분경 무사히 조선대 도착, 철수준비에 들어갔다. 조선대 철수는 11여단 통제하에 도보제대와 차량제대로 편성. 차량제대는 APC를 선두로 조선대-도청 15번 도로를 따라 철수하던 중 전남대병원, 남광주시장, 숭의실고 등에서 사격을 받았다. 도보제대는 19:40분경 11지역대가 통로를 개척하면서 철수개시, 임시 숙영지에 02:40분에 도착, 잠시 가면을 취한 후 06:00출발, 08:30분 주남마을에 도착. (특전사 전투상보)
16:43
-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학생인 듯한 젊은 사람 3, 4명이 무엇인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청 쪽을 쳐다보며 혹시 발포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인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부산하게 움직이던 이들의 사이로 기관총(LMG) 총신이 나타났다. 그것도 1대가 아니라 2대였다. 그러니까 2정의 기관총을 가설한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이곳에 기관총을 설치하기 위해 11명의 특공대가 편성되었다고 한다. 도청과 인근 건물 옥상에 있는 계엄군에 대한 공격을 위해 가설했음이 분명했다.
이 기관총의 설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군이 일단 자동화기로 무장하여 도청 옥상에 있는 계엄군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인 총격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상상만 해도 긴장된 순간이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시민을 다치게 하기가 십상이었다. 다만 학생들이 시민을 희생하면서까지 무모하게 공격하지는 않을 듯했다.
이곳에 기관총이 설치된 후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해 버린 탓도 있지만 실제로 시민군은 이곳 기관총을 한 발도 발사하지 않았다. 역시 현명했던 것이다. 계엄군은 한때 이곳에 설치된 시민군의 기관총 총좌를 제거하기 위해 특공조를 편성하기도 했다. 시민군의 기관총은 계엄군에 대한 무력적인 도전일 뿐 아니라 정부군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어서였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외신에 보도되면 정부군이 '게릴라'로부터 본격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6:45
- 전남방직(일신방직?)서 카빈 1백89정 탈취. (월간조선, 1985. 7)
* "오후 4시경 금남로에서 일신방직 무기고를 습격하기 위해 5, 6대의 차가 일신방직으로 갔다. 나는 군용 견인차를 탔다. 군용 견인차로 일신방직 무기고 담을 부수고 M1, 카빈, 탄창 등을 각 차에 나누어 싣고 금남로로 돌아왔다." (구술 : 강주원, 현사연 조사)
16:51
- 전남 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수량 미상).(월간조선, 1985. 7)
* "시외버스에 탄 청년 2명과 나는 연초제조창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갔다. 지하실에 무기고가 있었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M1 2정, 카빈 13,14자루를 탈취하여 공업단지 사거리로 갔다." (구술 : 박병준, 현사연 조사)
16:55
- 전교사 예비군 무기 및 탄약 확보 및 기타 도로 봉쇄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 한국화약 탄약보급소 31사단에 경비지원 요청. (계엄사 상황일지)
17:00
- 해남. 광주에서 군용차량 3, 버스 1, 트럭 1대가 내려와 시위에 가담한 청년, 학생 5백여 명을 실고 광주로 감. 경찰서는 텅 비고 주민이 자체경비 시작.
- 나주. 영산포에서 탈취한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옴.
