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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천재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삶
1994.4.8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복원돼 일반에 공개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가 복원 된 후, 로마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공개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성당으로 바티칸 궁전 내부에 건축되었다.
당시 보티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참여하여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를 그렸다. 이른바 화룡점정인 셈이다.이 불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16세기 작품이다. 이제 500년이나 지난 천장화를 복원해 낸 현대인들 역시 그 작업을 하면서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품었다. 세월 앞에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로맹 롤랑"천재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라면서 로맹 롤랑은 그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이렇게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 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의 울타리인 고독에 머물러 예술 이외에는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슬픔 그 자체로 살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었다.
부호 메디치 가의 배려로 피렌체의 미술품을 보며 자란 조각 지망생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토 시모니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아들을 훈육했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미켈란젤로의 외통수 고집을 꺾지를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는다. 천재는 일찍 발견되었다.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원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했다.
조각 작업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일부로 그려진 여인상.
마모된 것을 현대에 와서 복원했다.
프랑스의 피렌체 침공과 훗날 화형을 당하는 사보나롤라 신부의 저주에 가까운 설교가 불덩어리처럼 떠돌아다니던 피렌체를 잠시 떠나 있던 미켈란젤로는 1501년 봄, 피렌체에 다시 돌아와 <다윗>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압제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 눈에 익숙한 이 조각상은 <피에타>와 더불어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에 만든 걸작이다.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로 대리석을 조각하여 '물질 안에 속박되어 있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
모니카 지라르디는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조각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조각 이전에 행해지는 형태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직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에 숨겨져 있는 형태를 미리 예견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다."
르네상스의 두 거장의 만남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보다 20년 연상이다.) 1504년 피렌체 정부는 이 두 천재로 하여금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했다. 5월에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의 전투>의 구상에 착수했고, 8월에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맡았지만 두 사람 다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두 거장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이 계획이 무산된 것은 신이 두 천재 중의 작품을 한 자리에 놓아두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라이벌이 만든 함정에 빠져서 원치 않는 벽화를 그려야 했던 천재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했다. 그 중에서도 율리우스2세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그런 관계였다. 천재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질투하는 예술가들의 이간질로 교황과 사이가 틀어져 바티칸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율리우스 2세는 청동의 주조법을 모른다는 미켈란젤로에게 청동 동상을 주문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 라는 심경으로 청동 주조법을 배워 동상을 제작하다 실패를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아니 명령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이 천재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으로 본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이 작업으로 위대한 그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완성한 <최후의 심판>의 일부
더군다나 같은 해에 역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주문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추천하면서 자신은 빠져 나오려고 했다. 미켈란젤로만큼 외고집이었던 교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인 작업은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절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나 교황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자꾸 헛되이 지나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림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그에게 가정적인 문제도 어려웠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과의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결핍, 건강 문제 등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예술가의 고통은 바로 감상자의 희열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이라고 하듯,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는 1512년 11월 1일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두 명의 교황으로부터 번갈아 명을 받아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완성
이 작품이 진행 중일 때 교황은 언제 작업이 끝나느냐고 물었다. 미켈란젤로는 '완성되는 날에 끝난다.'고 대답해 교황이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화를 내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집으로 뛰어가 로마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고 한다. 아차 싶은 율리시스 2세는 급히 사자를 보내 사과하고 돈도 챙겨주어 미켈란젤로는 못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또 이런 일이 반복되곤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스티나의 일이 끝나자 율리우스 2세도 선종했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에는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3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묘의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를 해온 것이다. 클레멘스 7세가 세상을 떠나자, 1535년 파울루스 3세가 다시 이 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려 <천지창조>에 이은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역시 엄청난 노력으로 1541년에 완성되었다. 이제 60대의 미켈란젤로는 심신이 파김치가 되었다.
