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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918년 (음))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 ( 918년 (음) )
정명(貞明)註 380380 중국 5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15년~920년에 사용하였다.닫기 4년 무인에 철원경(鐵原京)註 381381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다.닫기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 同光) 3년註 382382 중국 5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 3년(925)을 가리킨다(≪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닫기 겨울 10월(925년)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註 383383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성으로 비정된다(김갑동,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닫기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대적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외생질 진호(眞虎)를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註 38438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居昌’으로 나와 있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이다.닫기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후당註 385385 923년 산서성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존욱(李存勗)은 후량(後梁)의 말제(末帝)를 살해하고 낙양에서 당을 재건한다는 기치 아래 후당을 건국하여 935년 후진이 세워지기까지 13년 동안 유지된 나라이다.닫기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 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侍中 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註 386386 후삼국과 병존하던 북중국의 나라는 후량, 후당과 거란의 태조와 태종대인데, 17년 동안 존속했던 후량과는 거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주로 후당과의 교섭에 치중하였다.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하지 않은 이유는 후량의 정세불안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후량이 당을 멸망시켰다는 대외 명분 때문이라 생각된다. 반면에 후당은 명분상으로나마 당을 잇는 정통왕조로 자처하였다.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함으로써 역적의 오명을 함께 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후삼국은 스스로 정통왕조로 자처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당에 사신을 보내 자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가 후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낸 것과 달리 단 2차례의 사신만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 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닫기 2천 5백 호로 하였다.
註 380
중국 5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15년~920년에 사용하였다.
註 381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다.
註 382
중국 5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 3년(925)을 가리킨다(≪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
註 383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성으로 비정된다(김갑동,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註 38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居昌’으로 나와 있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이다.
註 385
923년 산서성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존욱(李存勗)은 후량(後梁)의 말제(末帝)를 살해하고 낙양에서 당을 재건한다는 기치 아래 후당을 건국하여 935년 후진이 세워지기까지 13년 동안 유지된 나라이다.
註 386
후삼국과 병존하던 북중국의 나라는 후량, 후당과 거란의 태조와 태종대인데, 17년 동안 존속했던 후량과는 거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주로 후당과의 교섭에 치중하였다.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하지 않은 이유는 후량의 정세불안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후량이 당을 멸망시켰다는 대외 명분 때문이라 생각된다. 반면에 후당은 명분상으로나마 당을 잇는 정통왕조로 자처하였다.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함으로써 역적의 오명을 함께 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후삼국은 스스로 정통왕조로 자처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당에 사신을 보내 자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가 후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낸 것과 달리 단 2차례의 사신만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 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주제분류
정치>외교>절교>나라
색인어
이름 : 태조,견훤,견훤,태조,태조,태조,견훤,태조,견훤,견훤,진호,견훤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고 경순왕을 세우다(927년 9월 (음))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으면서 돌려보냈다.註 387387 진호의 사망을 계기로 그동안 비록 표면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친선외교는 끝났으며, 왕건에게 말을 돌려달라고 한 것은 외교단계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통고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닫기 천성(天成)註 388388 중국 5대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로 926년~929년에 사용하였다.닫기2년 정해(丁亥)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산양현(山陽縣)註 389389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산양현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가헌현(嘉獻縣)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일대이다.닫기)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니, 신라왕註 390390 당시 신라왕은 경애왕이다.닫기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註 391391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로, 고려 초 임고군(臨皐郡)에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을 합하여 설치한 것이며, 영주(永州)라고도 하였다고 한다.닫기지금의 울주(蔚州)註 392392 고울부는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이고, 울주는 울산광역시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와 ≪고려사≫ 권1 태조 10년조에서 고울부로 기록하고 있어, 지금의 울주라고 기록한 것은 誤記로 보인다.닫기를 습격하여 빼앗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의 서쪽 교외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왕도로 들어갔다. 신라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註 393393 현재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다. 원래 이궁(離宮)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했던 유적만 남아 있다.닫기에 나가 놀고 있을 때여서 이로 말미암아 더욱 쉽게 패하였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내어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註 394394 경애왕의 동생으로 본문 및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나와 있으나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닫기과 재상 영경(英景)註 395395 당시 신라의 재상으로 본문 및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나와 있으나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닫기을 사로잡고, 또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들이며 여러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도 친히 데리고 갔다.註 396396 견훤의 경애왕 살해 사실에 대해서 견훤의 포악성 내지 반신라적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즉 견훤전에 보이는 경애왕이 최후를 맞는 장면은 아무래도 국가를 몰락의 경지로 몰아간 왕에 대한 김부식의 의도적인 폄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경애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었음을 기술함으로써 결국 신라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견훤의 경주 침공의 목적은 신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병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왕실 내의 문제와 깊게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견훤이 제거한 경애왕은 55대 왕으로, 그 이전 53대 신덕왕의 아들이자, 54대 경명왕의 아우이다. 이들 3대 왕은 ‘박씨 왕’으로 그동안 즉위한 ‘김씨 왕’과는 다른 계통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에 등장한 박씨 왕들은 그 정통성에 대하여 김씨 왕족의 도전을 받고 있었고, 왕실 내의 분열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견훤은 바로 신라 왕실 내의 분열과 박씨 왕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경애왕을 제거한 것이고, 이어 정통 왕위, 즉 김씨 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순왕을 옹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왕의 역사적 평가와 그 의미」,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닫기