- 강진. 7, 8대의 버스, 트럭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강진읍에 도착. 각종 구호 외치며 시가행진, 많은 읍민들 환호. (1980년대 민주화운동)
총기교육후 지역방위대 편성
* "광주공원에 오후 5, 6시경 도착했다. 공원에는 LMG가 설치되어 있었고 일신방직, 전남방직, 나주 등지에서 가져온 1천5백 정의 총이 있었다. 또한 고속버스 등 각종 시위차량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서 나이가 마흔 살 정도 되는 분이 메가폰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 뭐라고 신빙성 없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메가폰을 빼앗아 시민들 앞에 나섰다. 질서를 잡아 체계적으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목청이 큰 나는 더 크게 외쳤다. '저는 학운동에 거주하는 광주시민 문장우입니다. 몇 년 전에 하사로 제대하고 현재 학운동에서 예비군 소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을 밝히니 시민들이 모두 쳐다봤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 메가폰을 들고 선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상황이 지휘자가 없는 오합지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우리 스스로 다치게 될 것은 뻔합니다. 이유는 여러분들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광주시민을 사랑한다면 지금부터 앞에 보이는 고속버스에 모두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간곡히 부탁합니다.'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군대 다녀온 사람들로 하여금 수류탄을 회수하게 했다. 회수한 약 1백여 개의 수류탄을 박스에 담아 버스 안에 두었다. 그리고 각 차마다 들어가 총기교육을 했다. 먼저 안전사고에 유의하도록 설명을 했다. 그리고 계엄군과 밤에 대치할 경우 한자리에서만 총격전을 벌이면 총구의 불빛 때문에 계엄군에게 노출되므로 총을 쏜 후 반드시 자리를 이동하라고 했다. 또한 총구 가늠자에 담배의 은박지를 붙여 총구의 방향을 표시하여 아군의 피해가 없도록 교육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수류탄 투척술도 교육했다.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던지면 몇 초 사이에 터지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군대에서 배운 상식을 최대한 설명한 후 행동개시를 했다. 군대 다녀온 사람을 조장으로 하고 10명 단위로 조를 짜 11대의 고속버스에 태웠다. 전대병원 주위의 야산에 버스 2대, 조선대병원 환자대기실에 2대를 정하고 계엄군이 지원동으로 넘어올 것에 대비해서 학동 숭실고와 석천다리에 3대를, 학동 평화맨션 부근의 속칭 신당고개에 2대를 배치했다. 마지막으로 학운동 배고픈다리에 2대를 배치하여 지역방위를 하게 했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광주공원 광장에서 특공대 편성
* "시위대들이 시외지역에서 탈취해 온 무기를 광주공원으로 가지고 왔다. 그곳에서 젊은 사람이 무장의 필요성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시민을 대상으로 사격술을 지도했다. 사격훈련에 참가한 1백여 명을 선별하여 처자식 있는 사람과 독자는 빼고 특공대를 조직했다. 특공대에 뽑힌 60명에게는 태극기와 카빈 1자루, 실탄 36발, 탄창 2클립을 지급하고 6개조를 편성했다. 각 조별로 자동차와 무전기, 수류탄 1,2발을 지급했다. 1조는 정찰임무, 2조는 도청 감시, 3조는 외곽도로 경계, 4조는 치안유지를, 5.6조도 각기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2조에 배정되었고 조원은 5명이었다. 우리 조가 광천동 외곽지역 순찰을 하고 있는데 본부에서 광주공원으로 모이라는 무전연락이 왔다. 본부인 공원으로 모인 특공대에게 각기 다른 임무가 부여되었다. 1조는 도청, 2조는 동구청, 3조는 적십자병원, 4조는 전남대 부속병원 경계의 명령이 하달되었고,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발포가 있을 시 즉각 응사하라고 했다. 도청 경계 임무를 부여받은 우리 조가 텅 빈 금남로를 따라 전일빌딩 쪽으로 나아가자 어디선가 우리 차를 향해 드르륵 총을 갈겼다. 그에 굴하지 않고 직진하는데 운전병이 총에 맞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리 차는 분수대에 꼬꾸라박히고 말았다." (구술 : 최동북, 현사연 조사)
17:15
- 전남도경 상황악화로 도경상황실 폐쇄. (육본 상황일지)
17:20
- 교도소 경계 임무 교대를 위해서(31사 : 3공수) 제3공수 전남대에서 이동 개시. (전교사 작전일지)
* "교도소내 배치되었던 31사단 소속 계엄군이 오후 5시경 공수부대로 교체되었다. 그때가 마치 쉬는 시간이라 나는 옥상에 올라가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오치 쪽에서 공수부대가 다가오자 주변의 논에 엎드려 있던 청년 2명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순간적으로 공수들이 땅바닥에 엎드리면서 총을 갈겨댔다. 그때 청년들이 쏜 총에 공수부대 중위가 부상당했고, 총을 쏜 청년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도망갔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17:00 헌혈하고 나오던 여학생,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
* "기독교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민들이 헌혈한 피를 각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보급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양림동을 지날때 한 여학생이 차를 세웠다.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 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헌혈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학생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해도 한사코 헌혈을 하겠다고 하자 기독교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복도에 방치되어 있는 환자를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다. 기독병원에 도착해 보니 한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어 그쪽으로 가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전 헌혈하겠다고 조르던 그 여학생(박금희)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학생이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려고 병원 마당을 지나갈 때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고 했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도청에 남은 병력 철수
- 도청에 있던 군인과 경찰들은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광주경찰서 직원들은 먼저 전투경찰대원들에게 트레이닝복을 입혀 철수시킨 뒤 맨 마지막에 철수. (월간조선, 1985. 7)
- 11여단 병력, 조선대로 철수 완료. (특전사 전투상보)
17:18
- 화순광업소에서 다이너마이트 차량 1대분을 싣고 와서 국민은행 앞에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
- 20여 명의 시위대들이 트럭에 분승, 총기를 휴대하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려다 이중 6명이 현장에서 숨진 것으로 밝혀짐.