시인 미켈란젤로의 마음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미켈란젤로가 지은 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내의 절절한 심경이 잘 보이는 시이다. 이외에도 힘들 때, 즐거울 때, 그는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구애를 한 대상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생을 슬픔과 친구하면서 살아간 이 고독한 사람의 연약한 마음이 잘 보인다. 물론 그의 조각이나 그림에는 비장한 사상만이 들어있다.미켈란젤로는 시작업과 서간문을 통하여 예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쓰고 또 썼다. 1486년부터 1563년까지 500여 편의 편지를 써서 조각이나 그림으로는 담아내지 못했던 마음까지도 담았다. 특히 1546년 이후에는 시집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의 만년의 시들은 종교적인 경건함과 성스러운 믿음의 마음이 잘 드러났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무수한 예술가들이 만든 피에타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숨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상을 평생 동안 만든 미켈란젤로
그의 조각, 회화, 이탈리아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건축 등 수많은 그의 작업 중에서 성모에 대한 작업은 일관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부조 작품에서부터 산 피에트로의 피에타, 브뤼헤의 성모, 그리고 만년의 피에타 작품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의 예술 인생에 끝과 시작을 같이 한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모성은 '마테르에클레시아(교회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개념)'을 강조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주조를 이루던 테마였다. 드 톨네이는 '인간의 영혼은 삶의 이상을 숙고함으로서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축복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모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켈란젤로가 돔을 디자인한 성 바오로 성당.
그러나 그는 이 돔을 미완성으로 둔 채 숨졌다.
성모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데,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부터 젖은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생명의 본질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이르면 젖은 믿음과 신앙의 바탕을 상징한다. 젖을 먹이는 성모의 모습을 통해 신에 의한 인간의 구원의 가치는 현현되며, 신의 한없는 은총과 가련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은 예수와 성모가 한 인물처럼 조각된'로다니니 피에타'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미켈란젤로의 폭풍우와 같은 인생은 고요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534년 9월 도망치듯이 피렌체를 떠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고 고향이 아닌 로마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운 피렌체의 환영을 다시 보았다. 롤맹 롤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쓴다. "그것은 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5시경이었다. 날이 저물었다….'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과 평화의 왕국의 첫날이…' 마침내 그는 휴식을 얻었다. 오랜 소원을 이루어 드디어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상이 미켈란젤로의 성스러운 고뇌의 생애이다. - 이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미켈란젤로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조각은 '론다니니 피에타'이다. 1547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단과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조각을 보면 예수의 모습이 성모의 신체 안에 갇혀 있어 마치 한 인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전에도 미완성으로 남긴 조각들이 여럿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미완성은 미완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덜 깎아낸 돌에서 몸부림치는 <포로>와 작은 조각들은 인간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는 성모와 예수을 통하여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다. 미켈란젤로의 90년 세월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그의 작품으로 우리는 환희와 희망과 사랑을 보고 감동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의지를 마음속에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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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하나의 이름을 보자. 미켈라니올로(Michelagniolo). 어느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고, 반항적이고, 극도로 고독했던 인물의 서명이다.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이 비범한 천재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빛바래고 무의미한 말일 뿐이다. 또한 미켈란젤로 화파에 관해 말할 수도 없다. 그런 화파는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미켈란젤로의 시대'라는 장을 별도로 구성해 그를 다룰 수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시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넓은 평원에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을 굽어보는 존재였다.
'위대함', '완벽함', '탁월함' 같은 말들은 보통 사람에게는 어울리지만, 그에게 갖다 붙이면 오히려 힘을 잃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마치 얼간이가 타지마할 앞에서 손뼉을 치며 "정말 예쁜데!" 하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그의 작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직접 보아야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말로는 형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데 비교할 대상이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그의 미완성 작품들을 모아놓은 피렌체의 전시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티탄(Titan)1)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장송행진곡(Death March)」2)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티탄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송행진곡」을 들어보지 않았으니 그런 비유는 아무 소용도 없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그것도 음악가 협회의 회원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 간략한 개요를 소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위인의 경우 으레 그렇듯이 그의 생애와 작품은 완전히 일치한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한 번 사랑에 빠지면 다른 일을 돌볼 여유가 없지만, 미켈란젤로는 예순이 넘어서야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에 대한 깊은 사랑도 그에게는 활동 범위를 바꾼다는 의미밖에 가지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시기에 그는 회화와 조각을 멀리하고 전혀 새로운 예술 형식, 즉 시에 몰두했다. 그는 「모세(Moses)」 상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깎아낼 때와 같은 절박함으로 소네트를 써내려갔다. 그가 표현한 정서는 여느 시에 드러난 정서보다 훨씬 고결했다. 마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그려진 인물들이 높은 곳에서 관람객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가 이 세상에 머문 90년 동안 한 일들을 살펴보자.
