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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책 소개
칸트 이후의 시도들에 기반하여 정신분석과 고별하면서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수록!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서구 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 널리 소개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상은 지난 90년대 한국 지성계를 풍미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의 한계와 탈출구를 동시에 보여주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안티’, 즉 반(反)의 ‘부정적 비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생물학과 지질학, 분자생물학, 위상 기하학부터 시작해 인류학과 고고학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인간의 지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이 천 개의 고원은 지난 20세기의 인문학의 온갖 모험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고 교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이를 비판하는 대신 그러한 이념이 어떤 근거에서 발생하는 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일관되게 저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서론으로 두 저자의 이론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1장의 리좀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인미답 (이전 사람이 아직 밟지 않았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손을 대거나 발을 디딘 일이 없음) 의 사유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복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인 왕(또는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사유 방식은 항상 기호학을 법칙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어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저자들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영토화, 탈용토화, 재영토화 등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위 자체인 것이다.
최근 우리는 중심과 질서가 없어져 간다는 비탄조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창조와 변신의 기회로 멋지게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질서냐 아니면 무질서냐, 또는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anarchy:무정부 상태 무질서)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1장의 리좀 대 나무부터 시작해 주체와 다양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국가의 포획 장치 대 유목민의 전쟁 기계 등의 새로운 대립쌍으로 변주되면서 기존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고고학, 생물학의 성과들을 재검토하는 멋진 시험지가 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는 “언젠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푸코의 그러한 평가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반증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다양한 반체계적, 반-시대적 사유들의 접속을 추구하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과 함께 네티즌의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정신적 지도를 너무나 정확하게, 또 흥미진진하게 그려주는 점에서 바로 시대의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적 모험을 이렇게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질서에 대해 저항이 또 다른 질서에 대한 꿈을 낳았으나 또 다른 질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무질서로의 급경사(예를 들어 68 운동과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이어졌으나 저자들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성벽은 워낙 강고한 것이었다(70-90년대 서구의 저항 운동의 침체). 하지만 이제 이들은 네트워크의 시대를 맞이하며 질서도, 그렇다고 또 다른 질서도, 또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들의 공존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도 이들은 ‘비정확한 것’의 제거를 위한 기준과 공리론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자 과학, 또는 왕립 과학이 아니라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유목 과학, 또는 소수자 과학을 추구한다. 앞의 과학은 모든 것을 질서지우고, 서열화하지만 후자의 과학은 다양한 근접한 사유들의 공존과 접속을 겨냥한다. 아마 이만큼 우리 시대의 사유의 풍경과 나아갈 길을 흥미있게 제시하고 있는 철학책도 드물 것이다.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것에 기반한 비질서의 유목적 사유들과 표준, 기준, 공리를 기반으로 한 왕립 과학의 대결이라는 틀.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두 사람의 이 책은 인문학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답게,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 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멋진 방법들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들자면 그 동안 각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되어온 두 사람의 주요한 개념어들을 완벽하게 한글화시켜 놓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역자는 plan de consistence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고른판’이라는 말로 하부지층, 상부지충, 메타지층 등으로 추상적으로 번역되어온 개념들을 밑지층, 윗지층, 사이지층 등으로 완전히 한글화시켜 놓았다. 아마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지난 90년대 동안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만 막상 좋은 한국어 번역은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의 번역 작업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인터파크 제공]
감각의 논리 (들뢰즈의 창) (6)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저자 질 들뢰즈 지음 | 하태환 옮김 |
Deleuze, Gilles 원저자
출판사 민음사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되어진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 피상적으로도 반대이다. 감각은 주체로 향한 면이 있고(신경시스템, 생명의 움직임, <본능>,<기질>등 자연주의와 세잔 사이의 공통적인 어휘처럼), 대상으로 향한 면도 있다.(사실, 장소, 사건). 차라리 감각은 전혀 어느 쪽도 아니거나 불가분하게 둘 다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관객으로서 나, 나는 그림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감각을 느낀다. 그럼으로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인상주의자들을 뛰어넘은 세잔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이것이 로렌스가 세잔느에 대해 말하면서 '사과의 사과적인 본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감각의 논리 中에서
Landscape 1978 / Francis Bacon
들뢰즈의 감각으로 바라본 베이컨의 그림들
프란시스 베이컨에 관한 질 들뢰즈의 비평서 <감각의 논리>.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세계적인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을 통해 자신의 철학세계를 전개한 책이다. 들뢰즈는 해박한 철학, 예술, 문화적 지식을 바탕으로 베이컨의 그림에서 느낀 감각들의 총체를 글로 표현하고 있다.