- 목포. 버스 1대 '계엄해제' 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목포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 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음.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서울, 광주 시외전화 불통.
- 여수. 광주에서 학생, 시민이 여수 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 여수경찰서내 보호 유치인 48명, 순천교도소로 호송중. 여수 분위기도 바뀌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 광주 숭일고교에서 M1 60정 피탈, 무기고 방화. (계엄사 상황일지)
- 공수여단에 자기방어를 위한 응사명령 하달됨. (말, 1988. 5)
- 방어를 위한 발포 가능. (특전사 전투상보)
18:15
- 목포. 서울행 특급열차(20:15발)가 2시간 전에 미리 출발. (월간조선, 1985.7)
18:20 20사단 병력 외곽에 배치
- 전교사, 20사 62연대 2개 대대 통합병원 입구 투입과 동시 군중 대치. (전교사 작전일지)
남금동 구시청 앞 발포
* "서너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환자수송과 의약품 보급을 하러 다니느라 지친 우리 대원이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광주천변을 지날 때였다. 아줌마들이 몰려와 우리를 붙잡고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구시청(남금동) 사거리에 5, 6명의 청년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데, 시민들이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접근하면 공수들이 무차별 난사를 하고 있어 부상자만 늘어가고 섣불리 접근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니 구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대원들은 결국 그들을 구조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는 데 뜻을 모으고 현장으로 갔다. 구시청 사거리에 수명의 부상자가 땅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우리를 본 공수들이 총을 쏘았으나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골목으로 끌고 가서 부상자가 있는지 확인해 봤더니 뒤쪽에 앉은 대원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차를 몰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여 내가 손을 뻗쳐 부상자의 팔을 잡는 순간 나는 허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같이 지프차에 탔던 우리 대원 5명 중 2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2명은 부상당했다. 다행히 운전하던 사람만 무사했던 것이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18:25
- 제3공수, 교도소 도착. (전교사 작전일지)
* "저녁을 먹고 난 직후 천막을 씌운 트럭 1대가 교도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70∼80명의 시민이 타고 있었는데 거의 축 늘어져 있었다. 공수들은 그들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면서 트럭에서 끌어내렸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18:30
- 35대대 철수 준비. (특전사 전투상보)
- 목포역 앞 광장, 학생, 군중 집결. (전교사 작전일지)
18:50
- 20사 62연대 3대대, 송정리 비행장 입구 및 서창다리 투입. 23일 16:00 포병 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18:55
- 20사 61연대 2대대 광주-목포 도로 차단을 위해 송암동 투입(11/207). 23일 16:00 보병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 60연대 송정리 확보.
- 강진 성전파출소에 무장폭도 기습, 총기 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18:56
- 20사 61연대 3대대 톨게이트 봉쇄를 위한 투입(11/228).
- 20사 61연대 3대대 비아송신소에 투입. 23일 16:00 기갑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19:00
- 무장한 시민, 남평, 화순, 나주 등으로 출발하였는데, 나주에서는 실탄 4만 2천 발, 경기관총 2정, 카빈총 3천2백 정을 빼앗고, 화순에서는 폭탄(TNT 3상자)를 가져와 거의 무장 완료.
- 해남. 오후 5시경 '차량이 통제되었다', '광주에서 학생들이 총을 들고 내려와서 읍내에서 데모를 한다'는 말을 들은 대흥사에 있던 청년 15명은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로 와서 시위대에 합류.
