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교회는 두 가지 의미에서 문명사적 경험을 하고 있다.
하나는 성질 급한 민족답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빠르게 번창했다가 가장 빠르게 쇠퇴하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강력한 안티세력의 등장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2007년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악몽의 해로 기억 될 것이다. ‘어게인 1907년'의 표어를 내걸고 상암구장에서 성대한 부흥집회’를 열었지만, 아프칸 인질 사태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는 쓰나미를 만났다.
김홍도 목사의 설교대로 인도네시아가 예수를 안 믿어서 쓰나미를 만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예수를 너무 열심히 믿다가 쓰나미를 만났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는 자연재해이지만, 한국 기독교가 당한 쓰나미는 분명한 인재이다.
나는 ‘안티 기독교’를 생각하면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라는 말씀이 상기된다. 하나님이 나태해지는 신앙, 물신화되는 교회를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안티진영을 예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바야흐로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사람들조차도 안티로 돌아서게 만든 안티의 대부흥의 계절이 왔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나는 아프칸 인질 사태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1, 2차 세계대전이 있던 시절 즈음의 유태인들이 떠올랐다.
지구상에서 가장 배타적인 종교관과 선민의식을 가진 민족인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무섭게 번져 나갔다. 당시도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의식 있는 비판자들처럼 시오니스트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비난, 비판이 어느 사이에 증오로 변하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 악순환을 거치면서 히틀러가 나오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기독교는 단지 이번 일로만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난을 받을 빌미를 꾸준히 제공해왔다. 한국 교회가 비난받을 짓을 한 것을 기록하면, 성경보다도 많을 것이다. 안티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은 항상 미움을 받고 있던 천덕꾸러기가 대형 사고를 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걸핏하면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 한국 교회가 얼마나 편협했었는지, 얼마나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지치게 했던가! 이번에는 ‘깨닫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는 말씀을 한국 교회가 이해할 차례이다.
안티란 무엇인가? 일단 워키피디아(Wikipedia)가 설명하는 안티의 개념 정의를 살펴보자. "Anti-Christian discrimination, anti-Christian prejudice, Christianophobia or Christophobia is a negative categorical bias against Christians or the religion of Christianity.
(http://en.wikipedia.org/wiki/Anti-Christian_discrimination, 2007년 11월 접속)
여기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anti가 phobia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안티가 비정상적인 정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문화와 그 언어가 사용되는 역사적 경험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근대, 즉 18-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내에서 해석학적인 ‘anti’를 걸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통적인 계시 안에 ‘갇힌 신’을 해방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anti-Christianity’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서 일어난 두개의 큰 anti-chrisitiantiy(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서) 흐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서구에서는 안티가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안티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안티”는 “단순히 기독교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다.”를 너머 “적극적인 반대와 충돌”을 포함한 안티를 말한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필자는 80년대 전두환의 폭압적인 통치가 소위 자생공산주의인 NL파를 양산했듯이, 한국교회의 병리 현상이 안티 범람현상을 초래했다고 본다. Chanel101, 휴머니니스트협회, 무신론자협회, 유니테리언 등에서 보여지는 서구의 안티는 기독교에 대하여 론리적인 반증이나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한국의 안티의 특징은 매우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그 동안의 한국 교회의 무분별, 무차별 비문명적 선교활동의 부작용이 “기독교 박멸”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는 어려서부터 들어왔지만, “기독교 박멸”이라니? 이건 완전히 네로 황제 수준이 아닌가? 안티는 기독교를 한국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물론이고 지금 한국에서 최대의 권력, 무소불위의 권력의 실체인 언론권력마저도 제 정신으로는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개신교라는 성역에 대하여 무엄하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안티의 실체는 무엇인가? 안티는 비록 자발적 비조직적 시민운동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지만, 여타 시민운동과 비교하여 다른 점은 불타는 적개심에 기초하여 감정적, 악의적, 일부 심리적 불균형 상태에서 오는 발작적, 신경증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가 비난 받는 이유에는,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 대한 비난과 안으로 갖고 있는 논리에 대한 비난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비난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고 있다. 시장의 생리란 장사꾼들이 한 푼의 이익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체제이다. 북한의 교회가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사회주의 체제 아래의 교회이듯이, 남한의 교회는 천민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존재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교회가 주체사상을 무시하고 존재할 수 없듯이, 남한의 교회는 자본주의를 무시하고 존립할 수 없다.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병리현상에서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생존원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의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들도 무한경쟁 사회 안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받고 있는 비난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부조리와 함께 뒤섞여 있다. 즉 부조리와 모순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기독교만이 독야청정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으로 가지고 있는 논리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문제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필자는 안티에게 다음과 같은 주문을 하고 싶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하여 피상적인 인식보다는 심층적,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요구 된다. 그 중에 필자가 가장 애석해 하는 것은 어느 종교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일반의 현상을 기독교만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물론 한국 근대사에 긍정과 부정의 양쪽으로 모두 큰 영향력을 끼친 종교가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측이 큰 책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종교도 시대와 문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어서 세월이 가면 저절로 변할 것을 상대로 목숨 거는 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는 짓 같다.
