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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스승님 돌아가신 15돌 제삿날에
오늘이 스승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15돌 제삿날입니다. 스승님, 벌써 이 땅을 떠나신 지 15 해가 지났습니다. 시간을 그렇게 귀중하게 생각하고 아끼신 스승님, 15 해 동안 제가 무었을 했는가를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더 잘 할 것을 다짐합니다. 해마다 스승님을 따르고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모여서 그리워했는데 올해는 혼자서 스승께 바치는 글을 씁니다. 살아 계실 때 한글문화원을 열고 활동하실 때 사진과 그 때 인연이 된 분들 소식을 스승께 알려드립니다.
제 마음은 올해도 벗들에게 모이라고 해서 함께 지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제가 나서서 돌아가신 한 돌 기리는 모임도 했고, 10돌 모임도 했고, 태어나신 100돌 모임도 한글단체 분들을 모이게 해서 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을 때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어기고 제가 언론에 공개한 일도 아실 것입니다. 15년 전 오늘 아무래도 무언가 느낌이 이상해서 이튼 날 한글학회 김한빛나리 후배에게 "박사님 소식을 들었는가? 아무래도 내 느낌이 오늘 전과 다르다. 공박사님의 아드님에게 알아보라."고 전화를 했더니 "어제 세브란스 병원에서 돌아가셨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김 군에게 "박사님께서 돌아가신 뒤 장사도 치르지 말고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일할 시간을 빼앗지 말라는 뜻이었다. 언론에 알려서 겨레의 큰 스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온 국민에게 알리는 것은 불효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방송국과 신문사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틀 뒤에 보도가 된 것인 데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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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기 전 공병우 박사님 모습
1. 공병우 스승님 그립습니다.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타실 때에도 언제나 평소 입고 다시시던 하늘빛 잠바에 빵모자를 쓰시고 구두 뒤를 꺾어 신으신 채로 단상에 오르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립니다. 한글문화원 사무실에 신문기자가 취재차 오면, "신문기사를 아직도 펜으로 쓰는가? 타자기를 칠 줄 아는가? 빨리 셈틀을 배워 글을 써야 한다!"시며 입가에 흰 거품을 보이면서 한글 기계화를 가르쳐주시면 모습이 생생합니다. 날마다 천리안과 하이텔에 글을 올리시며 "이 선생이 누리통신에 글을 쓸 때 한글세상이 빨리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밤 11시부터 12시까지 제게 셈틀로 글을 쓰고 올리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돌아가신 스승님 뜻을 이어서 오늘도 날마다 누리통신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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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종로구 와륭동 한글문화원에서 다달이 연 한말글 사랑 이야기마당을 알리는 펼침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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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그 때 한글문화원 지하 강당에서 하던 한말글 이야기마당을 저는 2010년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로서 한글학회 지하 강당에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할 수 없이 그 길을 또 가야하니 답답합니다. 잘 되도록 보살펴 주소서.
2. 서울 종로구 와룡동 65번지 한글문화원이 그립습니다. 박사님께서는 군사정권 세력에 재산도 다 빼앗기고 한글기계화 사업을 더 할 수 없게 되었던 전두환 정권 초에 미국으로 망명하시여 민주화 운동도 하고 셈틀 연구를 하시고 민주화바람이 불던 1988년에 돌아오셔서 옛 공안과 병원 자리에 한글문화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정태진, 정래권, 이찬진, 박흥호 들 젊은이들을 모아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회장을 맡은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방도 공박사님 사무실 옆에 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지하 강당에서 다달이 한말글 사랑 이야기 마당을 열었습니다. 박사님은 한글기계화운동을 하고 저는 한글운동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참말로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들과 감사패를 만들어 방배동 아파트 댁으로 가서 드렸습니다. 그 때 스승님은 콜라를 따라주시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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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한글학회 연구원 김불꾼, 공병우, 이대로, 최노석 경향신문 문화부장. 1992년 사진
3. 돌아가시기 2년 전 한국일보 기사입니다. 한글날이 가까워지면 여러 신문사에서 박사님을 찾습니다. 한글사랑운동을 하시는 모습과 말씀을 알리려는 뜻으로 한국일보에서 취재하려고 온다니 제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연락을 하셨습니다. 신문사에서 스승님과 가장 가깝게 활동하는 사람들이면 좋다고 한다면서 삼청동 댁으로 저와 안과 1급 장애인인 제자를 오라고 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가까운 동지요 제자로 생각해주시는 스승님이 고마웠습니다. 누구나 입으로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실제 행동은 하지 않았지요. 박사니 교수니 일류대 출신들은 더했지요. 그래서 90살을 바라보시는 스승님은 힘드셨지요. 셈틀이 무언지도 모르는 장관과 공무원, 신문사 사장과 기자들, 대학 총장과 교수들이 스승님의 큰 뜻과 어른 됨을 알아볼 리가 없었지요. 그 때 제가 스승 옆에서 모시고 활동하고 가르침을 받은 게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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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은 안과 1급 장애인이지만 타자기를 잘 치는 공박사 제자, 그리고 이대로, 공병우박사님
4. 문제안 선생님 소식입니다. 1970년 대 스승님께서 앞장서서 한글학회 소식지인 한글새소식을 만들도록 도와주시고 이은상,한갑수,전택부 선생님들과 함께 한글문화협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한글학자나 전공자가 아닌 애국자들이 모여서 한글사랑운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 한글문화협회가 국어순화운동이 시작되면서 중단 되었다가 허웅 한글학회장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동지들과 한글학회 개혁을 외치면서 그 모임을 다시 일으키게 하고 중국으 갔고, 이름을 말글문화협회로 바꾸고 문제안 선생님이 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문 대표께서 90살이 되신 지난해 활동이 힘들게 되어 제가 중국에서 돌아와 대표를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스승님이 1988년 미국에서 오셔서 문제안 선생님에게 셈틀로 글을 쓸 줄 모른다고 "젊은이가 그것도 못하느냐."고 혼내셨지요. 70이 다 된 문제안 선생님에게 ... 스승님께서 신임하시고 사랑하신 그 문제안 선생님이 91살이 되시더니 이제 걷지를 못하신다고 하셔서 걱정입니다. 대신 제가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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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초 한글회관 주시경 스승님 상 앞에서 문제안(오른쪽)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5. 