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는 아니지만
- 김선우
1
문득 미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림자 없이는 내가 증명되지 않는데
그림자로 살아본 적 없이 끌고만 다녔다는 게
실은 그림자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살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예요
오늘은 꼭 말 붙여보려 합니다
알록달록한 새들이 그림자를 열고 날아가는 꿈을 꿨거든요
산 그림자가 산속에서 푸드덕거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2
산, 파도, 크고 환한 나비, 따뜻한 돌, 검은 연꽃, 투명한 새,
이슬의 숲, 우아한 방랑자, 바람과 이끼, 걷다가 문득 멈춰 나
무가 된 고양이, 방울새 노래에 손뼉 치는 오래된 늪……
이렇게도 자유로운데
고작 사람에서 멈춰버린 나를 데리고 살아준 덕에
나라고 여겨지는 오늘의 내가 이만합니다
혹시 내가 아직 쓸 만하다면 다 그림자 덕분입니다
―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7ㆍ8월호 /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
* 김선우(金宣佑) :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지,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녹턴』(문지, 2016)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과, 청소년 시집 『댄스, 푸른푸른』(창비교육, 2018) 『아무것도 안 하는 날』(단비, 2018),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 개정판, 단비, 2012 / 재개정판, 2021)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미루나무, 2007)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새움, 2007)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청림출판, 2011) 『부상당한 천사에게』(한겨레출판, 2016)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21세기북스, 2017), 그리고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외에 다수의 시 해설서를 출간.
오랜만에 김선우 시인의 시를 띄웁니다.
그나저나
검은 연꽃을 본 적 있는지요?
투명한 새, 이슬의 숲은 본 적 있는지요?
그렇다면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와
방울새 노래에 손뼉 치는 늪은 본 적 있는지요?
실은
본 적이 없다 해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살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이니까 말이지요.
그래도 가끔은
가끔은 말입니다
.
나와 나의 그림자에 관해서
곰곰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미안해 할 필요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구요?
안 그러면 어느 날 문득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될지도 모르거든요.
아니면 바위가 될지도 모르고요.
미안해하고 물어보는 거
그게 바로 생기(生氣) 아닐까요.
아직은 사람에서 멈춘 생이지만 혹시 알아요 그 이상 더 가볼 수 있을지 말입니다.
룰루랄라 말입니다.
2021. 11. 8.
달아실출판사편집장 박제영 올림
박제영 시인 / 박제영 시인 네이버 블로그 <안녕 오타 벵가> 2021. 11. 8. '소통의 월요시편지_8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