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흥미로운 인물
찬하와 오가다는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들은 그저께 밤 동경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고 어제 아침 찬하는
본가에 들렀던 것이다. 용하는 부재중이었다. 명희가 집을 나간 일은
동경서 이미 알고 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거북해 하면서 환국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나이보다 늙어서 치매 같은 느낌을 풍기는 양친에게 인사를
올리면 찬하는 명희에 대하여 침묵을 지켰다. 집안은 썰렁하고 황폐한 것
같았다. 양친은 왜 손녀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 말만 했다.
"아직 어려서."
끝내 노인들은 며느리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는 열등 의식, 일본 며느리라는 현실이, 부나 명예를 마다하고 떠난
명희, 그것도 상대가 아니던가. 모두가 다 조씨 가문의 상처다.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노후가 더욱더 쓸쓸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양친을
만난 후 찬하는 곧장 산장으로 왔다. 산장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낸 찬하는
늦은 조반을 마치고 시내로 나와 무장정 거리를 헤매다가 오가다를
찾았다. 오가다는 여관방에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앉아 있었다.
"못 만나려니 하고 왔는데 계셨군."
"당신도 어지간히 갈 곳이 없었던 모양이지요?"
오가다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민망한 듯 말했다.
"서울에 오면 난 언제나 갈 곳이 없어요."
앉지도 않고 선 채 말했다.
"고아처럼?"
"고아처럼."
"나는 그렇지 않소. 갈 곳은 많은데 이러고 있지요. 만날 사람도 있는데
못 만나는 거요."
"왜 그럴까?"
"글세, 나도 지금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오."
두 사람은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럼 날 따라오시오."
찬하는 오가다를 산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말을 하면은
그것은 헛소리뿐일 것이란 생각이었고 두 사람이 다 헛소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이다. 오나가나 조선의 얘기, 일본에 관한 얘기,
사상의 동향, 세계 정세, 이제 신물이 났고 심각해지는 애정 문제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쓸쓸했다. 외톨이 같았고 외딴
섬에 유배당한 느낌이었지만 한편 신물나는 얘기, 그 신물나는 얘기에
열중하는 각계 각층의 군상, 그 군상 속에서 쓸쓸해하고 있는 자신들이기
때문에 더욱 외톨이 같고 유배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천천히 마시는 술이었지만 두 사람은 다 취해오지 않았다.
'히토미를 어떻기 만나는 것이 좋을까.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오가다는 인실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실의
오빠 유인성이나 여러 친구들이 인실과의 만남을 저지하겠지만, 오가다는
그 저지하는 힘을 겁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쉽게 만나느냐 어렵게
만나느냐 그 차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가다는 자신
이 서울에 온 것이 이미 선우신을 통해 유신성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제 본정통의 끽다점 나미끼에서 선우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선우 형제와 유인성,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오가다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좀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사정이 있어서 지체가 되었는데 방학 전에 왔더라면 야학교로
인실을 곧장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가다가 조선으로 나온
목적의 70%는 인실에게 있었다.
'우리는 어찌 될까... 만나서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간다. 그리고 몇 년을
견디어야 한다. 왜 왜! 왜 그래야 하나. 늙어서 죽을 때까지 바다 이쪽과
저쪽에서 그리워하다가 목말라하다가... 단념을 하라 한다. 단념을 하라고
모든 사람이, 히토미까지도 단념을 하라 한다. 결혼을 하라 한다. 여자를
몰라 그렇다는 거다. 남녀는 사랑이 없어도 결합이 된다. 내 잎에 있는 저
사내도 내게 단념을 하라 했다. 불가능할 때 그 사랑은 기억에만 남는다.
기억에 남아 있다해서 현재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진실인지 모른다. 사람의
생이란 길어야 칠십이다. 그것은 순간과도 같다. 얼마나 소중한 삶이냐.
