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 5] 2014_0629_국외 사적지 탐방 5 - 1
화룡시(청산리전투승비, 3종사묘) - 용정시(대성중학교, 서전서숙, 간도총영사관, 용두레우물터, 일송정, 3.13반일의사릉, 명동교회, 윤동주생가, 명동학교, 15만원 탈취지) - 연길시
백두산의 피곤함이 다 가시기도 전에 다시 일정이 시작되었어요!
특히 5일차 일정은 굉장히 빡빡해서 쉬는시간이 적어서 조금 더 힘들었어요ㅠㅠ
그래도 이양이 누굽니까! 한 번 가면 뽕(?) 뽑고 오는 성격!
5일차 시작합니다!
백두산에서의 날씨와는 상반되게 정말 맑았어요!
버스로 약 4시간을 이동했는데 가는 내내 풍경화 같은 모습이 펼쳐졌어요...!
그렇게 4시간을 달리고 달려 드디어 청산리 전투승전비에 도착!
청산리전투승전비?
청산리독립전쟁에서의 대승을 기념하여 광복회가 2001년 청산리 마을 입구에 세운 항일대첩승전기념비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8일 새벽까지 약 6일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군, 의민단, 신민단 등 8개의 2,500여 명의 독립군들은 일본군 정규군 2개 사단 50,000여 명 중 1,300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 대첩은 독립군 전쟁 중 가장 빝나는 승리이다.
저 많은 계단이 보이시나요?
계단을 오르고 오르면...!
청산리전투승전비가 있습니다!
청산리 독립전쟁 당시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네요!
헌화후 묵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비 주변의 잡초를 뽑았어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ㅎㅎ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진 않지만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대종교 3종사묘로 이동!
대종교 3종사묘?
대종교의 삼종사인 백포 서일, 홍암 나철, 그리고 무원 김교헌의 묘이다. 조그만 황토구릉 위에 세 사람의 무덤이 있고, 무덤은 서쪽 화룡시 건너 청산리를 향하고 있다. 북쪽에서 첫번째 무덤이 서일, 중앙이 나철, 세번째 무덤이 김교헌의 묘이다. 1911년 8월 나철은 이곳 연길현 삼도구 청파향에 이주하여 교도를 모집하는 등 동시에 각지에 대종교 소속의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진흥에 노력하였다. 나철이 1916년 8월 황해도 구월산에서 서거하자 제 2대 교주 김교헌이 1917년 4월 간도로 들어와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왕청현으로 이동하였다. 나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종교 삼종사묘는 이렇게 널찍한 들판 한가운데에 있어요.
울타리 안에 묘가 위치해 있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
헌화와 묵념을 하였습니다.
순서대로 서일 묘 - 나철 묘 - 김교헌 묘 입니다.
화룡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용정시로 이동하였어요!
용정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중부에 위치하며, 주도인 연길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1913년에 연변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용정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에 시로 승격되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3.13 만세운동의 현장인 용정앙소학교를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용정 기원 우물이 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백두산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도시이다.
용정시는 거의 한국과 같다고 보시면 돼요. 한국어 간판과 한국어를 쓰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양말에 구멍이... 왜죠...?
(빼꼼)
정말 생각보다 많이 걸었나봐요!ㅋㅋㅋ
구멍난 양말이 웃기면서도 뭔지 모를 뿌듯함이...!
중식은 유명한 냉면집에서 먹었어요!
이 냉면은 보통 냉면이 아닙니다.
왜냐구요?
엄청 크니까요!ㅋㅋㅋㅋ
아이폰 4s와 크기비교샷! 정말 엄청 커요!ㅋㅋㅋㅋ 그리고 완전 맛있었구요!
든든히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어요,
먼저 대성중학교입니다.
대성중학교?
1921년 건립된 대일항쟁기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이며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유교의 공교회에서 세운 민족학교로서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다녔던 학교로서 1921년 7월 11일에 정식으로 대성중학교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건물 앞에는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건물 2층에는 용정중학교 및 윤동주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옆 건물에는 이상설 선생 전시관이 만들어져 관람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용정시청소년애국주의교육기지 대성중학교.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뀐 상태입니다.
용정중학교 (구 대성중학교)의 역사를 한 눈에 알 기 쉽게 사진과 함께 설명이 제공됩니다.
또한 해설사꼐서 친절히 설명해 주시기 때문에 마치 한국에 있는 전시관에 온 기분이었어요.
주변 유적지에 관한 자료인데
오전에 방문한 청산리전투승비가 보이네요!
대성중학교에서 배출한 윤동주 시인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윤동주 생가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그리고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판과 <서시>의 친필원고 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8 ·15광복을 몇 달 앞두고 옥사한 윤동주의 유고를 친구 정병욱과 동생 일주가 주선하여 발행한 시집이다. 시집에는 저자의 사진과 서시(序詩)가 있고, 1부에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등 18편, 2부에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등 5편, 3부에 <참회록> <간(肝)> 등 42편, 4부에 <산울림> <해바라기 얼굴> 등 22편, 5부에 <투르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등 5편, 모두 92편이 수록되었다.
1부는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할 무렵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수록한 것이고, 2부는 도쿄 시대의 작품, 3부는 습작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4부는 동요, 5부는 산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거나 내면적 자아를 응시하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서시> - 윤동주(1917.12.30 ~ 1945.2.1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시관을 둘러 본 뒤 제 흔적을 남기고 이상설 선생 전시관으로 이동했어요,
이상설 선생?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했던 이상설은 25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결연히 맞서 이를 철회시키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소투쟁을 펼쳤다. 이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인 을사늑약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그래서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죠.
이후 1907년 이준 등이 을사조약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여 폭로하고자 하였습니다.
위의 전시는 이러한 내용에 관한 전시에요.
특히 코리안 뉴스페이퍼지에 실린 풍자화가 눈에 들어오네요.
이상설 전시관을 마저 둘러보고 나와 윤동주 책방으로 향했습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구입했어요
그리고 단체사진 찍고 서전서숙으로 이동!
서전서숙?
1906년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자 만주지역 교육기관의 모태가 되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위치는 용성시 용정실험 소학교의 운동장으로 추정 될 뿐이다. 1906년 만주 용정에서 이상설, 여준, 정순만, 이동녕 등이 서전평야의 이름을 따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된 것을 계기로 재정난과 함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폐교되었다. 서전서숙은 1년 미만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역에 수많은 신식 민족교육 기관이 설립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는 용정실험소학교의 운동장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추청되고 있습니다.
더 가까이 찍어보면
서전서숙이라고 쓰여있네요.
현재 건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서전서숙에 민족교육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간도총영사관부터의 일정은 5 -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