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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하느님의 큰형- 레프 톨스토이(4)
입수 가능한 증거들을 놓고 볼 때, 결혼 생활이 견딜 만한 것이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들이 결혼한 지 38년째 되던 해인 1900년의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기간에 소냐는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제게 줬던 예전의 행복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 평생 동안 그기 강하고 완벽하고 고요하게 지속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워요.” 이것은 유화적인 제스처였다. 처음부터 소냐는 그녀 자신이 그의 애정사의 강박적인 관리인이 됨으로써,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봉사원이 됨으로써, 그의 반항심 많은 노예가 됨으로써 그들의 결혼을 매끄럽게 유지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그의 지독한 악필 속에서 소설을 깔끔하게 필사해 내는 무시무시한 과업을 떠맡았다. 이것은 고역이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그녀는 그 일을 즐겼다 진정한 천직에 종사할 때의 톨스토이가 그래도 제일 참을 만하고 덜 난폭하다는 것을 그녀가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언니 타티아나에게 썼듯이, 톨스토이가 소설을 쓸 때 그들은 가장 행복했다. 우선 소설 집필은 돈을 벌어다 줬다. 그런데 그의 다른 활동은 돈을 써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이의 문학 작품을 사랑한다는 거야. 나는 작품들에 감탄하고, 작품들은 나를 감동시켜.” 그녀는 쓰디쓴 경험을 통해 톨스토이가 소설 집필을 중단하면 그녀가 유지하려고 기를 쓰는 가정생활에 상처를 줄 게 확실한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사태를 사뭇 다르게 봤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은 돈을 벌어다 준다. 그는 소설 집필을 돈을 벌 필요성과 관련된 일로 보게 됐고, 그 결과 두 활동 모두를 싫어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 소설은 결혼과 연관돼 있었는데, 소냐가 소설을 쓰라고 늘 그를 몰아세우는 것은 그런 연관관계를 확인해 줬다. 이제 그는 깨달았다. 결혼 생활과 소설 모두가 그가 예언 활동이라는 진정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그는 <고백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새로운 생활 조건은 삶의 보편적 의미를 탐구하려는 나의 노력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당시 내 생활 전체는 우리 가족, 우리 아내, 우리 자식들에게 집중돼 있었고, 그 결과로 내 관심은 우리의 생계 수단을 확장시키는 데에만 온통 쏠려 있었다. 나는 대중의 완성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자아완성을 위한 노력으로 이미 대체해 버렸는데, 그런 내 노력은……..우리 가족을 위한 최상의 생활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돼 버렸다.
따라서 결혼은 톨스토이에게 엄청난 불행의 출처일 뿐 아니라 도덕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는 그 자신의 특별한 재앙으로부터 일반화시켜 얻은 결론을 통해 결혼 제도와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 비판했다. 1897년에 그는 딸 티냐에게 리어왕처럼 독설을 퍼부었다.
타락한 남자가 결혼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이유를 나는 이해한다. 그런데 순진한 한 소녀가 그런 일에 휩쓸리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구나. 만약 내가 여자라면, 나는 세상 그 무엇을 준대도 결혼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있어 사랑에 빠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그건 수치스럽고 무엇보다도 건강치 못한 감정으로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고상하지도 않고 시적이지도 않아 -나는 사랑을 위해 문을 열어 주지는 않을 거다. 디프테리아, 티푸스, 성홍열처럼 훨씬 덜 심각한 전염병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려 들었듯이, 사랑이라는 질병에 감염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모든 예방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이 문장이 톨스토이가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문장을 보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각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불행하다.” 경험상 이 문장은 양쪽 부분 모두 논쟁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이 문장의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불행한 가정에는 분명하고 반복적인 패턴이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술꾼이거나 노름꾼이다. 아니면 아내가 무능하거나 바람을 핀다. 불행한 가정에 찍힌 낙인은 따분하리만치 반복되는 친숙한 것들이다. 반면, 행복한 가정에는 온갖 종류가 잇다. 톨스토이는 이 주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솔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여자들을 심각하고 솔직하게 생각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과 분노와 혐오를 느끼며 그 주제에서 등을 돌렸다. 톨스토이의 결혼 생활의 도덕적 실패와, 인류의 절반을 공평하게 취급하는 데 대한 지적인 실패는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렇지만 톨스토이의 결혼이 여러 가지 점에서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해도, 상속받은 농지와 관련해서 생긴 추가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형편은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농지는 노름과 섹스 다음으로 찾아온 톨스토이의 죄책감의 세 번째이자 대단히 중요한 원천이었다. 토지는 톨스토이의 안정된 생활을 지배하고, 마침내는 파괴해 버렸다. 농지는 그의 자부심과 권위의 원천이기도 했디만, 도덕적 불안감의 근원이기도 했다. 농지와 농노는 한데 묶여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둘 중 하나만 소유할 수가 없었다. 아주 젊었을 때 어머니로부터 농지를 물려받은 톨스토이는 처음부터 심오한 -부분적으로는 명예롭고 부분적으로는 자기 멋에 겨운- 의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농노들을 어디에 써먹을까?”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농지를 관리하는 것은 그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재능과 본분은 글을 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농지를 팔아서 자신에게 씌워진 도덕적 굴레를 벗어 버린 후 창작 활동을 통해 리더십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 문제를 놓아 버리지 않았다.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지도 않았다.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문제를 놓고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망설였다.
