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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1:12-17 작년 미국의 피지에이 골프대회에서 타이거 우즈를 꺽고 우승한 한국의 양용은 선수는 그 한 번의 우승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골프 250년 역사에 메이져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이자, 동양인 최초의 챔피언 등극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양용은은 아들이 다니고 있는 텍사스주 사우스레이크시의 더행 초등학교에 지난해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 챙겨둔 18번 홀 핀 플래그와 타이거 우즈를 꺾을 때 입었던 티셔츠를 기부한 것 때문에 학교와 지역사회가 난리가 났답니다.
기념비적 물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물건들은 지난 주말 경매 절차에 들어갔는데 아마도 수만 달러를 호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답니다. 이 같은 사실을 PGA투어닷컴이 23일 대서특필하면서 더행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살면서 이렇게 큰 감동과 충격을 받기는 처음이다. 상자를 열어 양용은의 싸인이 담긴 티셔츠를 볼 때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양용은 선수가 미국 사회에 보여주는 한국인의 아름다운 영향력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티셔츠 한 장 기부한 것을 가지고 생애 처음의 감동이자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이라고 하는 말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감동과 충격이라는 말을 그런데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지난 8일 대전에서는 7살된 아이가 트롬 세탁기 속에 들어갔다가 질식사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세탁기에서 자식이 죽었습니다. 그 부모 마음이 어떨까요? 말해 무엇 합니까 ? 억장이 무너질 것입니다.
빨래해 주는 세탁기가 생떼같은 자식을 주였습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고통을 당했을 때 충격 받았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난다면 부모 심정이 어떨까요? 그것은 숨이 멎는 감동일 것입니다. 코미디의 대부 격인 비실비실 배삼룡씨가 지난 23일 흡인성 페렴으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날 가마니로 돈을 끌어 모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3 번이나 결혼했으며 삼룡 사와라는 음료수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의 노년은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갈 집도 없어 병원에서 2억의 빚만 남긴채 , 그의 바보연기처럼 바보같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것이 충격 아닙니까? 하룻밤의 꿈같은 인생, 반드시 지고 마는 인생의 비애를 보면서 충격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 또 한명의 코미디 원로인 구봉서씨가 뇌출혈로 1년 째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서 배씨의 죽음소식을 접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 그렇습니다. 멈춰진 인생은 없습니다. 젊음도 잠깐이고 건강도 한 때입니다. 죽음의 차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들의 죽음을 보며 내 차례가 가까워 옴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날 부모님이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때는 부모님 안계시면 못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늙고 힘없는 부모, 병든 보모가 되면 빨리 죽기를 바라며 귀찮아하는 것이 자식들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귀잖은 부모세대가 죽으면 그 다음은 자기들 차례임을 모르는 것이요, 자기 자식들도 똑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 감동이고 어떤 것이 충격인지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일찍 목회를 하다 보니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지켜보았습니다. 그 절명의 순간은 실로 엄숙합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는 그 순간만큼은, 인생의 허망한 진실과 대면합니다. 또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게 되고, 내세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아찔해 집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관 예배가 끝난 후 무덤 일을 하는 분들이 봉분 윗부분의 잔디를 안 심고 깔고 앉아 있습니다. 일명 용머리라고 하는 것을 세워야 하는데 세울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꾼들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 호주머니에서 돈을 긁어냅니다.
매일 주검을 만지고 칠성판을 깔고 묘자리 작업을 하면서도 관심은 술값 뺏어내고 용돈 벌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 일꾼들이 정말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쓸쓸한 종말을 통해서 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숨겨져 있어서 보지 못하던 허망한 인생의 진실과 어떤 세계를 그곳에서는 볼 수 있어야 정상적인 영감을 가진 인간 입니다. 그런 엄숙한 실존의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런 마음의 열림이 없다고 하면 그게 바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비밀 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택한 사람만 믿는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이 무엇입니까 ? 정확히 알면 충격이고 감동입니다.
하늘 영광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분의 죽음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다 나 때문이랍니다. 날카로운 뼈와 쇠조각이 달린 채찍에 살이 터지고 뼈가 들어날 정도로 맞으셨습니다. 가시관이 씌여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사람들은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강타합니다. 발가벗겨진 채로 손과 발에는 굵은 대목이 뼈와 살쩍을 뚤고 들어갑니다. 그 치욕과 그 고통이 다 나 때문이랍니다.
