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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떠돌이끼리의 조그만 축제
자는데 천장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씨가 참 좋았는데, 좋아도 너무 좋았는데... 어느새 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리는 모양이었다.
'한 번 내리더니, 재미를 붙였나?'
그때가 새벽 세 시경이었는데, 인야는 그 뒤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세 시간을 그렇게 허비했을까. 인야는 뒤척이다 얼핏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일곱 시가 되자... 자전거로 가는 친구들이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걸로 인야의 잠자는 시간도 끝이었다.
오늘은 까미노로 걸어 사모라에 가서 돈을 좀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아침 기온이 썩 찬 데다 구름까지 껴... 버스를 타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사모라 구경도 할 겸.
일단 알베르게에 있던 먹거리들을 학교 방으로 옮겨두었다. 오늘내일 먹을 것만 조금 남겨놓고, 나머지는 그쪽에 두는 게 안전할 것이었고... 미리 짐을 싸두는 의미도 있었다.
춥고 쌀쌀한 아침, 자전거 친구들은 떠났다.
나그네들이 떠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인야는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머물고 있는 자신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까.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학교 방에 들렀다가, 두꺼운 잠바로 갈아입고... 사모라행 버스를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남아 관청 의자에서 인터넷을 확인하는데, 메일이 두어 통 와 있었다.
버스는 이미 와 있었고, 오늘은 노부부 둘이 탄 상태였다.
꼬랄레스를 거쳐 이번엔 반대로 여섯 개 마을을 도는 노선이었다. 매 번 갈 때마다 노선이 바뀌니, 이 버스가 대체 어떻게 운영되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인야가 사모라 입구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시민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 인터넷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근무자마저 검문도 없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거기서 까페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메일 답장도 마쳤다.
일하는 중 전화가 울려서, 정신없이 밖으로 나가 받으니... 바르셀로나의 장이었다.
어떻게 지내느냐기에, 집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사한 뒤 전화를 걸겠다며 끊었다.
한 시간 남짓 버스 시간이 남아,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우표를 사서 엽서도 부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행에서 돈 찾는 일이 겁이 났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갑자기(아니, 조짐은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날씨가 음산해졌다.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비가 제법 내렸다.
은행을 찾으려니 버스터미널 근처엔 없어서, 도심 쪽으로 조금 더 나가서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금인출기가 밖에 노출돼 있다 보니, 이래저래 마음이 쓰였다.
'어디,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하는 심정이었지만, 다행히 처음치곤 무사히 돈을 찾을 수 있었다.
'시장을 보고 갈까?'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낼모레 이사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이라... 우표를 사려고 보니, 그 역시 살 데가 마땅치 않아... 엽서는 오늘도 부치지 못했다.
'참내, 엽서 부치기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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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스마트폰 음악을 들었다.
다소 슬픈 멜로디가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와 제법 잘 어울렸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떠들어댔지만 오늘은 그 쪽에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바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저 아래로 빌랴누에바가 보이자,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내가 떠날 마을.' 하고 조금 감상적인 기분에 젖다 보니 버스가 마을에 닿았다.
이런 기분이라면 한참을 더 가도 좋을 것 같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 방으로 가서 돈을 봉투에 넣어두고(알베르게에 갖고 있는 것보단 안전할 것이기에), 알베르게로 돌아와 빠따따 리오하나를 만들었다.
오늘도 왜인지 생각만큼 맛이 나지 않았지만, 저녁까지 먹을 만큼... 넉넉히 만들어 우선 점심으로 일부를 먹었다.
설거지까지 마쳤을 때 마리아가 왔다. 그런데,
"인야, 새집으로 이사하면... 거기서는 물세, 전기세도 당신이 다 내야 할 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세를 살겠다고 나섰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인야는 스페인어로는 그 뉘앙스를 살리기 어려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짧고 단순한 문장만을 사용해서,
"그럼 어쩌라는 건데? 날더러 계속 여기에 머물라는 거야? 이게, 얼마나 성가신 생활인지 당신은 몰라? 냉장고도 없이, 음식을... 뭘 어떻게 해 먹으라는 거야, 언제까지?" 해서야, 마리아도 그건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속셈은, 인야가 이 알베르게를 떠나면... 자신에겐(?) 그만큼의 수입이 줄어들어 불만이라는 표현이라는 게 너무나 빤했으니까.