톨스토이는 농지를 물려받은 1840년대 후반에 그의 첫 번째 소작농 “개혁”을 단행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농노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1840년대의 우리들 무리에서는 거의 듣기 힘든 주장이었다.” 틀린 얘기다. 그 문제는 당시 어느 곳에서건 토론 주제였다. 조그만 시골구석의 철학 클럽에서도 그 주제를 다뤘다. 그렇지 않았다면 톨스토이에게 그런 난제가 닥쳤을 리가 없다. 톨스토이는 그의 “개혁”과 더불어 그가 혼자 힘으로 설계한 증기 탈곡기 등을 포함한 다른 개량 사업도 추진했다. 이런 노력들 중에 그럴싸한 성과를 낳은 것은 하나도 없다. 톨스토이는 본질적인 난점과(그가 적은 것을 그대로 옮기자면) 소작농의 “추접함” 앞에서 오래지 않아 개혁을 포기햇다. 네흘류도프는 미몽에서 깨어난 젊은 톨스토이를 대변한다. “내가 본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관습, 악덕, 의심, 절망뿐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최전성기를 낭비하고 있었다.” 18개월 후, 톨스토이는 농지를 떠나 다른 일들 -섹스, 노름, 군대, 문학-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소작농, 아니 그보다는 소작농이라는 관념-그는 결코 그들을 개개인의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소작농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양면적이다. 1852년의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저녁 내내 슈빈과 우리 러시아의 농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농노제는 나쁜 제도이지만, 극도로 즐거운 나쁜 제도인 것도 사실이다.”
1856년에 그는 두 번째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30년간 임대료를 받는 조건으로 농노들을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했다. 그의 특징 그대로, 그는 선언을 하면서도 농노 해방을 실제로 경험해 본 지인들에게서는 한마디의 조언도 구하지 않았다. 당시 농노들 사이에는 새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2세가 조건 없이 농노를 해방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들은 톨스토이의 저의를 간파했다. 그들은 톨스토이 백작의 위선적인 행동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톨스토이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업적 통찰력을 두려워하면서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격분한 톨스토이는 무식하고 희망 없는 미개인들이라고 농노들을 비난했다. 그는 농노 해방이라는 주제에 대한 정서적인 혼란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전 내무장관 드미트리 블루도프 백작에게 신경질적인 편지를 썼다. “6개월 내에 농노들을 해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몰살당할 것입니다.” 그의 계획을 멍청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가족들 - 예를 틀어 타니아나 아주머니- 에게는 무시무시한 적개심을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의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를 향한 증오심을 조용히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농노 문제를 단호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인 교육으로 눈길을 돌렸다. 교육 부문의 뿌리 깊은 어려움들을 새로운 교육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루소 이후의 시직인들이 사로잡힌 기묘한 망상이다. 그는 소작농의 자식들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산드라 톨스토이 백작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학교에 들어서서 누더기 옷에 더럽고 삐쩍 말랐으면서도 눈빛을 반짝거리며 매번 천사 같은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보면, 물에 빠진 사람을 볼 때 경험한 것과 같은 위급함과 공포감이 제게 몰려옵니다…….저는 여기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수많은 푸슈킨, 오스트로그라드, 필라레토프를 구제하기 위해 그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겼다. 훗날 그는 그의 공식 전기 작가인 P. I. 비루코프에게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여자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에 빚을 진 것이네. 굉장한 시간이었어.” 그의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학교에는 교칙이 없었다. 숙제도 없었다. 톨스토이의 글을 보자. “아이들은 풍부한 감수성과, 오늘도 어제처럼 학교 생활이 즐거울 것이라는 확신만 갖고 오면 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자매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한때는 학교가 70여개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직접 가르치려는 그의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따분해진 그는 독일로 여행을 떠났다. 표면적인 여행 목적은 독일의 교육 개혁을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율리우스 프뢰벨은 톨스토이를 실망시켰다. 그는 톨스토이의 말을 경청하는 대신, 톨스토이를 향해 떠들어대기만 했다. 프뢰벨은 어쨌거나 “다름 아닌 유대인이었다.”
