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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를 출발해 우레시노에 가면서 천주교도들의 시마바라의 난을 떠올리다!
2023년 2월 22일 후쿠오카 공항 에서 렌트카를 빌려서 사가현 가라쓰 에 도착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159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가라쓰를 영지로 받아
지었다는 가라쓰성 (唐津城) 을 구경하고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 외곽의 숙소를 찾아 1박 합니다.
다음날인 2월 23일 우리는 딸과 사위에 손주등 7명이라 늦게 일어난데다가 숙소에서 아침을 해서
먹고 설거지까지 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으니.... 오늘은 인근에 우레시노 차 와
다케오 도서관 까지 보고 멀리 구마모토 까지 가서 구경까지 해야 하니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예전에 한번 보았던 나가사키는 포기하고 렌터카로 하우스텐보스 기차역을 지나 우레시노 차(茶)
를 보기 위해 달리는데, 어제 가라쓰성 (唐津城) 을 구경하면서 초대 번주 데라자와 히로타카를
회상했으니 저 가문은 구마모토번의 가토 기요마사 가문 처럼 불과 2대인 아들 대에 멸문 당합니다.
2대 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 대가 되면 천주교도 기리시탄에 대한 강경책 과 아버지 대에서 부터 이어진
심한 노역으로 인해 영민들의 불만이 차 있던 차에..... 1637년 가라쓰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또 다른 영지 아마쿠사제도 와 인접한 시마바라에서 천주교도들의 “시마바라의 난” 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난은 1여년후에 진압되지만, 가라쓰번은 막부로 부터 문책 되어 아마쿠사 4만석의 영지가 몰수 되었으며
1647년 2대 번주 가타타카는 아마쿠사 영지의 몰수와 심적 동요로 인해 에도(도쿄) 번저에서
자살하였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데라자와 가문의 영지 는 무가제법도에 따라 몰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예수교 복음 이 전파된 해를 1845년 김대건 신부 로 부터 잡지만 실은 그보다 253년 전인 임진왜란
때로 보아야 하니....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으로 독실한 기독교도 기리시탄에 속한 고시니 유키나가
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채 1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했습니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에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인데, 아버지는 요나단
이고 어머니는 막달라 이며 처는 쥬스타 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의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왜성(倭城) 으로
들어옴으로써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 이며, 진해에서는 일요일에는 신부
주재로 거룩한 미사가 봉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 들이 다수
있었으니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 합니다.
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십자가 군기 를 들었다면 2군 가토 기요마사는 일연종(日蓮宗) 불교도 라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깃발을 앞세웠는데, 고니시 말고도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에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탄 (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잘 알려진
장수들이니 기리시단 부대는 십자가 군기(軍旗) 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임진왜란이 끝난후 1600년 부터 일본에서 천주교인들을 씨를 말리기 시작하니....
그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고아소녀 “줄리아” 를 규슈 우토성 (宇土城) 에 데려가서는
처인 쥬스타에게 맡겼으니 줄리아는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서 세례 를 받았는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되었다가 1612년 절해 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 에 유배 되어 죽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오다 줄리아” 가 유배 생활을 했던 도쿄 남쪽의 고즈시마(神津島) 에는
매년 5월 셋째주 토일요일 “줄리아 축제” 를 열고 있으니 성당과 고즈시마 마을에서
주관하는 연례 행사로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뱃길 인데도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일본의 밴드 “서던 올 스타스” 가 작사· 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입니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일본에서도 조선에 못지 않은 천주교 박해 가 있었으니..... 예수상이나 십자가와 성화 를 길에
깔아두고 밟는 "에후에" 를 한 사람은 배교자로 간주해 용서했으나 거부하는 자는
고문을 가하고 죽이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화형 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고통을 안겨
죽이기위해 거꾸로 메다는 “아나즈리 처형” 을 하는등 많은 일본 천주교도가 "순교" 했습니다.
*** 초록색 長崎県 지역은 사마바라반도 이고, 天草市 는 아마쿠사 오른쪽 宇土市 는 우토시 ***
1549년 8월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가 인도 고아에서 말레이시아로 건너오니 말래카
의 저팬타운에서 일본인 안지로 의 도움으로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해서는 선교를 하고
이어 도착한 야마구치에서 다이묘 오우치씨는 천주교 포교를 도왔으며... 1569년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는 교토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서는 천주교 포교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일본인 수사 로렌스는 히데요시를 알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은후인 1586년 3월 16일,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 와
루이스 프로이스 는 공사중인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서 천주교 포교 에 대해 도움을 받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 보면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 는 일본은 동생 히데나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선과 중국을 정복 하고자 하니, 지금 2천척의 선박 을 건조하기 위한 목재를 모은다면서
선교사들에게 대포와 총을 갖춘 대형 서양 선박 나우선 2척 의 조달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조선과 중국 곳곳에 교회 를 세우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두 크리스천 이
되도록 명령할 것이며 그 후에 자기는 일본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또 장래 일본인의
절반 혹은 대부분이 크리스천 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사카성 천수각과 재보가 저장된
탑 의 문을 열어 구경시켜 주는데 오르간티노 신부의 기록에는 포르투칼 배를 알선하겠다고 말합니다.
