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
강여울
부모님은 친정에 있는 잠시라도 좀 쉬라며 나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점심상을 차리셨다. 양념불고기와 푸성귀들이 먹음직스럽다. 친정 부모님은 쌈을 좋아한다. 나도 쌈을 좋아한다. 나를 시집보내고 두 분이 쌈을 드실 때면 어김없이 내 생각에 목이 메었다고 했다.
나의 친정 부모님은 거의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면서도 쌈(싸움)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귀찮고 힘든 것을 참았고, 좋은 것은 서로 권하고 양보했다. 어릴 적 나는 다른 모든 부모들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면서 함께 살며 바라본 시부모님은 거의 날마다 쌈을 했다. 우리 부부는 친정 부모님처럼 정답지도 않았지만 보이게 쌈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끝도 없이 시아버지께 잔소릴 하듯이, 남편도 내게 털어놓을 불평이 날마다 해도 줄지가 않았다. 일방적으로 거는 쌈이었다. 그러니 나는 시부모님처럼 쌈을 하지 않기 위해 내 안의 나와 말없는 쌈을 해야 했다.
상추 두 잎을 손바닥 위에 얹다.
그이와 나는 맞선을 본지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맞선을 보고, 날을 잡고 물목을 하고 함이 오가는 날을 다 합쳐서 여섯 번을 만나고 일곱 번째 만나는 날 신혼여행을 떠난 것이다. 엄마는 몇 번이나 살을 꼬집어 꿈이 아닌지를 확인해 보았다 한다. 그리고 신행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춘삼월에 첩첩 산중, 말이 대구지 그런 골짜기는 처음 봤다고, 요즘 세상에 아궁이 불 때서 밥 하는 집이 어디 있냐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했다. 그 바람에 엄마는 다리를 뻗히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두 분이서 종일 울었다는 그 날도 벌써 이십 여 년이나 지났다.
상추 위에 쑥갓을 한 잎 얹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기도 전에 결혼을 했으므로 나는 꿈같은 신혼은 아마도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꿈꾸는 나이였으므로 잠깐씩 비치는 햇살에도 까르르 나뭇잎처럼 웃을 수 있었다. 문을 열면 까꿍! 하고 앞을 막는 친구처럼 둘러선 돌담과 돌담 너머 언덕 그리고 산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춘삼월에 눈이 하얗더라는 그 산이 바로 내가 날마다 보는 앞산 뒷줄기와 이어진 청룡산이다. 그리고 날마다 그대로이면서 그대로가 아닌 이 풍경들은 더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마구간의 어미소나 아궁이 앞에 앉으면 슬금슬금 다가와 장난을 거는 송아지와 뱃속 아기의 발길질도 내 맘의 등불이 되어 주었었다.
쑥갓 위에 고기 한 점과 청량고추 한 조각 얹다.
서로에게 부족한 점이 얼마쯤 있으리라고, 그것을 채워가는 것이 결혼이라고 믿었으므로 처음에는 견딜 만 했다. 또 희망이 있었으므로, 남편에게는 고약한 버릇들이 있었다. 술에 취해 돌아와 울분처럼 욕설을 했고, 욕을 해 반응이 없으면 문과 가구를 부수었다. 그 모든 것들이 부족한 사랑 때문일 것이라고, 사랑이 충만해지면 좋아질 것이라 믿었다.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고, 일은 하지 않고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러도 내가 일을 하면 되지, 내가 힘들게 일하면 미안해서도 일을 하겠지 했다. 그러나 갑자기 낯선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채하듯 모든 것들이 숨 막히게 느껴질 무렵, 아들이 태어났고 온 집안에 자랑처럼 웃음꽃이 만발했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일을 하지 않았고, 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나들이를 많이 나오는 못 둑에서 나와 함께 포장마차를 했다. 아이는 등에 업혀 좋아했지만 그 해 여름 나는 더위를 먹어 해골처럼 말랐었다. 그래도 저금통장에 제법 늘어난 숫자를 보며 그 겨울 아들의 우유 값은 걱정이 없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 술에 취한 남편은 하룻밤에 그 숫자는 마이너스로 만들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맘 놓고 울 수도 없었다. 큰 방에는 시부모님이 계시고 품에는 아들이 방긋거리며 옹알이를 했던 것이다. 고기의 느끼함을 덜어주는 매운 고추처럼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아들의 건강한 웃음은 내 생활에 커다란 숨구멍이 되어주었었다.
쌈장을 넣고 그 위에 밥 한 숟가락을 떠 얹다.
