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河南慰禮)둘레길 4코스 산행
오늘은 친구들과 남한산(南漢山)산행을 한다.
남한산(南漢山)을 산행 함에 있어 한성백제(漢城百濟)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유력지를
고찰 해 본다.
********한성백제(漢城百濟)와 河南慰禮城(하남 위례성)*****
우리는 백제(百濟’)라고 하면 통상적(通常的)으로 공주웅진성(公州熊津城)이나 부여사비성
(扶餘泗沘城)·으로 알고 있다.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하기 전,
즉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500여년간 (BC 18~AD 475) 한성백제(漢城百濟)
시대는 웅진백제(熊津百濟/476~568)의 90여년, 사비성백제(泗沘城/扶餘 扶蘇山城/百濟
(538~660)의 120여년에 비하여 百濟 670 여년의 대부분(약 73%)이 한성백제(漢城百濟)時代인데
공주(公州)와 부여(扶餘)를 연상(聯想)하고 있다.
백제의 始祖(재위 BC 18∼AD 28)인 온조(溫祚)는 고구려의 시조인 朱蒙(東明聖王)의 아들로
沸流(비류)의 동생이다. 주몽이 卒本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召西奴를 왕비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낳았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孺留가 卒本으로 와서
太子가 되자 召西奴는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烏干 등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온조는 BC 18년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弥鄒忽; 지금의 仁川 朱安)에 따로 터를 잡았다가 沸流가 죽자 신하와
백성들이 慰禮로 합류하였으며 그 뒤 온조왕은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런데 한성백제(漢城百濟)時代 약 500년 동안의 都邑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지금의 어디일까? *************
그 동안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는 天安 聖居山 慰禮城(충남기념물 제148호), 河南市 春宮里 일대,
서울 夢村土城과 서울 風納洞土城 등 네 곳을 꼽아왔다.
충남 아산면(稷山面) 일대의 천안 성거산 위례성(天安 聖居山 慰禮城)과 하남시 춘궁리(河南市 春宮里)
일대춘궁동과(春宮洞)과 초일동,광암동(草一洞, 廣岩洞)에 걸쳐 있는 이성산역(二聖山城)의 이성산성
을 1999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 발굴하였으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88년 이후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는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공동발굴단의 6차에 걸친 조사와
발굴결과 3세기 말 ~ 5세기 후반의 遺物이 출토되었으며 石村洞 古墳群과 芳荑洞 古墳群이 인접해 있어
많은 학자들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見解가 學界의 主流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경기도 하남시 에서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春宮洞)일대가 한성백제시대, 하남위례성이란 지명을
사용했다는 옛 지명의 역사적 유래를 담아 하남위례길(河南 慰禮길)걷기 코스로 총 4개 코스를 조성
하였다.
총 연장 64㎞로 제1코스 위례사랑길, 제2코스 위례강변길, 제3코스 위례역사길, 제4코스 위례둘레길이
각각의 명칭에 걸맞게 구성돼 있다. 도미설화의 도미나루, 강변의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 이성산성 등의
문화유적과 함께 빼어난 산세도 둘러볼 수 있다.
그중 위례둘레길 4코스는 하남시청 에서 샘재~남한산성(벌봉)~금암산~이성산성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39.7㎞의 구간, 하남 위례성의 궁안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걸으며 하남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서 남한산성 성곽과 벌봉, 객산, 금암산, 이성산 등을 지나면서 하남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가 있다.
2011년 준공된 '하남위례길'(4개 코스, 64km)은 하남시의 명소를 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 됐다.
연간 3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하남위례길'은 어느덧 수도권 제일의 걷기 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4코스로 조성된 위례길에는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벚꽃과 억새밭, 철새등을 만날수 있으며
하남을 둘러싼 객산과 남한산성, 금암산의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하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오늘은 하남 위례길 4코스중 일부를 산행 해 보기로 한다.
우리 일행은 산행코스 를 북문-봉암성-남한산-벌봉-바람재-법화골-사미고개-객산-샘재로
계획 하고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에서 10시에 만나 시내 버스 9번을 타고 남한산성
노타리 정류장 에서 하차 남한산성 북문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우리일행은 북문을 나와 위례둘레길 방향표지목에 따라 서문 방향으로 급경사길을 오르니
북문0.2Km지점 북장대터 앞에 도착 하남시 위례 둘레길 고골길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등로는 급경사 흙기로 짙은 안무에 가려 미끄럽고 지척을 분간 할수가 없다.
한참을 내리다 고골에서 올라오는 산객을 만나 벌봉 남한산 정상길을 물으니 잘못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이길은 조금 내리면 고골 마을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벌봉 코스를 가려면
다시 남한산성 북문을 나가 동장대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암문이 있는데 그 암문을 나가야
남한산 정상 벌봉 코스가 있다는 것 이다.우리 일행은 온길 돌아 다시 북문으로 돌아 와 보니
1시간을 헤매고 말았다.