침대 2층에 올라가 일기 스케치를 하다 졸음이 몰려와 잠깐 눈을 붙였다.
그사이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들렀다가,
"쏘리(Sorry)!"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
네다섯 시쯤 되자, 비가 그쳐가기 시작했는데... 대신 바람이 거셌다.
천장 유리창 너머로 하얀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지붕 안테나도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나에게 하룻밤 더 혼자 잘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가?'
여섯 시 반이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오긴 왔지만 다들 다시 떠났고... 그 뒤론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제 이틀 밤 남았는데, 혼자 있는 밤을 하루라도 더 줬으면 좋겠다.'
저녁은 낮에 만든 음식을 데워 엔살라다와 함께 먹었고(아직 남은 게 있어 내일 아침에도 먹어야 할 듯했다), 쌀쌀했지만 바람이 부는 저녁 들판에 나가보기로 했다.
어제는 마누엘이 와서 못 나갔으니,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내일도 나갈 수 있을지 몰랐지만)
바람은 역시 쌀쌀했지만 상쾌했다.
비 갠 하늘엔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저녁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몇 장은 꽤 잘 나왔다) 천천히 까미노를 걸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놀라 날아오르는,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다음 이정표까지 걸어가 하모니카도 몇 곡도 불고 나니,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지만 기분만은 더없이 상쾌했다.
'꼬랄레스에 가서 살아도 어딘가 들판에 나가 이러기는 하겠지만, 거긴 여기와는 분위기가 다를 것이다......'
빌랴누에바에서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인야는 나름의 감회에 젖었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이 마을과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와서 보름을 지내다 떠나게 된 것인지......'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완전히 혼자였다.
다음 날, 인야가 수첩 달력을 보다 보니... 3월 14일에 스페인에 왔으니 이제 곧 한 달이었다.
산티아고 집에서 보름, 이 마을에서도 보름 넘게 지냈으니, 정확히는 아직 이틀이 더 지나야 한 달을 채우는 셈이었다. 체감으로는 이미 그 이상이 지난 것 같았다.
마음이 스산해져, 인터넷이라도 하려고 관청으로 향했다.
까페엔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쌓여 있었다.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동네 영감님이 지나가며,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날씨가 더 고르지 못할 거라고 일러주었다.
'하필 이사하는 날인데......'
관청 직원이 도착해 안으로 자리를 옮겨 홈페이지와 까페 댓글을 마저 올리는데, 빵 차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가보니 루이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 그의 아버지인 듯했다.
인사만 나누고 학교 방으로 들어가 내일 떠날 채비를 했다.
가방을 챙기고, 썼던 물건들을 정돈하고, 바닥도 쓸고 쓰레기까지 내다 버리며 마무리를 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 인야는 마리아를 만났다.
지금 세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중 하나만 스페인어를 하고 둘은 불어를 쓴다고 했다.
알베르게에 들어가 보니 정말 세 사람이 있었다. 아까 봤던 사람과, 부부로 보이는 나머지 둘.
쌀쌀한 날씨였기에, 인야는 그들에게 생강차를 끓여 한 잔씩 대접했다.
그러면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데, 마리아에게 들었는지...
"당신, 화가라면서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보고 싶다고도 했는데, 이미 이삿짐을 싸놓은 상태라... 그들에게는 그림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이미 부탁을 했는지, 여기서 또르띨랴를 해 먹겠다고 했다.
그거야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인야는 침대에 앉아 일기 스케치를 하다가... 문득, 그들이 또르띨랴 만드는 걸 구경하고 싶어졌다. 배워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엌으로 나가, 하는 과정의 사진을 찍어가며 지켜보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엥?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온, 옷차림도 추레한... 걸인 같은(집시 같은) 커플이었다.
추운 길을 걸어와서 그랬겠지만 떨고 있었고, 사람을 경계하는 듯... 쉽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알베르게에 있던 프랑스인들과 이 커플 사이엔...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었다.
그때, 인야가 나섰다.
여자가 우유를 데워 먹으려고 하기에,
"저, 내가 점심에 먹으려고 남겨 둔 음식이 있는데... 데워서 드시겠어요?" 하고 묻자,
"예!" 하고 웃으며 대답했는데, 그 반응이 너무 고맙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조금 전... 마리아가 갖다 준(열흘 넘게 뒹굴던) 수프 봉지를 먹어도 되냐고 물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인야가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부랑자 같은 몰골이었다.