플잎에 맞힌 영롱한 이슬 같은 것, 히토미가 보석이라면 인생 자체도
보석이다. 하나밖에 없는 보석이다. 어떤 놈은 나를 보고 계집 섞은 것
같은 자식이라 한다. 어떤 놈은 나를 보고 미숙아라 한다. 삼십이
넘었는데 지능 검사를 해야 한다고 웃는 놈도 있었다. 많이 봐주는
작자까지 감상파라, 이 나를 감상파라, 사내가 삼십을 넘으면.'하다가
오가다는 술잔을 기울인다.
"쥬유무소오노 오가헤이와"
느닷없는 노랫소리에 찬하는 오가다를 쳐다본다.
"하며 총 메고 사람 죽이러 만주로 떠나는 놈들, 날 보고 계집 섞은 것
같은 놈이라 하지."
"덴니 가와리데 후기오 우쯔(하늘에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 그건
어떻고?"
그 정도면 작사한 놈이 미쳤지."
작사자 뿐일까요? 시나징 고로세 하는 아이들까지 전쟁광이 돼가고
있지."
'흠, 쥬유무소오노 와가헤이를, 강도질하러 보내는 놈들, 생명을
난도질하러 보내는 놈들! 민족제일주의, 그놈들이 한 짓은 무엇이냐, 제
민족까지 덫에 쓰는 고기로 삼지 않았더냐? 참본 그 기라성 천재들,
충용무쌍한 미치광이들, 용광로에라도 떨어질 놈들, 만주뿐인가? 중
국 뿐인가? 세계가 눈앞에 왔다갔다하니 미치지 미쳐, 관나두자 관두어,
나는 히토미 때문에 너희들에게 화내는 것은 아니다. 짧은 생애,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영롱하고 고귀하고 찰나 같은 생명 때문에 분통이 터지는
거다. 나는 내 손에 피 묻힐 수는 없다. 공범자가 될 수는 없다. 결코
나는 나를 버리진 않아. 그렇게 함부로 생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
말씀이야. 내 목소리가 설사 모기 소리라 하더라도 나는 내 목소리를 지닐
것이며... 아아 참으로 고달프도다.'
제 민족까지 덫에 쓰는 고기로 삼았다는 얘기는 제남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 민족까지 덫의 고기로 쓰는 수법이 어디 제남사건에만
한했을까마는, 아무튼 조선은 먹었고 만주를 수중에 넣는 것이 숙원이던
대일본제국, 그것은 또한 시간 문제이기도 했었는데 재작년 삼월 남경
정부가 북벌 재개의 성명과 더불어 일본은 재산과 인명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천진 주둔군의 일부, 육사단에서 오천 명을 뽑아 제남에
파견하였는데 정작 남경 정부의 혁명군은 장작림 군대와는 교전이 없었고
평화적으로 입성했던 것인데 일본군이 도발하여 중국 정부의 직원을
사살하고 마약 밀매자인 일본인 십여 명을 참살, 그 시체들을 전쟁으로
가는 덫에 다 장치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본
거류민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고 신문도 덩달아 그것을
과대 보도, 전쟁 열기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장작림을 괴뢰로 하여 서서히 만주와 몽고를 먹어치우려던 일본의
정부측 복안이나 가와모토 다이사쿠 현역 대좌로 하여금 장작림을 실은
열차를 폭파케 하고 그혼란을 틈타서 만주를 점령하려던 관동군의 계책도
다 실패하고 도리어 폭사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에 의해 국민 정부는
만주의 군벌과 합작하여 어쨌거나 중국은 통일이 된 셈이다.
일본으로선이가 갈리게 분통터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공산당 하던 놈들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놈들이 자본주의의 부패를
막는답시고 군보와 결탁하여 만주를, 더 나아가서는 중국을 집어 삼키는
계획에 동조하고 있다. 이제는 대륙 낭인가 지고는 일 안 된다구? 총뿌리
가지고 전쟁으로, 전쟁으로만 몰려가려는 군부, 전쟁이 부패를 막아? 막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그냥 부수는 건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게요?"
찬하가 물었다. 그도 혼자 생각을 하다 문득 그래본 말인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생각."
"..."
"넌더리가 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이오."