고려 말에 불교가 권력의 비호 아래 위세를 누리고 과다한 토지를 소유하여 노비와 소작농을 착취하였던 불교는 이조를 시작한 성리학자들에게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이조는 한양의 사대문 안에 승려의 출입을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이조 말에 유교가 지나쳐서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해야 했듯이, 오늘에 와서는 안티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980년대 전두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자신을 스스로 단련시켜 “고난의 행군”을 즐겁게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안티들이 기독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자기가 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된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종교든지 무릇 종교라는 것은 어차피 개인의 성찰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 그렇게 거품을 무는 당사자들에게 영적, 정신적, 인격적, 교육적으로 무슨 유익함이 있는 것일까? 말과 글은 단순히 사고력의 도구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
허구헌 날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에게서 어떤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안티 측의 문제는, 종교를 비판의 대상인 객체로만 보니까 주관적 안목은 소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나 하나님과 싸움만 하다 보니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종교적 관심은 자기 안을 밝히는 것인데, 종교의 밖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보수기독교, 즉 소위 “골통 기독교”와 “골통 안티”는 같은 공식을 가지고 있다. 보수 기독인들이 성서를 문자에 씌어진 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에 반발한 안티들도 똑같이 씌어진 글자를 가지고 덤빈다. 즉 “문자주의 대 문자주의”의 싸움이다.
그러나 틀린 질문에 대답하면, 틀린 대답 밖에 나올 것이 없다. 골통을 격렬하게 비난하다보면, 어느 새 자신이 또 다른 골통이 될 수 있다. 보수든 안티든 타인의 세계관을 폭력으로 점령하려드는 자세는 꼴통일수 밖에 없다.
한국의 개신교가 비판받는 문제를 요약하면 교회의 정치권력화, 대형화 그리고 세속화일 것이다. 그러나 안티진영의 기독교 비판이 기독교회에 대하여 성급한 일반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측이 안티진영의 일반화된 비판을 반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존경받아 마땅한 성실한 진짜 성직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향력은 몇몇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맹수 몇 마리 때문에 초원에 평화가 없는 꼴이다. 참고로 호주는 유난히 파충류가 많은데 그것은 호주대륙에는 맹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이런 상황에서 안티의 일반화 비판경향을 지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궁색한 변명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안티 여러분!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리자!
소위 “지탄받는 일부”가 아니라 “지탄받는 전체” 대형교회 목회자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라는 찬송가 가사와도 다르게, “교회 건물의 등기부상에 이름도 없이 빚만 있이” 일생을 고결하게 목회에 바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에 눈감지 마시라.
제발 도매로 하지 말고 소매로 하자!
장사는 도매보다 소매가 이익이 많이 남는 법이다.
첫댓글교회 건물의 등기부상에 이름도 없이 빚만 있이 ... 일생을 고결하게 목회에 바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 강조해도 ... 따르려하는 목사들이 몇명이나 될런지 ..... 그분들을 이용해 ... 먹거리-터 확장에 피치만을 올리는 것이 작금의 한국 기독교 현실인것을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악을 죽이기 위해 나는 더 큰 악이 되어야 한다. 피는 피로 씻을 수 밖에 없다. 악과 대항하귀 위해서는 더 거대한 악의가 필요하다. 고로 기뻐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전파함을. 고로 슬퍼하라. 그렇게 다가간 하나님의 일부분을 보고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름을 못 봄을. 고로 기뻐하라. 저주 받을 내가 미워해야 할 절대악의 개독교가 위선 떰에 내가 분노할 수 있음을. 그로 슬퍼하라. 저 놈을 족쳐도 내가 얻을 것이 없음을. 고로 슬퍼하라. 기독교가 싫어서 기독교가 지키지 못한 소중한 가치까지도 지키지 않는 그대들 역시슬퍼하라모로가도교회로천국으로실상그대들이지옥으로이끄는자라.