베이컨은 무정형에서 정형으로, 정형에서 무정형으로 이행하고 있는 기괴한 형상을 즐겨 그렸다. 그는 주관이 바라본 대상이 아닌, 감각 그 자체를 재현하였다. 이러한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들뢰즈는 근대의 재현적 인식 모델의 파괴로 해석하였다. 또한 구조, 형상, 윤곽만으로 이루어진 베이컨의 그림들에서 리듬을 발견해 내고, 리듬과 감각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 즉 에너지를 읽어내었다.
특히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보이는 긴장감이 시각에 충격을 주어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고 보며, 이것이 윤곽과 빛에 의존해 온 이전의 회화를 뛰어넘어 색을 중시한 베이컨의 회화라고 이야기한다. 들뢰즈의 통찰을 통해 만지는 눈에 호소하는 전통적이면서도 참신한 형상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 예술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Study for a Portrait of John Edwards 1985 / Francis Bacon
목차
- 서문
- 일러두기
1. 동그라미, 트랙
2. 과거 회화와 구상 사이의 관계
3. 운동 경기
4. 신체, 고기와 기, 동물-되기
5. 베이컨의 여러 단계와 양상
6. 회화와 감각
7. 히스테리
8. 힘을 그리다
9. 짝들과 삼면화
10. 삼면화란 무엇인가
11. 그리기 이전의 회화
12. 사용된 돌발 표시
13. 유사성
14.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대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
15. 베이컨이 지나온 길
16. 색에 관한 한마디
17. 눈과 손
- 베이컨 연보
- 그림 목록
질 들뢰즈
■ Profile
1925 파리 출생
1944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 수업
1948 철학교사자격 취득
같은 해 철학 교사를 시작해 57년까지 지냄
1969 파리 8대학에서 푸코의 뒤를 이은 교수 생활
1969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 공동저작 기획
1987 교수 은퇴
1995 자신의 아파트에서 하늘나라로 감
Deleuze, Gilles
프랑스에서 20세기 후반의 뛰어난 저술들을 남긴 몇 안 되는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출생,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고했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쥬 깡길렘, 쟝 이폴리트 등에게 배웠으며 미셸 뷔토르, 미셸 투르니에 등과 교우했고 라깡, 푸꼬 등과도 만났다.1969년 주 논문인 '차이와 반복', 부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파리 8대학에서 교수 생활 시작, 1987년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집필과 강연에 몰두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저서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연구서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본서 이외에도 '칸트의 비판철학', '베르그송주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푸꼬',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등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철학적 입장을 기술하는 탁월한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91년 타계한 정치운동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와는 69년 이후 꾸준히 교유하며 공동 연구 및 공동 집필을 수행했다
■ 작가 이야기
욕망에 대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조망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을 가득 채우는 개념인 '유목인'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빌어 온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을 부활시켰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은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과 서양 철학사의 전통과 계보를 가로지르며 사상의 지평을 횡으로 열어놓았다. 그러나 시대의 지평에서 벗어난 움직임은 아니다. 들뢰즈는 "변증법이란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의 방식을 창조하지 못한다"고 단언하면서 변증법적 사유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사고는 코제브 밑에서 헤겔 철학을 배운 들뢰즈, 푸코, 바타이유 등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기초적인 사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뢰즈를 값지게 만든 것은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타리와 만남을 가지면서부터이다. 둘은 하나처럼 <앙띠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현대의 욕망과 규율을 넘나드는 저서를 썼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는 달리 들뢰즈는 욕망의 창조력을 강조했고, 욕망을 사회적 차원에서 조망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되풀이하기 싫은 말인 미셸 푸코의 "언젠가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너무나 잘 들어맞고 있다. 그의 후기 철학은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파시즘적 욕망 구조를 날카롭게 들춰냄으로써 대항 문화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창기의 들뢰즈 철학은 사회 철학적 성격보다는 <니체와 철학>이나<스피노자>처럼 철학사에 대한 여정이었다. 이후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마루들>과 같은 가타리와의 분열 분석을 행했고, 막판에는 <영화 1, 2>, <감각의 논리>와 같은 예술에 대한 철학서를 내기도 했다. 특히 <영화>는 영화에 관한 책도 아닌, 철학에 관한 책도 아닌 두 감각을 연결하는 묘한 저작이다. 다양한 영역만큼이나 들뢰즈의 입장을 간명하게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탈근대성을 의미 있게 표현하는 특이성, 탈영토화, 리좀의 개념들은 한국 사회의 이론가들도 매력을 느끼는 사유의 언어들이다.