註 387
진호의 사망을 계기로 그동안 비록 표면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친선외교는 끝났으며, 왕건에게 말을 돌려달라고 한 것은 외교단계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통고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註 388
중국 5대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로 926년~929년에 사용하였다.
註 389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산양현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가헌현(嘉獻縣)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일대이다.
註 390
당시 신라왕은 경애왕이다.
註 391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로, 고려 초 임고군(臨皐郡)에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을 합하여 설치한 것이며, 영주(永州)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註 392
고울부는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이고, 울주는 울산광역시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와 ≪고려사≫ 권1 태조 10년조에서 고울부로 기록하고 있어, 지금의 울주라고 기록한 것은 誤記로 보인다.
註 393
현재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다. 원래 이궁(離宮)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했던 유적만 남아 있다.
註 394
경애왕의 동생으로 본문 및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나와 있으나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註 395
당시 신라의 재상으로 본문 및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나와 있으나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註 396
견훤의 경애왕 살해 사실에 대해서 견훤의 포악성 내지 반신라적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즉 견훤전에 보이는 경애왕이 최후를 맞는 장면은 아무래도 국가를 몰락의 경지로 몰아간 왕에 대한 김부식의 의도적인 폄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경애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었음을 기술함으로써 결국 신라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견훤의 경주 침공의 목적은 신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병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왕실 내의 문제와 깊게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견훤이 제거한 경애왕은 55대 왕으로, 그 이전 53대 신덕왕의 아들이자, 54대 경명왕의 아우이다. 이들 3대 왕은 ‘박씨 왕’으로 그동안 즉위한 ‘김씨 왕’과는 다른 계통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에 등장한 박씨 왕들은 그 정통성에 대하여 김씨 왕족의 도전을 받고 있었고, 왕실 내의 분열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견훤은 바로 신라 왕실 내의 분열과 박씨 왕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경애왕을 제거한 것이고, 이어 정통 왕위, 즉 김씨 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순왕을 옹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왕의 역사적 평가와 그 의미」,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
정치>외교>사신>조공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색인어
이름 : 진호,왕신,태조,견훤,태조,태조,견훤,견훤,김부,효렴,영경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하다(930년 (음))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하다 ( 930년 (음) )
태조는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註 397397 현재 대구광역시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을 가리킨다.닫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註 398398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927년에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인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에 견원이 신라를 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니, 이를 구하려던 왕건이 오히려 공산전투에서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에 김락은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구하고 전사했다. 왕건은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닫기과 신숭겸(申崇謙)註 399399 고려 태조 때의 장군 겸 개국공신으로 본관은 평산이고, 처음 이름은 능산이다. 궁예 말년에 홍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다.닫기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래서 견훤에게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죄악을 짓게 내버려 두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 지금의 약목현(若木縣)註 400400 현재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일대이다.닫기과 경산부(京山府)註 401401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일대이다.닫기, 강주(康州)註 402402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이다.닫기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註 403403 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추정된다.닫기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註 404404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이다.닫기 태수(太守) 홍술(洪述)註 405405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홍술(洪術)로 되어 있다. 홍술은 신라말의 진보현에서 대두한 지방호족출신으로 의성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닫기이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오른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42년 경인註 406406 이전 연구에서 오기로 인식하였던 42년을 ‘견훤왕 42년’으로 본 연구가 있다. 즉 견훤 42년은 930년으로, 경순왕 7년이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닫기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부(安東府)註 407407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이다.닫기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태조는 백보(百步) 가량을 떨어져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註 408408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지역이다.닫기에 진을 쳤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註 409409 견훤의 신하로, 고창군 싸움에서 왕건에게 사로잡힌 행적 외에 달리 알려져 있지 않다.닫기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註 410410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일대이다.닫기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능히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태조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 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니, 원봉이 본래 순주성 사람이기 때문이다.으로 삼았다.