- 시위대는 차량 25대를 앞세우고 해남읍 삼산면-현산면-북평면-송지면을 경유 22:00 완도읍에 도착 시가시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수미상 폭도, 대한통운에서 카빈 70정 탈취 시내로 집결. (계엄사 상황일지)
- 8시 30분까지 사이에 도청, 도경에서 군 철수, 조선대 쪽으로(1만여 명). 도청, 도경은 시민이 접수, 일반인 접근 금지시켜.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 (월간조선, 1985. 7)
- 경찰관들,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내를 빠져나감. (말, 1988. 5)
- 외곽 주요도로 봉쇄지점 점령 완료
.31사 : 오치(1개 중대)
.3공수 : 교도소(순천 방향) 1개 여단
.11공수 : 소태동(화순 방향) 1개 여단
.20사 :.극락교(광주-송정간 도로) 1개 대대
.백운동(광주-목포간 도로) 1개 대대
.톨게이트(광주-전주) 1개 대대 (전교사 작전일지)
광주역에서 시청 쪽으로 군부대 트럭 질주
* "광주역을 통과한 군부대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시청 쪽으로 행렬을 지어 질주해 왔다. 트럭에 군인들이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부대가 이동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재빨리 길을 건넜다. 길을 거의 건널 무렵, 맨 앞에 오던 트럭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차에서 뛰어내린 공수 한 명이 내게로 달려오자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인도에 몸을 굴렸다. 나에게 다가온 공수가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구타하고 짓밟았다. 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팽개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구술 : 김선문, 현사연 조사)
* "학동시장 옆 사진관 건물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후 7시경 도청 쪽에서 장갑차 1대가 케리바 50을 쏘면서 쏜살같이 질주해 왔다. 나는 같이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지시를 내리고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장갑차는 일시 후퇴하더니 잠시 후 길 양쪽을 향해 총을 쏘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철수하는 공수부대의 장갑차에 치어 사망.
* "오후 7시경 학운동 집 앞 도로에 앉아 있는데 시내 쪽에서 장갑차 1대가 무섭게 돌진해 왔다. 어찌나 과속으로 달려오던지 내 남편은 엉겁결에 손을 들었으나 장갑차는 그대로 돌진했다. 남편은 그 장갑차에 치어 이웃집 문턱에 나동그라졌다. 내 남편은 머리가 깨져 뇌가 바닥으로 쏟아져 사망했다." (구술 : 윤삼례, 현사연 조사)
남평-효천간 도로에 매복한 계엄군의 집단발포
* "우리가 탄 버스가 해남을 출발하여 나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40여 대의 차량이 광주로 가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광주 외곽지역에 계엄군이 주둔해 있을지 몰라 선발대를 뽑아 3, 4대의 차가 먼저 출발했다. 내가 탄 차가 남평 드들강을 건너고 있을 때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앞서가던 차에서 빨리 되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우리는 즉시 차를 돌려 나주를 향해 질주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 들어보니, 선두에 있던 지프차는 집중사격을 받아 거기에 탔던 사람들은 즉사하고, 트럭 1대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다 사격을 받아 운전수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날 밤은 나주예식장에서 새우고 새벽 5시경 주위에 있던 시위대를 모아 토론한 결과 '효천을 통과해서 광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송정리 쪽으로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송정리에도 광주로 가려는 사람이 많아 그들을 태우고 가다보니 송정리 비행장 진입로에 탱크 4대와 계엄군이 포진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송정리로 되돌아왔다. 송정리에서 차를 버리고 무기만 소지한 채 걸어서 극락강을 거쳐 유덕동으로 갔다. 유덕동에도 계엄군의 검문검색이 심해 총과 실탄을 논바닥에 묻고 결국 빈손으로 광주로 오게 되었다."(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 "21일 정오를 전후하여 시외지역으로 나간 차량들이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나주에 속속 도착했다. 시위차량을 전부 모아보니 73대였다. 광주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먼저 공수의 매복 여부를 확인해 봐야 된다고 생각한 나는 선발대를 뽑았다. 3명의 지원자가 있어 그들을 3대의 차에 태우고 몇 명씩 더 승차시켜 광주로 보냈다. 그들이 떠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마지막으로 갔던 버스가 유리창이 완전히 박살난 채 되돌아왔다. 그 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유리창에 몸이 걸린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남평다리 부근을 지나갈 때 야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고 했다. 앞에 출발한 2대의 차량에 탄 사람은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되돌아온 버스에 탄 청년들이 울분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구술 : 박행삼, 현사연 조사)
19:20
- 3여단 교도소에서 바리케이드 작업 도중 구난차 1대, 트럭 2대, APC 1대에 분승한 폭도들, 기관총 난사. 민간인 2명 사망. 아군 피해 없음. (특전사 전투상보)
- 목포. 군용 헬기 1대 10분간 목포역 상공을 중심으로 정찰비행 후 사라짐.