그는 1475년에 태어났다. 가족은 당시 이탈리아의 평범한 계층에 속했다. 신분은 괜찮았어도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물론 생계를 위해서 일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런대로 살 수 있었겠지만, 신분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비천하게 돈을 받고 노동하느니 차라리 굶어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당시 신사 계급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미켈란젤로는 무능한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돈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자 젊은 시절의 모든 어려움을 잊고 온 가족을 정성껏 부양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와 형, 남동생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그 유모의 남편은 인근 마을의 석수였다. 조각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아마도 농담이었을 테지만 그렇다면 그의 유일한 농담일 것이다. 그는 너무 바빠 농담할 시간도 없었다.
본격적인 예술의 경력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도제가 된 열세 살 때 시작되었다. 기를란다요는 보석 세공인 출신의 화가로 피렌체에서 인기가 높은 공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훨씬 이전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장차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노라고 공언했다. 늘 뼈대 있는 가문임을 의식했던 아버지는 그런 직업을 택하면 부오나로티(Buonarroti)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진다며 노여워했다. 그러나 스스로 더 나은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고 아들에게 권하지도 못하는 처지였으니 그는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자위하지 않았을까? 예술가란 멋진 사람이야. 잘만 하면 큰돈을 벌기도 하지. 아들이 나중에 유명해져 가문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우선 이 젊은이는 일을 배워야 했다. 피렌체의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도 브란카치 예배당에 있는 마사초의 작품을 모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른 학생과 싸우다 코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부러진 뼈는 낫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표정이 이상해졌는데, 그것을 두고 그의 적들은 그에게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공방을 나와 메디치 가문이 설립한 예술 아카데미로 옮겼다. 아카데미가 위치한 메디치 저택의 정원에는 많은 고대의 조각상들이 있었다. 아카데미의 운영을 맡은 덕망 있는 노신사는 고대의 신들과 오랜 시간 함께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이교도가 되어버렸다. 그는 예술 아카데미를 일종의 문학 아카데미처럼 만들었으므로 성 바울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플라톤의 이름이 더 자주 나왔다.
인문주의 사상이 르네상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혔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제 그런 변화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바티칸조차 고대 로마의 궁전처럼 바뀌고 있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미켈란젤로는 플라톤과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로 70년 동안이나 노골적인 이교 신앙을 선전하는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이단의 혐의는커녕 교회의 든든한 대들보로 존경을 받았고, 군중의 애도 속에서 여든아홉 살의 고령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92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피에로는 우둔한 인물이었다. 그의 무능한 통치 아래 피렌체의 상황이 불안해지자 미켈란젤로는 거리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기 전에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날 결심을 했을까? 이 기묘한 모순덩어리 같은 인물은 자신이 천리안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는 망치와 끌을 내던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조금만 더 머물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그는 얼마 안 되는 소지품도 내동댕이치고 말을 사서 전속력으로 달려 한참 떨어진 도시에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
1492년이 처음이었지만 그런 일은 그 뒤에도 몇 차례나 되풀이되었다. 70년에 걸친 그의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 거장이 조합에서 정한 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면서 수시로 그런 도피를 감행하는 사례를 보게 될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피렌체를 떠난 그는 볼로냐로 가서 현지 교회에 조각상을 두 개 만들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피렌체 시의회 의사당의 건축을 담당할 예술가들의 한 사람으로 초빙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중대한 사기극에 관여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그런 사건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옛것은 다 새것보다 좋고, 멀리서 온 것은 가까이에서 온 것보다 좋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2천 년 된 평범한 조각상이 당대에 제작된 완벽한 작품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엉뚱한 유머감각을 가진 미켈란젤로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철저히 로마의 양식으로 큐피드 상을 만들었다. 위조 미술품을 취급하는 전문가는 그 작품을 어느 추기경에게 고가에 팔았다. 평소에 고대의 거장들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추기경은 큐피드 상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사기극이 흔히 그렇듯이 결국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화가 난 추기경은 편지를 보내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사건은 무마되었지만, 16세기 미술상이나 20세기 미술상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미켈란젤로는 다시 겁에 질려 피렌체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로 가서 그 가짜 큐피드를 구입했던 추기경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 사람이 정말 예술을 안다면, 모두가 기원전 3세기의 진품으로 착각할 만큼 뛰어난 작품을 만든 내 솜씨를 알아주겠지. 나를 크게 존경하면서 환영해줄 거야."
그는 이런 꿈에 부풀어 로마로 갔으나 그가 받은 대접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가 찾아갔을 때 추기경은 집 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하긴, 우롱당한 감식가의 분노를 어떻게 달래겠는가?
