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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과 전봉준
1894년 갑오년 대원군 복귀
by온기철 James Ohn7시간전
전봉준
전봉준의 별명은 녹두 였다. 그는 녹두알 처럼 작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부패한 양반 관리들의 착취와 밀려오는 외세에 억눌린 조선은 사람살기 힘든 나라 였다. 30대 전후의 청년 전봉준은 동학교에 입교 했다. 신분차별로 망해가는 나라에 인간의 평등을 교리로 하는 동학교는 그에게 매력 적이었다. 항상 나라의 장래와 백성들의 삶을 걱정 하던 중 1888년 동학교의 지도자중에 한사람이었던 손화중을 만났다(전봉준, 김재남, 손화중을 3대 동학군 지도자라고 하고 그중 손화중이 가장 강한 동학군을 통솔 했다. 근거지는 전라도 고창이었다). 1890년 초 운현궁의 문객이 되었다. 그는 대원군과 세상 일을 논의 했다. 대원군은 그를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 했다. 1892년 초에 운현궁을 떠나 전라도 고부로 돌아 왔다. 같은 해에 교주 최시형은 그를 고부 동학교 접주로 임명 했다. 전봉준은 농사를 지으면서 서당 훈장 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92년4월, 전봉준이 고부 접주로 임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선 제일의 탐관오리 조병갑이 조선 최고의 노른자위 전라도 고부(부안)군수로 부임 했다. 부안지방은 수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하여 전국에서 수탈하기 가장 좋은 임지 였다. 중앙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산물이 풍부한 지방의 수령으로 임명되어 축재를 했다. 본전을 챙기고 중앙관리들에게 상납하여 자기의 입지를 획실히 하고 나머지는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장사 였다. 조병갑은 당시에 조선 제일의 수단꾼 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저수지를 만들면 물세를 징수 할 수 있었다. 고부에는 만석보(땜)가 있어서 더이상 저수지가 필요 없었다. 조병갑은 만석보 밑에 필요 없는 보를 하나 더 만들어서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전봉준은 농민대표와 함께 부당한 세금에 대해서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돌아온것은 곤장이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1893년2월 대원군을 방문 했다. 대원군은 2년 동안이나 운현궁 식객이었던 전봉준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둘은 시국에 대해서 논의 했다. 전봉준은 "나의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대원군에 자신의 포부를 피력 했다. 대원군은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대단히 흡족해 했다.
1893년 2월, 전봉준이 운현궁을 방문 했을 무렵 광화문에서 동학교도들이 모여 복합상소를 올리는 서건이 발생 했다. 상소의 내용은 교주 최제우의 복권(신원)요구 였다. 상소는 2월11일 부터 2월13일 까지 계속 되었다. 이때 서울 장안에는 "동학교도 수만명이 서울에 올라와 외세 배격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성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들을 불안하게 했다. 또한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 뒤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 했다. 복합상소 3일 만에 고종이 최제우 신원을 약속 하자 모두 해산 했다. 그러나 고종은 약속과는 달리 상소 주모자 체포를 명하고 동학교를 다스리지 못한 전라감사 이경직과 한성 판윤 신정희를 문책 했다. 물론 동학교 탄압도 더욱 심해 졌다.
1864년, 동학교를 탄압하고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한 장 본인은 대원군이 었다. 1893년, 약 30년 후에 그는 박광호를 대표로 하는 동학교도 40명으로 하여금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복합상소를 올리게 하고 남쪽에서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교도 수만명이 한성으로 처들어 오게 하여 고종을 폐위 시키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 하려고 했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대원군을 만나고 전주 구미리로 돌아 왔다. 그는 민중봉기 계획을 짜기 시작 했다. 대원군은 밀사 나성선을 이곳에 파견 했다. 전봉준은 나성선, 김재남, 송해옥등과 모의를 했다. 짜여진 계획에 따라 전봉준은 군중 앞에 나서서 "인간은 평등 하다, 탐관오리를 처벌 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대원군이 도와준다고 약속 했다" 등등을 외쳤다. 대원군과의 연계 소식에 많은 젊은이 들이 고무 되었다. 1893년3월 무렵 전봉준의 휘하에는 1만명의 농민군이 모였다. 전봉준은 이들을 위한 식량과 무기를 모았다. 전봉준은 서장옥, 손화중등과 함께 전라도 금구에서 동학교도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이들은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와 합세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척양척왜를 완수 할 계획이었다.
