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탐방) 전주(全州) 경기(慶基)어진 박물관
태조 실록입니다.
『명
종실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의 경우 한 때 26축까지 있었으며, 태조가 임금에 오르기 전 시중(侍中) 시절의 영정도 있었습니다. 또
『세종실록』에는 전주에 살고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 첩의 아들 집에 태조어진이 있다고 하여 이를 모셔오라고 명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기록들을 놓고 볼 때 전주, 영흥, 경주에 봉안된 태조어진 만이 보존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경주에 모셨던 어진은
강릉으로 옮겼다가 인조대에 불타버렸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전주와 영흥의 태조 어진이었습니다.
어진 박물관의 조감도입니다.
실록편찬 모습입니다.
조선후기만 해도 상당수의 어진이 한양의 선원전을 비롯해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6.25 때 이들 어진들마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954년, 부산에 옮겨져 있던 12점 정도의 어진을 비롯해
어필 등 궁중유물들이 대다수 화재로 사라졌습니다.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선원전수개등록(璿源殿修改謄錄)』(1934)에 의하면 그
당시만 해도 선원전에 태조, 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어진, 그리고 추존된 임금 원종과
익종어진이 있었습니다.
태조가 승하한 1409년 (태종 9년)에 태종은 하륜에게 명을 내려 전조의 예에 의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사관 송포 등은 당대의 사람이 실록을 편찬하면 올바른 역사를 편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하륜으로 하여금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다음 정종과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5년에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편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도 두어 대 지난 뒤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세종은 이것을 묵살하고 이듬해 3월부터 변계량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여 1426년 (세종 8)과 1431년 (세종 13)에 각각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완성하였습니다. 이후 역대 임금의 실록은 그 임금이 사망한 뒤 곧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의 편찬을 위해 임시로 실록청 또는 찬수청을 설치하고 영의정 또는 좌 ․ 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을 총재관에 임명하여 총지휘하게 하고, 대제학과 기타 글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당상과 낭청에 임명하고, 도청과 일방 ․ 이방 ․ 삼방 등 각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습니다.
일방 ․ 이방 ․ 삼방 등 각방은 편찬자료를 수집하여 1차 원고인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세종이나 성종과 같이 재위연수가 길고 자료가 많은 임금의 실록은 6방으로 나누고, 세조나 명종과 같이 20년 내외로 재위한 임금의 실록은 3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는데, 각 방은 연수를 평균 분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명종의 경우 1방은 즉위년과 3․ 6․ 9․ 12․ 15․ 18․ 21의 8년을, 2방은 1․ 4․ 7․ 10․ 13․ 16․ 19․ 22의 8년을, 3방은 2․ 5․ 8․ 11․ 14․ 17․ 20의 7년을 담당하였습니다. 각 방이 연속한 8년 또는 7년을 담당하지 않고 두 해 건너 한 해씩 담당한 것은 연속한 3개년을 동시에 편찬하여 이것을 수정하는 도청에 넘기고, 다음 3년도 이와 같이 하여 빠른 시일 안에 편찬을 완료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종실록입니다. 정종(1357-1419) 즉위 원년(1,399) 정월부터 2년12월까지 만 2년만에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원래이름은 "공정왕실록"입니다.조
선후기만 해도 상당수의 어진이 한양의 선원전을 비롯해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6.25 때 이들 어진들마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954년, 부산에 옮겨져 있던 12점 정도의 어진을 비롯해 어필 등 궁중유물들이 대다수 화재로 사라졌습니다.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선원전수개등록(璿源殿修改謄錄)』(1934)에 의하면 그 당시만 해도 선원전에 태조, 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어진, 그리고 추존된 임금 원종과 익종어진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2]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왕의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 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 《조선실록》에는 “사신(史臣)은 논한다. …”라는 형식으로 사관의 의견(일종의 논평)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실록은 편찬될 때마다 여러 부를 활자로 더 인쇄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분란에도 그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과 순종에 대한 실록은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의해 편찬되지 못하고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효황제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규례(사관이 작성한 사초를 바탕으로 집필해야 한다 등)에도 맞지 않고, 일본 제국의 관점에 입각한 바가 크다고 판단하여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이 견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철종(哲宗) 때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은 태조부터 철종(1392~1863, 472년간)까지 25대에 걸친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로서, 별칭 《조선실록》입니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과 순종에 대한 실록은 그 내용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의 주관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학계는 보편적으로 신뢰성이 부족한 사료로 간주하였으므로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에 왜구에 의해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난중인데도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혹은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지로 나누어 보관했다가, 평란 후 국가 재정이 곤란하고 물자가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실록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선조 39) 3월까지 2년 9개월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출판하였습니다.