註 397
현재 대구광역시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을 가리킨다.
註 398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927년에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인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에 견원이 신라를 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니, 이를 구하려던 왕건이 오히려 공산전투에서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에 김락은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구하고 전사했다. 왕건은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註 399
고려 태조 때의 장군 겸 개국공신으로 본관은 평산이고, 처음 이름은 능산이다. 궁예 말년에 홍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
註 400
현재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일대이다.
註 401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일대이다.
註 402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이다.
註 403
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추정된다.
註 404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이다.
註 405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홍술(洪術)로 되어 있다. 홍술은 신라말의 진보현에서 대두한 지방호족출신으로 의성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註 406
이전 연구에서 오기로 인식하였던 42년을 ‘견훤왕 42년’으로 본 연구가 있다. 즉 견훤 42년은 930년으로, 경순왕 7년이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註 407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이다.
註 408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지역이다.
註 409
견훤의 신하로, 고창군 싸움에서 왕건에게 사로잡힌 행적 외에 달리 알려져 있지 않다.
註 410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일대이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이름 : 태조,태조,김락,신숭겸,태조,견훤,견훤,홍술,태조,견훤,태조,견훤,김악,견훤,원봉,태조
지명 : 공산,경산부,강주,의성부,고창군,석산,병산,하지현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견훤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다
견훤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쇠망해 가는 시기에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우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신라 왕도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했는데,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지난번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 하는 것이었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逖)註 411411 남조 동진(東晋) 초기의 무장이다.닫기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註 412412 수(隋)의 장수로서 진(陳)을 쳐서 후주(後主)를 사로잡은 인물이다.닫기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타일렀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경명왕(景明王)註 413413 신라의 제5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17년~924년이다.닫기의 표제(表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잇게 하여 임금이 있게 되었다. 그대는 나의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책으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이달 안에는 좌장 김락(金樂)은 미리사(美利寺)註 41441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미리사(美理寺)로 되어 있다. 현재 대구광역시 근처의 절로 생각된다.닫기 앞에서 전사했으며 그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며, 내가 바라는 것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註 415415 당말에 진해·진동양군절도사(鎭海鎭東兩軍節度使)였던 전류(錢鏐)가 907년에 당이 멸망하자 항주를 중심으로 세운 국가로 978년에 송에 항복하기까지 5왕 72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의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에 이르는 강남의 요지를 영역으로 하였는데, 후백제는 오월과 900년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한 이후 지속적인 왕래를 하였다. 후백제가 오월과 교섭한 목적은 정치적 후견 세력으로서, 그리고 국제무역의 상대국으로서였다(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닫기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선린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는데 근래에 양편의 볼모가 북은 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본도로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길이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에 돈독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데 전념해 오던 터에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으로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기를 바란다. 토끼와 사냥개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요,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註 416416 각각 ≪전국책≫ 「진책(秦策)」과 「연책(燕策)」에 실려 있는 고사이다.닫기 마땅히 미혹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라.”
