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타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타전]
배재열 시집 / 황금알시선 65 / 도서출판 황금알(2012.12.31) / 값 8,000원
================= =================
타전
배재열
열꽃 피었다
몸뚱어리마다
그대가 툭툭 간질이면
달아오른 콩깍지처럼
비비꼬다 키득키득
쏟아내는 봄 봄 봄
땅끝에서
북으로 북으로
자지러지는
타전
홀랑
깍지 씌우는
찰나, 환해지다
배재열
한 무리 참새 떼 날아오른다
입에 물린 노란 나비 한 마리
저 처참한 아름다움
하늘에 핀
한 송이
경전
관계
배재열
잠자리 애벌레가 올챙이를 잡아먹고 자라는 육식동물이란 걸 아시나요 그런데요 그 애벌레가 잠자리가 된 뒤에는 다시 개구리의 먹잇감이 된다 하네요 그래서 먹고 먹히면서 살아가는 논리가 약육강식의 관계를 이루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는 공생관계라는 거지요 그러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고 앉은자리 풀도 안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있지요 남의 피로 내 살을 만들지만 한 번도 내 살 남 주어본 적 없는 그런 부류 말입니다 우주를 형성하는 것들이 살짝살짝 비껴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조금씩 제 살 닿아 공생하면서 산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살짝 비끼어 사는 것은 비겁한 일 아니라 어우러지면서 사는 거지요 그 스침을 무뢰한 낚음으로 착각하는 약육강식은 잠자리와 개구리만도 못한 그런 가라는 거지요
무엇이 되고 싶다
배재열
휘청이는 그 나무를 위해
기우뚱하지 않는 힘이 되고 싶다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체에 버팀목되는 순수
생채기 덧나지 않을 부드러운 입술로
숨막히는 포옹을 하고 싶다
저 숲에 내리꽂히는 창창한 햇살
나무의 중심을 잡아주듯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 깊어지는 뿌리
내가 너의 깊이에서
너이고자 할 때
그 기류의 힘으로
온갖 것들의 소리 품어 퍼덕이며 박차 오르는 일
계절 따라 굴곡을 앓아도
나이테는 아름다운 곡선이 아니던가
그러하기에
희망이 절망일 때
그의 든든한 몸통 안에서
가지를 뻗어 잎으로 피어나고 싶다
그의 꽃이 되어
풋풋한 향기 건네고 싶다
꽃샘
배재열
갈채하는 저 빛에
한 잎 내어주고
동동거리는 숨
호기심 가득한 들것들
발정난 봄
안아 버린 참담함
너를 취하련다
배재열
남춘이 북춘이의 가슴팍으로
막 밀고 들어가는 거라
그녀러 교태
선근 가지 그
등걸마다 휘감고 돌면
헤죽헤죽 웃다 간드러지는 거라
그 전염병 같은 끼
달거리 끝낸 여편네인 거라
저 화냥기에 답삭 잡혀 옴짝 못하면
혼미한 채 스러지고 마는 거라
그러한들 또 어쩌랴
휘모리장단 껴안고 뒹굴어 보는 것이제
이 봄
소지燒紙
배재열
천 년의 뿌리를 향해
뱃속의 오욕 모두 거두고
두 손 가득한 소지
때마다
부처의 모습으로 안위하여
오욕의 자리 초록 심지 돋우고
사르르 불사르는 손끝마다
노오란 기쁨 열어주는
천태산 은행나무는 성자
천 년을 좌정하고도
먹잇감과 먹이꾼
배재열
빙빙 돌면서 놀자했다
단번에 확 낚아채지 않고
슬슬 간과 맛을 보았다
설마하면서 놀잇감이 되어 주는 시간
그 시간에 살점이 뜯어먹히는 줄 몰랐다
먹히다 아물다 반복하는 동안
깊어진 상흔
깊게 파인 우물이 되었다
언제나 마르지 않는 그 속
헤어날 수 없는 기쁨인가!
