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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을 출발 숙정문(肅靖門)의 서울 북쪽 성곽 순례(巡禮)
지난여름 서울 북쪽 성곽 답사를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취소돼 못내 아쉬웠는데 오늘 오전 L형이 전화를 해오며 환기미술관의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을 가보자는 제안을 해온다. 환기 미술관이 바로 창의문 북쪽 성곽 근처에 있기에 감상 후 함께 돌아보자는 나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약속시간인 2시에 미술관에서 만나자고 하여 서둘러 출발했지만 조금 늦다. 그러나 L형은 벌써 구기동의 가나아트의 황재형 전을 돌아왔다며 그의 높은 작품성을 논한다
(남쪽에서 본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紫霞門 전엔 이 편액을 본듯 한데 지금은 없다)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은 한국 추상 미술 1세대 작가인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규상, 이중섭, 백영수 화백의 작품전이었다. 1947년 결성된 신사실파는 순수조형운동으로 조직, 한국적 정서를 추상표현기법으로 꾸준히 추구해온 작가들로 게시된 작품들 중 눈에 익은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내게 인상적인 작품은 김환기의 피난열차, 이중섭의 소, 장욱진의 작은 작품 등...
성곽의 출발은 창의문 옆에 있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사무실에 들러 신청서를 작성하며 시작된다. 신분을 상세히 적은 다음 출입증을 받은 후 출발한다. 성곽 출입 마감시각이 오후 3시까지인데 불과 몇 분을 남기고 신청한 것이다. 사무실을 나와 성곽 안쪽의 층계를 오르며 건너편 청운동 쪽을 바라보니 인왕이 마주선다. 창의문 지붕너머 청운동쪽으로 도성은 이제 여유롭게 이어져 있다. 전엔 주택과 아파트로 성이 가려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성곽 안쪽으로 오르는 길 : 층계로 잘 정비되어 있음)
서울의 성곽은 1395년 태조4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수축하기 시작했다. 지금 오르는 북악산 (342m)을 진산으로 동쪽의 낙산(125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2m), 서쪽의 인왕산(338m)을 잇는 총 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하여 1396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완성하였다 한다.
그 후 세종 4년에도 농한기를 이용하여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공사를 거쳐 그간 부분 보수만 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던 듯 숙종 30년(1704)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 성곽을 유지한다. 이후 1899년 전차를 부설하며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가면서 점차 철거되어 오늘날 총길이 10.5km만 남게 되었다는 안내 팜플렛의 설명이다.
(첫 쉼터 입구의 자북정도(紫북正道)란 각자 박정희 전 대통령 필의로 보인다)
마침 혼자 답사에 나선 같은 또래 분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곳에서 관심분야가 같은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걷는 기분도 싫지 않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내는 검뿌연 매연이 상공을 뒤덮고 있어 흐리게 보인다. 높은 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하늘을 향해 위세를 뽐내는 듯 치솟고 남산으로 막힌 좁은 곳에 그 옛날 도성(都城) 안이었던 서울은 너무 많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북한산 쪽으론 멀리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비봉을 위시하여 승가봉, 문수봉이 그만그만한 높이로 배열되어 있고 정상 가까이에 북한산의 명찰 승가사가 어렴풋이 보인다. 북한산성의 남문인 대남문은 찾을 수 없으나 오른쪽 보현봉은 많은 암괴들로 뭉쳐있는 봉우리 속에 우뚝하다.
