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의 열악한 운동역량을 딛고……
증 언 자 : 이우정(남)
생년월일 : 1955. 5. 10 (당시 나이 25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약국경영)
조사일시 : 1988. 9
개 요
조선대학교 학내민주화와 전체 운동권을 주도했으나 5·18 당시 서울로 피신, 5·18이후 '전남민주청년연합회'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처음으로 맛본 최루탄 가스
나는 1955년 5월 10일 전남 목포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제사기술자인 관계로 안양, 대구 등지로 옮겨다니다가 이곳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내 나이 7세 되던 해다. 아버님이 임동 소재 범양제직공장에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림국민학교와 광주서중을 거쳐 1971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문학서클인 '원시림'에 가입하여 제법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것이 광주학생의거를 주제로 한 '이름없는 별들'을 2번이나 관람했던 일과 함께 나의 인생관이나 생활양식 등에 다소나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3학년 때인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조기방학 문제가 터졌다. 나는 그때 광주공원에 집결하여 최루탄을 처음 맛보았고 광주경찰서에 연행되어 교장선생님이 각서를 쓰는 것으로 훈방되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께 몇 대 얻어맞고 부모님과 함께 귀가하기도 했다.
졸업 후 문학에 대한 열정과 고교시절 문학서클에서 활동하였던 관계로 1975년 조선대학교 문리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1976년 6월 강제징집을 당하여 입대했다가 제대 후 1979년 2학기에 복학하였다. 복학후, 문학청년으로서 장준하 씨의 문학 및 여러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현재 주어진 사회적 여건들에 대한 인식을 체계화 하였다. 복학했을 당시 조선대학교 운동권 조직은 전체 인원이 30명 정도였다. 그 해 1979년 11월 17일 학내 전운동권 모임을 가졌는데 참가인원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1980년 봄의 조선대학 운동권 동향
그해 12월 영암에서 서클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10·26 이후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1980년 상반기 운동의 조직 작업과 투쟁방향을 논의하였다. 당시의 운동 수준은 매우 열악하여 문학 지망생이나 열기 있는 학생 중심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우리들의 운동역량의 부족을 인식하고 앞으로의 학내상황을 주도하기 위해 타서클과 연대하여 대중성 확보를 위한 연합 활동을 논의했다.
1980년 2월 28일, 이곤섭(서클연합회 회장)을 중심으로 23개 서클을 연합 '서클연합회'를 조직하고 서클연합회에 대한 학칙상의 제도적 보장을 요구하면서 교내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학생회 부활과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들도 펴나갔다. 그러나 서클연합회가 운동의 방향과 서클들 간의 상이성, 그리고 학교당국과의 폭력사태가 야기되면서 이를 해체했다. 그 뒤 김인원 씨를 의장으로 하여 1980년 3월 15일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이하 학자추위)가 결성되었다.
'학자추위'는 김운기 씨 등 복적생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학교 본관 앞에서 총장사퇴, 어용교수 퇴진, 학내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교내시위를 가졌다. 당시의 조선대학교 상황에서 학원민주화 등을 요구했다.
그것은 당연히 학교당국과 대립하게 되어 있었다. 학교당국에서는 '학자추위'가 대표성이 없다고 반박했으며 우리는 학회장을 구성했으나 4월 15일경 해체되고 말았다.
4월 19일, 4·19학생의거 기념행사(준비위원장 장갑수)가 진행되었다. 이때 박현채, 송건호 등의 강연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본관 앞에서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와 이곤섭이 학교당국에 의해 다른 학생들에게 납치되어 총선이 거부되어 김현장 씨를 중심으로 한 운동권 전체 비상회의를 증심사에서 가졌다 한다.
5월 1일, 광주시 학운동 광신여관에서 김운기, 양희승, 이경, 한국재, 곽재구, 임왕택, 김수영, 김현장(문부식과 함께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 ) 등과 회합하여 '조선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민투)를 결성하였다.
다음날 광주시 서석동 수로여인숙에서 김운기, 양희승, 이경, 한국재, 곽재구, 임왕택, 김수영 등과 만나 집행부(운영부, 기획부, 섭외부, 조직부)를 새 부서로 구성하였다. 위원은 김운기, 양희승, 이경, 유재도 등 복적생 4명과 나, 그리고 구교성(보이스카웃 회장), 김대홍(학생카톨릭회장), 김수영(학생기독교회 회장), 곽재구, 박상복, 임왕택, 한국재 등으로 했다. 김운기와 내가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민투'는 별도의 결성식 없이 조직되어 학회장단을 방문하며 장외투쟁을 요구했다. 뜻대로 되지 않아 학회장단을 밀어내고 그 장소를 민투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민투 운영자금으로는 선배들에게 100만 원 정도의 도움을 받고 서클연합회 잔여금 190만 원 정도(나중에 김대중 자금으로 발표)가 고작이었다.