깊고 깊게 우물 만들어
빠지게 할 줄 몰랐다
그 먹이꾼 자기가 끈이 모자라는
두레박이란 걸 짐작치 못했다
게워낼 수 없는 살점 때문에
늘 속이 아팠고 늘 목이 말랐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해
소리로 가늠하는 깊이는
혼동의 낙차이어서
늘 불안하지만
우물 안과 우물 밖의 이야기는
수밀도의 내재이며
언제나 푸르른 외연이다.
졸음
배재열
매미 소리
폭염 찢는다
속눈썹에
매달린
한 짐 눈꺼풀
풀꽃 지쳐가는 시간
열기 감아내는
덜덜거림
깊숙한 찰라
계세요?
삶의 획,
긋는 소리.
꽃불
배재열
가슴이 두 방망이질 하는 날엔
당신 심장에도 꽃불이 붙었구나 생각합니다
남녘에 매화향 흩어지고
개나리, 병아리 줄탁으로 종종거리고
산수유 봄의 축포 쏘아 올리면
진달래, 산벚꽃, 철쭉 궁둥이 실룩실룩 돋아나다
가슴팍 열어젖히고 실실 거립니다
홍역을 앓듯
열꽃이 확 불붙고 맙니다
봄볕 입맞춤하지요
바람 살랑살랑 꼬리 흔들지요
하늘 자꾸자꾸 내려와 꼬드깁니다
한바탕 살 비벼 보잡니다
이런 날은 줄탁을 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톡톡 톡, 톡톡 톡
꽃이 화끈 달아오르고
심장에 꽃불 확 질러대면
그러면요, 아마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그러다
홀딱 벗어부치고
환장하는 봄일 테지요
쪽빛에 기록되는 것들
배재열
1.
높다랗고 둥그러진
9월 하늘에 드리운 크고 작은 애환을 본다
구름화풍
핵전쟁통에 피어나는 버섯구름
그림이 될 수 없는 그 구름
부글거리다 솟아오른 화산불기둥 같은 구름
우리 가슴속에서 폭발하지만, 그 또한 쪽빛에 들지 못한다
우주가 생기고 빛이 생기고
지구가 생겨난 이래 별별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다 기록으로 남겼다
펼쳐놓은 희로애락을 본다
2.
목화솜같이 포근하고 예쁜
새털구름은 날씨가 맑은 후
흐려지기 시작하는 시초라고 한다
면사포구름은 햇무리 달무리 만들고
비를 부르는 구름이라는데 그래서
여자에게 면사포는 기쁨과 함께
눈물의 시작이기도 하는 것이련가
이해, 관계, 욕심이 부르는 역사가
희, 로, 애, 락, 인 것도
저 하늘 구름화풍을 위한 것
윤회─
먹구름 두터워져 내리고 나면
말갛게 피어나는 양떼구름
초원 달리는 양일 순 없을까?