최제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 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동학교 지도부는 반정부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했다. 1893년3월10일, 충청도 보은 에서 전국적인 집회를 연다고 발표 했다. 3월11일 부터 집회가 진행 되었다. 그들은 척왜양창의를 외쳤다.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파견하였다. 그의 중제로 집회는 4월3일 해산 되었다. 전봉준의 농민군이 보은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대원군이 고대하던 동학군의 한성 진입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준용 추대 계획은 또 한번 실패로 돌아 갔다. 그러나 동학군이 외치는 구호는 외세 배격이었다. 쇄국을 하여 나라를 보호하겠다는 대원군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다.
1894년1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곤장을 맏고 사망 했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체벌을 당한 후유증이었다. 같은 해 3월31일 전봉준이 봉기 했다. 동학란의 시작이었다.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은 동학군에 연전 연패 했다. 5월22일 전봉준은 나주 관리들에게 "전하께 아뢰어 국태공(대원군)을 모셔다가 나랏일을 보도록 함으로 써...."라는 문구가 들어간 공문을 보냈다. 5월31일 동학군은 전주성을 점령 했다. 6월7일 전주성 전투중에 홍계훈에게 보낸 문서에는 "국태공인 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맏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거를.."라고 적혀 있다.
전라도와 전라도 감영 소재지인 전주가 동학군에게 점령 당하자 고종과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믿을 구석은 청나라 밖에 없었고 위안스카이가 지척에 있었다.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에 따라 6월8일 청군 1500명이 아산만에 상륙 했다. 청군이 출발하기 전에 일본에게 파병을 알렸으나, 알리지 않았다고 억지를 쓰고 일본군 500명이 인천에 들어 왔다. 이후 일본은 4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 안에 있는 동학군은 관군이 높은 산에서 내려 쏘는 대포를 견딜 수 가 없었다. 더구나 모내기 시절이어서 농부들은 집에 가야 했다. 탈령병이 속출 했다. 한편 관군은 왕실의 고향인 전주성에 마냥 포탄을 퍼부울 수도 없었다.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은 타협안을 제시 했고 전봉준은 이를 받아들여 성안의 동학군은 모두 해산 했다.
전주성을 내주기는 했지만 동학군은 전라도 각 지방 행정 관청 안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사실상의 통치를 시작 했다. 전봉준은 12개항목의 행정 요강을 각 집강소에 시달하고 혁명적인 개혁을 감행 했다. 탐관오리 처벌, 부정축재한 부호, 나쁜 유림과 양반 징벌, 노비와 천인 차별 금지, 과부 재혼 허락, 공정하게 관리 등용, 토지 균등 분배 등이 개혁의 골자 였다.
전주 화약 이후 1894년 6월과 7월에는 동학군이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일본 낭인들이 등장 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내란이 계속 되어 군대를 조선에 파견할 구실을 만들고자 했다. 1894년6월 하순경 이들은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동학군 지원에 나섰다. 그들은 "시주음락으로 소일하는 조선 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토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제하고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 낼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밝혔다. 7월8일과 9일에 천우협 회원 14명은 순창에서 전봉준과 만났다. 무기를 원조 해주고 자신들도 동학교도가 되겠다고 제안 했으나 전봉준은 이를 거절 했다.
일본군 경복궁 점령, 대원군 복귀
1894년7월23일 새벽 4시 일본군 2개 대대는 30분만에 경복궁을 점령 했다. 그리고 고종을 제압 했다. 조선의 수도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 되었다. 일본군 대대장 야마구치는 칼을 뽑아 든체 공포에 질린 고종 앞에 서서 아뢴다. "전하를 지켜드리려 왔으니 안심하소서" 라고.