그러나 로마에서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그 추기경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곧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문을 받았다. 그는 1496년부터 1501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미미한 관직(세관의 한직)을 잃어 생계가 곤란해지자 미켈란젤로는 즉각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만큼 그는 충직한 아들이요 형제였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족을 그들이 죽을 때까지 돌보았으며, 후대의 베토벤이 그랬듯이 재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린 조카에게 한없는 애정을 쏟았다.
얼마 뒤 미켈란젤로는 시에나로 초청을 받아 시에나 대성당에 건축되는 교황 피우스 2세의 기념물을 제작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거기서 그는 주요 인물상 두 점을 완성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 지금도 남아 있는 거대한 「다비드」 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 작품은 비를 맞지 않도록 실내로 옮겨졌는데, 바깥에 있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실내에서 보아도 「다비드」는 감탄할 만한 걸작이다. 그 재료가 된 거대한 대리석은 원래 40년 전에 피렌체 시가 아고스티노 단토니오(Agostino d'Antonio)라는 조각가를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토니오는 그 엄청난 덩어리에 경악하고 포기해버렸다.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쓸모없는 돌덩어리가 마침내 미켈란젤로의 손에서 형태와 숨결을 얻은 것이다.
그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성모상도 만들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플랑드르로 옮겨져 현재 브뤼헤의 성모마리아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조각이 초기 플랑드르의 성채 안에 있는 모습은 사뭇 어색해 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회화로 돌아갔다. 새 의사당 벽에 그려질 전쟁화를 놓고 레오나르도와 경합을 벌인 것도 이 무렵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으나 미켈란젤로의 스케치는 남아 있다. 「수영하는 사람들(Bathers)」이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피렌체 병사들이 강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적에게 습격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때 로마에서 편지가 왔다.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로 와서 방대한 기념물을 제작해달라는 교황의 의뢰였다. 교황은 자신의 생전에 완성을 보고 싶다는 희망도 덧붙였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예술가들의 책략이 난무했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 브라만테는 주변에 위대한 예술가가 있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율리우스 2세가 편애하는 미켈란젤로를 특히 시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의뢰하는 게 좋겠다고 교황에게 권했다.
그의 복안은 따로 있었다. 우선, 잘 알려져 있듯이 미켈란젤로는 그림보다 조각을 더 좋아하므로 거절할 가능성이 컸다. 둘째, 승낙하더라도 5~6년은 그를 멀리 떼어놓을 수 있었다. 셋째, 삐걱거리는 비계 위에서 작업하다 보면 떨어져 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상상이지만 나는 뮤즈의 추종자들과 오랜 세월 함께 지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 미켈란젤로도 분명히 그런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는 또다시 겁에 질렸다. 교황이 그를 불렀을 때는 이미 피렌체로 돌아간 뒤였다.
교황이 그런 계략을 구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까다로운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잘 알았던 듯하다. 사람들은 흔히 교황이 대금의 지불을 자주 잊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진심으로 알아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없다.
학자, 문필가, 예술가는 흔히 까마귀가 먹는 음식이라도 먹고 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굶어죽을 것 같지 않은데 돈을 지불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미켈란젤로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결국 마음을 바꿔 돌아오기로 했다. 모든 안전조치를 보장받은 뒤 그는 로마로 출발했다.
