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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타바 전투(위)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초상화. |
기회가 온 것이다. 스웨덴을 호시탐탐 노리던 폴란드와 덴마크·러시아가 스웨덴을 세 방향에서 공격했다. 1700년 초에 폴란드가 리보니아 지방을 공격했다가 스웨덴에 패배했다. 덴마크군이 공격해 오자 칼 12세는 코펜하겐을 위협해 덴마크가 꼬리를 내리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나르바에 대병력을 집결시켰다. 칼 12세는 즉각 발트해 지방으로 군대를 이동했다. 스웨덴군은 겨우 1만 명이었으나 러시아의 병력은 3만7000명으로 스웨덴의 승산이 희박한 전쟁이었다.
“전투는 심한 눈보라로 양측 간에 전투다운 전투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나 일순간 눈보라의 방향이 바뀌어 러시아군을 향해 불어 닥쳤다. 승기를 직감한 칼 12세는 눈보라를 헤치고 선두에서 러시아를 공격했다. 느닷없는 눈보라와 스웨덴의 공격에 러시아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러시아는 전사 1만5000명에 포로 1만2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스웨덴 병사는 겨우 700명의 피해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칼 12세의 용병술과 날씨의 도움으로 스웨덴은 쾌승했다. 전사의 기록처럼 칼 12세는 어린 나이에도 기민한 기동성과 대담한 공격력을 구사하는 뛰어난 제너럴십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한 칼 12세는 다시 폴란드를 공격했다.
스웨덴에 협조해 러시아에 대항하라는 칼 12세의 화해조건을 폴란드가 거부하자 진격해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칼 12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승리 뒤에는 어려움이 찾아온다.
나르바에서의 치욕적인 패배 후 와신상담해 온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군사력을 재정비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군대가 분산돼 있던 스웨덴은 러시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칼 12세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잉그리아(현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빼앗기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칼 12세는 모스크바 원정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그는 폴란드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 왕과 동맹을 맺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칼 12세의 군대는 스몰렌스크에서 러시아군에 저지됐다. 칼 12세는 겨울을 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추위와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이었다.
러시아가 외국과 전쟁을 벌일 때 즐겨 쓴 유서 깊은 전략은 적군을 러시아 영토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지휘 통신망과 보급선을 차단하고, 기상학적·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추위를 이용하고, 여름에는 수많은 늪지와 하천으로 적군의 기동이 제한되면 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표트르 황제는 이 전략을 채택했다. 러시아의 유인으로 내륙 깊숙이 진격한 스웨덴은 곧 본국과의 연락이 어려워진데다 악천후와 황폐한 지형, 그리고 식량 보급의 어려움 등으로 고통받게 됐다. 무적의 스웨덴 보병도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스웨덴의 겨울이 춥다고는 해도 우크라이나의 겨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월 평균기온만 해도 스웨덴보다 10도 이상 낮다. 그런데 이 해는 유난히도 더 추웠다.
1708~1709년 겨울에는 유럽 전역에 보기 드문 혹한이 닥쳐왔다. 추위 때문에 대흉작이 들어 충분한 식량과 의복을 보급받지 못한 스웨덴군은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게 됐다.
칼 12세는 남은 병력을 추슬러 1709년 여름 드네프르(Dneprs) 강 유역에 위치한 폴타바(Poltava)를 포위했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스웨덴군은 러시아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황제는 싱싱하고 사기가 높은 대병력을 동원해 스웨덴군에게 맹공을 가했다.
배고픔에 지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스웨덴 군대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칼 12세는 겨우 1000명의 병력만 거느리고 터키로 도주했다.
러시아의 팽창 정책에 위협을 받고 있는 터키의 도움으로 러시아와 다시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그는 1714년에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스웨덴은 1710~1711년에 전국을 휩쓴 흑사병과 몇 년간 계속된 흉년과 기근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더 이상 강한 군대를 만들 돈이 없었다. 1718년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칼 12세의 북방전쟁은 막을 내렸다.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은 러시아에 북유럽의 맹주 자리를 내주고 만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17세기 말 북유럽의 강자는 스웨덴이었다. 인접 국가였던 덴마크·폴란드·노르웨이·러시아가 힘을 합쳐 스웨덴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소빙하기의 춥고 습한 날씨가 1695년부터 1697년까지 스웨덴과 스웨덴의 식민지였던 핀란드·리보니아·에스토니아를 강타했다. 대기근으로 스웨덴 식민지 국가의 인구 중 30% 이상이 굶어 죽었다. 국력이 약해진데다 1697년에 15세의 나이로 칼 12세가 왕위에 올랐다.
[Tip]칼 12세의 교만한 리더십-`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라' 교훈 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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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2세의 초상화. |
15세의 나이에 왕에 오른 칼 12세의 담대함과 지혜는 대단했던 것 같다. 병력의 이동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연막(煙幕)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칼 12세였다.
1701년 러시아를 공격할 때 드비니강을 건너기 위해 물에 젖은 짚을 태워 발생한 연기를 이용했다. 이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해 스웨덴군은 아무런 피해 없이 강을 건넜고, 이것이 현재의 연막으로 발전했다.
“영토에 관한한 나를 공격하는 이는 무조건 쳐부술 것이고, 절대 타협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 볼테르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칼 12세에게는 돌아가는 유연함이 부족했다. 전력이 강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약할 때에는 큰 약점이 된다.
칼 12세에게는 적군의 전략과 힘을 과소평가하는 교만함이 있었다. 날씨의 영향에 대해선 더욱 무지했다. 병사들의 목숨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던 교만한 리더였다.
“전투력은 부하와의 관계가 신뢰로 맺어질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아이젠하워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그의 부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칼 12세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지혜가 부족하고 교만한 리더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