이때 출판한 부수는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되었으므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과 도서(島嶼)를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간본, 마니산에는 전주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선조실록》을 편찬 출판한 후 또한 다섯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했습니다.
그당시 실록을 분산 보관하기 위해 실록을 실고 이동하는 모습을 만든것입니다.
어진박물관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주 한옥마을 소재의 전통 박물관입니다. 경기전 경내에 있습니다.
전북지역 태조유적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이성계 어진(왕의 초상)을 봉안하였습니다. '경기전'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입니다.
어진실입니다.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말합니다.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317호입니다. 현재 어진의 진본은 전라북도 전주시 경기전(慶基殿)의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사본이 국립전주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현존하는 유일본입니다. 조선 왕조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할 진전(眞殿)으로 경복궁의 선원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 전주의 경기전, 개성의 목청전, 평양의 영숭전, 경주의 집경전을 세웠습니다. 경기전의 어진은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1410년(태종 11년)에 봉안하였으며, 1763년(영조 39년)에 수리를 거치고 나서 1872년(고종 9년)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화사(畵師)로 활동한 조중묵이 다시 모사하였습니다.
태조가 탔던 말을 그린 그림입니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의주를 거쳐 묘향산에 이안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어진이 봉안되어 있던 경기전이 소실되자 1614년(광해군 6년)에 경기전이 중건된 후에야 전주로 환안되었습니다. 경기전 어진은 1636년 병자호란 때에 다시 무주 적상산으로 피난을 가서 이듬해 환안되었습니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전주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주향교로 옮겨졌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후 다시 환안되었습니다.
2005년에 문화재청의 국정감사에서 태조 어진의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에 보존 처리를 완료하여 전주시로 반환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2012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은 회화로서의 작품성 뿐만 아니라,
이 어진을 둘러싼 귀중한 기록들 - 『경기전의(慶基殿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 등도 함께 전한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이들 문헌에는 어진 제작과 관련된 도감 설치와 동원된 화가명, 소요 물품, 봉안을 위한 각 기구 간의 교신 및 각종
의주(儀註) 등 어진 제작의 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어진이 단순히 왕의 자손들이 조상의 모습을 그려 남기고 제사를 지낸다는 봉공(奉供)의 의미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조정이나 왕실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욱 지대하였음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은 예술성과 희소성, 상징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해 볼 때, 국보로 승격될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진의 제작 방법은 도사, 모사, 추사 등의 그림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도사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렸고 모사는 원본을 밑에 받치고 그려냈고, 추사는 생존시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듭니다.