5월 6일경 다시 수로여인숙에서 민투 집행부 모임을 갖고 문제발생시 공동책임을 지도록 민투 집행부를 취소하고 집단지도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다. 박상복은 금전관리 등 총무 역할을, 나는 한국재, 김수영 등과 함께 전남대와 서울지역 대학들과의 연락을 맡았다.
5월 9일, 정식으로 '민투'발족을 선언하고 학교 본관 앞에서 학내문제로 농성중인 학생들 앞에 나아가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신현학 퇴진'등을 내용으로 하여 작성한 '시국선언문 1호'를 낭독하였다. 이 시국선언문 1호는 자금부족으로 유인물 제작이 불가능하여 몇 장 복사하여 기자들에게만 나누어주는 정도였다.
5월 11일경, 한국재와 함께 상경하여 고려대 총학생회를 방문, 조선대 민투의 결성 사실을 알렸다.
12일, 서울대 총학생회실에서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 대표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때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온몸으로 거부한다는 내용의 서울지역 24개 대학과 전남지역 대학의 공동투쟁을 결의하는 제1 공동 시국선언문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5월 15일, 학교에서 '민족통일 및 민주쟁취', '민주인사 석방'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 3개를 제작하여 본관 앞에서 20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시국선언문 5호를 낭독한 후 '비상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청앞 광장을 향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5월 16일, 도청 앞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사회로 '민족민주화대성회'라는 연합시위에 조선대학생 2천 명 정도와 함께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재광 7개 대학교 학생단체가 공동명의로 '온몸으로 투쟁할 것', '휴교령이 내릴 시 도청으로 집결할 것'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선언문의 내용중 '온몸으로 투쟁할 것'이라는 부분 등 몇몇 부분은 후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을 때 '피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기도 했다.
16일 오후 횃불시위에 참가하고 이후 상황을 지켜보기 했다. 그런데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정치인과 학생들에 대한 검거령이 전국에 몰아쳤다. 공수부대가 각 대학에 진주하는 등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피신, 자수
나는 19일 오후 4시경 한국재, 김대홍 등과 함께 전주로 피신하였다. 민투 역시 예비검속과 구속 등의 사태에 직면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전주로 피신했던 우리 일행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거나 하면서 피신해 있다가 6월 1일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서는 여동생 친구집에서 10일 정도 기거하다가 TV에서 수배자(11명) 명단에 내가 민투위원장으로 끼어 있음을 알고 다시 열차편으로 상경하였다. 서울에서는 이모집에 기거했다. 5·18에 대한 서울시민들의 냉담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외로웠던 생활이었다. 그러던 차에 광주에서 김부수, 신헌경(현재 강진과 순천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이 올라와 김수영, 곽재구, 한국재 등이 구속되었고 김대용도 자수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김수영, 한국재의 구속은 거짓이었다. 6월 29일, 광주에 내려와 신헌경의 집에서 조직원들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뒤 다음날 자수했다. 자수한 즉시 나는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거기서 군용 팬티와 메리야스 그리고 군복 바지와 군용 실내화를 지급받은 뒤, 보안대 지하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부터 눈을 가린 채 상무대로 이송되어 4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김수영, 한국재가 구속되었다는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곽재구는 정말로 나보다 먼저 구속되어 있었다.
김수영, 한국재는 9월 경에야 구속되었다. 김수영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곧 석방되어 강제징집으로 입대했고 한국재와 나는 6개월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4년 11월 정상용 씨를 1기 의장으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가 조직되었다. 양희승이 사회부장, 정재호가 조사부장, 송재형이 총무 제1부장, 장갑수가 총무 제2부장을 맡고 나는 조선대 구속자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일정한 주거 공간이 부족하였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선배들의 도움과 일일찻집 등의 자금조달 프로그램을 마련하기에 고심했다. 공장에도 들어가고 공사판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활하다가 정재호, 양희승 등과 함께 '전민청'을 나와 전남지역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활동 등을 목적으로 양림동에 한국사회문제연구소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국가보안법사건이 터지면서 위험을 느끼고 한국사회문제연구소를 해체하였다.
1988년 5월에는 5월운동협의회 간사직을 맡아 7월에 그만 둘 때까지 5월 행사 및 전국 공동투쟁 준비 등을 했다.
군부가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중심고리를 남단으로 택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광주라는 지역을 택해 무자비한 폭력사태를 촉발시켰다. 그들은 이로 인해 국민에게 위기감을 조장하여 군부집권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권력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나 개인뿐만이 아니라 전광주시민,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 전체 민중의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다. 민족사적으로도 이 사건은 민족의 대전환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사.정리 최정기)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