고통도 습관이 되면 편안한 옷처럼 길들여진다. 남편의 거듭되는 버릇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될 무렵 나는 가게를 하나 세내어 책방을 차렸다. 그동안 극단적인 생활에 익숙해지느라 외면했던 지적 갈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밤낮 나는 책 속에 빠져 지냈다. 내가 책에 빠지는 만큼 남편의 버릇은 크게 날갯짓을 했고, 그때마다 가계의 숫자는 들어온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날아갔다. 그럴 때도 아들은 변함없이 내 품에서 재롱을 떨었고 남편이 원하던 딸이 태어나 또 방긋거렸다. 아이들은 모든 반찬들과 어울리는 밥처럼 마음을 든든하게 배불리는 것이었다. 다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한 많은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라고 믿었다. 남편이 자상하고 능력 있는 가장으로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해도 아들딸이 크게 아프거나, 말썽을 부리거나, 꿈을 갖지 않는다면 더 큰 슬픔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불행은 내게서 끝낼 것이니 너무나 행복한 고민이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모든 것과 어울리는 밥알처럼 변해갔다. 내가 가진 것들 중에는 눈물짓게 하는 고통도 있지만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과 보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스럽다고 피하지 않고, 기쁘다고 가볍게 뛰지 않고 순간순간 내게 오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맘으로 감싸 안으면 그 속에 가정이라는 따스한 밥상이 차려져 군침 돌게 하는 것이다.
다시 상추 두 잎을 넣고, 쑥갓을 넣고, 매운 고추와 쌈장과 밥을 싸서 입에 넣다.
웃는다고 마음이 늘 웃음이었을 리 없다. 겨울 벌판 같은 마음은 늘 통곡의 강을 품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남편과 나는 쌈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가해자이면서 늘 피해자처럼 할 말이 많은 남편의 잔소리는 거의 일방적이었다. 늘 함께 사는 시부모님과 아이들이 잔소리의 쌍방 통행을 제한한 것인지 모르겠다. 마음 내키는 대로라면 싸움이 아닌 날들이 몇 날이나 될까.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 나는 매운 세월을 씹듯 쌈을 꼭꼭 씹는다. 씁쓰레한 상추와 바람 냄새 같은 쑥갓의 향, 그리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추의 매운 맛이 씹힌다. 씹을수록 각각의 맛은 약해지고 간을 맞추고 중화된 맛이 달큰하게 포만감을 한 눈금씩 높인다.
오랜만에 친정에서 쌈을 먹으니 쌈 맛이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내가 철학적인 쌈의 맛을 알고 쌈을 좋아한 것은 아니겠지만 쌈을 좋아한 내 미각이 참으로 기특하게 느껴졌다. 다시 상추 두 잎을 손바닥에 사이가 뜨지 않게 잘 펴고 쑥갓과 고기 한 점을 얹고 고추를 쌈장에 찍어 얹고 그 위에 밥 한 술을 얹어 잘 싼다. 큼직한 쌈을 입안에 넣는다. 상추, 쑥갓의 풋내와 느글거리는 고기, 톡 쏘는 청랑 고추의 매운맛이 밥과 섞이면서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또 한 눈금의 즐거운 포만감을 더한다. 쌈 맛이 철학적인 것인 것은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은 극단적이거나 개성적인 성격들이 섞여 살면서 적당히 각이 깎이고 둥글어져 일상의 바퀴를 굴려가는 것이리라.
어머니께서 나물 더 갖다 줄까 하고 묻는다. 나는 입안에 가득히 든 쌈을 씹으며 손을 젓는다.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 쌈이 아무리 맛있고 철학적이어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좋은 음식도 과식하면 배탈이 나는 것처럼,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너무 쌈을 크게 쌌던지 입 안의 것을 삼키고 나니 눈물이 핑 돈다. 남편도 볼이 불룩하게 쌈을 씹고 있다. 이십 년을 함께 살다보니 적당히 무디어진 성격처럼 입맛도 닮는가 보다. 귀찮다고 쌈을 꺼리던 사람이다. 맛있게 쌈을 먹던 남편도 눈을 찔끔거리며 물을 찾는다. 물맛이 시원하다. 부부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이 쌈을 하며, 쌈을 먹고 생수를 마시는 일처럼 느껴진다. 일방적이든, 상대적이든, 또 자신의 내면이든 우리는 쌈을 하면서 조금씩 모난 성격들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쌈은 서로 다른 맛들이 섞여 씹을수록 달짝지근하게 부드러워진 맛으로 배를 불리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쌈을 먹듯 쌈을 하며 서로의 각이 닳고 둥글어져서 상대에게서 거울처럼 나를 발견하며 웃어 보는 것이 아닐까.
서로 많이 먹으라고 손짓하며 눈길 교환하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둥근 달처럼 내 맘의 창을 훤히 밝힌다. (2006년 4월)
첫댓글 수업 날 알려주던 그 쌍추쌈이군요. 글 과 현실적인 쌈이 겹쳐지는 듯 서로 둘글게 닮아 가는게 아닐까요. 은순님 심기가 불편하겠지만 며칠 후 확인합시다. 가무치 판 돈은 다래끼 안에 있지않을까요 최갑선
좋은 글 감상할 기회주어 감사하군요. 일상사가 인생과 닮아가고, 인생이 일상사를 닮아 간다는 말이 있더니만 '쌈'을 읽어보니 그러하네요.
수업시간에 말한 쌈이라는 글.., 맛깔스럽게도 인생이라는 과제를 쌈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잘 이어져 온 것 같네요. 좋은 글 감상하며 갑니다. **^^**
쌈을 하지 않고 산다면 쌈맛을 모르리. 쌈맛과 인생을 결부해서 쓴 것도 좋지만 구성의 창의성이 멋지네요. 좋은 글 감상 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