"그럼 어서 취하시오, 자아."
술을 부어준다.
"이상해. 예감이 이상하거든. 한밤중 텅 비어버린 창고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란 말이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오."
오가다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내 자신이 썩은 씨앗 같단 말이오."
찬하는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생각하면 뭘해. 우린 지금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 거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당신이나 나나."
"...."
"우린 물어볼 곳이 없어요. 한 가지 길이 없는 건 아니오만."
"그게 뭔데."
"티벳에 가서 라마승이 되는 일이오."
"당신 처자는 어떡하구?"
"허헛 허허어."
"모든 것에 승복할 수 없으면서 나는 나에게도 승복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승복할 수 없는 그것에 내가 속해 있기 때문일까?"
"바로 그렇지요."
찬하는 또다시 허허헛 하고 웃었다. 웃다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고, 하고 싶은 생각도 따로 있는 거 아니오?"
"그걸 어찌 알어? 음, 우린 참 많이 닮은 것 같애."
"여러 가지로."
우울해 있던 오가다는 처음으로 웃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이 많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세상이 발전은 안 하겠지만 도둑놈 강도는 적어지겠지요."
"그건 모를 일이오. 발전을 안 하면 배가 고플 건데."
말을 하면은 헛소리뿐일 거라 했는데 역시 그랬다. 지금 심정으론 이들
사이에선 헛소리밖에 할말이 없었다.
"진주엔 언제 가실 겁니까?"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모래쯤 갈까요?"
"나도 가자 그 말이오?"
"그럼."
"내가 갈 명목이 없지 않소?"
"그렇게 따진다면 나 역시 명목은 없지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동창 아니요, 형무소의."
"억지로 엮은 사건인데 그분하곤 면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최환국이, 그분 아들의 초대라고 나는 생각하고 가는 거요. 두루 남선을
구경할 겸."
"그건 좀 생각해봅시다."
"최환국이 그 청년하고 약속하지 않았소? 연장자가 약속을 안 지키면 안
되지요."
오가다는 강인하게 끈다.
"내가 약속했다기보다는 그때 좀 애매했어."
찬하는 찜찜해하는 것 같았다.
"나하고 사귀면서 그분은 회피하는 겁니까? 나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좀 심하군. 아무리 용기 없는 골샌님이기로 겁나서 피하는 줄
아시오? 친일파 아무아무개 둘째가 무슨 주의의 동조자라 한다면 우선
총독부 경찰이 난처해지지 않겠소? 내가 겁낼 이유는 없지."
하는데 좀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오?"
찬하가 목을 뽑듯 하면 말했다. 문이 열렸고 산장지기 노인이
"저기,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찬하의 얼굴이 구겨진다.
"혼자요?"
"아닙니다. 손님하고 함께 오셨습니다."
산장지기 노인의 표정에는 난처해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그럼 우리가 방을 옮기면 되잖소."
찬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럴 것 없다. 합석하자."
산장지기 노인을 젖히고 조용하가 나서며 말하였다.
조용하가 방안으로 들어왔고 뒤따라 제문식이 들어왔다.
"이거 오래간만이군. 왜 그리 보기 힘이 드나."
제문식은 찬하에게 악수를 청하며 소탈하게 말을 걸었다.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달가워하지 않는 찬하의 태도였다.
"객지 생활을 한다는 게,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야. 돌아와야지."
"돌아오면 전무 자리 내주시겠소?"
"그야 어렵잖지. 형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로 옮기면 되니까,
허허헛헛."
"네에,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초면인 분이 계시니 소개는
해야지요. 오가다 씨, 이쪽은 저의 형 되는 사람이고 저쪽은 제문식 씨."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오가다는 꾸벅 절을 했다.
"이분은 친굽니다. 오가다 지로 씨."
조용하와 제문식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언제 왔어?"
조용하가 물었다.
"그저께 저녁, 집에 갔더니 형님이 안 계시더군요."
"없는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던가?"
태연히 말했다. 찬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노여운 눈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제문식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나간다.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조선말로 물었기 때문에 오가다는 못 듣는다. 찬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신문기자요."
