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가 11일 오후 6시 63빌딩 국제 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는 보도를 보자 문득 부산에 살던 2005년 5월 8일(어버이 날) 제가 운영하는 카페 회원 30여 명과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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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카페 회원들이 하는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
ⓒ 조종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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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공지를 올릴 때만 해도 동교동 자택 방문은 생각지도 못하고 카네이션 꽃바구니만 전하고 경비원들에게 음료수라도 대접하려고 했지요. 김 전 대통령 내외분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싶다는 글이 올라와 담당 비서관에게 전했더니 꽃다발은 감사하게 받겠다고 하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거든요.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싶다는 회원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2-3일쯤 지났을까요. 아침에 눈을 뜨기 무섭게 담당 비서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님께서 무척 기뻐하셨고 가족 동반도 허락하셨습니다. 사진 촬영도 가능하니 카메라가 있는 분들은 가져와서 대통령님 내외분과 기념사진도 찍으세요. 하고픈 인사말이 있으면 메모도 해오시고요.
꽃다발을 전해 드리고 싶다는 제의는 제가 했지만, 초청을 받은 기분이어서 비서관의 목소리가 제 귀를 의심하게 했습니다. 그때의 흥분과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요. 전화를 끊고 회원들에게 연락을 하면서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 내외분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하고 무엇을 여쭤볼지 고민이 되었는데요. 메모를 하려다 생각해 보니 딱딱하게 격식을 따지기보다는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접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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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카페 운영자의 설명이 끝나자 박수로 화답하는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
ⓒ 조종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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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오후 2시쯤 김대중도서관 앞에 도착, 외곽경비 책임자를 찾아 사람들이 모이게 된 사연과 제 신원을 밝히고 준비해 간 음료수를 전달했습니다. 경비 초소에서 돌아와 회원들과 일정을 계획하고 있는데 담당 비서관이 나오더니 자택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접견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회원들의 표정을 살피니 모두 긴장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님 내외분이 입장하시면 "김대중 대통령님, 이희호 여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를 외치면서 박수로 맞이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비서관님들과 회원들도 좋아하더군요.
조금 있으니까 김 전 대통령 내외분이 웃으며 들어오셨고, 우리는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습니다. 두 내외분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고 저는 카페의 성격과 성향을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카페 회원들은 지지 정당과 정파를 초월해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인동초 정신'을 배우고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회원이 없는데 가입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함께 찾아뵙는 그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고 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회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을 표하며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전남 진도에서 올라온 회원이 "제가 사는 섬사람들은 대통령님의 외가(外家)가 진도 옆의 조도라고들 하는데 소문이 맞습니까?"하고 묻자 그렇다고 하시며 고향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안부를 묻듯 옛날 외갓집 동네 분위기까지 설명해주셨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님께 드릴 전복을 가져왔다며 이 자리에서 잡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자 미소를 지으며 그건 다음에 먹자고 손사래를 치시더군요. 그 순간 실내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경직되어 있던 회원들 얼굴도 펴졌습니다. 고향의 부모를 찾아온 자식들이 모인 자리처럼 웃음과 사랑이 넘쳤는데요. 휠체어를 타고 온 회원에게는 어쩌다 그런 몸이 되었느냐며 열심히 살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덕담을 하면서 젊은이들을 의식해서인지 "서양에는 우리와 같은 효도의 개념과 낱말도 없습니다. 유교문화권인 동양, 특히 우리나라에서 중요시 여겨져 내려오는 독특하고 자랑할 문화이지요. 진정한 효란 이웃과 벗의 부모도 잘 모셔야 합니다"라며 이웃 어른과 친구 부모도 공경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21세기 디지털 정보화 시대까지 인류가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며 80년 신군부에게 당한 고문과 협박, 회유, 사형선고를 받고 풀려나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2년여 동안 겪은 고초도 회고하듯 설명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누구나 가슴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는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기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며 "여러분이 김대중과 함께 가려면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광주에서 두 자녀와 함께 올라와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린 회원이 억울하고 참혹하게 당했던 5·18 민중항쟁 당시를 설명하며 존경한다고 말하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여성 회원 누군가가 이희호 여사님의 말씀도 듣고 싶다고 하자 고난의 시절이 생각났는지 잠시 눈을 감으시더니 말문을 열더군요. 이 여사는 "암울했던 유신 치하에서 납치와 감금이 이어지고 신군부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서까지도 불의와 타협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기도의 힘이 컸다"며 "눈앞의 부귀를 마다하고 영원한 삶을 선택하신 대통령님의 의지가 존경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사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김 전 대통령께 “이희호 여사님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의 선물로 회원들이 손뼉을 칠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라며 회원들과 함께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치며 접견실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렀는데요. 김 전 대통령은 우리를 바라보며 만족한 표정으로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김 전 대통령의 정확한 탄생 연도와 생일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문 기사나 TV 뉴스에서도 태어난 해와 생일을 다르게 보도하는 것을 볼 때마다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했는데,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요.
“신문과 방송 대부분이 대통령님을 1924년(甲子)생이나 1925년(乙丑)생으로 보도하고 1926년(丙寅)생으로 소개하는 검색창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1923년 돼지(癸亥)띠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TV프로를 시청하다 알게 되어 평소 쓰는 글에도 1923년 12월3일생으로 적는데 맞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제가 묻는 얘기를 듣고 옆을 바라보며 웃으니까 이희호 여사가 양력으로는 1924년 1월6일이고 음력으로는 1923년 12월3일이라며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어 기분이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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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함께 참석한 회원들과 따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시골집 큰아버지 고희(古稀) 때 찍은 사진처럼 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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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어진 대화는 1시간이 넘어서야 끝났고, “지금부터는 정원으로 나가셔서 대통령님 내외분과 기념촬영을 하겠습니다”라는 비서관의 안내가 또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회원, 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회원, 애인과 동행한 회원에게는 다시없는 추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원 잔디에서 단체사진과 가족사진을 찍고 돌아올 때는 두 내외분이 대문까지 나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행동하는 양심’의 기를 전달받은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랄 것으로 믿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담당 비서관이 다가오더니 대통령님의 선물이라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 등이 담긴 25장의 카드가 들어 있는 봉투를 한 뭉치 건네주기에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는데요. 대접받은 커피와 녹차 그리고 선물로 받은 카드는 돈과 비교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에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출판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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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는 김 전 대통령 내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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