(이상용 / 문화평론가)
사랑과 들뢰즈 式 ‘사유思惟'의 공통점
사랑과 사유의 공통점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는 그렇다. 어떤 폭력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나의 의지에 의해 혹은 평소에 갖고 있던 반듯한 기준으로 사물을 재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마주쳐지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이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사랑에서 발견하곤 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은 분명 특별하다.
하루에 열 번을 마주쳤다 해도 못 알아봤을 평범한 얼굴일지언정
마주침으로 다가왔을 때 상대방의 얼굴은
그 어떤 미남 미녀의 얼굴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어느 날이다.
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헤어져!” 라고...
그 혹은 그녀는 구체적인 이별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헤어지자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날 뿐…….
그때부터 나는 크나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가 왜 떠나갔을까?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딴 사람이 생긴 걸까?......
자! 여기서부터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사유란 우리가 생각하던 사유와는 다르다.
무언가를 비평하고자 생각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닌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은 기분, 그것이 사유다.
실연을 당한 나는 무수한 철학적 사유들을 하게 된다. ‘그(혹은,그녀)가 왜 떠났을까?
처음과 달리 그의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진정 불변하는 개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변화무쌍한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거야?’ 라는 式의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유는 생각보다 난폭한 놈이다
칸트가 말하는 사유는 들뢰즈의 것과는 다르다.
그의 말대로라면 감성 지성 이성의 세 조화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유를 해낼 수가 있다.
물론 칸트의 사유가 무작정 쉬운 것만은 아니다.
감성은 수동적인 성질을 가진 반면 이성은 능동적으로만 작동한다.
이 대립항對立項 속에서 사유하는 우리는 혼란을 겪을 수가 있다.
우리의 인식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대립적인 두 성질을 적절히 혼합 배분하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즉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인데 칸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 상상력이라는 능력이 더해짐으로써 완벽한 사유를 해낼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유에 관한 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존의 인식능력들로 가뿐히 해결되는 것들은 들뢰즈에게 있어 사유가 아니다.
인식들이 미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어되지 않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이다.
사유는 Philosophy(철학)라는 사랑의 어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그저 폭력적이고 성난 황소처럼 내면을 어지럽힐 뿐이다.
사유는 생각보다 따뜻한 놈이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인가?
그건 또 아니다. 그러한 미친 경험은 생각보다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사유’는 평소 우리가 갖춘 인식능력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사유는 끊임없이 주어져 있는 인식의 이미지 틀을 깨고 전진한다.
그것을 본질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공리公理 axiom와 인식 능력들을 파괴하는 방식!
단지 이것은 방식이 폭력적일 뿐 그 너머에 있는 종착점은 한없이 포근하기만 하다.
들뢰즈의 개념들 중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던 탈영토화, 해체의 이미지,
파괴의 이미지는 이렇게 진정한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사유하기를 통해 고정된 개념과 작별하고 무한한 사유의 창공으로 비상하는 것,
우리는 언제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을까?
- 이지영의 '들뢰즈의 사랑' 中에서
이지영
「들뢰즈의 『시네마』에서 운동-이미지에 대한 연구」로 서울대 박사
「영화 프레임에 대한 연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M.A.)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의
논문으로는「들뢰즈의 『시네마』에 나타난 영화 이미지 존재론」, 「H. Bergson의 지각이론」, 「이미지의 물질성과 내재성에 대한 연구-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 이론을 중심으로」, 「<올드보이>의 이미지와 공간의 형식에 대한 분석」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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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시간 넉넉할 때 다시 볼까하여 제 메일에 스크랩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