안 되는 그림 버리고
화산 폭발도 버리고
자유, 또는 착각
배재열
어떤 시인의 시를 읽다가
전생과 이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다
복잡해지는 마음과
그 시인이 혼자 사는 까닭을 짐작해 본다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는, 또
떨쳐버려야 하는 심사에 대한 직결심판을 한다
인연은 연결고리처럼 걸리는 거라고
작금의 말놀이가 누구누구의 경전에서 놀더라
한 때 회오리에 묶여
기류를 타지 못하는 날개가 이런 것인가
흙탕 속에서 발을 빼도 남는 그것은
절정의 꽃 속에 꽃이 또 숨어 있는 거라고
말장난에 또 장난을 처도
돌 위에 또 돌이 서는
낙화
배재열
무심한 바람에도
저리 부리어
바위벽 수놓는구나
푸른 이끼
섬렘 짜릿하구나
아리잠직한 햇분홍
지나는 나그네
바람되는구나
파르르 깊은숨 고르다
지지대를 세우며
배재열
화분에 심은 고추에
지지대를 세우라며
이웃집 아주머니가 튼실한
쇠막대기 가져왔다
주며 하는 말
뽑아가지 않게 여러 곳 묶으란다
인심이 흉흉하고 고물값 비싸니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란다
너와 내가
쓰러지지 않으려 기대 보는 일
지지대가 되어 묶이어 보는 일
그리고
달콤한 주렁거림으로
먹혀주는 일의 일상
안간힘으로 버티려다 그만
쓰러지게 하고 낙하하게 한다면
그 모든 것을 잃는 일이라는 것
쇠막대기에 한 생명을 묶으며
삶의 축 도한 그와 같은 이치라
쓰러지지 않음과
썩힐 수 없음에 대해
어제의 오늘과 오늘의 내일이
기쁜 노래가 되는 다시금에 대해
준비를 위한 울음
배재열
날기를 앞둔 새끼 새의 어미는
냉정해져야 한다
둥지를 떠나야 하는
자식의 헛날개짓을 보아야 하므로
어린 새끼의 간절한 부름을 모른 척
외면하는 아림이 눈물겹다
동생이 생김으로써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야 하는 자식의 울음소리가 그렇고
지켜보는 어미의 눈물이 그렇다
할미 둥지가 아무리 든든해도
제 둥지의 포근함만 못하니
그 품이 그리운 것을 어쩌랴
울지 않고 드는 잠과
울지 않고 깨는 잠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벼워질 때
어미 품 밖에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날갯짓
혼자 서기
.♣.
=================
■ 시인의 말
그늘 두터운 나무 키우고자 했으나
비옥한 토양을 만들지 못하고
여린 나무로 선보입니다.
죽비 쳐 주십시오.
죽비 지나간 그 자리마다 준비하는
다람쥐가 되겠습니다.
고마운 분들께 절합니다.
2012년 12월
배재열
.★.
=============== == = == ===============
배재열 詩集 [타전]
[ 해설 ] -
가슴‘먹먹하게’하는‘버선발’의 서정
호 병 탁(시인. 문학평론가)
1.
피아노를 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손가락이 있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를 쓰기 위해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실용적 도구나. 따라서 문학의 언어도 작가와 독자 간에 원만한 ‘소통기능’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실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문학은 발신자인 작가와 수신자인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다. 전달 내용은 겉으로 나타나는 명시적 의미와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암시적 의미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언어를 통한 ‘의미의 공유’ 는 필수적이다.
문학은 작가의 ‘언어적 제안’에 ‘독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의를 위해서는 당연히 ‘의미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의 공감뿐만 아니라 독자가 새로운 이미지로 대상을 보게 하고, 모르던 사실을 인지하게 하고, 잊었던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등의 양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문학에서 언어는 이념의 실천적 기능이나 서로 다른 견해의 조정기능으로도 발현될 수 있고 이것들은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도 ‘의미의 공유’라는 전제하에 발현될 수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인간의 의식에서 배태되는 시적 영혼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를 지나치게 비의화, 신비화하거나 ‘특별한’ 인간의, ‘특별한’ 정신적 산물로만 간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특별한 정신적 산물이 가끔 문예지에 버젓이 실리는 ― ‘알 수 없는 지껄임’ 의 시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시는 언어적 조형물이다. 조형물은 심미적이어야 하고 그 아름다움은 독자와의 공감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의사소통이, 즉 의미공유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일이다.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원론적인 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원론적 언어기능을 벗어난 글들이 양산되고 있음이다.
의미공유라는 언어기능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며 동시에 깔끔하게 심미적 조형물을 이루어낸 시 한 편 읽어 본다.
대문이 없는 외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고
마당은 넓었다.