히데요시는 “ 이 방에는 금 이 가득차 있고 다음방에 은과 견사, 그 옆방에 다마스커스 직물, 또 다른
방에는 차 도구, 다음은 도검과 무구가 있다” 고 말하고는 다른쪽 방으로 가니 유럽산 홍색
외투 12벌, 또 금실로 재봉된 조립식 침대, 그리고 황금으로 장식된 다실 등을 일일이 구경시켜 줍니다!
선교사들은 성 안의 크리스천 부인들 을 통해서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 가 남편 히데요시에게
선교사들에게 특허장을 내려주라고 부탁하니, 애처가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에서 천주교
의 포교를 허락 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일체 세금과 부역을 면제 하고 병사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허장 2장 을 발부해 주면서.... 한통은 인도와 포르투칼 에도 보내랍니다?
방문한 서양 선교사들에게 오사카성의 방들을 손수 구경시키며 입에 혀처럼 놀런 그토록 친절 했던
히데요시는 규슈를 정복한 후에 돌연히 표변 해서는, 기리시단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선교사들을 힐문하더니 1587년 6월 19일 청천벽력같은 선교사 추방령 을 발표합니다.
대원군이 러시아 침입에 프랑스 도움 을 얻고자 했다가 러시아인이 물러가자 프랑스 도움이 필요 없어지고
내실에 천주교도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돌자 태도를 180도 돌변해 천주교 탄압령 을 내렸듯, 히데요시도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80% 를 장악한 규슈를 정복하는 전쟁에서 서양 무력의 도움 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모양인데 규슈를 정복했으니 더이상 서양 무력을 빌릴 필요가 없으니 배척 하게 된 것으로 봅니다?
“너희 예수교는 왜 일본 방방곡곡 거리에서 포교 하는가? 왜 말고기 와 소고기 를 먹는가?
왜 너희 유럽 상인들은 우리 일본인 부녀자들을 돈을 주고 사서는 외국에 노예 로 파는가?”
그러니 토사구팽 이라는 것은 동서고금 어느시대나 있던 것으로 필요할때는 간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
에서 다이묘들 까지도 천주교도 가 되어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데다가 서양 상인들이 저 일본인
부녀자들을 노예로 마카오에 파는게 심기를 거슬린 것인데..... 규슈 정복 후에야 본심 을 드러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추방령에는 “일본은 신국(神國) 이므로 크리스천 나라에서 악마의 가르침 을 설교하기
위해 온 것은 나쁘며, 예수교 신도들은 신과 부처의 사원을 파괴 하니 일본의 법이 파괴되는
지라, 선교사들은 20일 내에 떠나라, 단 포르투칼 나우선들이 상거래 를 위해 오는 것은 허락 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비와호수에 천수각을 금으로 도배한 이즈치성 아래에 교회를
설립하는 편의 를 봐주었으며 후임 히데요시도 그런 정책을 취하는등 몇년간 봄날 이었는
데..... 전혀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선교사들은 나가사키로 가서는 숨어 지내게 됩니다.
나가사키의 교회 들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히데요시는 이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는지라 흐지부지 되었다가, 나우선의 사령관이 예방하고 선교사 발리냐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이라고 칭하고는 교토 취락제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모두 없었던 일 이 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아시아 처럼 일본
이 서양에 침략 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천주교도들을 처형 하니 3만 7000명 에
달했는데....부모 앞에서 자식이 온천구덩이에 던져지고, 사람의 몸에 불로 고문을 가해
타죽이기도 했으니 당시의 극심한 박해로 현재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1% 에 못미칩니다.
"절망하고 싶은 유혹 이 듭니다. 두렵습니다. 당신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기도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 입니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을 원작으로 한
마틴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 는 이 처럼 끊임없는 천주교 탄압에 고통받는 포르투갈인
신부의 모습을 통해서.... 종교 만큼이나 숭고한 인간적 고뇌의 과정을 유려하게 묘사 합니다.