이날 새벽2시,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운궁으로 몰려 갔다. 일본 공사관 직원 오카모토와 대원군의 심복 정운봉이 대원군에게 경복궁으로 가자고 설득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절 했다. 아침해가 밝아 올 무렵 일본 대리공사 스키무라 후카시가가 달려 왔다. 일본이 조선 땅을 한치도 점령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대원군은 경복궁으로 향 했다. 오전 11시 였다. 그가 왜 마다 하곘는 가? 민비를 밀어 내고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 였다.
1894년7월28일, 74세의 노인 대원군은 비상시국의 첫 번째 회의를 주재 했다. 갑오경장의 시작이었다. 개혁 내각을 군국 기무처라 하고 김홍집을 총재로 임명 했다. 민씨 척족 대신들은 찬바람을 맞고 개화파 인사들이 중요한 직책을 맏게 되었다. 모두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각본이었다. 대원군도 개혁도 일본의 국익을 위한 일련의 조치 였다. 10년전 갑신정변으로 서리를 맞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일본이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대원군을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 경복궁으로 불러들였지만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 시키고 이준용을 옹립하여 다시 권력을 잡아 보려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74세의 할아버지와 24세의 손자는 한몸처럼 동분서주 했다. 경복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일본공사 오토리에게 민비 폐서를 제안 했다. 일본측이 거절하자 이준용이 직접 일본공사관을 방문하여 오토리 공사를 설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끝까지 대원군과 이준용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일단 민비 폐서에 실패한 대원군은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민비를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이준용에게 군 지휘권과 한성의 경찰권을 가질 수 있는 직책에 임명 했다. 그는 내무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내무대신 역활을 했다. 대원군이 이준용을 군국기무처 위원에 임명하려 했으나 고종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은 군, 경찰, 내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게 되어 고종을 압박 했다.
대원군은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에게 쿠테타 계획을 짜도록 지시 했다. 농민군을 한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궁을 점령 하고, 청군은 일본군을 격퇴하여 개화파를 제거 한다는 윤곽은 가지고 있었으나 세부계획을 짜야 했다. 그들은 농민군이 남쪽에서 북상하여 한성에 가까워 지면 이준용이 통솔하는 군대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출동하여 과천, 수원사이에서 농민군과 합세하여 한성을 점령 한다는 데 합의 했다. 거사 시기는 일본군이 청군과 싸우기 위해서 북으로 진격하여 한성에 수비가 허술 할때로 결정 하였다. 만약 일본군이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남쪽으로 내려 가면 한강이 얼어서 청군이 한성으로 들어 오기 쉬운 11-12월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친일 집권세력인 개화파는 동학군을 탄압 했던 반면에 대원군은 이들을 비호 한다. 경복궁에 들어온 대원군은 즉시 감옥에 있는 서장옥, 서병학, 장두재등 동학교도들을 석방 했다. 대원군은 북접 손병희와 남접 전봉준에게 일본군과 싸울 것을 종용 했다. 이준용 또한 동학군과 연락을 취 했다.
동학군은 부패한 양반을 척결 하고 있었고 실력있는 양반 중에는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나섰다. 그러나 일본과 외세에 반대하는 데는 의기 상통 했다. 대원군은 이들에게도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울 것을 종용 했다. 최익현등 위정척사파들도 대원군에게 협조할 것을 약속 했다. 한편 대원군은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에게 일본군을 격퇴 시켜줄 것을 부탁하는 밀서를 평안감사 민병석을 통해서 전달 했다.