그를 기다리던 첫 번째 작업은 대형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볼로냐의 주요 성당 문 위에 교황의 청동상을 세워야 했다. 볼로냐는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교황의 영토가 된 탓에 주민들의 처지가 비참했다. 그 조각상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그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나중에 주권을 회복한 볼로냐 사람들은 교황의 주둔군을 몰아낸 후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을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시 한 번 볼로냐를 방문해야 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는 도중에 재료를 살 돈이라도 받기 위해 교황에게 여러 번 달려가야 했던 것이다. 천장화 작업은 4년이나 걸렸고 그 과정에서 미켈란젤로는 목뼈가 비틀려 평생 고생했다. 마침내 이 작품은 율리우스가 죽기 넉 달 전에 완성되었다. 곧바로 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조각상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조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삶은 화려하다는 환상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펼쳐지는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잘 보기 바란다. 교황이 죽자마자 교황의 친척들은 온갖 시시콜콜한 일로 그를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비용을 줄여야 하오." "크기를 좀 줄이면 절반 가격으로도 가능하지 않소." 이런 식이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조각상 세 점만 제작했다. 지금 루브르에 소장된 벌거벗은 노예 상 두 점과 로마의 산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웅장한 모세 상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세 점 모두 마무리하지 못한 채 피렌체로 돌아갔다. 새로 선출된 메디치 가문의 교황이 동향 사람인 미켈란젤로에게 고향 피렌체로 가서 산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장식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의 유족들도 동의하고 일시적으로 계약을 해지해주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원하는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황급히 카라라3)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지역의 관리가 피에트라산타의 채석장과 덜컥 계약을 맺어버렸다. 이리하여 계획은 몽땅 수포로 돌아가고 그의 노고도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그는 프랑스 왕이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파리로 와달라는 것도 거절했고, 볼로냐의 행정장관이 이번에는 자기가 몸이 달아 새 조각상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교황이 전갈을 보내왔다. 로마에서 라파엘로가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끝마치지 못한 작업을 완성해달라는 의뢰였다. 미켈란젤로가 어느 주문에 따를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내란이 터졌다.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공격하는 틈을 타 피렌체 사람들은 조용히 메디치 가문을 축출했다. 그러나 곧바로 교황과 황제가 강화를 맺자 졸지에 피렌체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시민들은 부랴부랴 시를 방어하기 위해 나섰다. 미켈란젤로는 방어 계획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성벽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쳤다. 모든 일이 끝난 뒤(늘 그렇듯이 혁명가들은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가 불가능했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 가문이 의뢰했던 작업을 속개했다. 산로렌초 성당에 설치된 메디치 가문의 납골당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그중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밤(Night)」과 「낮(Day)」이라는 유명한 두 와상(臥像)이 있는 작품이다.
그밖에도 많은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미켈란젤로는 그 전에 로마로 돌아가 율리우스 2세의 유족들과 맺은 계약을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가 로마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교황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 바로 윗벽에 있는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요청을 수락한 결과가 바로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완성되기도 전에 바티칸의 완고한 일파에게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교황의 의전 담당자가 가장 심하게 비난했다. 그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최후의 심판」 맨 밑에 그려진 인물을 보라. 미켈란젤로는 그를 저승에서 죽은 자를 심판하는 미노스로 그렸는데, 바로 카론(Charon)4)의 배를 타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강력한, 따라서 더 무서워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티탄들이 싸우는 이 그림은 그리스도교 신의 성채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교황 파울루스 3세도 이 그림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벌거벗은 인물들에 옷을 입히면 그림 전체를 지우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는 말에 수긍하고 명령을 철회했다. 지극히 평범한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라는 화가가 최초의 모독을 가했고, 200년쯤 뒤 누드로 남아 있던 몇몇 인물에 또다시 옷이 그려졌다. 오늘날 경건한 신도들은 더 이상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다. 수백 년에 걸쳐 양초의 그을음과 향의 연기로 그림에 검댕이 두텁게 앉아 누가 성인이고 누가 죄인인지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은 1541년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뒤에도 23년 동안 때로는 조각가로,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토목기사와 건축가로 밤낮없이 일했다. 만년이 되자 그는 점차 고독해졌다. 동년배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친척들도 죽었다. 그는 유일한 상속자인 조카 로렌초에게 모든 애정을 쏟았다. 예순이 다 되어서야 그에게 생애 최초의 위대한 열정이 싹텄다. 그러나 그것은 지성적인 열정이었다. 그가 사랑을 바친 비토리아 콜론나는 독실한 종교적 감정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가 플라톤의 지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예술의 신비를 똑같이 열렬하게 찬미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무척 궁금한 일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는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건강을 도외시한 채 일손을 놓지 않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탕을 그리스도교 교회로 개조하는 대규모 사업과 씨름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는 며칠 뒤에 죽었는데, 아마 죽음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일을 그만둘 수 없었으므로.
여기서 나는 이 거장의 노작에 관해 간단한 요약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의 작품에 다가서면 나도 모르게 무릎의 힘이 빠지고, 맹세컨대 매우 낯선 겸손의 감정이 생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 노인도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고결한 불만에 있다. 남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위인들, 베토벤, 렘브란트, 고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처럼, 그는 '완벽'이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 어슴푸레 보이는 약속의 땅에 동경의 시선을 던지는 모세처럼, 그는 우리 인간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고결한 불만은 거기서 나온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시작일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의 시작이자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