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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북한에서의 본국검(本國劍)’과 <황창무(黃倡舞)>
북한에는 ‘검도’가 없고 ‘칼쓰기’가 있다. 북한에서 발간된 사전들을 보면, ‘검도’를 “일제때, 앞이 보이게 만든 털같은것을 얼굴에 쓰고 갑옷 비슷한 것을 가슴에 대고 참대로 만든 칼로 몸의 일정한 부분을 치거나 찔러서 이기고짐을 겨루는 경기”(《조선말사전》,66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검도(劍道)=격검’이라고 한다. 그런데 ‘격검’은 “긴 칼을 가지고 일정한 시간안에 상대방의 몸의 일정한 곳을 빨리 찌르거나 베는 정도에 따라 이기고짐을 겨루는 경기.”(《조선말대사전(1)》,14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에서 1995년에 발간된《조선대백과사전(1)》은 ‘격검경기’를 “14세기에 총이 나오면서 전투무기로서의 검의 사명이 점차 약화되여 고대로부터 쓰이여오던 두텁고 무거운 검과 검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검은 보다 가볍고 다루기 쉽게 되였으며 검술은 군사적목적보다도 체력교육적목적에 유리하게 갱신되였다. 18세기중엽부터 격검이 완전히 경기화되였으며 경기에서 보호면이 리용되고 검끝에 단추를 붙여 안전성이 보장되게 되였다. 격검경기는 1896년 제1차 올림픽경기대회때부터 정식 올림픽종목으로 되였다.”(619쪽)라고 설명했다. 여기서의 ‘격검’은 ‘펜싱’을 말한다. 현재 북한에는 ‘펜싱’만 있고, ‘검도’는 없다. 검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이다. 다만 사전에서 ‘검도장’(“검도훈련을 하도록 마련되여있는 장소”), ‘검도복’ (“일본에서, 검도를 할 때 입는 옷”)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칼쓰기’라는 용어는 존재한다. 《조선의 민속전통 5》의 ‘민속 놀이’편을 보면, “칼쓰기는 삼국시기의 고구려무덤들의 벽화를 통하여 생동한 장면을 엿볼수 있다. (...). 리조시기 무기로 사용된 칼을 크게 나누어보면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긴칼(장검)이며 다른 하나는 짧은칼(단검)이다. 긴칼은 칼날은 짧으나 칼자루가 길었다. 긴칼의 칼날은 오히려 짧은칼의 칼날보다도 짧았다. 짧은칼은 전체의 길이와 칼자루가 짧으며 칼날은 오히려 긴칼보다 길었다. 이 시기 구체적인 칼종류는 6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도, 제국검, 본국검, 쌍도, 월도, 협도 등이였다. 예도는 칼날의 길이 3자 3치, 자루의 길이 1자로서 우리 나라 봉건시기 칼가운데서 칼날의 길이가 제일 긴것이였다. 제독검과 본국검은 예도와 비슷하였다. (...). 칼쓰기의 구체저인 방법은 《교전총도》,《예도총도》,《제독검총도》,《본국검총도》등으로 구분하여 그린 몇십가지의 전법에 대한 그림에 전하여온다.”(75~76쪽)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북한의 체육출판사가 펴낸《동방격투술 이야기》에 기술된 <우리 나라 중세무술체육>에는 ‘칼쓰기’가 빠져 있다. 이 장(章)에선 ‘활쏘기ㆍ창쓰기ㆍ격구ㆍ힘쓰기와 달리기ㆍ돌팔매ㆍ《합전》과 사냥경기’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104쪽과 105쪽에 [그림 24. 칼쓰기동작(《무예도보통지》중에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검도복’을 “일본에서, 검도를 할 때 입는 옷”이라고 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에 ‘검도’가 없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민속전통 6》 의 ‘민속 무용’편을 보면, “신라사람들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민속무용가운데는 또한 탈을 쓰고 칼을 휘두르면서 추는 《가면검무》가 있었다. 《가면검무》의 유래는 황창의 얼굴을 본딴 탈을 쓰고 긴칼을 비껴들고 추는 《황창무》와 결부되여있다. 기록에 의하면 《황창랑이 나이 열일곱살 때 백제에 들어가서 저자에서 칼춤을 추었더니 구경군들이 담을 쌓을듯이 많았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가 왕앞에서 칼춤을 추게 하였는데 황창이 왕을 찔렀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이였다. 신라사람들은 그를 슬퍼하면서 황창의 얼굴을 형상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는 장면을 형상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한다.》(《동경잡기》권1 풍속)고 하였다. 실화적인물과 결부되여있는 신라의 가면검무는 무사의 숙련되고 대담한 검술을 보여주는 군사무용의 하나로서 그후, 고려, 리조 시기까지 전승되면서 주로 남해안지방에서 많이 추어졌다. 리조시기의 학자이며 시인인 김종직의 시에 의하면 당시까지 전해진 가면검무는 칼을 들고 원쑤와의 격렬한 싸움을 형상한 아주 긴장하고 박력있는 춤가락을 가진 민속무용이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칼을 높이 빼는 몸 떨지 않고 / 칼로 가슴 겨눈 눈 깜박도 않네 / 공을 이루고 태연히 춤을 마치니 / 그 기세 산을 끼고 바다도 뛰여넘겠네 (《동경잡기》권3 김종직시)”(264쪽)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조선조 때 학자며 문필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칼춤》을 읽어본다.
