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불성, 진성의 마음 / 종범 큰스님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는 의미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뜻에서
세존(世尊)이라 하고 부처님은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대웅(大雄)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존상을 봉안한 전당을 대웅전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한다.
여래는 진리와 같은 모습으로 진리와 함께 오고
진리와 함께 머물러서
일상의 생활에서 진리와 인격이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처님을 ‘비로자나’라 하고 ‘아미타’라 하는데
비로자나는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광명이란 말이며,
아미타는 어둠이 없는 광명(무량광無量光)이며 죽음이 없는
수명(무량수無量壽)이라는 말이다.
부처님께 붙여지는 이 같은 호칭은 모두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름이다.
부처님의 세계와 우리 인간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에게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불성(佛性)이라 하는데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경전에서 한 결 같이 강조하였다.
그 중에서도『열반경』에서 밝힌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구절이 유명하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란, 중생들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생의 모습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남녀와 노소에 상관없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 내용이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말씀이다.
불성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평소에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마음이 불성이다.
불성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불성이 없으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하지 못하고 몸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한다.
불성이 있기 때문에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며 온갖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가 불성의 능력이고 작용이다.
불성이 있어서 생로병사를 느낄 수 있고 불성이 있어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
불성이 없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하고 불성이 없으면
선하고 악함도 판별하지 못한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불성이고 불행을 느끼는 것도 불성이다.
불성은 정의할 수 없는 무한의 능력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시작을 헤아릴 수 없고
언제까지 존재하는지 끝을 알 수 없다.
『금강경 오가해』의 서문에서는,
불성은 “천지보다도 먼저 생겨서 시작됨이 없고,
천지보다도 뒤에까지 있어서 끝남이 없다.”고 했다.
너무도 거대한 담론인 것 같지만 사실이다.
형상을 볼 수 있는 불성은 진리도 볼 수 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불성은 우주의 비밀을 들을 수도 있다.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불성은 선한 일도 할 수 있다.
꿈을 꿀 수 있는 불성은 꿈에서 깰 수도 있다.
분노할 수 있는 불성은 용서할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 있는 불성은 지혜로울 수도 있다.
불성은 큰 것을 느껴도 커지지 않고
작은 것을 느껴도 작아지지 않는다.
어둠을 느껴도 어두워지지 않고 밝음을 느껴도 밝아지지 않는다.
불성은 모든 것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성은 불변성(不變性)이면서 보편성이다.
불성의 불변성을 어려운 말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이라 한다.
진여는 불성이 무엇을 느끼든 본래의 진실성과 같다는 뜻이다.
죽음을 느껴도 불성은 본래의 진실성과 다름이 없고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해도 불성은 본래의 진실성과 다름이 없다.
이런 진여 본성의 불성을 ‘진성의 마음’ 이라 한다.
진성의 마음은 모든 것을 경험해도 변질되지 않는다.
『육조단경』에서도 “진여의 본성이 만 가지 사물을 느끼지만
사물에 물들지 않고 항상 스스로 자재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불성의 인격상이다.
불성은 보편성의 작용에서 한없는 변화를 맞을 수 있다.
보편성은 인연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는 수연성(隨緣性)이며,
사물현상에서 고립됨이 없이 합일을 이루는 융합성(融合性)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인격상에서
많은 다양성과 차별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인 진성의 마음은 불변성이다.
사회의 인격상이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진성의 마음인 불성은 변함이 없다.
사회에서 접하는 생로병사의 각가지 인격상은
불성의 그림자이며 불성의 몸에 입혀진 옷이다.
그림자를 보지 않고 사람을 보아야 하고
몸에 입혀진 옷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아야 하듯이
인간의 모습에서 불성을 보아야 한다.
불성을 볼 때 인격상에서 존엄성을 볼 수 있다.
불성의 믿음으로 인간에게 희망을 갖게 된다.
괴로움을 느낄 수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불성의 믿음이다.
자비복지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불성의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종범 스님/승가원 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