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1-6> 동천 스토리- 부산의 중심, '서면'
사통발달 여건 덕 중심상권 자리매김…1970·80년대 최고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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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부산 서면교차로 일대의 모습. 이곳은 현재 하루 유동인구가 지역에서 가장 많은 부산의 경제 교통 금융 유통 문화의 중심지다. 이진우 인턴기자 |
- 1938년부터 4년 동안 구획정리
- 5개 방사선도로 생기며 급부상
- 군수공장 중심 일대 공단 성행
- 사상공단 조성 후 유흥가 번성
- 여가 수요 끌어모은 영화관들
- 고작 1곳만이 옛 명맥 이어와
서면은 부산의 중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전, 전포동 일대를 이른다.
부산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 요건때문에 서면은 일찌감치
중심 상권을 형성하며 교통·금융·유통·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서면(西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동래부(군)에 속한 7개면 중 하나로 '동래부의 서쪽에 위치한 면'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때 서면은 오늘날의 초읍 연지 부암 개금 당감 가야 범전 전포 부전 양정동 외에
남구 문현 대연 용호 용당 우암 감만동 일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다.
1920년대 서면교차로는 딸기밭이었다.
교차로 주변은 서면사무소, 경찰서, 서면공립보통학교(성지초등 전신)와 몇 채 안되는 농가가 있었고
대부분 파밭이었다.
1915년 초량과 부산진, 서면과 부산진을 오가는 전차가 개설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고
1923년 4월 부산공립 제2상업학교(옛 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가 영주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사실상 '서면 시대'가 시작됐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면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많은 땅을 사들였다고 한다.
게다가 1910년 성지곡수원지가 만들어지면서 다른 지역보다 식수 문제 해결이 쉬워져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
이후 1938년부터 4년간 구획정리 과정에서 서면교차로에 5개의 방사선도로가 생기면서 서면은 부산의 중심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당시 서면 주변에는 군수공장이 많았고 천일고무, 조일고무, 조선금속, 제국제마, 전기제강 등이 있었다.
여기에다 정미, 고무, 섬유, 기계공장등이 들어서면서 동천을 통해 부산항으로 물자를 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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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직할시 승격을 기념해 부산탑을 건립한 직후의 서면로터리와 그 주변 지역 모습이다. |
6·25전쟁이 터지면서 서면 일대는 전쟁 난민이 몰려들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부산상고(현 롯데백화점)는 스웨덴병원이 되었고
부전시장에는 부전역으로 들어오는 농산물과 수산물로
새벽시장이 번창했다.
1966년 부전천이 일부 복개되고 1968년 사상공단이 조성되면서
서면 부근의 공장들도 그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하지만 퇴근길 사상공단 근로자들은 가까운 서면으로 찾아들어
서면 유흥가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서면은 부산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중구 남포동과 함께 저녁에는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1968년 이곳에 영광도서를 개업한 김윤환 대표는
"당시 영광도서 주변은 일부만 복개됐고 복개도로 위에는 화신클럽, 모나미클럽 등 맥주집들이 번성했다"며
"복개를 걷어내는 것에 대해 좁은 하천 폭, 부족한 수량, 상권 축소 우려 등으로 주민들의 반응이 엇갈린다"고
말했다.
서면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극장가다.
별다른 소일거리가 없던 1950~1970년대 시절, 서면 일대 영화관은 최상의 휴식 공간이었다.
개봉관으로는 북성극장, 동보극장, 태화극장, 대한극장, 은아극장 등이 있었고, 속칭 삼류극장인 천일극장, 태평시네마, 노동회관, 이성극장, 신도극장, 대명극장, 성지극장, 부일시네마 등이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컬러 TV가 보편화되고 오락거리가 늘어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극장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춰 아직껏 명맥을 이어오는 곳은 대한극장(현 CGV대한)이 유일하다
2006년부터 부산진구보에 '서면이야기'란 글을 연재하고 있는 동길산 시인은
"전포동(田浦洞)의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서면은 원래 바다였다. 바다로 나아가는, 그리고 사통팔달의 개방성이
오늘의 서면을 이끌어온 원동력"이라며
"동천에 배를 띄울 수 없다면 동천 근처나 서면 일대에 등대를 세워 현대인의 차가운 감성을 따뜻하게
좀 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서면로터리와 부산탑
- 직할시 승격 기념 부산탑, 한때 지역의 명물 명성
- 지하철 공사로 박물관행
서면 중심에 원형의 '서면로터리'가 조성된 것은 1957년이었다.
