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플레이~ 파이팅~” 12월 12일 토요일 오후. 야탑고등학교는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해있었다. 카메라 가방의 무거움을 못 이기고 가픈 숨을 몰아쉴 때 여기저기서 파이팅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어진 ‘깡’ 소리를 듣고서야 ‘아하, 이 학교에 야구부가 있구나.’며 무릎을 친다. 꽁꽁 얼어붙었던 운동장은 갑자기 찾아든 온기에 물기를 토해냈으나 그들의 얼굴은 온통 야구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야구부들의 경기를 잠시 구경하다가 학교 강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강당에는 약 100여명 가량의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세계최고의 속사포 실력을 뽐내는 마냥 하양까망 바둑알을 정신없이 나르는 아이들의 얼굴에 해맑음이 가득하다. 유창혁 9단과 최규병 9단, 그리고 김영환 9단과 김만수 7단은 대회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애정 어린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유창혁 9단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젠 승부사 유창혁보단 바둑인 유창혁이 더 어울리지 않겠냐는 너털웃음엔 관조의 여유가 물씬 느껴진다. 바둑도장일과 방송일, 그리고 바둑대회 유치까지, 그의 반외 속력행마는 하루를 더할수록 더욱 신명나기만 하다. 유창혁 9단과 나눈 짤막한 대화들을 독자들에게 풀어본다.
유창혁 도장배 어린이 바둑대회를 만들었다. 먼저 대회를 만들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도장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많은 걸 느꼈다. 요즘 어린이 바둑대회가 조금씩 줄어가는 상황인데 성남시에 있는 초등학교 대부분이 바둑부를 개설하지 않고 있다. 있던 바둑부도 없앤다는 얘기는 어린이 바둑교육 자체가 정말 큰 위기에 놓여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실정이다.
뭔가 조금이라도 어린이바둑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일단 1회 대회는 성남시 어린이들만 참가하게 했지만 점차 규모를 늘려 전국대회로 만들 것이다.
얼마 전 한국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3차전 마지막 대국을 이겼다. 영남일보의 3연속 우승을 결정짓는 굉장한 승리였는데 유창혁 9단의 승리 소식에 많은 팬들이 기뻐했다. 팬들에게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싶지 않는가?
좋은 성적을 내려면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하고 엄격한 자기관리가 뒤따라야한다. 요즘 이것저것 다른 일에 신경 쓰다 보니 예전만큼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려운 나이이지 않은가. 우리 세대는 이제 성적으로 말하기보단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할 시기다.
예전 이창호 9단의 인터뷰에서 나이가 드니 정확한 수읽기가 조금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유창혁 9단도 비슷한 느낌인가?
수읽기는 잘 모르겠지만 실수가 많아진 건 확실하다. 컨디션이 좋을 땐 형세판단이 정확히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엔 두 번을 세 봐도 형세가 오락가락한다. 요즘엔 속기전이 대세다보니 초읽기에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도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어떤가? 유창혁 9단과 같이 크게 될 재목은 안 보이는가?
아이들의 재능이야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어떤 아이는 입단하면 큰 물건이 되겠다싶고 또 어떤 아이는 입단하더라도 거기에 그칠 것 같단 인상을 받는다. 본인의 재능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환경에 어떤 선생님을 만나 어떻게 지내느냐가 바둑의 실력을 좌우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바둑 자체를 좋아하고 실력이 쑥쑥 커갈 때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
방송해설을 많이 한다. 젊은 기사들 사이에선 유창혁 9단의 해설이 지독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어, 저 수는 뭡니까? 헛수를 두었네요.’라는 식의 해설이 직설적이라 느끼는 것 같다.
그건 내 스타일이라 어쩔 수 없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실수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과거 선배 기사님들의 방송해설을 보면 대국자들의 실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해설은 어찌됐던 정확해야 된다는 관점이다.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하다. 상금제 논의에 불씨를 지폈고 비씨카드배 세계바둑챔피언십 출범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건 유창혁 9단의 또 다른 업적이다. 대외적인 행마가 워낙 발빠르다보니 다음 행마가 기대되는 건 당연지사인데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일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바둑의 세계화 사업은 한시바삐 서둘러야한다.
수십 년간 프로바둑이 한중일 3개국에만 한정되다보니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계속 이대로 가단 바둑시장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협소해질 것이다. 이건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한중일 3국으로 힘들다면 이젠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대한바둑협회가 대한체육회 정가맹이 되면서 정부예산을 바탕으로 세계화 사업에 첫발을 디뎠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시작을 했다는 자체가 놀라운 변화다.
현재 소수의 프로기사들과 연구생 출신 아마추어 강자들이 유럽과 구미 쪽에 나가 보급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를 지금보다 더 많이 키워야 한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50명 가까이 해외보급을 내보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보급 활동에 나선 이들이 모든 역량을 쏟을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든든히 해줘야 한다. 훗날 이들의 활동이 기반이 돼 유럽과 구미 쪽에 프로제도가 정착된다면 바둑시장은 지금보다 배 이상 커질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바둑계의 역량을 한군데 모아야만 한다. 10년 정도 꾸준히 노력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와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우리 세대는 지금 이 자리에만 머무를 수 없는 세대인 것 같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바둑의 세계화는 최우선사항이 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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