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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이제서야 자료를 올립니다.
신흥동우회 평택근현대유적답사
◉ 일시 : 2014년 1월 25일(토) 오전10시 30분~오후 4시 30분
◉ 집합장소 : 평택역 대합실
◉ 답사일정 : 삼남길 가곡리~봉남리 구간(경주 이씨 유적) → 진위면사무소 3.1운동유적 → 점심식사(김치찌개) → 삼봉 정도전 유적 → 원균 유적 → 민세 안재홍 유적(시간 가능하면) → 송탄 K-55오산AB 기지촌 → 저녁식사(부대찌개)
◉답사안내
1.경주 이씨와 이회영의 형제들
<경주 이씨 상서공파 가계(家系)>
•17세 :이 과(李 薖) : 상서-상서공파의 파조
•20세 :이연손(李延孫) : 공조참판
•22세 :이성무(李成茂) : 안동판관, 아들-①인신(仁臣) ②의신(義臣) ③예신(禮臣) ④지신(智臣)
•24세 :이예신의 2남 이몽량(李夢亮) - 우참찬, 정헌공
◉25세 :이몽량의 4남 이항복(李恒福) - 영의정, 문충공, 권율의 사위
•26세 :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李星男) -이조판서
•29세 : 이성남의 증손자 이광좌(李光佐) - 대제학, 영의정, 문충공
◉26세 :이항복의 2남 이정남(李井男) - 이조판서
•28세 :이정남의 손자 이세필(李世弼)-형조참판-①태좌(台佐) ②정좌(鼎佐) ③형좌(衡佐)
◉29세 : 이세필의 큰아들 이태좌(李台佐) - 좌의정, 충정공
•30세 : 이태좌의 큰아들 이종성(李宗城) - 영의정, 문충공
•34세 :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①건영(健榮) ②석영(石榮, 이유원에게 출계) ③철영(哲榮) ④회영(會榮) ⑤시영(始榮) ⑥호영(頀榮)
◉29세 :이세필의 2남 이정좌(李鼎佐) -증 영의정
•33세 : 이세필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이석규의 아들 이계조(李啓朝) - 이조판서, 문정공
•34세 :이유원(李裕元) - 영의정, 충문공
•35세 :이석영(李石榮) - 생부 이유승
평택시 진위면 일대는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다. 진위면 가곡리, 봉남리, 동천리 일대에는 경주 이씨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 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근거지였던 가곡리 신가곡 일대의 토지는 이회영 형제들이 만주로 이주하면서 방매되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진위면 봉남리는 이세필과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유허이고, 진위면 동천리에는 경주 이씨 재실과 묘역, 이연손, 이광좌, 이태좌의 묘가 있다.
진위면 마산2리, 송북동 동막마을에도 이씨 관련 유허가 있다.
2.삼봉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498)은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이며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다. 본관은 봉화이고 호는 삼봉(三峰)이다. 10여 세부터 영주향교에서 수학하였고, 개경에 올라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 2년 뒤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 전교주부, 통례문지후를 지냈다. 그는 고려 말 친명반원의 입장이었는데 1375년(우왕 원년) 북원(北元)의 사신이 왔을 때 처벌을 요구하다가 회진현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다. 유배가 끝난 뒤에는 역성혁명의 꿈은 품고 1383년 이성계를 만나 뜻을 같이하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정권의 중심에 섰고, 전제개혁(1391)과 군제개혁을 주도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1392년 정도전은 정몽주 등 정적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건국 후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일등에 녹훈되었으며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1394년 한양천도사업, 『조선경국전』,『경제문감』을 저술하여 통치규범과 제도 마련, 요동정벌계획 추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이념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영향을 받아 민본정치와 재상 중심의 신권정치를 지향하였다. 이 같은 정치적 입장은 왕권정치를 지향하는 이방원과 갈등을 빚었으며 무인난(戊寅難,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참수되었다. 참수 뒤 조선왕조 5백년이 끝나도록 복권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 설계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대원군에 의해 복권되었다. 1870년(고종 7)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1872년에는 죽산부사 이헌경의 노력으로 원곡면 산하리에 사당 문헌사가 건립되고 주변 7개 고을의 수령들이 합동으로 제를 올렸다. 1930년에는 현재의 위치로 사당을 옮겼으며, 1922년에는 설단이 조성되었고, 근래에 삼봉기념관과 재실인 민본루가 건립되었다.