남자는 불어를 쓰고, 여자는 스페인어와 불어를 다 썼는데... 뭔가, 조금 이상한 조합의 커플이었다.
기타를 들고 왔기에,
"기타를 치세요?" 하고 인야가 물으니,
"플라멩꼬를 치는데요..." 했다.
"아, 그래요? 내가 '참바오(Chambao: 스페인의 플라멩꼬와 현대적 멜로디로 접합한 혼성 그룹)'의 팬이거든요?" 하고 인야가 반색을 하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인야는 그들과만 있었다면, 음악을 청해서 들어보고도 싶었지만... 프랑스인들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점심은 프랑스인들이 만든 또르띨야를 함께 먹었다. 이미 인야가 그 음식에 관심을 갖고 사진을 찍을 때부터, 그들이 인야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야가 탁자를 안으로 들여가자고 했던 건, 부엌이 좁아 다(양쪽)들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프랑스인들은, 처음엔 싫어하는 기색이더니... 결국 그러기로 했다.
사실 인야의 속셈은, 바깥 공간을 그 커플에게 내주어... 한갓지게 요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안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그 커플은 밖에서 자유롭게 요리하고 설거지까지를 하던데... 이따금 콧노래도 들려왔다.
인야의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그들 양쪽 다 서로 섞이길 원치 않는 눈치로, 알베르게 안의 공기에 긴장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물론, 저들이 떠돌이라고 해도... 저들도 사람이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들인데......' 하는 심정이었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프랑스인 중 하나가 밖에 나갔다가 그들이 담배 피우는 걸 보고 뭐라 했는지, 안에 있던 나머지 프랑스인 둘도 합세해...
"담배는 밖에서 피워!"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인야는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름 살벌하고도 낯선 광경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 커플을 쫓아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뒤 마리아가 새 손님 한 명을 더 데리고 왔는데, 다시 소란이 일었다.
인상부터 좋지 않아 보이던 그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하고 투덜댔다. (허긴 인야가 이 알베르게에 온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오후였다.)
그가 한 침대를 잡자, 그 떠돌이 커플이... 자기들은 다른 데로 가겠다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소란이 커졌다.
"왜, 당신들이 나가죠? 당신들한테, 우리가 여기 머무는 게 싫다면... 차라리 우리가 나가지요!" 하는 말도 들려왔다.
그러자 결국 마리아가 중재에 나선 모양이었다.
개를 데리고는 알베르게 안에 들어올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며...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돈을 냈으니, 어쩔 수 없이 당신들(떠돌이)이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까지 인야가 나설 계재가 아니었기에, 인야는 관청이나 학교 방에 가서 다른 일이라도 할 참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는데... 그 떠돌이 커플이 짐을 싸들고 나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로서는 그들 간의 언쟁에 휘말릴 수가 없었기에, 바로 알베르게를 빠져나왔는데...
천천히 걸어서 관청에 닿으니,
어?
그들이 어느새 먼저 관청 처마 밑에 있는 것이었다. 다른 길로 해서 곧바로 온 모양으로, 이 마을에서 그곳만이 처마가 깊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인야 역시 거기 벤치에 앉아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안달루시아 여자와 프랑스 남자, 떠돌이 생활을 하는 커플이었다.
작년 가을에도 이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어, 이 마을과는 이미 구면이라 했고......
그런데 인야는 아까부터,
'아, 이 추운 날... 이들은 어딜 가서 잔다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 겉으론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암울한 상태로 생각을 하고도 있었는데,
'어찌 됐든, 저녁에라도 이들에게... 따끈한 라면 국물이라도 먹여야겠다.' 고 혼자 생각하던 참에,
마리아가 지나갔다. 어차피 그녀의 집은 이 광장의 한 모퉁이에 있으니까. 그러면서는,
"아까 그 손님들이 다, 다른 알베르게로 가버렸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그 알베르게(떠돌이 커플이 머물렀던)에서는 잠을 자기 싫다는 뜻이었을 것이기에...