오늘은 중복 날! 바람 한점 없는 후덥지근 한 날로 시작도 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잠시 휴식후 동장대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성곽길 따라 급경사 길을 오르고 올라도
동장대터가 보이지 않는다.
제4암문(북암문)을 통과 해도 정상,벌봉길은 나오지 않고 동장대 가는길은 하늘로 치솟는
급경사 길이다.쉬엄 쉬엄 오르고 또 오른다. 멀리 동장대가 눈에 든다.
드디어 벌봉 가는 안내 이정목이 눈에 들고 제3암문(봉암성암문) 이다.이암문은 남한산성
본성과 봉암성을 연결 하는 주 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또한 남한산성 본성 문과 봉암성의 출입문이 이중 으로 되어 있어 봉암성인 외성이 함락
되어도 본성으로 들어 갈수 없도록 이중문으로 설계 되어 있다.
암문을 나와 남한산성 본성 문을 나오니 봉암성 이다.봉암성을 들어 가는 문이 따로 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 dl다. 이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12년(1686년)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31년(1705년)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고 출입구인 12암문은 홍예문이며, 나머지는 모두
평거식문입니다.13암문은 북동쪽 방향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15암문은 한봉성
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입구 이다.
봉암성은 아직 복원을 하지 않아 성은 무너진채 옛모습 그대로 이고 등로는 잡초가 욱어진채
안내 이정표는 설치 해 놓았으나 길이 여러 갈래 이고 남한산 정상을 찾기에 너무도 힘들었다.
봉암성을 따라 10여분 직진 거리에 있는 남한산 정상을 찾아 헤맨다.산객을 만나 몇번 이고
물어 보고 안내를 받아 찾아간 남한산 정상 이다.정상석은 없고 숲속에 달랑 천사모 산악회
에서 설치한 남한산 522.1m 검은 표석 뿐 이다.우리 일행은 이곳 에서 하산주겸 간식을 하고
벌봉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벌봉(蜂峰)은 남한산성 북문 밖에서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해발 512m의 뾰족한 바위산
봉우리로 암문 에서 이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조선 인조 재위시
청 태종이 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짜고 용골대(龍骨大)를 시켜 조선의 도성과 그 일대를
돌아 보게 하고 지도를 자세히 살피던 중 청 태종이 한 지점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틀림없이
성 밖에 있었느냐? 고 물었다.
용골대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청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수고하였도다. 이제 우리가 조선을
쳐 들어가면 조선 임금은 반드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지도를 살펴보니
산성의 정기가 모두 이 바위에 서려 있어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산성을 점령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어늘 다행히 바위가 성 밖에 있다하니 가는 즉시 이 바위부터 깨뜨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한양이 청군에 함락되자 인조는 과연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했다.
그리고 산성을 포위한 청군은 성(城)의 정기가 있다는 바위부터 찾았는데, 우거진 숲 속에 있는
그 바위에는 수많은 땅벌 '야생봉(野生蜂)'이 집을 짓고 있어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청군은 그 일대에 불을 지르는 등 천신만고 끝에 화약으로 바위를 깨뜨렸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연기가 오랫동안 하늘에 뻗치었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아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병자 호란 당시 이지역을 청나라 군사 에게 빼았겨 적이 성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 할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 까지포격 할수 있었다.
그후 우리 조정에서는 뒤늦게 이런 사연을 듣고 당초의 성에서 연결된 겹성을 그 봉우리 밖까지
쌓았으므로 지금은 외성(外城)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 벌봉 에서 좌측 길로 내리면 옛날 광주 관아가 있던 고골(고읍?古邑)으로 연결 되는
우례길 이고 공사중인 봉암성 문을 나가 직진 하면 벌봉-바람재-법화골-사미고개-객산
-샘재로 이어 가는 위례길로 이곳 벌봉 에서 2시간 이상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일해은 들머리 찾아 헤매느라 1시간 이상 소비 했고 날씨도 너무 덥고 시간도 촉박
해서 벌봉 에서 온길 뒤돌아 동장대 3암문으로 돌아와 한절사,공원 관리 사무소 방향 으로
하산을 한다.
한절사에 도착 한다.한절사는 병자 호란때 적 에게 항복 하기를 끝 까지 반대 했던 홍익한
윤집,오달재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절 이다.우리 일행은 산성 보건 진료소
옆을 지나 산성 노타리 주차장 부근 은행 나무 집에 들려 중복의 특별 메뉴 백숙에 하산겸
식사를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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