왜 ? 무슨일로 .... 시대마다 안티라는 것이 나오고, 역사성까지 갇게 되는가 ?? ..... 두말할 필요도 없이 .... 그것은 종교 기득권을 가진 사제들의 "볼썽 사나운행태" 에 대한 회의로 시작되고, 결국, 그 기득권자들을 수호해주는,...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의 법(法),교리 ....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카스트적 계급주의 ,,,, 등등의 하늘의 소리에 걸 맞지 않은 그것들을 작심하고 폐기 처분 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라 봅니다 ... 애초에 교리가 어떻고를 떠나 종교인들의 행태가 ..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 안티가 왜 생기겠읍니까? ....
좌파 님의 댓글을 조금 더 발전 시켜 봅시다. 문자주의에 더 지독한 문자주의를, 배타주의에 더 악에 바친 배타주의(기독교박멸)를 택하여 다툰다면? 결론은 물량적인 싸움일 뿐입니다. 물량적인 싸움에서는 기독교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잘 못하면 집단성 히스테리가 될 뿐 입니다. 마치 나치가 보기 싫은 유대인을 보고 미쳐 돌아갔듯이..... 기독교를 이기려면 문자주의에는 성서본문비평을, 배타주의에는 포용주의를 가르쳐야할 것 아닌가요? 그런 까닭에 반기련 대표가 본문비평을 가르치냐는 질문을 잘 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첫댓글 교회 건물의 등기부상에 이름도 없이 빚만 있이 ... 일생을 고결하게 목회에 바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 강조해도 ... 따르려하는 목사들이 몇명이나 될런지 ..... 그분들을 이용해 ... 먹거리-터 확장에 피치만을 올리는 것이 작금의 한국 기독교 현실인것을 ....
박무평 형님이 대충 야길 듣고 공감하다더군요...어제 오늘 만났습니다.저를 써 먹을 요량인지 아직 모르겠어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요 말이 '꿩 잡는게 매'라고 하는 말하고 비슷한 뜻인가요? 어리버리해서리 질문하는 건디, 텍싸수 통신과외 선상님께서 답변햐도 무방할 겁네다. '없이각하'는 바빠서리...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악을 죽이기 위해 나는 더 큰 악이 되어야 한다. 피는 피로 씻을 수 밖에 없다. 악과 대항하귀 위해서는 더 거대한 악의가 필요하다. 고로 기뻐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전파함을. 고로 슬퍼하라. 그렇게 다가간 하나님의 일부분을 보고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름을 못 봄을. 고로 기뻐하라. 저주 받을 내가 미워해야 할 절대악의 개독교가 위선 떰에 내가 분노할 수 있음을. 그로 슬퍼하라. 저 놈을 족쳐도 내가 얻을 것이 없음을. 고로 슬퍼하라. 기독교가 싫어서 기독교가 지키지 못한 소중한 가치까지도 지키지 않는 그대들 역시슬퍼하라모로가도교회로천국으로실상그대들이지옥으로이끄는자라.
왜 ? 무슨일로 .... 시대마다 안티라는 것이 나오고, 역사성까지 갇게 되는가 ?? ..... 두말할 필요도 없이 .... 그것은 종교 기득권을 가진 사제들의 "볼썽 사나운행태" 에 대한 회의로 시작되고, 결국, 그 기득권자들을 수호해주는,...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의 법(法),교리 ....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카스트적 계급주의 ,,,, 등등의 하늘의 소리에 걸 맞지 않은 그것들을 작심하고 폐기 처분 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라 봅니다 ... 애초에 교리가 어떻고를 떠나 종교인들의 행태가 ..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 안티가 왜 생기겠읍니까? ....
좌파 님의 댓글을 조금 더 발전 시켜 봅시다. 문자주의에 더 지독한 문자주의를, 배타주의에 더 악에 바친 배타주의(기독교박멸)를 택하여 다툰다면? 결론은 물량적인 싸움일 뿐입니다. 물량적인 싸움에서는 기독교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잘 못하면 집단성 히스테리가 될 뿐 입니다. 마치 나치가 보기 싫은 유대인을 보고 미쳐 돌아갔듯이..... 기독교를 이기려면 문자주의에는 성서본문비평을, 배타주의에는 포용주의를 가르쳐야할 것 아닌가요? 그런 까닭에 반기련 대표가 본문비평을 가르치냐는 질문을 잘 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목사님, 사진 올리기가 안돼요. 등급이 낮아서리 높은 등급으로 올려줘요. ...협성원,김항안,안성성결교회,수정성결교회 사진 올리기 안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