新羅君臣以衰季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萱聞之又欲入王都作惡, 恐太祖先之, 寄書于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将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凖翼, 必使生霊塗炭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姧臣遁逃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獻康王之外孫勸即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徒聽流言, 百計窺覦多方侵擾, 尚不能見僕馬首拔僕牛毛. 冬初都頭索湘束手星山陣下, 月内左將金樂曝骸羙利寺前, 殺獲居多追禽不小. 強羸若此勝敗可知, 所期者掛弓於平壤之樓, 飯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尚書至, 傳王詔㫖, ‘知卿與髙麗乆通和好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不戢干戈. 今專發使臣赴卿本道, 又移文髙麗冝各相親比永孚于休.’ 僕義篤尊王情深事大, 及聞詔諭即欲祗承, 但虜足下欲罷不能困而猶闘. 今録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免獹迭憊終必貽譏, 蚌𪃬相持亦為所笑. 宜迷復之為誡無後悔之自貽.”
註 411
남조 동진(東晋) 초기의 무장이다.
註 412
수(隋)의 장수로서 진(陳)을 쳐서 후주(後主)를 사로잡은 인물이다.
註 413
신라의 제5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17년~924년이다.
註 41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미리사(美理寺)로 되어 있다. 현재 대구광역시 근처의 절로 생각된다.
註 415
당말에 진해·진동양군절도사(鎭海鎭東兩軍節度使)였던 전류(錢鏐)가 907년에 당이 멸망하자 항주를 중심으로 세운 국가로 978년에 송에 항복하기까지 5왕 72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의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에 이르는 강남의 요지를 영역으로 하였는데, 후백제는 오월과 900년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한 이후 지속적인 왕래를 하였다. 후백제가 오월과 교섭한 목적은 정치적 후견 세력으로서, 그리고 국제무역의 상대국으로서였다(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註 416
각각 ≪전국책≫ 「진책(秦策)」과 「연책(燕策)」에 실려 있는 고사이다.
주제분류
정치>외교>문서>내용
색인어
이름 : 태조,견훤,태조,태조,김웅렴,경명왕,헌강왕,색상,김락,반상서
국명 : 오월국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답서하다(927년 1월 (음))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답서하다 ( 927년 01월(음) )
천성(天成) 2년註 417417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와 ≪고려사≫ 권1 태조 11년조에서는 3년(928)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천성 3년이 옳다.닫기 정월에 태조는 답서를 보내어 말하였다.
“삼가 오월국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었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다. 사신이 이에 조서를 가지고 왔고, 그대의 편지에서도 아울러 가르침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읽고는 비록 감격을 더했으나 그대의 편지를 펴 보고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으니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나의 심중을 말하려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註 418418 후한말에 장각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둑 무리인데, 모두 황색 두건을 표식으로 둘렀기 때문에 황건적이라고 하였다.닫기에 속하게 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다.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고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 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다. 계유(癸酉)년 10월(913년)에 이르러 갑자기 사건을 일으키니 곧 싸움에까지 이르렀다.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달려드는 것이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감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다.註 419419 둘 다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나오는 고사이다.닫기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전쟁을 하지 않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 어찌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과 같은 독기는 생민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와 같은 난폭함은 기전(畿甸)을 가로막아 금성(金城)註 420420 신라의 왕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닫기이 군급(窘急)해지고 황옥(黃屋, 왕실)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대의에 의거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註 421421 둘 다 춘추시대의 패자이다. 제환공와 진문공은 쇄락하던 주(周)를 일으키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책을 추진하여 춘추시대에 큰 영향을 남겼다.닫기의 패업(覇業)과 같으며 기회를 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하니 오직 왕망註 422422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 8~23)왕조를 세웠으나 겨우 15년만에 후한 광무제(광무제)에 의해 멸망당했다.닫기과 동탁註 423423 후한 말엽의 간신인 동탁(董卓, ?~192)은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권력을 휘둘렀으나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참살당했다.닫기의 간악함을 볼 뿐이오. 지극히 존귀한 왕으로 하여금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질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근심하였다. 이에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목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하였다.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싣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註 424424 하(夏)의 걸(桀)왕과 은(殷)의 주(紂)왕을 가리키는데, 두 왕은 그릇된 왕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된다.닫기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과 올빼미보다 더 심하였다.