논길 밭길 에움길
한나절은 걸어서 가야 했던
어릴 적 조금 두렵고 많이 즐거웠던 길
그 길고도 넓은 사랑
마루에서 좁다란 길까지 달려오시며
아이고 내 강아지 오는가
외할머니 버선발이 있는
부엌 앞 돌확에서
붉은 고추 썩썩 갈던 외숙모의 손
시설스럽지는 않으셨지만 어서 오너라
뒷마당에 서면 널따란 논, 거기
메뚜기 떼 후루룩 날던 영원면 장재리
내 어머니 택호가 장재댁이 된
30년 훌쩍 지나
외가 식구들도 등진 곳
허리춤 질끈 동여매 더 작아진
내 어머니의 어머니
툭하면
달려나오시어
가슴 먹먹하게 하는 그 버선발
-「버선발로 오는 사랑」전문
독자들은 시인이 자신들에게 ‘신선한 언어’를 선사해 줄 것을 바란다. 신선한 언어란 적적으로 새로운 언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무엇이 다르더라도 달라야 한다. ‘이전’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대상을 보는 것, 모두 다 보는 대상이라도 ‘이전’과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 ‘이전’부터 있었던 대상이지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두 ‘신선함’과 통한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많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아릿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추억이다. 이런 ‘외가’와 ‘외할머니의 정’ 은 대개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전’부터 존재하는 시적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이전’과 달리 표현하고 ‘이전’과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연의 휴지休止가 없이 짧은 행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위의 시는 외가가 있는 곳의 풍경은 물론 서사적 사건이 담겨 있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정서가 함께 어우러진다.
시는 외가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곳은 ‘대문’이 없었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고” 그 안의 “마당은 넓었다” 독자는 시의 도입부부터 긴장감을 느낀다. 시인은 ‘없는 문’,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길다고 한다. 당시 시골에는 대문이 없는 집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그 집의 ‘문’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비가시적인 바람과 허공이 실재하듯 외가의 실체가 ‘없는 문’은 우리의 정서 속에서 ‘있는 문’으로 실재하게 된다.
외가로 가는 길의 묘사는 계속된다. 그 길은 ‘논길 밭길’을 거쳐 “한나절은 걸어서 가야 했던” 길이며, 어린 아이가 혼자 가기에는 ‘조금 두려운’- 반듯한 길이 아닌 굽어 돌아가는- ‘에움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또한 “많이 즐거웠던”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두렵고 ‘많이’ 즐거웠던 길이라는 대척점에 위치한 언어구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외갓집 가는 길’의 미묘하고 복합적인 정서가 서로 상반되어 교호하는 정황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구절이다. ‘길다’는 ‘멀다’의 비유가 된다. 이런 ‘먼 길’을 거쳐 시적 화자는 외가의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2.
외가에 가는 길은 ‘길고’ 그 집 마당은 ‘넓었다’ 그런데 다음 행에서 ‘풍경’을 형용하던 그 ‘길고’‘넓은’이라는 언어는 갑자기 인간의 원초적 정서인 ‘사랑’을 수식하는 언어로 급변한다. 시적 긴장이 다시 야기된다. “그 길고도 넓은 사랑”. 사실 이 구절은 이후에 언술되는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따뜻한 반김이 있은 후에 나타나야 통사적 연관이 자연스런 말이다. 그들의 ‘정’이 바로 길고도 넓은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에서 상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표현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일종의 ‘시행 걸침’으로 신선하고 창조적인 의미를 도출하려는 의도다. 실체적인 길의 ‘김’과 마당의 ‘넓음’이라는 의미는 그대로 연속되면서, 동시에 동일한 언어는 외가의 ‘길고 넓은 사랑’이라는 의미로 환치된다. 통사론적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중의 의미가 형성된다. 그리고 두 의미는 서로 진동하며 확산되어 독자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적 화자를 반기는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행동을 서술하는 다음 행들은 이 시의 백미다. 외할머니는 “마루에서 좁다란 길까지 달려오시며”, “아이고 내 강아지 오는가”하고 반긴다. “부엌 앞 돌확에서/붉은 고추 썩썩 갈던 외숙모”도 “어서 오너라”고 먼 길을 걸어온 조카를 반긴다. 두 분의 행동은 매우 대조적이다. 할머니는 집 앞 길까지 달려 나오지만 외숙모는 자기 할 일을 계속하며 어서 오라는 말 한 마디뿐이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된 계산에 넘어가면 안 된다. 즉 할머니의 반김에 비해 외숙모의 그것이 열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계산이다. 그러나 외숙모의 반김에도 진정성이 담뿍 배어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시적 화자는 그녀가 ‘시설스럽지 않은’ 사람이가고 단서를 붙인다. 더구나 그녀는 ‘붉은 고추’을 갈고 있는 중이 아닌가. 