그 비참한 십자가의 저주가 바로 나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건짐받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답니다. 이 사실이 제게는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이었습니다. 21년 전 주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가 벽제에서 군 생활할 때 포니 액셀을 타고 서울 불광동에서 출퇴근하는 장교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통일로에서 출근 하던 중 펑크가 나서, 길옆으로 주차 한 채 타이어를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차 트렁크에서 스피아 타이어를 꺼내려는 그 때 덤프 트럭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와 덮치고 말았습니다. 포니 엑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끼였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분이 그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좀 늦게 출근했을 뿐 멀쩡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딱 두 가지입니다. 기적이든지 거짓말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만왕의 왕이시며 우주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했는데 아무 일이 없습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인생이 태양보다 더 강력한 빛과 열을 가지신 하나님과 충돌했습니다. 저주와 죽음의 독은 뽑아내시고 하늘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멀쩡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했는데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미안한 예기지만 충돌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맨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과 충돌하자마자 그들은 그물과 배와 가족까지 버리고 주님을 쫒았습니다.
예수님과 충돌한 삭개오는 바로 그 날 죄와 결별하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우물가에서 충돌한 사마리아 여인은 그 순간에 부끄러운 과거를 버리고 마을로 전도하러 뛰어 나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 뒤집어졌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충돌이었습니다. 헛된 정욕은 가루가 되고 죄는 산산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고 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결국에는 성품까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충돌했는데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뿐이었습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다메섹에서 충돌했습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한 수재였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크리스찬들을 잡아들이라는 특별 명령을 받은 검사였습니다. 그는 예리한 지성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크리스찬 구속을 위해 다메섹으로 나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충돌했습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산산이 깨어집니다. 지성은 깨어져 믿음으로 바뀌고 헛된 열정은 참된 순교정신으로 바뀝니다.
대제사장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은 버리고 낮은 자리에서 다른 이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을 자기의 본분으로 받듭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15절 미쁘다(미덥도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게 바로 바울 사도의 충격적인 감탄사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그 놀라운 구원 사건을 충격적인 감탄사에 담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별로 실감을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쁜 유리병에 색깔을 입힌 모래를 넣어서 한정된 시간을 측정하는 모래시계가 있습니다. 모래시계가 주는 교훈은 배터리가 장착되어 있는 초침 시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합니다.
아래로 떨어지는 모래는 단순한 모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의 길이를 나태내고 있는 것입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끝없이 회전을 계속하고 있기에 그것만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끝을 알 수 없는 손목시계가 아닙니다. 분명히 그 끝이 있는 모래시계입니다. 시간은 단순한 시간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내 인생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내 생명 자체인 동시에, 이미 지나온 내 인생의 실상이요 실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만 진리의 표준 되시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고 또한 매순간 진리의 삶을 바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은 다들 열심히 사셨을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산 세월들이 끝없이 돌아가는 손목시계로 착각한 채 의미 없이, 생각 없이 산 것은 아닙니까?
모래시계의 끝을 보면서 진리 안에 생명을 담아 바르게 가꾸려 한 흔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모래시계 아래 부분에는 무엇이 쌓여 가고 있습니까? 진리의 알갱이들입니까? 아니면 쾌락의 찌거기입니까?
한 주간 여러분의 표정과 말 속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된 것은 생명의 씨앗입니까? 아니면 죽음의 씨앗입니까 ?
배가 고픈 벌레들이 지네에게 수퍼에 가서 빵 좀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네가 나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문 밖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문을 열어 보니 지네가 아직까지 마루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모두들 놀라서 “너 거기서 뭐하니?” 물었더니 지네가 대답합니다. “응 신발 신고 있어!” 발이 너무 많습니다.
알아야하게 너무 많습니다. 다니는 데가 너무 많습니다. 충족 시켜야 할 욕망이 너무 많습니다. 잡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터전으로 간다고 말만 하고 있지 사실은 꼼지락거리며 너무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냅니다. 자신의 인생이 멈추지 않을 초침 시계인줄 착각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바른 답을 추구하는데 지체하게 됩니다.
결국 참된 헌신과 아름다운 사랑 한번 못 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육신의 종말과 함께 구더기의 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모래시계임을 깨달은 크리스천은 진리 위에서 자신을 조명하며 바른 답을 추구하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원에 잇닿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이 모래시계의 아래 부분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쌓여 가고 있습니다. 세월은 곧 은사이자 직분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남게 됩니다.
16절-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진리의 일꾼 된 까닭은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쇠퇴하는 기억력과 함께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쌓여 가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을 강도의 굴혈로 가꾸든지 아니면 진리의 전으로 가꾸든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송두리째 나누어주셨습니다.