(북악(일명 白岳)으로 오르는 성곽)
그러나 산 중턱까지 들어찬 주택가가 우리의 가슴을 옥죄니 이제 서울엔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성벽 중간 중간에 안내 겸 경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길옆에 자북정도(紫北正道)란 글씨가 쓰인 자연석 옆 첫 쉼터로 가 안내판을 보니 북악에 자라고 있는 식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북정도(紫北正道)가 북쪽을 뜻하는지 원래 자북(磁北 : 자침이 가르키는 북쪽)이란 말은 있으나 자북(紫北)이란 자하문이 있는 북쪽이란 뜻인가. 공해로 찌든 서울에 이렇게 싱싱한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있다는 것은 서울 시민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조금 숨을 고르다 경사가 다소 급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바로 서울의 진산(鎭山) 북악(北岳) 일명 백악산(342m)의 정상이다. 바로 아래가 우리나라의 권부 청와대 뒷산으로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오른쪽으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조감(鳥瞰)되고 지금 한창 공사중인 광화문과 넓은 길 세종로 양쪽으로 고층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서만 올려다보던 북악의 정상이라 하니 작년(2006년)부터 이렇게 누구나 자유롭게 답사할 수 있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 생각된다.
(백악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나는 아직 대학로를 통해 오른 낙산의 서울도성 일부와 우연한 기회에 들러 본 신라호텔 안의 담장으로 쓰인 성곽, 그리고 간송미술관 정기 전시 때 혜화문 근처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성곽따라 난 길을 걸어본 것이 전부이다. 문득 우리가 중국 북경을 여행할 때 만리장성을 찾는 것처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오늘 내가 오른 성곽 순례를 관광코스로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한눈에 조감(鳥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위치가 아닌가.
(북악산(342m) 정산의 상징인 큰 바위)
(백악산 표지석 : 퍼온 사진)
사방을 내려다보니 성곽이 굴곡을 그리며 아래로 이어져 있고 동쪽 낙산의 성곽도 어렴풋이 보인다. 그것보다 사방으로 펼쳐 개발된 1500만명이 숨 쉬고 사는 서울의 빌딩과 고층 아파트 군들이 덩치 큰 몸집으로 위압하듯 서있다. 처음 해외여행 때 홍콩의 고층 아파트가 왜 저리 자연과 경쟁하듯 비탈진 산속에 솟아있을까 참으로 눈에 거스르더니 바로 내가 사는 서울도 그 모습을 따라 하는 것은 아닌지 눈길을 주기 거북하다. 성북동엔 또 어떤 건물이 들어서는지 상당히 넓은 공간을 파헤쳐 놓아 흉물스럽게 보인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청운대(靑雲臺)를 내려다보니 안내원이 열심히 해설하는 목소리가 핸드 마이크를 통해 낭낭하게 들린다. 이제부터 내리막 길이다.
(백악에서 본 북한산 쪽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碑峰, 오른쪽은 보현봉임)
다른 곳에 비해 너른 공간의 청운대에 곧바로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문화해설사는 우리 일행 4명을 대상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인근의 길쭉한 촛대바위며 푸른 솔숲, 그리고 성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길을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북악의 정상에서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바위이다. 해설사는 <해태바위>라 하지만 분명 전남대 이태호 교수가 쓴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이란 책에는 18세기 영조 때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부아암도(負兒岩圖)의 모형이 저 바위라 한다. 몇 년 전 차를 몰고 삼청터널을 향해 성북동으로 가는 굽은 길을 도는데 언뜻 보이는 저 바위! 한참을 생각하니 저 바위가 바로 경희대박물관 소장이란 정선의 부아암도(負兒岩圖)였다. 이태호 교수의 글(미술로 본 한국에로티시즘 P254~255 여성신문사 1998)을 옮겨보자
(오른쪽 능선에 조금 튀어나온 바위가 부아암(負兒岩) 일명 남근석, 해태바위)
<특히 북악의 오른쪽 능선의 부분을 그린 <부아암도(負兒岩圖)와 같은 그림이 서울 사람들의 민속이나 성신앙장소가 아닌가 싶어 관심을 끈다. 부아암이 기자(祈子) 신앙터로 삼을 만큼 남근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바위의 모양이 아기를 업은 것과 같다 하여 부아암(負兒岩)이라 이르게 된듯하나, 막상 그 형태는 남근석에 가깝다.~ 겸재의 부아암 실경 그림에서는 선돌 위에 얹힌 둥그스레한 바위 덩어리를 팽팽하게 발기된 남근의 귀두 모양으로 유달리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위 정선의 부아암도, 아래 확대한 부아악 바위 일명 해태바위, 남근바위)
사실 청운대에서는 삼청터널 쪽 보다 지금 해태상이라 부르는 이 부아암의 정확한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해태상이건 남근(男根)상이건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우리 조상들의 기자(祈子)신앙으로 양물처럼 남근처럼 보이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형상이다. 그래서 겸재는 더 강조하여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솔숲사이로 보이는 숙정문)
우리가 마지막 답사팀인지 인적이 없다. 나는 서둘러 앞장서 길을 따라 성밖으로 나가 촘촘히 쌓은 성곽을 살핀 후 암문(暗門)을 통해 다시 성안으로 들어온다. 곳곳에 경계를 서는 군인과 부대건물이 은폐되어 있다. 권부의 뒷산이기에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싱싱한 솔숲 속에 조금 전 살핀 촛대바위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전망대를 해 놓았다.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전망대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은 배려가 고맙다.