이오덕 선생님 소식입니다. 스승께서 1988년 미국에서 돌아오셔서 한글문화원을 열고 스승님 사무실 옆방에 제가 이끄는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방을 주셨고, 그 앞쪽에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장 이오덕)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스승께서는 제가 이오덕 선생과 손잡고 한글사랑운동을 잘 해주길 바라셨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뒤 저는 이오덕 선생과 함께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지금까지 12년 째 우리말을 지키고 한글을 빛내는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5년 전 쯤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저는 스승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임 회보를 요즘 김두루한 선생이 맡아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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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이오덕 선생님과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힘차게 잘 하자고 다짐하며 찍은 사진
6. 김동길 박사님 소식입니다. 스승께서는 미국에서 오셔서 김동길 교수께서 한국일보에 쓰신 한글사랑 글을 복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돌리셨습니다. 한자세상이 가고 한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김동길 교수님을 남달리 신임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을 믿게 되었고, 는 노태우 정부 때 노재봉 총리를 한글전용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김동길 교수님과 상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 김 교수님께서 오늘도 제가 열심히 한글사랑운동을 하는 것을 남다르게 보시고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쓴 '우리말 독립운동의 발자취'란 책을 가지고 2008년에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 김 교수님께서 "공 박사님께서 1980년 대에 한국일보에 내가 쓴 글을 보고 미국에서 격려 편지도 보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책을 내느라고 애썼다고 격려금까지 주셨습니다. 김 교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한글사랑 글을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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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김동길 교수님 댁에서 왼쪽 이대로, 이대로 둘째딸 이은별(세브란스 의사), 김동길 교수.
7. 한글문화원을 다시 연 스승님을 섬기는 이들 소식. 스승님, 7년 전 쯤 장안동 송현 선생 사무실에 우리는 한글문화원 간판을 다시 달고 스승님의 뜻을 이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그 사무실에 모여 스승님의 사진을 걸로 우리끼리 스승님 뜻을 되새겼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 때 사진입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박흥호님도 사업이 잘 안 되어 어려움이 있었고 송현 선생도 여러 일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박흥호님도 다시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한글학회에 나가니 하나씩 풀어가겠습니다. 우리들이 다시 뭉쳐서 큰 일을 하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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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송현, 이대로, 박흥호, 한나람 건너 김한빛나리님.
8. 백기완 선생님 소식. 스승께서는 한글학회를 지을 때에도 적지 않은 돈을 내셨습니다. 와이엠씨에이 종로 회관 지을 때에도 , 한겨레신문 창간 때에도, 김대중님이 민주화 운동을 할 때에도 보통 사람보다 많은 성금을 내셨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통일문제연구소를 열고 그 집을 사실 때에도 도와주셨습니다. 그 백기완 선생님께서도 한글운동을 열심히 하고 게시고 저를 사랑해주십시다. 얼마 전 백 선생님을 한겨레신문사에서 낸 책 소개 방송을 할 때 만나서 스승님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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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저도 지난해 외솔상을 받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살아 게실 때 5.16 민족상은 거절했지만 외솔상은 자랑스럽게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스승님 덕에 저도 지난 해 그 외솔상을 받았습니다. 시상식 날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스승님이 하신 그 말씀을 하면서 스승님을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더 열심히 한글사랑 운동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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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송현 한글문화원 원장 소식. 지난해 한글날 경복궁 안에 있는 옛 집현전 터인 수정전에서 학술대회를 했는데 그 때 송현 선생이 "공병우 박사의 업적과 한글기계회의 당면 과제"란 주제로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문화부에 건의해서 주시경, 외솔, 이극로 선생에 대한 업적과 함께 외솔회 주체로 학술대회를 하도록 건의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제 세벌식 자판, 조합형 코드 세상이 오려고 합니다. 송현 선생은 요즘 "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과 제가 함께 신문의 날에 각 신문사에 한글전용을 건의했을 때 중앙일보에서 우리의 건의를 들어주어서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한글가로쓰기 신문을 만들 때 편집국장이었던 분이 국회의원인데 며칠 전에 초등학교 한자교육 학술토론회에 와서 격려사를 하길 때 송현 선생과 함께 따진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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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모자 쓴 이 송현, 이대로, 고흥길 의원.
공병우 스승님, 날과 달이 가고 또 한 해가 지나서 스승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15돌을 맞이하니 스승님이 그리워서 스승님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사진을 살펴보면서 스승님을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또 한 해를 보내면서 더욱 더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잘 하겠습니다. 지난해 저는 한글문화관을 지으려고 애써서 올해 안에 한글박물관 설계를 하고 잘 하면 첫 삽을 뜰 거 같습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하늘에서 도와주시길 비손합니다. 스승님에 견주면 티끌만도 못한 이들이 정치인,학자,언론인, 기업인으로서 이 나라를 지배하고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저 어리석은 이들을 깨우쳐 주소서.
4343년 3월 7일 마지막 제자 이대로 씀.
첫댓글 나라임자님의 글을 읽노라니 공박사님의 추모정이 새롭습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