'그렇다면 이 커플이 따뜻하게 잘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속으로 반기면서 인야는,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당신들이 먼저 알베르게로 돌아가서... 샤워도 하고 준비하고 계세요. 내가 여기서 잠시 인터넷을 하다가, 뭔가 먹거리를 준비해서 갈 테니까요. 오늘 저녁은 나에게 맡기세요." 하고, 그들을 먼저 보냈다.
인야가 학교 방에 들러 쌀과 토마토 튀김 팩, 라면을 챙겨 알베르게로 돌아와 보니, 그들은 이제 개까지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싫어했던 것인데, 그들에게는 그런 자제심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여자는, 머리에 찌들어 있던 때도 풀려 조금 여유로워 보였고... 침대에서 편안한 웃음도 짓고 있었다. 남자도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고, 추위와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서인지 역시 여유가 느껴졌다.
아직 저녁을 짓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인야는 침대 2층에 올라 짬을 내기로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그들이 안달루시아에 있는 '바르바테(Barbate)' 해변 얘기를 했던 게 떠올라...
"그 해변을 잘 아세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긴, 우리들이 살던 곳인데..."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기에,
"혹시, 거기서 집을 구할 수도 있을까요?" 하고 묻기에 이르렀다. 인야의 호기심은 어느새 그런 쪽으로도 뻗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좋은 집이야 어디든 있을 거 아니겠냐며...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인야의 생각은, 내일부터 '꼬랄레스...'에 살다... 언젠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제 3의 장소'를 알아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현지(바르바떼의 집) 전화번호가 있느냐고 물으니, 전화는 없고... 자신들도 그들과 인터넷 메일로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얘기를 전해줄 수 있겠느냐고 인야가 묻자, 인터넷에 연결해 주면 바로 하겠다고... 흔쾌히 응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관청으로 함께 갔다.
여자, 아구스띠나는 독수리 타법으로 메일을 썼는데, 나름 구구절절 상세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이... 문장력이 있어 보였다.
그 여자가 메일을 보내는 사이, 인야는 '꼬랄레스...'의 집 주인 '삘라르'라는 노파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가겠다고 알렸다.
그런데 아구스띠나가 다른 메일에도 답을 하느라 시간이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핫메일이 말썽을 부려... 쓰던 글이 다 지워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추워서, 다음에 하기로 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저녁은 내가 준비할 테니, 편히 쉬고 계세요." 인야가 말하자,
"뭐, 내가 도와줄 게 없을까요?" 했지만,
"부엌도 좁고, 어차피 나만 아는 요리니... 나 혼자 해야 하거든요?" 하면서 여자를 들여 보냈다.
그렇게 인야가 요리에 몰두하는데, 안에서 그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남자는 추임새를 넣는 것이었다.
뜻밖의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인야는 가져왔던 쌀로 밥을 짓고 있었는데, 그들의 노래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듣기 좋았고, 무엇보다 지극히 오리지널한... 그 무엇이 있었다.
'아, 이들과 함께한다는 게 이런 맛이 있는 것이었구나.'
토마토 튀김에 남은 채소로 살사를 만들어 '까미노 덮밥'을 하고, 거기다 라면까지 곁들이면... 훌륭하고 따뜻한 저녁상이 될 것이었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리는 훌륭했다.
그저께 마누엘이 가져온 비노도 반쯤 남아 있어 부족하지 않게 곁들였다. 셋이는 그 상황의 사진부터 찍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는데... 매워서인지 재채기를 하고 땀을 흘리면서도 두 사람은 맵고 따뜻한 국물을 무척 좋아했다.
이어 흰밥에 소스를 얹어 나눠주었고, 한입 먹어보니 소스가 뜻밖에 아주 맛있게 되어 있었다.
돼지고기 대신 초리소를 대충 썰어 넣은 게 독특하면서도 간이 잘 맞아, 흰밥과도 잘 어울렸다.
남자는 음식을 정신없이 다 먹고도 한 접시를 더 청했고, 그러고도 망설이기에... 남아있던 것도 다 먹으라 하니, 그마저 깨끗이 비웠다. 인야의 세 배는 되는 양이었다.
그런데도 식사는 인야가 가장 늦게 끝냈다.
오렌지로 후식까지 마치고 탁자를 밖으로 내놓은 뒤 대충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노래 안 부를 거야?"