나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원한과 해를 뒷걸음질치게 하는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는 듯한 힘으로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하였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지났는데 육전에서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전에서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일을 하는 데 헛됨이 없었다. 윤경(尹卿)을 해안까지 쫓았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밖에서 잡았을 때에는 엎드린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註 425425 현재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일대이다.닫기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목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이산군(伊山郡)註 426426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근으로 비정된다.닫기인 듯하다. 밖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註 427427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일대이다.닫기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註 428428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일대이다.닫기상주(尙州)註 429429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사벌국(沙伐國)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 사벌주, 혹은 상주로 개편되었는데 소백산맥 이동 지역의 교통상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이용현, 「삼국시대의 상주 -중고기 신라 경영의 시점에서-」, ≪상주 영남 문물의 결절지≫, 2003, 국립대구박물관).닫기 영내의 현 이름을 쳐부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註 430430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는 사찰이다.닫기는 깃발만 바라보고 허물어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하였다. 강주(康州)註 431431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이다.닫기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註 432432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일대이다.닫기는 서쪽에서 와서 귀속되었다. 공략한 지역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반드시 저수(泜水)註 433433 중국 하북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의 서군산(西羣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괴하(槐河)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닫기의 군영에서 장이(張耳)註 434434 장이(張耳, ?~기원전202)는 위(魏) 대량(大梁) 출신으로 진말(秦末) 한초(漢初)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진여(陳余)와 절친했으나 나중에는 멀어졌다. 진이 멸망한 뒤 장이는 항우에 귀의해 조(趙) 지방에 상산군(常山君)으로 분봉되었으나 진여가 제(齊)의 병사를 이끌고 침범하자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는 기원전204년 한신(韓信)과 함께 진여를 공격해 저수에서 참살하여 원한을 씻었다.닫기의 첩첩이 쌓인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註 435435 진(秦)이 멸망한 뒤 항우는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으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퇴하여 양자강(揚子江) 서안(西岸) 오강(烏江)에서 자살했다.닫기의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일전 승리의 소원을 이룩하여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그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다. 하늘이 돕는 것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이 먼 지역까지를 포괄하고 인(仁)은 약한 자들을 애무(愛撫)하던 지라 특히 대궐에서 조서를 내려 동방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도 이 조서를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상국(上國)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을 능히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최치원(崔致遠)註 436436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닫기이 지었다.註 437437 왕건이 견훤에게 준 서신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최치원이 아니라 최승로가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닫기
二年校勘 185185 서울대규장각본에는 二年 앞이 두 개의 빈 칸으로 되어 있다.닫기正月太祖荅曰.
“伏奉吳越國通使班尚書所傳詔㫖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爰到制書, 尺素好音兼蒙教誨. 捧芝檢而雖増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托迴軒輙敷危衽. 僕仰承天假俯迫人推, 過叨将帥之權獲赴經綸之㑹. 項以三韓厄㑹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黄巾, 田野無非其赤土. 庻㡬弭風塵之警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於為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癸酉年維時陽月, 忽焉生事至乃交兵. 足下始軽敵以直前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辝指天作誓, ‘今日之後永世歡和, 苟或渝盟神其殛矣.’ 僕亦尚止戈之㱏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辝質子, 但欲安民. 此即我有大徳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為梗於畿甸, 金城窘忽黄屋震驚. 仗義尊周誰似桓·文之覇, 乗間謀漢唯看莽·卓之姧. 致使王之至尊枉稱子於足下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為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社稷. 以僕心無匿惡志切尊王, 将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主焚燒宮闕, 葅醢卿佐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珎寳則奪之相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獍梟. 僕㤪極崩天誠深却日, 約効鷹鸇之逐以申犬馬之勤. 再舉干戈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激, 水攻則虎愽龍騰, 動必成功舉無虛發. 逐尹卿於海岸積甲如山, 禽雛造於城邊伏尸蔽野. 燕山郡畔斬吉奐於軍前, 馬利 疑伊山郡城戮隨晤於纛下. 拔任存 今大興郡之日刑積等數百人捐軀, 破清川縣尚州領内縣名之時直心䓁四·五軰授首. 桐藪今桐華寺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收復寧遥. 必期泜水營中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成漢王一捷之心, 竟息風波永清寰海. 天之所助命欲何歸. 况承吳越王殿下徳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舟校勘 186186 조병순소장본에는 丹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丹이 옳다.