해버린다. 한때 오가다가 신문 기자로 있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하는 더 이상 묻지 않있다. 조선말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는
것을 상대를 불쾌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사람은 넷이고 술잔은 둘이니."
이번에는 일본말로 조용하는 중얼거렸다.
"가만있게."
제문식이 일어서 나갔다.
"여전히 충견이군요."
찬하가 내뱉았다.
"비열하게 없는 데서 그런 말 하는 것 아니다."
"형도 비열하다는 단어를 아시오? 새로운 발견이군요."
"손님 앞에선 이러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조용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가다상."
"네."
"네가 형 얘기 했던가요?"
오가다는 눈만 꿈벅꿈벅했다.
"굉장한 일본통입니다."
"그렇습니끼?"
"그 대신 우익이오."
"그야 물론, 당신 찬하도 우익이지."
씁쓰레 웃으며 조용하는
"그렇다면 당신은 좌악이다 그 말씀이오?"
오가다에게 말하는데 찬하는 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목소리에서
느낀다. 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은 일말의 연민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습도 달라진 것 같았다. 아느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듯, 없는 사람이 어디 나 혼자 뿐이던가? 했을 때도 그 말
속에는 치열한 것, 꼬아서 잡아비트는 것이 없었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그저 등속의 사람을 총독부 경찰이 좌익으로 잡아
가두었으니 누명 벗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오가다의 목소리였다. 조용하의 안색이 변했다. 찬하도 오가다도 느낄
만큼, 두 사람은 조용하의 낯빛이 변한 것을 계명회 사건 탓으로
오해한다. 인실로 인한 감정의 변화인 것을 이들은 일 턱이 없다. 조금
전에 인실을 조용하가 만났다는 사실을 상상인들 했겠는가. 사람이란
감추는 것이 없고 툭 까놓고 보면 대담해진다. 상대가 환영하지 않는 것을
확신했을 때도 배짱이 생기는 수가 있다. 순진하고 선량하였던 오가다도
그새 세월이 흘렀고 세파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소 체득한 셈이다. 조용하의 변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환영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열기 같은
것, 불꽃 같은 것. 조용하는 조용하대로 착각에 빠진다. 쳐다보는
오가다의 눈을 인실의 눈으로 착각한다 .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무심한
눈이 안경알 속에서 골똘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고생했군요."
잠간 음성이었다.
'이상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우연치고도
소름이 끼치는 우연 아닌가.'
마침 제문식이 들어왔다.
"이보게 제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오가다 씨야."
별안간 조용하의 음성은 한 옥타브 올라갔다.
"...?"
"자네도 계명회 사건 알고 있지?"
"글세... 신문에서 보기는 했는데."
오가다에게 곁눈질을 하며 어정쩡 대답했다.
"단 한 사람의 일본인이야. 경의를 표해도 좋을 것이네."
제문식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경의를 표하더라도 방향이나 알아야지, 안 그런가?"
"방향이나마나 조선인의 동지 아닌가. 그것도 적 속의 우리 동지
아닌가."
"조선인의 동지일지는 몰라도 두 분의 동지는 아니지."
농담 반 진담 반,
"대일본제국의 작위까지 받은 조씨 가문, 그 가문의 형제들, 더군다나
찬하를 말할 것 같으면 일본인의 사위 아닌가."
"맞습니다. 동지는 아니지요. 친구일 뿐입니다."
"자네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내 형편은 달라."
"이거 참, 오가다 씨의 시세가 폭등이군."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동상이몽과도 같은 웃음 소리는 산장의 정적을
깬다.
새로운 술상이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인데 성찬이군요. 장자 숭배의 국풍 알 만합니다."
화합될 수 없는, 괴가하다 할 만큼 이상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껄이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오가다가 말했다.
"국풍이 어디 있어, 나라 망한 지가 언제인데. 자아, 술이나 듭시다.
술이란 진담을 할 수 있어 좋고 행패 부릴 용기가 나기에 좋고 또 잊을 수
있어서 좋은 게요."