당신 몸에 있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흘려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 하신 그대로 밀알 되기 위해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부활의 주가 되셔서 진리를 믿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죄와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부활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허무한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의와 경건의 사람으로 진리의 모래시계를 남길 수 있는 영생의 삶을 주십니다.
모래시계는 반드시 무더기를 남기게 됩니다. 혼자만의 정욕을 위해 살았다면 썩은 냄새 진동하는 무더기를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스스로 포기하며 나누어 주는 덕스런 삶을 살았다면 향기로운 무더기를 남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지금 이 시간에도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서는 그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언제 사랑하는 가족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불치병 진단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 들려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불안한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왜냐면 우리 인생은 모두 모리시계이기 때문입니다.
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할 때 인천을 연고지로 하던 삼미 슈퍼 스타즈라는 구단이 있었습니다. 이 구단의 모 기업인 삼미그룹은 29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은 김현철씨가 회장직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창원에 특수강 공단을 만들어 무기 국산화를 이루며 주목 받는 젊은 재벌이었습니다. 삼미 그룹은 89년 세계 최고의 케나다 특수강 회사를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회사로 발 도돔할 기반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95년 비자금 사건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나야했고 회사는 부도처리 됩니다. 모든 재산은 압류 당하고 업친데 덮친 격으로 부도 충격에 맏딸은 거식증 환자가 되고, 사위는 백혈병 진단을 받습니다.
이어서 장남에게는 뇌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김씨 자신도 직장암이 발병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됩니다. 그는 철저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술하러 갈 때 ‘암센터’라는 간판이 보이자 눈물이 핑 돌면서 자신의 죽음이 실감나더랍니다.
그 때 그는 일장춘몽 같은 허망하고 처절한 인생의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는 두 번의 수술 끝에 대변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며 겨우 생명을 건집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그에게 인생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래시계가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는 죽음의 진실 앞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에게 충격이었습니다.
특수강 재벌이라는 허망한 욕망을 쫒는 회장이 아니라 남은 생애를 진리로 가꾸는 감동적인 모래시계가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나와 곧 바로 하와이에 있는 YM선교 센터에 들어갔고 이후 여러 곳에 단기 선교를 다녀옵니다. 그리고 아이티 참사가 일어나기 6개월 전부터 자신이 뼈를 묻을 아이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거룩한 소식을 전한 사람은 중앙일보 기자였습니다. 아이티 참사 현장에서 대변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구호품을 나누어 주고 있는 전 삼미 그룹 회장을 기자가 알아본 것입니다. 그 기자는 재벌의 변화된 삶에 충격을 받고 인터뷰 하여 그 내용을 1월 23일자 중앙일보지에 올렸습니다. “지금과 삼미그룹 회장 때와 어느 쪽이 더 행복하십니까 ?” 기자의 물음에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꿨던 잠시뿐이었고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 초침 시계에 맞추어 자신의 정욕을 위해 살던 삼미그룹회장은 거기 없었습니다. 지진으로 죽음의 땅이 된 아이티에는 예수와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 진리를 자신의 몸으로 살고 있는 환한 얼굴의 김현철 선교사만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모래시계입니다. 결코 죽음의 모래시계 됨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잘록한 허리 사이로 우리의 남은 인생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기쁨도 쾌락도 성공도 모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진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복음 앞에 강렬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산 아름다운 삶의 무더기를 남기게 됩니다.
뿐 만 아니라 그 무더기야 말로 죽음의 날 우리 믿음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자신이 쌓은 거짓과 탐욕의 무더기 앞에서 가짜 크리스천은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 혹시 얄팍한 목사 아닌지요? 혹시 뻔한 장로는 아닌가요? 혹시 그렇고 그런 권사님 아닌가요 ? 우리의 모든 수고들이 혹시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 밥이 되기 위한 열심은 아닙니까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땅속에서 구더기 밥이 되어 있는 시체와 우리 사이에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 그들이 조금 더 빨리 그들의 모래시계가 멈춘 것밖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계도 곧 멈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과 삶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충격을 받고, 진리의 인생으로 격변했으며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바울 사도의 감탄사가 우리들의 귀전에 분명히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 대변 주머니를 찬 채 지구 반대편 죽음의 땅에서 함박웃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김현철 선교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참된 생명을 위해 남은 시간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나의 생명의 모래가 얼마 남았는지 가늠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성도들 되시 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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