註 417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와 ≪고려사≫ 권1 태조 11년조에서는 3년(928)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천성 3년이 옳다.
註 418
후한말에 장각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둑 무리인데, 모두 황색 두건을 표식으로 둘렀기 때문에 황건적이라고 하였다.
註 419
둘 다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나오는 고사이다.
註 420
신라의 왕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註 421
둘 다 춘추시대의 패자이다. 제환공와 진문공은 쇄락하던 주(周)를 일으키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책을 추진하여 춘추시대에 큰 영향을 남겼다.
註 422
전한(前漢)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 8~23)왕조를 세웠으나 겨우 15년만에 후한 광무제(광무제)에 의해 멸망당했다.
註 423
후한 말엽의 간신인 동탁(董卓, ?~192)은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권력을 휘둘렀으나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참살당했다.
註 424
하(夏)의 걸(桀)왕과 은(殷)의 주(紂)왕을 가리키는데, 두 왕은 그릇된 왕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된다.
註 425
현재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일대이다.
註 426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근으로 비정된다.
註 427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일대이다.
註 428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일대이다.
註 429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를 지칭하는데, 사벌국(沙伐國)이 신라에 복속된 뒤에 사벌주, 혹은 상주로 개편되었는데 소백산맥 이동 지역의 교통상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라의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 혹은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다(이용현, 「삼국시대의 상주 -중고기 신라 경영의 시점에서-」, ≪상주 영남 문물의 결절지≫, 2003, 국립대구박물관).
註 430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는 사찰이다.
註 431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이다.
註 432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일대이다.
註 433
중국 하북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의 서군산(西羣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괴하(槐河)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註 434
장이(張耳, ?~기원전202)는 위(魏) 대량(大梁) 출신으로 진말(秦末) 한초(漢初)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진여(陳余)와 절친했으나 나중에는 멀어졌다. 진이 멸망한 뒤 장이는 항우에 귀의해 조(趙) 지방에 상산군(常山君)으로 분봉되었으나 진여가 제(齊)의 병사를 이끌고 침범하자 한고조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는 기원전204년 한신(韓信)과 함께 진여를 공격해 저수에서 참살하여 원한을 씻었다.
註 435
진(秦)이 멸망한 뒤 항우는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으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퇴하여 양자강(揚子江) 서안(西岸) 오강(烏江)에서 자살했다.
註 436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註 437
왕건이 견훤에게 준 서신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최치원이 아니라 최승로가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제분류
정치>외교>문서>내용
색인어
이름 : 태조,반상서,환공,문공,왕망,동탁,걸왕,주왕,윤경,추조,길환,수오,형적,장이,한왕,오월왕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와 고려의 계속되는 전투(932년 (음))
후백제와 고려의 계속되는 전투 ( 932년 (음) )
장흥(長興)註 438438 중국 오대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로 930년~93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3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註 439439 공직(?~939)은 후삼국시대의 호족으로 연산(燕山) 매곡(昧谷)사람이다. 처음에는 견훤 세력에 속해있었는데, 932년에 아들 영서(英舒)·함서(咸舒)와 함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대상(大相)을 제수했고 이후 좌승(佐丞)에 이르러 사망했는데, 사후에 사공삼중대광(司空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되었다.닫기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註 44044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이 부분이 일길찬(一吉湌)과 상귀(相貴)를 보낸 것으로 씌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길은 신라의 제7관등인 일길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닫기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註 441441 황해도 곡산군 대각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도 동부를 남류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강이다.닫기으로 침입하여 사흘 동안 머물면서 염주(鹽州)註 442442 현재 황해도 연안 일대이다.닫기·백주(白州)註 443443 현재 황해도 백천 일대이다.닫기·진주(眞州)註 44444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정주(貞州)로 되어 있는데, 한강과 임진강 하구 근처로 추정된다.닫기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운운(云云)
청태(淸泰)註 445445 중국 후당 폐제(廢帝)의 연호로 934년~93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元年) 갑오(934년)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註 446446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이다.닫기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뽑아 재빨리 이르렀으나 미처 진영을 설치하기도 전에 장군 금필(黔弼)註 447447 유금필(?~914)은 고려 초기의 장군으로 평산 유씨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 8년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후백제의 길환(吉奐)을 죽인 후, 임존성군(任存成郡)을 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4년에 참소를 당하여 곡도(鵠島)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후백제의 수군 장수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침범하므로 자진 출전하여 격퇴시켰다. 동왕 16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동왕 18년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지내어 많은 전공을 세웠고, 후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994년(성종 13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닫기이 날랜 기병으로 이를 쳐서 3천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註 448448 백제 제22대 문주왕 즉위년(475)에 고구려의 침입과 개로왕의 패사(敗死)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성(漢城)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건설한 백제의 도읍지로 오늘날의 공주 일대이다.닫기 이북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註 449449 술사는 풍수지리에 밝은 자로서 종군하여 전술을 담당한 듯하다. 그리고 종훈은 이 기록 외에 그 행적을 찾아 볼 수 없다.닫기과 의원(醫者) 지겸(之謙)註 45045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의자(醫者) 훈겸(訓謙)으로 나와 있다. 지겸 또는 훈겸은 이 기록 외에 달리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닫기,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註 438
중국 오대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로 930년~933년에 사용하였다.