남자가 먼저 시작했다. 그런데 별맛이 없었다. 아까 요리하며 자연스레 흘러나오던 여자의 노래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남자가 두어 곡을 부르고 나자, 누워서 고개를 까닥이던 여자가 마음이 동했는지...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인야는 내심 그러기를 바라던 참이었다.
여자는 처음엔 팝송을 불렀다. 인야는 스페인 사람들이 팝송을 부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발음이 이상해 듣기가 영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노래는 좋았다.
약간 졸린 듯한 음색에 비음이 섞여, 묘한 매력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이 여자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인 듯했다.
첫 곡이 끝나자 인야는 다시 청했다.
"아까 불렀던 그 노래 다시 한 번만 더 불러줘요." 했더니,
남자가,
"'로꼬~' 하는 곡"이라고 알아챘고...
바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몸이 약한지 여자의 힘이 없다(성량은 풍부하지 않았다.)는 게 약간의 흠이었지만, 아마추어치고는 상당히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인야는 자신이 오늘 밤 이들과 함께하는 이유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이런 경험은 아무나 그리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냐......'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인야는 그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기까지 했다.
여자의 다소 지친 듯한 목소리가 남자의 추임새로 빛을 발하며, 남들은 다 떠나고 '떠돌이 셋'만 남은 이 조그만 알베르게에서...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야가 '떠돌이 셋'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본인 역시 따지고 보면... '떠돌이'나 다를 바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결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스페인의 어느 조그만 마을의 알베르게에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예삿일은 아닐 것이었기에......
순간 인야는 생각했다.
'아, 나의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축하해주는구나. 그러고 보면, 마지막 선물이라는 건가? 아무튼 좋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어쩌면 뭔가가 있는 떠돌이일 수도 있어.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마지막 밤에... 이런 극적인 일이 벌어질 리 없을 테니까.'
부족했던 비노였지만, 그나마 한 잔 정도 마셨던 비노 덕분에... 황홀하기까지 했던 인야는,
행복했다. 그리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평생 잊지 못할 밤일 수도 있었다.
(훗날 인야가 그 밤을 기억하며, 그 밤에 찍었던 동영상을 보고 싶었는데... 저장과정에서 뭐가 잘못 됐는지, 아무리 찾아도 그 동영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노래의 제목도 모른다. 물론 나머지 사진들은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다음 날 아침, 인야는 그들을 배웅했다.
몇 년 전 마누엘이 인야에게 빵을 건네주었던 바로 그 갈림길까지......
인야는 그들과 함께 걸어간 뒤, 베소(스페인 식 뺨을 맞대고 하는)로 인사를 나눴다. 그런 뒤,
"부엔 까미노!" 하고 손을 흔들자,
여자가,
"운 베소(Un beso)!" 하면서 다시 다가왔다.
여자와는 볼 인사를, 남자와는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문득 인야는 가방 안주머니에 있던 지폐 한 장을 꺼냈다(나머지 돈은 학교 방에 있어서, 지금 가진 돈의 전부였다).
"이건, 내 선물인데... 다니다 보면 꼭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 쓰길 바라요." 하고 건네니,
그들은 잠시 주춤하고 서 있었다.
"선물이라니까요."
다시 건네서야 여자가 지폐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볼을 맞댔다.
"인야, 너무 고마워요. 앞으로 당신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길 빌게요."
"그래, 잘 가요."
개 한 마리가 앞장을 섰다. (그 개도 까미노를 세 번인가 걸었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유난히 즐거워 보이는 개였다.)
그리고 그들도 멀어져갔다.
어제 내린 비로 들길은 촉촉했고, 기온은 쾌적했다.
동쪽에서 솟아오른 해가 떠돌이들의 그림자를 서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며 움직였다.
그들이 점점 멀어져갔다.
순간 인야도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몇 걸음 걷다 다시 뒤돌아 보니, 그들은 어느새 두 개의 점이 되어... 밝은 아침볕을 받으며 평화롭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인야는 가슴에서 뭉클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외면해야만 했다.
'오늘, 이사를 해야 돼.'
'내가 만약 이 마을에 더 머문다면, 지금이라도 저들과 함께... 사모라 방향으로 걸어가고도 싶은데, 하필 오늘이 이사하는 날이라서...... 아, 어제만 같았어도, 이대로 따라가는 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