삼봉기념관에 보관 중인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삼봉집』은 정도전의『경제육전經濟六典』,『심기리편心氣理篇』,『불씨잡변佛氏雜辨』등 중요 저작이 수록된 문집이다. 삼봉집은 고려 말 우왕 때도 간행했다고 하며, 1397년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큰아들 정진에 의해 2권으로 간행되었고, 1465년(세조 11), 1487년(성종 17)에는 후손들에 의해 6책과 8책으로 증보 간행되었다. 현재의 것은 1791년(정조 15) 왕명에 의해 대구에서 14권 7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삼봉기념관의 것은 대구본 가운데 태백산 사고에 보관중이었던 것으로, 본래 총258매였는데 14매가 유실되어 244매만 전하며 이 가운데 8매는 경기도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3.원릉군 원균 유적
평택시 도일동은 원주 원씨의 동족마을이다. 이곳에는 원주 원씨 묘역과 임진왜란의 명장 원균 묘 및 사당, 양세충효정문 등이 있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말, 술 한 말, 꿩이나 닭 서너 마리를 먹어치우는 대식가였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에는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토벌하여 명성을 얻었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임진왜란 두 달 전인 1592년 2월에는 경상우수사에 부임하였다. 1592년 4월 왜군이 7백 여 척의 함선과, 16만(초기에는 12만 명) 명의 군대, 9천 여 명의 수군으로 침략하였다. 왜군이 침략하자 경상좌수영의 수군이 무너지고 부하 장졸들이 도망치는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와 연합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등 13회의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그러다가 승전 장계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어 충청병사, 전라병사로 전임되었으며, 1597년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한 죄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뒤에는 뒤를 이어 통제사에 올랐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뒤 부산포를 공격문제로 권율과 갈등을 빚었고, 명령에 따라 부산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칠전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선의 대부분을 잃고 싸우다가 동생 원전,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뒤 논공행상과정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 공신 원릉군에 녹훈되었다.
4.민세 안재홍
안재홍(1891~1965)은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 학자였고 해방 후 가장 유력한 정치가였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10여 세 때 이범철 형제가 세운 고덕면의 진흥의숙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7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진학하였고, 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1914년에 귀국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과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다가, 3.1운동 뒤에는 시대일보 주필, 조선일보 주필 ․ 부사장 ․ 사장을 지냈다. 1927년에는 좌우합작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해소 뒤 옥고를 치른 후에는 낙향하여 조선학운동에 매진하였다.
안재홍은 1944년 여운형과 비밀조직인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패망 후 치안유지와 국가건설준비를 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여 좌우합작을 통한 건국준비에 돌입하였다. 미군정 하에서는 초대 민정장관을 지냈으며, 해방정국의 중심인물로 다양한 정치,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민주적이면서도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에 노력하였다. 안재홍은 제헌의원선거에는 불참하였지만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평택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북한으로 납북되었고 1965년 사망하였다. 안재홍은 시골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민족운동의 최전선에서 단 한 번도 굽히지 않고 투쟁한 지조 있는 독립운동가로 평가받는다.
5.송탄(松炭)과 K-55미군기지촌의 탄생
송탄(松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장면(松莊面)면과 탄현면(炭峴面)이 통합되면서 형성되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평택지역에는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에 평택역이 설치되었고, 송장면 서정리에 서정리역이 설치되었다. 역(驛)이 설치되자 기차역을 중심으로 1번국도(신작로)가 새로 가설되었으며, 주변에는 상가와 서정리장, 서정리초등학교, 서정감리교회, 서정동성당과 같은 교육기관과 종교시설이 들어섰다. 1920, 30년대 서정리청년동맹, 서정노동청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기관들도 서정리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택지역에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다. 일본해군시설대가 전쟁 중에 사용할 보급시설을 짓기 위해 팽성읍 안정리, 대추리 일대에 비행기 활주로와 보급시설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군 군사시설은 해방 후 미군에게 접수되었고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해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았다. 송탄지역에 미군기지가 주둔한 것은 1952년 3월부터라고 한다. 한국전쟁 초기 신장1동 남산일대와 서정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인 미군은, 1952년 3월 경 신장동 일대에 K-55오산AB를 건설하였다. 미군기지의 주둔으로 서탄면 신야리, 적봉리, 장등리 주민들은 수 백 년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으며, 일부 마을은 중심지를 마을 뒤 산등성이로 옮겨야만 했다.
하지만 미군기지는 전쟁 피난민과 한국전쟁으로 삶터를 잃어버린 사람들, 농촌의 빈농층에게는 새로운 꿈과 희망의 엘도라도를 제공하였다. 인구의 증가로 미군기지 정문 앞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음식과 술, 몸을 파는 수많은 하꼬방이 밀집하였고, 기지 후문이 있는 사거리에도 상가와 민가들이 뒤엉켜 밀집하였다. 전북 군산에 집단 정착했던 황해도 전쟁피난민들도 살길을 찾아 사거리 아래 산등성이에 황해도촌(신흥마을)을 건설하였다. 서정동 관할의 복창동지역에는 미군들의 빨래와 청소를 대행했던 복창공사 사람들이 기거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송탄시 외곽으로 산업도로(1번 국도)가 가설되면서 지장동, 파라다이스유원지, 이충동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1961년에는 송탄면이 읍(邑)으로 성장하였으며, 1981년에는 평택지역 최초로 시(市)로 승격되었다. 송탄시는 초기에는 과거 읍사무소가 있었던 중앙동사무소 자리를 시(市) 청사로 사용하다가 1992년 서정동에 새 청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 시․군 통합 방침에 따라 평택시에 통합되면서 현재는 송탄출장소와 평택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첫댓글 김선생 반갑습니다. 꼭 가보싶었는데..... 팽택기행 준비 많이 했을텐데...... 잘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