평소에도 시설맞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건네는 ‘어서 오너라’의 발화에는 누구 못지않은 반가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이 다른 외가 식구, 즉 외삼촌이나 이모에게 있지 않고 두 사람에만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두 사람의 발화는 짧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따뜻한 정의 울림을 증폭시켜 우리의 가슴을 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용부호만 없다뿐이지 시인이 두 사람의 발화를 직접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적 발화는 시적 측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친숙한 소통체계이다. 독자들은 외할머니와 외숙모와 함께 있는 시적 화자의 공간에 들어가 적극적인 대화 상대자의 입장이 된다. 여기서 ‘의미공유’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아이고”와 “내 강아지” 같은 통속적인 구어체 발화는 그 일상적 친숙성으로 글에 생동감을 제고시키는 한편 독자와의 공감대를 크게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원활한 의미공유야말로 독자의 공감을 유발하는 데 있어 최우선으로 전제되어야 할 명제라는 점에 잘 부응한다.
3.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언행은 시에 서사적 사건을 부여하고 있다. 양산되는 많은 시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인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희열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경험 자체를 언어화하는 것이 곧 시가 된다는 사고는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버선발로 오는 사랑」이 외가에 가는 풍경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 언제나 반겨주는 외가 사람의 ‘정’과 그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묘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 이 시는 별 볼 일 없는 ‘그저 그런 시’가 될 뻔했다. 그러나 “마루에서 좁다란 길까지 달려” 오는 외할머니와, 돌확에 “붉은 고추 썩썩 갈던” 외숙모의 행동과 그들의 정겨운 발화는 서사를 형성하는 ‘사건’이 된다. 희로애락에 울고 웃는 우리 일상은 대단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남루한 일상에서 사건적 서사를 도출하여 형상화시키는 것은 시인의 특별한 자질이다. 또한 좋은 시가 될 것인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요소로 작동될 것임도 확실하다.
위의 시는 ‘연’의 가름이 없이 ‘행’만의 연속반복으로- 그래서 전체가 한 연이 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과 연 사이의 휴지는 의미의 단속斷續과 호흡을 조절하며 시간적․ 심리적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앞의 연을 음미하는 휴지시간이 없으므로 앞 행의 정서를 그대로 지닌 채 다음 행을 읽게 된다. 즉 외숙모의 ‘어서 오너라’가 아직 귀를 맴돌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메뚜기 떼 후루룩 날던” “영원면 장재리”의 “널따란 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메뚜기 떼를 보고 있는 우리 눈에 ‘장재리’는 다음 행에서 벌써 어머니의 택호 ‘장재댁’으로 환치되어 시적 자아의 회상 속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앞의 심상은 지워지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어 새로운 심상과 연결된다. 30년이란 긴 시간의 간극이 또 다른 심상이 개입하며 후다닥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맞물려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원래 이 시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외가에 가는 길’(7행까지)이고, 둘째는 ‘반가워하는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모습’(13행까지)이고 나머지는 현재 시간으로 돌아와 ‘과거를 회억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첫 행부터 끝 행까지 이 구분을 무시하고 이어감으로써 ‘잔상’의 연결이 ‘동작’으로 보이듯 생생한 감각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한편 끊임없는 ‘의미화’의 연속 창출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는 언어와 그 형식을 독특하게 운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면밀한 계산 아래 언어의 속성을 변형하거나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든 사회를 노래하든 궁극적으로 시는 인생의 구경적究竟的 표현이다. 정서와 상상에 의한 삶의 해석으로 ‘생명’과 ‘영혼’에 울림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시인의 외가는 “식구들도 등진 곳”이 되었다. 그 구부러진 ‘에움길’이 아직 존재나 하고 있는지, 외숙모가 붉은 고추 썩썩 갈던 “부엌 앞 돌확”은 그대로 있는지, 아니 장재리에 지금도 외갓집이 그대로 남아 있기나 한 것인지. 현대화 속에 많은 것들을 우리는 잃고 있다. 메뚜기 보기가 힘든 요즘 ‘메뚜기 떼’ 나는 ‘널따란 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간직할 것이,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가슴을 지금도 먹먹하게 하는 외할머니의 ‘그 버선발’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4.