그해는 부산이 처음으로 중·서·동·영도·부산진·동래 등 6개 구로 행정구역을 나눈 뜻 깊은 해다.
이후 객지 사람들이 부산에 오면 반드시 보고 가야 하는 명물이었던 '부산탑'(사진)은 1963년에 세워졌다.
부산시가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예산 250만 원(부산시 100만 원, 부산상공회의소 150만 원)으로 1년간의 공사 끝에 1963년 12월 14일 높이 23m 부산탑이 탄생했다.
부산탑 위쪽은 부산이라는 머리글자를 상징하는 'ㅂ'자 모양을 형상화했고, 그 'ㅂ'자 상부에는 오륙도 형상을 가로로 본떠 넣었다.
부산탑 중앙에는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 청동상을 설치,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부산사람의 발전을 기원했다.
기념비에는 당시 김현옥 부산시장과 탑 건립에 참여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인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김지태 신덕균 왕상은 등 내로라하는 부산상공회의소 임원들의
이름이 올라있다.
서면로터리는 중앙로, 가야로, 새싹길, 동성로를 연결하는 부산 교통의 중심 역할은 물론 상업·금융·유통·문화·정보 등이 총 집합하는 소통의 로터리였다.
당시 솜씨가 서툰 신출내기 운전자는 로터리를 빠져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바퀴나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이후 산업화로 인한 도시 발전과 서면로터리 교통 정체가 극심한 상황에 이르면서 부산에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자 부산탑은 1981년 7월 부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 부산탑의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상과 기념비는 부산박물관 야외에 보관돼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백승옥 학예연구실장은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시민들이 부산탑의 햇불상과 기념비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 '볼거리 없는' 서면 …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외면
부산의 중심이었던 서면이 화려했던 과거 명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도시의 외연 확대로 해운대와 덕천동, 하단동 등으로 도심 기능이 분산되면서 서면의 역할도 그만큼 줄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찾고 싶은 관광지로서 서면의 위상은 초라하다.
서면의 라이벌로 볼수 있는 해운대와 남포동 등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펼치고 있지만
서면은 주도적인 관광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서면은 사통팔달로 연결된 교통 접근성과 대형판매점과 전통시장이 집중되어 있는 부산최대의 유통상업지역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외국인의 쇼핑 선호장소 1~3위는 면세점, 재래시장, 백화점이다.
서면은 이 세가지를 반경 1㎞내 모두 보유하고 있다.
쇼핑 장소로 서면만큼 좋은 곳이 없는 셈이다.
또 의료관광도 서면이 갖고 있는 잠재력 중 하나다.
서면 메디컬스트리트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드물 정도로 개별 병원들의 집적율이 높다.
이처럼 서면만의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사람을 끌어 모으지 못하고 있다.
동의대 한상현(국제관광경영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관광객들의 방문 수요를 불러 일으킬만한 서면만의 차별화된 관광 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 여행상품의 취약성을 들었다.
부산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여행상품에 서면은 아예 방문지로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설령 포함된 경우도 대형버스를 타고 와 카지노, 면세점에 잠깐 들렸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부산에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 1박2일 정도여서 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원도심지역이나 해운대 정도를 둘러보는 것으로 부산 일정을 짠다"며
"서면에 대한 중장기 관광마스터플랜을 작성해 외지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영광도서 김윤환 대표는 "서면이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심 철도를 외곽으로 이전해 그곳에 관광과 의료, 유통 시설을 대거 유치해야 한다"며 "도심 철도 이전지가 확보되면 부산시민공원, 송상현광장 등과 함께 서면을 발전시키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