註 439
공직(?~939)은 후삼국시대의 호족으로 연산(燕山) 매곡(昧谷)사람이다. 처음에는 견훤 세력에 속해있었는데, 932년에 아들 영서(英舒)·함서(咸舒)와 함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대상(大相)을 제수했고 이후 좌승(佐丞)에 이르러 사망했는데, 사후에 사공삼중대광(司空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되었다.
註 44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이 부분이 일길찬(一吉湌)과 상귀(相貴)를 보낸 것으로 씌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길은 신라의 제7관등인 일길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註 441
황해도 곡산군 대각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도 동부를 남류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註 442
현재 황해도 연안 일대이다.
註 443
현재 황해도 백천 일대이다.
註 44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정주(貞州)로 되어 있는데, 한강과 임진강 하구 근처로 추정된다.
註 445
중국 후당 폐제(廢帝)의 연호로 934년~936년에 사용하였다.
註 446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이다.
註 447
유금필(?~914)은 고려 초기의 장군으로 평산 유씨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 8년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후백제의 길환(吉奐)을 죽인 후, 임존성군(任存成郡)을 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4년에 참소를 당하여 곡도(鵠島)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후백제의 수군 장수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침범하므로 자진 출전하여 격퇴시켰다. 동왕 16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동왕 18년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지내어 많은 전공을 세웠고, 후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994년(성종 13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註 448
백제 제22대 문주왕 즉위년(475)에 고구려의 침입과 개로왕의 패사(敗死)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성(漢城)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건설한 백제의 도읍지로 오늘날의 공주 일대이다.
註 449
술사는 풍수지리에 밝은 자로서 종군하여 전술을 담당한 듯하다. 그리고 종훈은 이 기록 외에 그 행적을 찾아 볼 수 없다.
註 45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의자(醫者) 훈겸(訓謙)으로 나와 있다. 지겸 또는 훈겸은 이 기록 외에 달리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이름 : 견훤,공직,태조,견훤,공직,견훤,일길,견훤,태조,금필,견훤,종훈,지겸,상봉,최필,태조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견훤이 유폐되다(936년 1월 (음))
후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견훤이 유폐되다 ( 936년 01월(음) )
병신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혹은 견성(甄成)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註 451451 여기에는 상원부인으로 나와 있으나,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아자개의 첫째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닫기의 소생이다”라고 하였다.