「버선발로 오는 사랑」이라는 한 편의 시를 좀 길게 다룬 것 같다. 그러나 시 하나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이것저것 집적대는 거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다.
이제야 시인을 거명한다. 배재열 시인은 오랫동안 혼자 시공부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단에서 시인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혹 만났더라도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시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이를 위한 엄청난 독서량을 보유한 사람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정성과 공부의 결과인지 시인은 획일적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시를 쓴다. 앞의 시처럼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서정시를 쓰는가 하면, 선취를 느끼게 하는 단시, 관념적인 산문시 등 여러 시에 능하다.
한 무리 참새 떼 날아오른다
입에 물린 노란나비 한 마리
저 처절한 아름다움
하늘이 핀
한 송이
경전
-「찰나, 환해지다」전문
짧다. 그러나 경전을 대하는 것처럼 선취가 느껴진다. 시인의 치밀한 관찰력은 참새 입에 물린 나비 한 마리를 놓치지 않는다. 입에 물린 나비는 곧 나비의 ‘죽음’을 의미한다. 처절하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이며 순리에 따른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은 나비의 죽음을 인간의 삶에 대입시킨다. 지지고 볶고 아웅다웅하는 인간들의 삶에 비해 참새의 ‘생명’을 위한 나비의 ‘죽음’은 얼마나 깨끗하고 담백한가. 어렵게 읽고 배워야 하는 경전이 특별나게 있기나 한 것인가. 참새의 “입에 물린 노란나비 한 마리”,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늘에 그려진 경전이 아니던가.
그녀의 이런 시선은 시인들이 가장 즐겨 다루는 소재의 하나인 계절을 노래할 때도 그 통찰의 날카로움이 번득인다. 겨울의 끝자락에 가장 먼저 춘신春信을 전하는 “시위 당긴 활처럼 굽은 등걸”에 피는 매화는 “멍울멍울 베어 문 북받침”(「노매老梅」)이다. 그것도 “겹겹으로”, 등걸 속에서 솟구쳐 올라 핀 꽃은 ‘한’이 북받친 것인가. ‘그리움’이 북받친 것인가. 무엇이 북받쳤는지는 몰라도 ‘북받쳐 피어난 꽃’은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다. 시인이 간취하는 봄은 ‘열꽃 핀 몸뚱어리’가 되어 “달아오른 콩깎지처럼/비비꼬다 키득키득/쏟아내는 봄”(「타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봄은 “땅끝에서/북으로 북으로/자지러지는/타전”이 되는 것이다. ‘비비꼬고, 자지러지는’ 봄에 대한 이런 감각은 강하고 건강한 관능을 야기하기도 한다. 봄의 간드러지는 교태는 “달거리 끝난 여편네”의 ‘끼’와도 같다. 그 “화냥기에 답삭 잡혀 옴싹 못하면/혼미한 채 스러지고” 만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하게 노래한다. “그러한들 또 어쩌랴/휘모리장단 껴안고 뒹굴어 보는 것이제/이 봄”(「너를 취하련다」)이라고.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의 한 단면만을 살펴보았지만 시인의 시각은 그가 사는 전주천의 버드나무에서도 범상치 않은 사유를 길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방이 어두워 디딜 발이 없을 때”에도 “사납게 낭창이면서 스침의 간격”(「버드나무 가지를 보라」)을 이루는 버드나무의 속성을 시인은 찾아내고 “그 발 없는 속내”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넌지시 충고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낭창거리는 가지가 부러지고 꺾이던가. 여기에는 바로 ‘스침의 간격’이라는 통찰이 있다. 흔들리면서도 지켜야 하는 ‘간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요구하는 중요한 명제이기도 하다.