조선의 초상화는 주로 배채법이라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천이나 종이 뒷면에 물감을 발라 색이 은은하게 비쳐나오도록 한 기법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 전기의 어진은 상당수 남아있었습니다. 선조처럼 어진을 그리기 거부한 일부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아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얼굴만 간신히 남은 문종의 어진과 불길속에 뛰어들어서 구해낸 세조의 어진, 그리고 태조의 어진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왕들은 거의 다 어진을 그렸다 전해집니다. 정조는 특별한 행사때마다 어진을 그렸고, 즉위년, 즉위 5년, 즉위 15년 에 어진을 그렸다 전해집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정조의 어진은 선원보에 있는 간단한 스케치 말고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영조, 연잉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익종의 어진까지 7개만 남아있다.(연잉군의 어진만 도사본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이다.) 다른 어진들은 현재의 화가들이 실록의 묘사를 따라서 그린것으로, 실제 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어진은 사진도 찍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어진의 사진은 대부분 현재에 들어서 찍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한국 전쟁 이전의 어진 사진은 함흥에 있던 태조의 젊을 때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한 일본 순사가 찍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세조, 정조, 원종, 순조, 철종 등의 초상화가 선원보감에 있기는 하지만, 이는 보고 그린것이므로 정확한 자료라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때 전국의 어진을 모아 부산의 광복동의 약품 보관 창고인 관재청에
보관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년 뒤인,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경 부산광역시 광복동에서
전기공사청부업을 경영하고 있는 정수홍의 집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는 안순자씨가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그
촛불이 주위에 인화되어 불길은 삽시간에 퍼졌고 용두산 일대를 전소시켰습니다.
이 일로인해 국보 3400여점이 불에 타 재로 변했습니다. 간신히 반쪽만 불에 탄 영조의 연잉군시절, 노년기, 철종, 익종의 어진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남은 어진은 전주에 있던 태조 어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진들도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탁본입니다.
가마실에는 옛날 왕실의 가마를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되었습니다.
가마행렬입니다
태조 어진 봉안 행렬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조 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1,893권에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입니다. 이 실록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당대 사회의 제반 사항이 총망라되어 있는,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문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처
음에 실록을 보관한 곳은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였습니다. 그러다가 충주사고가 민가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하여 화재의 염려가
있었으므로, 1439년(세종 21)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1445년(세종 27)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실록을 각각 1부씩 나누어 봉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 주사고(全州史庫)는 4대사고 중 가장 늦게 건립되었습니다. 세종 27년 처음에는 전주성내의 승의사(僧義寺)에 실록을 보관하였습니다. 1464년(세조10년)에는 승의사에서 객사 후원의 진남루로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습니다. 이후 세조가 사고를 세울 것을 명하였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착수하지 못하다가, 1473년(성종 4) 경기전 동편에 사고를 건립하였습니다. 임난직전 전주사고에는 태조대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각종 문헌 총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임진
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채 한 달도 안되어 서울을 장악하는 등 물밀듯이 밀려오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전라감사 이광(李洸), 전주부윤 권수(權燧) 등과 함께 경기전 안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과 왕조실록의 피신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처
음에는 사고의 마루 밑을 파고 실록을 묻으려 하였으나, 방어사 곽영(郭嶸)으로부터 경상도 금산현에서 붙잡힌 왜적에게서 성주사고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방법을 바꾸어 깊은 산중에 피신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참봉 오희길은 무사
김홍무(武士 金弘武), 수복 한춘(守僕 韓春)과 함께 밤낮으로 피신처를 찾아다니다가 정읍 내장산의 은적암(隱寂庵, 隱峰庵이라고도
함)을 적소로 정하였습니다.
그 해 6월 왜군이 전주로 통하는 관문인 금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치와 이치에서 대 접전을 전개하게 되자 전주성이 위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라감사 이광은 학행과 지략을 겸비한 유사를 선발하여 참봉 오희길과 함께 실록과 태조어진을 피신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태인(泰仁)의 선비 손홍록(孫弘祿)․안의(安義)가 가동들을 데리고 경기전으로 급히 달려왔습니다. 당시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의 노구였다. 이 때부터 안의와 손홍록은 몸을 돌보지 않고 사재를 털어 실록과 어진을 보존하는데 사력을 다했습니다.
경기 전참봉 오희길과 유인(柳訒),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이 태조어진과 실록을 운반하여 6월 22일 내장산 은적암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태조어진을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겼으며, 실록은 7월 14일 더욱 깊숙한 내장산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9월 28일 태조 태조어진도 비래암으로 옮겨, 실록과 태조어진은 다음 해 7월 9일까지 내장산 비래암에서 보관하였습니다.