제문식은 묘한 말을 했다.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 오늘, 이곳에서 이
사내와 마주치다니. 내 목줄기를 밟아누르려고 이들은 같은 날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났더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야. 전신투구 해보아?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각본 아니냐 말이다. 저 적수가 지금 내 앞에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저 일본놈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다. 여자들은 이들 손아귀 속에 있는 게 아니야. 여자들은
지금 날아다니며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총으롱 못 잡으란 법도 그물로
생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총은 명희에게 그물은 인실에게, 조용하는 병적인 가위눌린 것 같은
의지에 따라와주지 않는 찌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오가다 씨."
제문식이 불렀다.
"네."
"이런 기회에 나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많는데, 그리고 국토의
크기나 규모 그것도 각양각색 아니겠소? 헌데 일본은 섬나라, 세계에서 젤
작은 섬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섬나라인 것 만은 분명하지요."
"그렇습니다."
"대륙, 육대주든가? 하여간 큼직큼직한 땅덩어리 한 귀퉁이에 쥐 똥만한
섬나라가 일본 아니오? 그 일본이라는 섬나라의 소위 만세일계, 면면하게
이어온 통치자가 칭호 말이오. 그 칭호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었소."
오가다는 술잔을 들면서 쓴웃음을 머금는다. 전개될 이야기의 내용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다. 제문식은 다분히 의식적인 듯
촌스럽고, 빈 공간을 억지로 메우듯 말을 계속한다.
"세계 속에는 나라도 많고 따라서 통치자도 가라성같이 많는데, 나를
말할 것 같으면 가본 곳이라곤 일본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라, 도처에
흩어진 그 우두머리들의 칭호를 다 안다 할 수는 없겠으나 하여간 손쉬운
대로 열거해본다면 황제가 있고 왕에서 대왕, 천자, 종교계든 뭣이든
다스리는 처지니까 법왕이 있고, 추장이다 족장이다, 요즘같이 민주주의가
유행하는 시국에는 대통령, 총통, 주석,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서기장이든가? 그리고 세계의 거반을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대왕 테무진은
칸, 나폴레옹은 황제였었소.
한데 일본은 천황이오. 비교할 수도 없게 넓은 국토와 국민을 가진 중국도
겨우 천자, 그것도 잘못하면 하늘의 뜻을 어겼다 하여 쫓겨나는 판국인데,
하늘을 다스린다는 옥황상제도 천과 황이 함께 있지 않으니 일본의
천황보다는 자리가 낮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개미가 우산 쓰고 가는 격이지 도시 황당무계하단 말씀이야."
"이 친구가, 허파에 바람 들어갔나? 대역 죄인으로 모가지 날려
버리려고 이러는 게야?"
조용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기는, 네 사람이 산장에서 모의를 했다, 그렇게 되나?"
"물귀신처럼 남의 왜 끌어들이누."
"같이 죽자, 그게 야마도다마시이 아닌가요? 오가다상."
"조선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한다는 말이 있다더군요."
오가다의 응수였다.
"나는 찬하를 믿지요. 발등 찍히는 일은 없을 게요. 원수라 해서 밀고나
고발 같은 건 죽어도 못하는 나약한 사내니까요."
"나는 조찬하 씨가 아닌데."
"동류지 뭐, 하하하하핫핫... 남들이 이 제문식의 눈을 매눈 이라
하거든."
"제군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천황이라는 칭호는
다이가 가이신, 그
무렵부터 시작된 걸로 아는데."
조용하는 오가다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이가 가이신, 그때부터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닌게 아니라 일본은 대단히 용감무쌍하오."
"용감무쌍하기보다 왜구니 왜놈이니 하니까 발돋움한 거겠지요."
스스로 비웃듯 오가다는 말했다.
"아니면 소가나 후지하라 같은 권신이 왕이나 다름없는 실권을 쥐고
있어서, 그 이상의 칭호를 필요로 했는지 모르지요. 땅은 우리가 다스릴
터이니 당신은 하나님으로 있으라, 이전에는 오기미로 칭했거든요."