이런 시인의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다음 시편과 같은 곳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잠자리 애벌레가 올챙이르 잡아먹고 자라는 육식동물이란 것을 아시나요 그런데요 그 애벌레가 잠자리가 된 뒤에는 다시 개구리의 먹잇감이 된다 하네요 먹고 먹히면서 살아가는 논리가 약육강식의 관계를 이루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는 공생관계라는 거지요 그러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고 앉은자리 풀도 안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있지요 남의 피로 내 살을 만들지만 한 번도 내 살 남 주어본 적 없는 그런 부류 말입니다 우주를 형성하는 것들이 살짝살짝 비껴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조금씩 제 살 닿아 공생하면서 산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살짝 비끼어 사는 것은 비겁한 일 아니라 어우러지면서 사는 거지요 그 스침을 무뢰한 낚음으로 착각하는 약육강식은 잠자리와 개구리만도 못한 그런 거라는 거지요
-「관계」전문
잠자리 애벌레는 “올챙이 잡아먹고” “그 애벌레가 잠자리가 된 뒤에는 다시 개구리의 먹잇감이 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두 생명의 관계는 ‘약육강식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리는” “공생관계”가 된다.
따져보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미물들은 모두 공생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네요, 거지요, 있지요”로 맺는 독특한 어투는 시인이 무언가 불만이 있어 혼자 구시렁거리는 것 같다. 맞다. 시인은 미물들의 공생관계를 인간의 삶과 비교하고, 인간의 철저한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철저히 ‘약육강식’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우주를 형성하는 것들이 살짝살짝 비껴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조금씩 제 살 닿아 공생하면서 산다”는 시인의 통찰이 독자들의 뇌리를 친다.
잠자리 애벌레가 올챙이를 먹는다는 것이 생물학적 사실이냐고 시인에게 확인해 본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썼겠느냐는 확답에 시인의 열심히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시인은 끊임없이 직접 관찰하고 확인한다. 다음 시만 보아도 그렇다.
호박벌이 경계를 넘었네
그 녀석
호박꽃에만 종사하지 못하고
도심 화분에서
호객하는 고추꽃 탐하고 있네
그 작태를 지켜본즉
꽃보다 큰 몸 살짝 웅크리고
꽃 속을 입맞춤하듯 드나드네
한 번 들어간 꽃 속엔
절대 들지 않는다는 것
뒤돌아보지 않는 저 습성
냉정하게 돌아서는
어떤 사랑의 말로 같네
-「호박벌」부분
‘호박벌’이 ‘호박꽃’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추꽃’까지 탐하고 있다. 호박벌의 덩치는 고추꽃보다 훨씬 크다. 벌은 “꽃보다 큰 몸 살짝 웅크리고/꽃 속을 입맞춤하듯” 드나들고 있다. ‘입맞춤하듯’이란 직유가 맛깔스럽다.
꿀을 다 딴 벌은 “뒤돌아보지 않는” 습성으로 “냉정하게 돌아”선다. 시인은 벌의 양태에서 부박한 인간의 “어떤 사랑”을 느낀다. 꽃을 꿀은 화분花粉을 이동하기 위한 유혹이다. 이 유혹은 바로 생식을 위한 꽃의 안간힘이다. 꿀은 벌의 양식이기도 하지만 실상 “꽃 위한 꿀”인 것이다.