이준용은 내무협판에서 군을 통솔 할 수 있는 자리인 통위사로 옮겼다. 그리고 미국인 법률고문인 그레이트 하우스와 르장드르의 도움을 받아 사병을 훈련시켜 궁에 숨겨 놓았다. 이 병력을 동원하여 왕실을 장악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민비와 세자를 폐하여 이준용이 왕으로 등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94년9월 상순, 허엽과 이병휘 등에 의해서 이준용의 음모가 들어 났다. 당황한 대원군은 개화파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 했다. 그리고 고종주와 김국선을 시켜 개화파 암살을 시도 했다. 이준용은 고종주를 시켜 동학군과 연락을 취 했다. 일본군은 이준용이 동학군과 내통한 사실을 알게 되어 반일 행위에 대한 추궁을 당했다.
1894년9월17일, 평양에서 청군은 일본군에 완전히 패 했다. 청군이 버리고 간 대원군의 편지가 일본군 손에 넘어 갔다. 새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준용의 항일운동과 대원군의 청군 원조를 청하는 편지를 문제 삼아 대원군에게 사임을 요구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일본이 주장하는 모든 사실을 완곡하게 인정하고 일본측은 대원군이 청군에게 보낸 편지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하는 대신 대원군과 이준용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 났다. 대원군은 이노우에에게 이준용의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1894년11월 대원군은 경복궁을 떠났다. 그래도 이번에는 4개월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앙숙 민비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 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권력을 포기 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유지 하려고 한다. 1894년7월 까지 만 해도 개화파를 암살하려 했던 이준용은 유길준을 대원군파로 포섭하고 군국 기무처 내에 자기파인 박준양, 이태용, 이원경을 심어 두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자주 출입 했다. 프랑스, 청나라 공사관등 외국 공사관에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 했다.
1894년10월31일 군국기무처의원겸 법무협판 김학우가 살해 되었다. 김학우는 러시아, 일본, 중국어를 자유자제로 구사 했고 전신기술의 전문가였다. 대원군이 그 에게 누군가를 지방관으로 임명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김학우는 그 서한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내보이며 대원군의 인사청탁을 비난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대원군은 대노하여 전동석과 최형석을 김학우의 집에 보내 살해 했다. 일본과 개화파는 이 사건을 이준용 역모사건에 엮어서 대원군 파 숙청에 나섰다. (정례의 글방, 조선말 김학우 사건)
1894년12월7일 동학군은 충남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 당하고 전봉준이 체포 되었다. 농민군 약20만명이 장렬하게 전사 했다. 개화파 서광범의 끈질긴 심문에도 전봉준은 끝까지 대원군과의 연관을 부인 했다. 그는 1895년4월24일 교수형에 처해 졌다.
1895년3월24일 이준용은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 되었다. 개화파들은 심한 고문을 가 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타고난 채력으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민비와 개화파는 이준용과 대원군,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반역죄로 다스려고 했다. 본인은 물론 삼족이 죽어야 하는 죄목이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손자 이준용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 했다. 대원군은 이노우에 일본공사와 각국 공사를 찾아가 손자의 목숨만 부지하게 해달라고 호소 했다. 이준용은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은 특명으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해 주었다.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 되었다. 1895년6월12일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다.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살리려고 거리에나가 시위까지 했다. 이준용이 강화도에 유배 되자 그를 만나러 가려고 마포 나루터로 나갔다. 그가 막 강화로 가는 배를 타려는 순간 순검이 나타나서 그를 끌어 내렸다. 그곳에서 체포된 대원군은 공덕동에 았는 그의 별장 아소정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그곳에 가택연금되어 바깟 출입을 할 수가 없었고 외부인사도 방문이 금지 되었다. (조영희;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한 어린 마포의 삶)
외따른 곳에 있는 아소정은 경복궁 지척에 있는 경운궁보다 비밀을 지키기에는 좋은 장소 였다. 한때 대원군의 적이었던 개화파 인사들과 일본 공사관 사람들은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 했으니, 과연 무슨일을 꾸미고 있었을 까?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와 관한 정보는 인터넡에 산재 돼 있어서 그 가닥을 잡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동학란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역사관은 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려 하지 않게 하고 있다는 인상이 깊었 습니다. 위키피디아, 브로그, 강준만의 근대사 산책등에 있는 기록을 엮어서 합리적인 서술을 해 보았 습니다.
댓글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