1861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황제의 칙령으로 갑작스레 농노를 해방시켰다. 약이 오른 톨스토이는 칙령을 깎아내렸다. 해방령은 그가 승인하지 않으려 들던 국가가 반포한 법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결혼을 하면서 농지의 중요성은 달라졌다. 농지는 커져가는 그의 가족들의 집이었고, 소설과 더불어 가족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의 창작기인 이때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었다. 책에서 얻는 수입이 늘자, 톨스토이는 땅을 사들이고 농지에 투자했다. 한때 그는 말 400필을 사육장에서 기를 정도까지 됐다. 집에는 남녀 가정 교사가 다섯 명 있었고, 집안 살림만 담당하는 하인이 열한 명이나 됐다. 그렇지만 소작농이 아니라 그 자신, 그의 가족 -세계 전체-을 “개혁”하겠다는 욕망은 그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그 욕망은 언제 어느 때건 깜짝 놀랄 만한 행동으로 세상에 뛰쳐나올 준비가 돼 있었다.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톨스토이의 마음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는 일찍이 1855년부터 바탕은 “기독교이지만 교조와 신비주의 가 완전히 제거된,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 천국을 약속하는”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내고 싶어 했다. 이것은 무수히 많은 영양가 없는 종교개혁가들이 수세기 동안 떠들어댄 흔하고 뻔한 아이디어였다. 톨스토이는 신학자로서는 결코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쓴 <교조적 신학의 고찰>과 <4복음서의 융화와 해석> 등 2편의 긴 논설은 체계적인 사상가로서의 그의 위상을 조금도 높여 주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 저작 상당수는 모호한 범신론적 용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느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살아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하느님이 삶이시다. 하느님을 구하면서 살아라. 그러면 하느님이 살지 않게 될 것이다.”(1878-1879)
그런데 톨스토이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종교적 관념들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개념들이 그의 정치적 충동과 결합하면, 고도로 인화성이 높은 물질을 형성하면서 별다른 경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고히 다져 준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고 출판할 무렵, 글쓰기로는 만족하지 못해 안달하던 그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 예언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자와 숭배자들이 지혜를 얻고 지시를 받고 싶어 하는 인물이 되어 대중적인 해악을 끼칠 준비가 돼 있었다.
최초의 폭발은 톨스토이와 가족들이 모스크바에 있던 1881년 12월에 있었다. 모스크바의 빈민가인 키트로프 시장에 간 그는 부랑인들에게 돈을 나눠 주고는 각자의 사연을 경청했다. 톨스토이는 군중이 주위를 에워싸자 인근에 있는 싸구려 여인숙으로 도피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훨씬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집에 돌아와서 모피코트를 벗은 그는 하얀 장갑과 타이틀 맨 정장 차림의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5코스짜리 만찬 식탁에 앉았다. 그는 고함을 지르기 시작햇다. “그렇게 살 수는 없어! 그렇게 살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는 팔을 휘둘러대면서 소냐에게 겁을 주고는 전 재산을 내팽겨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센서스를 기초 통계 자료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빈민 구호 시스템 구축에 즉각 착수했다. 그리고는 시골로 내려가서, 소위 “농민 예언자”로 불리던 정신적 지도자로 그가 당시 떠받들던 V. K. 슈타예프에게 향후 계혁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소냐는 생후 4개월밖에 안 된 아픈 알렉세이와 함께 모스크바에 남았다.
백작 부인(소냐)은. 처자식을 내팽개친 이런 행위가 가져온 새로운 고통에 대해 편지를 썼다. 편지는 톨스토이와 살면서 겪는 그녀 자신의 어려움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위대한 인도주의적 지식인을 겪으면서 느끼는 분노까지 요약했다. “우리 갓난아기는 상태가 아직도 안 좋아요. 그리고 저는 딱한 아이를 아주 걱정하고 있어요. 당신과 슈타예프는 친자식을 유별나게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우리의 감정을 왜곡할 수도 없고 왜곡하고 싶지도 않고, 세상 전체를 향한 사랑을 공언하여 일개인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답니다.”
톨스토이의 행동을 몇 년 동안 지켜본 소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인류를 관념적으로 사랑하는 대신 개별적인 인간, 특히 가족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불쌍한 형 드미트리는 확실히 동정의 대상이었다. 가난뱅이로 전락한 그는 매춘부와 결혼한 후 1856년에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었다. 형의 임종 자리에 억지로 간 톨스토이는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을 간신히 앉아 있었고, 장려식에는 참석하기를 거절했다(대신에 그는 파티에 갔다). 훗날 그는 임종과 거절의 두 에피소드를 훌륭한 픽션의 조재로 써먹었다. 역시 결핵으로 사망한 형 니콜라이도 가엾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톨스토이는 형을 찾아가기를 거절했고, 결국 톨스토이를 찾아온 니콜라이는 톨스토이의 품안에서 숨을 거뒀다. 셋째 형 세르게이가 노름판에서 전 재산을 날렸을 때도 톨스토이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 모두는 저능한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톨스토이가 주장한 원칙 중 하나는 강자는 약자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