"글세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해서 헤이게나 겐지도 그랬고 도쿠가와는
아예 황실 알기를 쌀섬이나 보내주는 고아원 양로원쯤으로, 부처가 있어야
불공이 들어오고 시주도 받아 중놈이 먹고 실 듯 부처야 늘 말이 없고
메밥을 드시는 것도 아니니까 신불같이 요긴한 것도 달리 없을 게야. 해서
아라히도가미다. 일본인들의 합리성을 설명해주는 거지. 해서 일본엔
사상이 없어."
제문식 말에 오가다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사나 깡패의 경우에도 삼 대 일이면 구경꾼은 어느 쪽을 응원할까?
문식 형은 늘 다수 속에 속한 것이 특징이오. 해서 박수를 못 받지."
찬하는 마치 희롱의 대상이 된 것 같은 오가다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제문식을 비꼰다.
"박수 같은 게 무슨 소용이야. 실속 없는 박수 좋아하다간 광대 되기
십상이지. 그것도 고상한 광대 말씀이야. 광대란 본시 고상해 서는 안
되거든. 요즘 일 좀 한다는 작자들 고상해서 탈이야. 관중도 없는 혼자
연극이고, 나는 어떤 경우도 하나뿐인 자리엔 안 서둘 셋, 항상 많은 편에
설 거야. 인생은 소요가 아닌 게야. 승산을 위한 싸움이지."
제문식의 말은 심장을 찍어내는 그 무엇이 있었다. 특히 오가다나
찬하에게는.
"왜들 흥분하고 이래. 술이나 마시자구."
용하는 술을 들이켜며 오가다에게 곁눈질을 한다.
'그렇지, 이놈들이 내 적순데, 하나는 묵은 놈, 하나는 진솔이고 내
경우는 이 대 일 아닌가. 허나 내게는 박수쳐주고 응원하는 놈 하나 없다.
저기 저 매눈 가진 놈도 내 표정에 기복이 심해지는 날 달겨들어 껍데기를
벗기려 할 게고 어쨌거나 실속이고 나발이고 나하곤 상관이 없다!
경매장에서 최고 가격을 때렸는데 그 계집들은 왜 낙찰이 되지 않느냐
그거지.'
조용하는 의식이 해롱해롱,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주기가 전신에 쫙
깔린다.
"아라히도가미 얘기는 이제 그만인가? 재미나는 논제인데 왜 그만두나.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말할 것 같으면 아라히도가미를 치켜든 실력자는
누구인고? 그 유형은 소가, 후지하라도 아닐 게고 겐페이도 아닐 게고
도쿠가와."
"그야 세계를 제패코자 하는 알렉산더, 나폴레옹 같은 과대망상의 뭐
그런 환자들이겠지."
용하 말에 제문식이 대답했다.
"그러면 군부인데 천황 못지않게 신조어를 만들어낸 관파구, 도요도미
히데요시구먼. 오가다상은 어찌 생각하시오."
흥미도 관심도 없으면서 대단히 열중해 있는 것처럼 조용하는 물었다.
"그것저것 다 아닐 거요. 실력자라기보다 실력군이라 해얄 겁니다.
오기미노 헤니코소 사나메에 그런 사람 들이겠지요. 참본 중에서도 알짜,
비밀 참본, 뭐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그들 일군, 그리고 관동군일
게요."
오가다 역시 내키지 않으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이것 보게? 당신 정말 일본 사람이오? 정말로 참말 하네."
제문식 역시 건성으로 감탄하는 몸짓이다. 찬하 홀로 생각에 잠기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 말 마시오. 일본에도 히로히도군 하고 호칭하는 소셜리스트가
있고 군주제 철폐를 외치는 볼셰비키도 있소이다."
농쳐버리려 하는데 제문식이
"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천황과 전쟁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나
의견이 일치되거든."
"지나치게 사시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의 핵심을 놓칠 경우가 많지요.