(숙정문 문루 추녀마루위의 잡상들)
숲을 따라 경쾌한 발걸음으로 내려오니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성곽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 지붕이 보인다.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 예를 숭상한다)과 대비하여 북대문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숙정문(肅靖門)이라 지었다 한다. 서울 성곽의 대문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5가지 덕목(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지었다 한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고 북대문은 지(智)를 정(靖)으로 고쳐 숙정문 (肅靖門)이라 하였다. 원래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던 것이 중종연간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고 숙종 때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수축할 때 세검정과 홍지동 사이의 오간대수문 옆의 문루인 홍지문(弘智門, 일명 한북문(漢北門)을 북문을 대신해 들기도 하지만 숙정문이 바른 명칭이다.
(성안에서 본 숙정문)
숙정문은 원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기에 큰 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고, 숙정문을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 하였다. 그래선지 오랜 동안 문루(門樓)가 없이 월단(月團 : 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성 밖에서 본 숙정문)
솔숲 속에 숨어 있는 듯한 문루를 보니 지붕위의 잡상이 최근에 조성해 놓은 듯 선명하다. 한참을 올려다 본 후 숙정문의 글씨가 획이나 간가로 보아 박대통령의 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벽의 비교 안내)
숙정문에서 하산 길은 성북동의 삼청각 쪽과 성곽을 따라 난 와룡공원쪽, 그리고 좁은 등산로를 따라 난 삼청공원 쪽이 있는 데 우리는 삼청공원 쪽으로 내려왔다. 1395년 이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인력이 1,2월에 11만 8천명, 8,9월에 79,400명의 전국 농민들이 동원되었고 1422년 세종4년에는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중 872명이 이 공사 증 사망했다니 얼마나 힘든 공사였겠는가. 그런 선조들의 희생과 노력 덕에 우린 이렇게 편히 성곽을 돌며 아름다운 서울을 내려다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젊은이들이 북쩍이는 삼청동에 내려오니 새 정부 인수팀이 있는 연수원이 있어선지 거리엔 경비 경찰도 인파속에 짝지어 순찰을 돈다.(完)
(퍼온 숙정문 사진들, 숙정문 주변의 성벽, 내려다 본 서울 광화문 일대, 숙정북 안쪽)
첫댓글 서울 곳곳에 많은 볼거리들중 좋은곳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안한 겨울 나세요.
그렇습니다, 서울의 북촌만이라도 세세히 답사하면 좋은 자료가 될것입니다. 지리한 긴 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한 입춘날 되소서^^
정교수님 고맙습니다.
혼자만의 답사길에 같은 목적으로 길은 나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도 답사길에서 주위의 유적이나 풍경이 몰입하여 곁에 있는 이를 망각할 때도 가끔 있기도 하지만 말예요. 상세한 설명과 교육적인 답사 안내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지리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서울의 숙정문을 개방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답사하지 못해 뒤 늦게 간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답사에서 동호인을 우연히 만나 같이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물꽃나무님 새해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일 이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