인간은 사랑도 많이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꿀’에 황홀해하다가 ‘꿀’의 끝과 함께 돌아서 버리는가. 시인은 다음 연에서 “굳은 꽃심지”가 “오래도록 꽂혀”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도 굳게. 오래도록 견뎌내기를 희망하는 말이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 벌이 “한 번 들어간 꽃 속엔/절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생물학적 사실이냐고 또 물었더니 이번에는 “직접 지켜보고 확인한 사실”이라며 웃는다. 앞의 시는 시인이 스스로 화분에 고추를 기르고, 스스로 꽃이 피는 것을 지켜보고, 스스로 그 꽃에 날아든 벌을 오래 관찰한 연후에 인지한 습성을 단초로 삼아 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성실성과 진정성을 감지하게 된다.
소금에 곰팡이가 피겠는가. 성실함과 진정함으로 한 편, 한 편 깎여질 배재열의 시를 믿고 기대한다. 시인은 오랫동안 움츠린 뜻은 멀리 뛰자는 뜻이다. 이제 멀리 뛰기를 바란다.♣.
=================
◆ 표사의 글 ◆
소금에 곰팡이가 피겠는가. 성실함과 진정함으로 한 편, 한 편 깎여질 배재열의 시를 믿고 기대한다. 시인은 오랫동안 움츠린 뜻은 멀리 뛰자는 뜻이다. 이제 멀리 뛰기를 바란다. 배재열 시인은 오랫동안 혼자 시공부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단에서 시인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혹 만났더라도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시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이를 위한 엄청난 독서량을 보유한 사람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정성과 공부의 결과인지 시인은 획일적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시를 쓴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서정시를 쓰는가 하면, 선취를 느끼게 하는 단시, 관념적인 산문시 등 여러 시에 능하다.
— 호병탁(시인 ․ 문학평론가)
가만, 사물들에게 다가가는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있다. 그 족적은 아련하고도 아득한 풍경 속으로 빨려들게 하던 유년의 기억을 헤치고 나온다. 말을 걸기도 전에 대답을 유추해내는 더듬이, 물음표들이 툭툭 불거진다. 시간을 빗질하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없는 여정은 "숭숭거리는 구멍"을 통해 늘 목이 말랐다. 그 허기와 상실감으로 "살점 뜯어먹히는" 듯한 "소리 죽인 아우성"을 듣는다. 구호를 앞세워 뜨겁다거나 못 참겠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시의 신경줄을 놓지 않지만 그 입맛은 식물성이다. 꽃샘, 꽃술, 단풍, 무화과, 버드나무, 석류알, 낙화까지 간다. 결코 소리치지 않는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사물들에게 말을 걸며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손을 잡아끈다. 고뿔처럼 "칠갑하고 자빠지는" 익숙한 자기 점검으로 새로운 길을 열려고 한다. 그렇게 대상에 다가가는 배재열 시인의 시간과 공간의 재발견을 위한 시선이 참으로 따뜻하다.
— 구순희(시인)
배재열 시인은 늘 시를 임신한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는 시의 씨앗을 잉태하여 꽃을 피우는 시밖에 모르는 시인이다. 시집 전편에 걸쳐 꽃을 잉태하고 아프게 꽃을 피우는 행위는 바로 시인 자신의 시업詩業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이 절망일 때/그의 든든한 몸통 안에서/가지 뻗어 잎으로 피어나고 싶다"(「무엇이 되고 싶다」)고 할 때, 배재열 시인은 절망으로 그의 꽃이 되어 화려한 시의 궁전을 건축한다. 속절없는 아픔으로 신열과 오한을 앓으면서도 고통의 원인마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배재열 시인은, 이미 외적 압력이나 고통이 시와 한 몸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여, 온몸으로 쏟아 붓는 사랑의 행위가 시의 씨앗을 안배하고 꿈에서도 시는 업보인 양 아이처럼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환경이 척박할수록 수밀도는 달고 풍부해지듯 배재열 시인이 타전해오는 시의 열꽃이 시인공화국을 만들 날도 멀지 않았다.
— 김영탁(시인 ․『문학청춘』주간)
.♣.
=================
▶배재열 시인∥
∙195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2008년 계간『문학사랑』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2010년 계간『문학사랑』인터넷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전북 문예진흥기금 수혜
∙이메일 thfdlvgid54@hanmail.net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