영화의 무대는 나가사키로 천주교 선교 성지(聖地) 라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이 많이 남아있으니
1597년 2월 5일 히데요시의 '천주교도 추방령' 에 의해 간사이에서 전도하던 선교사 6인과
일본인 신도 20명이 처형된 곳 이고 순교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화형과 물고문으로 처형 됩니다.
1956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는 26명 성인의 등신대 동상 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는
니시자카 공원 이 완성됐으니 1950년에는 로마 교황 피오 12세가 이곳을 천주교 교도의
공식 순례지로 공표했으며...... 개항 후인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 (大浦天主堂) 이 건축되었습니다.
천주교 금교(禁敎) 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천주교도들이 250년간 세월을 뛰어넘어 프랑스인
신부와 만났던 '신도발견' 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한데.... 건물 안에는 100년 전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고 마리아상은 1865년 프랑스에서 직접 가져와 경건함을 더합니다.
기리시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 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에도 탄압이 계속되니 1637년에는 시마바라 반도에서 아마쿠사시로의
주도로 4만명의 신도가 반란 을 일으켜서 4개월간 12만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마바라반도 운젠시의 온천은 뜨거운 온천수가 지표면을 뚫고 솟구쳐나오니 끓어오르는 땅, 산불
이라도 난 듯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수증기,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지옥' 을 만드니
개종을 거부한 천주교 신자 수십명이 펄펄 끓는 늪지대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던져져서 죽었습니다.
시마바라 는 키리시탄이었던 아리마씨 가 전봉된후 마츠쿠라씨가 들어오면서 천주교도를 무지막지
하게 탄압 했고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데다가 키리시탄의 본거지인 필리핀의 루손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까지 부과하며운젠 지옥(雲仙地獄) 고문 이라 부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마쿠사 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가톨릭이 융성했지만 테라자와씨가 들어와 종교 박해 를 자행하자
시마바라의 키리시탄 농민 2만여명이 무장 봉기 를 일으키니 아마쿠사에서도 반란 이 일어나고, 지도자
는 하느님의 대리인 이라고 불리던 세례명 '예로니모' 의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라는 16세 소년이었습니다.
또한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 이 되어 떠돌던 기독교 신자 사무라이들 도 대거
참가했으니 반군의 병력은 3만 7천의 기리시탄 이었다는데, 시마바라 번에서 3천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참패당하고 혼도성이 포위되니 주민들이 궐기해 반란군에 합류하니 혼도성이 함락됩니다.
천주교도 반란군은 나가사키 까지 장악해 막부군과 장기간 농성전을 계획해 도미오카성 을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폐성이였던 하라성을 보수해서 농성전 을 시작하는데....
이후 3번의 공세 끝에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이끄는 진압군을 궤멸 시키자, 에도 막부는
병력을 무려 12만으로 증강시켰고...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마츠다이라는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포위하여 하라성 자체를 봉쇄 했으며 닌자 들을 성내로
잠입하고 정찰시키니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해초로만 연명하게 될 지경이 되자
총공격을 감행하니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하라 성이 함락되는데 반군은 단 1명도
항복하지 않고 전부 전사 했는데 막부군도 10,8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천주교도 박해는 백오십여년후 조선 에서도 일어나니.... 1차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 박해(1846년)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인데, 5차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신도 8천명 을 고문하고 처형하니 병인양요 전쟁이 일어나는데 저때
산이나 바다로 도망가면서 사고나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만명이 훨씬 넘습니다.
서양인들은 처음 탐험가를 보내고 두번째로 상인이 오며 세번째로 선교사가 와서 현지인들을 기독교도
로 만들면 박해를 받게되는데.... 이때 군대를 보내 식민지 로 삼는지라, 일본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두려워 해서 나가사키섬 데지마에 선교에는 관심없이 무역을 원하는 "네델란드인의
상관" 만을 허락한채 "쇄국정책" 으로 들어가는데, 일본인은 외국에 출국과 입국을 일체 금지합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왜구 가 완전하 사라진 외에도 동남아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 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생을 마치도록 강요를 당했는데...
이후 아시아의 40개국 가운데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나라 뿐이고 중국
과 태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그리고 나머지 37개국은 모두 식민지로 전락 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에 우리 일곱명 가족이 탄 렌터카는 드디어 차(茶)로 유명한
우레시노 에 도착해서는 차 교류회관 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여기서 일본 차 (茶) 와
다도(茶道) 에 에 대해 알아보고 또 시음 을 한 후에 마을을 한바퀴 둘러볼 생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