나도 전쟁 미치광이들을 두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만 일본인 전제가
그렇다는 얘기는 수긍하기 어렵군. 어떤 면에선 당신네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체도 피해자라 할 수는 없을까요? 강요와 기만 술수에 생명을
내놔야 하니까. 이렇게 지탄을 받는 것도 그렇고, 안 그래요?"
"역시 당신도 민족주의자요."
조용하가 휘저어버리듯 말했다.
"죄 없는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도 비열한 짓일 게요. 이상으론 세계인일 테지만 같은 추억, 같은
습관 속에 몸담은 사람끼리 정다운 거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지요. 그게 민족주의, 그렇게도 생각 할 수
있겠네요."
"아니지, 아니오. 문제를 그렇게 보아서는 안 돼. 물론 나도 유전
인자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의 일본은 역사의 산물이며 또
누적된 시간과 상황의 결과로 봐야 해요. 일본만 그렇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며 모든 민족은 그 특성이 개인과는 달라서 말하자면 사회 삼리인데."
제문식의 말을 가로막듯
"역사의 산물이며 누적된 시간과 상황의 결과라구? 그거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상통하는 거 아니야?"
했으나 조용하는 취가가 덤벼드는지 고개를 흔들곤 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찬하는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문식은 말을 계속한다.
"일본에는 민죽주의 같은 것 없어. 있다 하더라도 그건 희박해. 그곳엔
군국주의와 황도주의가 대종이다. 민족주의란 외적인 침입을 끊임없이
받으며 싸워서 제 나라를 지키는 데서 싹트고 자라는 것, 일본은 거의
외적인 침입이 없었던 나라 아닌가. 국세가 융성해서 그랬다기보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인방에서는 잊혀진 곳, 관심 밖의 나라,
그러니까 세계사 속에선 뒷길을 걸어온 셈이지. 침략이란 반드시 강한
편에서 약한 편을 정벌하는 것만은 아니며 없는 쪽에서 있는 쪽을
사생결단하며 생존의 신장책으로 감행할 경우가 있는데 일본은 후자에
속하는 거고, 전쟁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균형의 법칙에 의한
필요악으로서, 그러니까 일본이란 섬나라는 역사상 근해에 나가서
노략질이야 했겠으나,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남을 침범하고 내가
침범당하는 일이 별반 없었던 관계상 제 나라 안에서 끊임 없
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닥은 좁지만 균형의 법칙에 의한
필요악과 인간 본성의 호진성이 제 동족끼리, 상호간에 행해졌던 겨야.
민족주의가 없다, 민족주의 사상이 희박하다, 그렇게 보는 내 견해의
이유가 바로 거기있네. 이들이 명치유신을 꾀하여 그야말로 천우신조,
천재일우라, 열강의 뒤꽁무니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노쇠한 청국, 국내
사정이 엉망으로 돼 있는 러시아를 물어뜯은 것은 전통적인 그 칼과
황도사상, 그러니까 칼은 힘으로, 황도사상은 명분으로 둔갑한 거지.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공범자끼리의 굳은 악수, 털어먹으러가자,
털어서 갈라먹자, 음흉스럽지. 국민이나 실력자나 서로의 자분을
생각하면서 멀쩡한 얼굴로 천황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거든. 저희들끼리
싸우다가도 공동 이해에 처하면 칼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눈 깜짝할 새
선회하는 일본의 특성이야말로 황당무계한 것도 진실
이 되며 진실에 대한 고뇌가 없기 때문에 참다운 뜻에서 사상과 종교도
부재야. 차원 높은 문화 예술이 없는 것도, 그들의 음악이나 춤을 보아.
단조로운 몸부림, 힘의 폭발이 없는데 칼면 잘 싸우거든. 한마디로 천황을
아라히도가미로 모시는 황당무계한 것도 방편에 불과한 건데, 충성의
대상이 다양하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천황에서 장군, 번주,
잘게잘게 썰어 내려오면 새까만 말석의 무사, 그들 밑에 따른 자에게는
그들이 각각 충의의 대상이라, 충의의 그 곁에는 언제나 칼날이
번득이는데 그런면에서도 우리는 민족주의의 희박함을 감지할 수 있지.