(월간조선, 1985.7)
19:25
- 20사 62연대 병력으로 상무대 경계 보강
장군 공관 : 1개 중대
사령부 외곽 : 1개 중대
북문 : 1개 중대
시월산 탄약고 : 1개 중대 (20사 작전상보)
19:30
- 광주경찰서 쪽에서 50여 명의 경찰관들이 군복 차림으로 동명동, 우리가 투숙해 있던 여관 앞으로 달아났다. 이때는 용케도 시위대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민가에 들어가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귀가했다 한다. (월간조선, 1985. 7)
* "저녁 무렵 군인, 경찰 등 37명이 착검한 상태로 우리집(서석동)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피해는 주지 않을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서 사복을 달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남자가 없기 때문에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하자 그들은 신을 신은 채 안방으로 들어와 장농에서 옷을 꺼내 이것저것 입어보더니 몸에 맞는 것이 없자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몸집이 적은 경찰 2,3명만 내 티셔츠를 입고 서둘러 나갔다." (구술 : 이순자, 현사연 조사)
19:30
. 차량제대: APC 1대, 2 1/2 5대, 7여단 33대대(7지역대), 1/4 8대, 2 1/2 17대, APC 1대순으로 철수중 기관총 사격 받아 방송차량 1대, 보급차량 1대 손실. APC사수 2명 팔목 부상.
. 도보제대:1) 7여단 - 35대대 11지역대 통로 개척, 조선대 뒷산을 거쳐 산 정 부근으로 철수
2) 11여단 - 산 와지선 이용 철수(15번 도로 근처)(특전사 전투 상보)
19:30
- 무장폭도 교도소 기습, 장갑차 등 차량 9대로 와서 총격. 수비병력 교전 끝에 격퇴. 군인 4명 부상, 차량 1/4 1대, 1/2 5대, 장갑차 1대, 1/2 소방차 1대, M1 3정, 실탄 112발, 카빈 28정, 탄창 4개, LMG 실탄 39발, 사살 1명, 생포 1명, 부상 8명. (전교사 작전일지)
- 30-40명 데모대, 강진에서 송정리로 이동중 (계엄사 상황일지)
19:33
- 노안지서에 트럭 3대 도착 후 방화.
- 나주 남평지서 기습, 무기 탈취(73정).
-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TNT로 도청 파괴 계획.
- 목포역 앞 2만여 명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9:50
- 광주역에서 20분간 총격전.
20:00 목포 진입 시위대, 지산부대 앞에서 피격
* "어둑해질 무렵인 오후 8시께 버스 2대가 목포 입구인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국도상 지산부대 앞에 이르렀다. 도로에는 바리케이드 2개가 쳐져 있었고 도로 가운데는 송곳 같은 것이 박아져 있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운전사 김동문씨는 바리케이드 사이를 뚫고 나가야겠다고 판단하고 속력을 내서 달리는데 차가 장애물에 걸려 정차했다. 그때 양쪽 언덕에서 총격을 가했다. 검문검색이나 사전경고도 없이 집중적으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김호성 씨는 오른손과 복부에 3발의 총을 맞고 차 밑으로 숨었다. 5, 6분 정도 총격이 계속되었다. 전혀 응사를 하지 못하고 의자 밑에 숨어 있는데 차 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계엄군의 무선교신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잠시 후 군인 3명이 총을 겨누고 언덕에서 내려와 무기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김호성 씨는 들것에 실려 지산부대 의무대로 옮겨졌다. 간막이가 설치돼 옆사람들을 볼 수는 없었으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틀 후인 23일 김호성 씨는 목포 시립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총격사건은 당시에도 일부 시민에게만 소문으로 나돌았을 뿐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밝혀져 아직 전체적인 진상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현재 밝혀진 부상자는 2명이고 사망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광주일보, 1989. 3. 17 김호성 증언)
- 광주 동신학교, 차량 20대로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폭도 80명 방어진지 구축하면서 교내에서 공포 발사.
- 98연대 2대대에 폭도 80명 버스로 와서 대대장과 면담 후 부대 주변에서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
* "효동국민학교에 총이 있으니 그것을 착용하고 지역방위를 맡아서 하자는 동료의 말을 듣고 효동국민학교로 갔다. 캄캄해진 운동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총은 없었다. 그곳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10시쯤 됐을 때 송정리 쪽에서 헬리콥터 7,8대가 교도소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군인들이 교도소로 투입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경계를 서는 동안 멀리서 간간이 총소리가 들리고 사방은 고요해 오히려 불안할 지경이었다. 자정이 되자 회사로 내려와 잠을 잤다." (구술 : 채종일, 현사연 조사)
- 해남. 읍파출소에서는 동교 서교국민학교 학생들이 뒤따르고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터미널-교육청-해남중고교-교도리를 계속 돌며 시위를 했으며, 맨앞에서 선동하는 학생은 공포탄 한방을 쏴 분위기를 주도. 그때 파출소는 이미 유리창들이 깨진 상태였고 경찰들은 무기 없이 사복 차림으로 관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