내
장산으로 옮긴 후 수직의 책임자는 참봉 오희길이었으며, 안의와 손홍록은 하루도 떠나지 않고 교대로 실록과 태조어진을 지켰습니다.
이들과 함께 영은사(현 내장사)의 승려 희묵(熙黙)과 무사 김홍무 등 의병 100여명이 이를 수직하였습니다.
1593 년(선조 26) 진주성이 함락된 후인, 그해 7월 실록과 태조어진은 정읍에서 아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안의와 손홍록은 이 때에도 식량과 말을 마련하여 배행하였습니다. 이에 호서 검찰사 이산보(李山甫)가 두사람의 공을 상신하여, 안의와 손흥록은 별제(別提)에 임용되었습니다. 태조어진은 아산에 그대로 모셔졌고, 실록은 다시 해주로 옮겨졌습니다.
1595
년(선조 28)에 실록을 다시 강화도로 옮겼으며, 그 다음해에는 태조어진을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안의는 이 때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졸하였습니다. 1597년(선조 30년) 9월 실록과 태조어진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항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습니다. 손홍록, 김홍무, 수복 한춘, 사복(寺僕) 강수(姜守)․박야금(朴也金)․김순복(金順卜) 등은
전주에서 묘향산에 옮겨가기까지 5, 6년간 태조어진과 실록을 배행하였습니다.
왜 란이 끝난 후 선조는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하여 태조부터 명종실록을 다시 출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새로 인쇄한 실록 3부와 전주사고본, 그리고 교정 인쇄본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을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의 마니산, 경북 봉화군의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항산, 강화도 평창군의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 때 전주사고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습니다.
이 후 이괄의 난 때 춘추관 소장본은 불탔으며, 1633년(인조 11)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의 실록은 전북 무주군 적상산 사고에 이장되었습니다. 무주는 사고설치로 인해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습니다. 한편 원 전주사고본인 마니산의 실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낙장이 생기는 등 크게 훼손되었는데, 현종 때 이를 보수하여, 숙종 4년(1678) 그 옆의 정족산성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습니다. 이후 실록은 "철종실록"까지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의 4사고에 보관되어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전해왔습니다.
일제 에 의해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에 옮겨지고, 적상산본은 구황실 장서각에 옮겨졌습니다. 오대산의 실록은 일본에 반출되어 동경제국대학에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렸습니다. 적상산본은 1950년 6.25 당시 북한측이 가져갔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국내에는 정족산본(원 전주사고본)과 태백산본이 남아 있습니다. 전주사고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습니다.
이
렇게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태인지방의 선비 손홍록․안의 등을 비롯한 지역인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에 있는 실록들은 모두 불타버렸으며, 전주 경기전에 보관하였던
실록만이 지역인들의 희생으로 유일하게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만 약 전주사고본 마저 불타버렸다면 조선전기의 방대한 역사는 과거속으로 묻혀버렸을 것입니다. 전북인들은 전란 속에서도 실록을 보존하여, 병화로 사라질뻔한 조선의 역사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사고는 비록 현존하지 않지만, 전주․전북지역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있어서 그 의미가 지대합니다
전
주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조선 정조 8년(1784) 이승훈(李承薰)이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를 한국에 들어온 다음해, 이승훈으로부터 전교받은 유항검(柳恒儉)이 호남지방의 포교
책임자가 됨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일찍 포교되었습니다. 1701년(정조 15)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토마스) 그리고 순조 원년(1801)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습니다.
이 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Baudounet)가 성당 건립에 착수, 1931년에 완공했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경기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순교 1번지인 이곳은, 유항검의 큰며느리인 동정녀 이순이(루갈다)가 순교한 숲정이 성당, 유항검 등이 묻히 인근의 치명자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천주교 순례지입니다.
한옥마을에 있는 조선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