아녀자도 가슴에 비수를 품고 주군이나 부모의 원수를 찾아 방랑하는
기풍이 성행하고, 그러니 그들의 적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 자신의
동족이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찬하에게는 안됐네만 일본 여자들이
쉽게 타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도 틔여 있던 나라가 아니었고 닫혀
있었던 나라인데 말씀이야, 그 의식 구주가 조선 여자들하고는 판이해.
그것은 사회가 조성한 일종의 반영인데 도진오키치나 오쵸오후진이
아름다운 비극으로 무대에 상연되는 것만 보더라도, 그런 것이 조선에서
가능할까? 어림없지."
마지막 부분은 찬하의 심기를 비벼대는 것과 동시에 오가다를 괴롭히는
내용의 얘기였다. 오가다와 유인실 풍문을, 신문 지상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유인성과는 면식이 없을 수 없는 왕시 동경 유학생군의 한
사람인 제문식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당신 얘기를 듣고 보니 수긍할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짐작이 많이 틀리군."
오가다는 침울해서 말했다.
"틀리다니?"
"당신은 누구보다 반일의 골수파로군요."
제문식은 껄껄걸 웃었다.
"나는 언제나 리얼리스트요. 현실은 분명 꿈이 아니거든. 군국주의든
민죽주의든 사탕같이 달콤하게 제조하는 애국심에는 바판적이다 그
말이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오가다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거 기분이 안 좋아서 자릴 뜬다는 오해 받기 십상인데 나는 가봐야
할 약속이 있어서."
하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약속이라는 말에 졸 듯, 그러나 가차없이
자신을 우롱하는 인실의 언동을 되새기고 있었던 조용하가 눈을 떴다.
찬하도 오가다를 따라 일어섰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옛날같이, 여러 해 만에 찬하는 예절 바르게 형을 향해 말하였다.
"나가는 곳까지 함께 갔다오겠소."
밖으로 나온 찬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운전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차에 오르고 자동차는 떠난다.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르고
날아내리는 해거름의 언덕과 들판이 차창 밖에서 달아난다. 일몰은
끝났는데 저 겨울 들판에 까마귀떼들이 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려고
잠자리로 떠나지 않는 건가, 찬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불행한 사내야."
오가다가 불쑥 말했다.
"무슨 뜻이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불행한 사내... 그러나 항상 불행한 사람은 없고 항상 행복한 사람도
없고 ... 남이 나
보다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며 내가 남보다 항상 블행한 것도 아니며."
"당신 형은 뱀같이 교활해 뵈고 그 입술 두꺼운 사내는 굶주린
이리같이, 바닥 모르게 무서워."
운전수가 듣거나 말거나 오가다는 서슴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 독기가 다 빠져버렸어. 왜 그럴까? 형한테서 독기가
빠져버렸다는 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줄 알았는데."
하다가 멈추었던 노를 다시 젓듯
"제문식이, 그 작자는 어쨌거나 천재요. 바닥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본 얘기고, 형과 그와의 관계는 수재가 천재에게 잡혔다. 송충이 같이
싫은 놈!"
찬하가 흩어지다.
"아무튼 흥미 있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소."
"바닥 모를 인물... 하는 얘기는 늘 빙산의 일각이고 표변무쌍,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능력에 견주어 한치 일 푼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철저하지. 그자 말대로 리얼리스트요. 경계를 하다가도 그 배짱 속에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문이 생길 때도 있고,
어릴 때부터 보아왔지만 모르겠어. 이십 년 넘게 늘 보아온 사내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건 약한 힘에 틀림이 없어."
찬하도 운전수에게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건, 논리를 어떻게 전개하든 궁극은 멀고, 결국 사상이나
종교란 인생에 있어서 무장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인생자체는 아니다.
인생이란 비애에 가득 찬 것, 왜 해가 지고 까마귀가 저리 날으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지 않느냐 말이오."
오가다는 담배를 꺼내 붙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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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0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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