견훤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알고 몹시 근심하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註 452452 도독(都督)은 통일신라 때 주(州)의 장관으로, 원성왕 9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 도독으로 제수될 수 있는 사람의 관위(官位)는 급찬(제9품)부터 이찬(제2품)까지이다.닫기,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어서 홀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註 453453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가리킨다.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으며, 신라 경덕왕 16년 이후 무주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 23년에 광주로 개칭되었다.닫기에 보내서 양검 등과 모의하였다. 청태(淸泰) 2년 을미 봄 3월(935년)에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해서 견훤을 금산(金山)의 불당(佛堂)註 454454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이다.닫기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 운운(云云)註 455455 신검과 금강의 세력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신호철과 김수태의 연구가 있다. 신호철은 견훤이 후백제를 수립한 후 주변의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정책적인 혼인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신검·양검·용검 삼형제의 외척 세력과 금강의 외척 세력이라고 보았다. 신검 형제의 외척 세력은 초기 광주 정권 시절의 광주 호족인 데 반해, 금강의 외척 세력은 전주천도 후 새로 연결된 전주 일대의 호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검계는 대 고려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주전적인 성격을 가진 반면에 금강계는 소극적·타협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결국 금강의 외척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신검 형제를 제쳐두고 금강을 옹립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신검·양검·용검 삼형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한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김수태는 신검계와 금강계의 세력 구분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주전파와 타협파로 나누는 견해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즉, 대고려에 대한 태도보다는 전선의 문제와 연관시켜 광주에 기반을 둔 신검계는 경상도 지역의 전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반면에 전주에 세력 기반을 둔 금강계는 충청도 지역의 전선에 관심을 두었다고 주장한다(김수태, 「전주 천도기 견훤정권의 변화」, ≪한국고대사연구≫ 15, 한국고대사학회, 1999).닫기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의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도다
註 451
여기에는 상원부인으로 나와 있으나,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아자개의 첫째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452
도독(都督)은 통일신라 때 주(州)의 장관으로, 원성왕 9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 도독으로 제수될 수 있는 사람의 관위(官位)는 급찬(제9품)부터 이찬(제2품)까지이다.
註 453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가리킨다.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으며, 신라 경덕왕 16년 이후 무주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 23년에 광주로 개칭되었다.
註 454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이다.
註 455
신검과 금강의 세력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신호철과 김수태의 연구가 있다. 신호철은 견훤이 후백제를 수립한 후 주변의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정책적인 혼인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신검·양검·용검 삼형제의 외척 세력과 금강의 외척 세력이라고 보았다. 신검 형제의 외척 세력은 초기 광주 정권 시절의 광주 호족인 데 반해, 금강의 외척 세력은 전주천도 후 새로 연결된 전주 일대의 호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검계는 대 고려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주전적인 성격을 가진 반면에 금강계는 소극적·타협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결국 금강의 외척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신검 형제를 제쳐두고 금강을 옹립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신검·양검·용검 삼형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한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김수태는 신검계와 금강계의 세력 구분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주전파와 타협파로 나누는 견해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즉, 대고려에 대한 태도보다는 전선의 문제와 연관시켜 광주에 기반을 둔 신검계는 경상도 지역의 전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반면에 전주에 세력 기반을 둔 금강계는 충청도 지역의 전선에 관심을 두었다고 주장한다(김수태, 「전주 천도기 견훤정권의 변화」, ≪한국고대사연구≫ 15, 한국고대사학회, 1999).
주제분류
정치>왕실>왕위계승>계승쟁탈전
색인어
이름 : 견훤,신검,용검,양검,견훤,신검,겸뇌,용술,총지,종우,위흥,상원부인,견훤,금강,견훤,신검,양검,용검,양검,용검,신검,견훤,능환,양검,영순,신검,견훤,금강,신검,견훤,신검,신검,파달
서명 : 이제가기
국명 : 후백제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견훤, 고려에 귀순하다
견훤, 고려에 귀순하다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4월에 이르러 술을 빚어서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보(尙父)라고 하고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였으며 양주(楊洲)註 456456 현재의 경기도 양주군 일대이다.닫기의 식읍·전장(田莊)과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註 457457 신강은 후백제 사람으로 견훤보다 먼저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 인물로,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여 남궁에 있게 되자 그곳의 아전으로 배속되었다. 이 때의 아전은 백관 위에 비상으로 설치된 상부의 서무를 관할했던 일종의 서리직(胥吏職)으로 추정된다.닫기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註 456
현재의 경기도 양주군 일대이다.
註 457
신강은 후백제 사람으로 견훤보다 먼저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 인물로,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여 남궁에 있게 되자 그곳의 아전으로 배속되었다. 이 때의 아전은 백관 위에 비상으로 설치된 상부의 서무를 관할했던 일종의 서리직(胥吏職)으로 추정된다.
주제분류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