신호와 함께 음악이 울리니 온 좌석이 물결처럼 잔잔하다 진주성안 고운 녀인 꽃같은 그 얼굴에 군복으로 단장하니 남자맵시 의젓하네 보랏빛쾌자에 푸른색 전립 눌러쓰고 자리에 나와 절하고 일어선다 사푼사푼 걷는 걸음 박자소리 맞춰가며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듯 돌아오네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앉으니 외씨같은 버선발이 곱고도 고울시구 한참 몸을 기울였다 불쑥 일어서면서 열손가락을 뒤번뜩거리니 뜬구름과도 같구나 한칼은 땅에 두고 한칼을 들어 휘두르니 푸른 실뱀이 휘휘청청 가슴을 휘감는 듯 홀연히 두칼 잡고 소스라쳐 일어선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구름만 자우룩 이리저리 휘둘러도 칼끝 닿지 않는구나 치고 찌르고 뒤로 굴어보기에 소름끼친다 회오리바람 소낙비가 빈골짝을 울리는 듯 번개칼 서리발이 온 공중에 번쩍인다 놀란 기러기처럼 안올 듯이 날아가다 성난 보라매인냥 감돌아 노려본다 댕그렁 칼을 놓고 사뿐히 돌아서니 호리호리한 가는 허리 의연히 한줌일세
신라의 녀인춤은 뛰여난 춤이라 《황창무》 옛수법이 지금껏 전하누나 칼춤 배워 성공한 사람 백에 하나 어렵거던 몸매만 느리여도 재간없어 못한다네 너 이제 젊은 나이 묘한 재주 가졌으니 녀중호걸이라 너 아니고 누구이랴 이세상 몇사나이 너로 하여 애태웠더냐 때때로 선들바람이 장막안에 불어든다네
평양의 문예출판사가 펴낸 《조선민속무용》은 위 정약용의 《칼춤》을 소개하면서, 이 시에 나오는 ‘진주성안’은 “지난 시기 전라도의 큰성”, ‘보라빛쾌자’는 “지난 봉건사회때 군대들이 입던 겉옷, 소매는 없고 두루마기처럼 길다. 보라빛쾌자는 보랏빛갈의 쾌자”, ‘푸른색전립’은 “지난 시기 군대들이 쓰던 모자, 벙거지, 푸른빛갈의 전립”라고 주석(104쪽)을 달았다. 그리고 “짧은《칼춤》은 고구려의 전투적인 칼춤의 전통을 이었으며 전기신라때 류행되였던 《황창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특히 시 《칼춤》에도 있는바와 같이 《황창무》의 수법을 전하고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황창무》의 호탕하고 힘있는 률동과 실전과도 같은 칼싸움수법이 보존된 것으로 보여진다. 칼자루목을 마음대로 돌릴수 있는 이 《칼춤》은 리조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짐작한다.”(105쪽)고 기술했다.
남한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제10권에 ‘본국검(本國劒)’을 그림 ‘본국검《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본국검 32가지 기본동작’과 함께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제1권의 ‘검도(劍道)’에서 “우리나라 본국검은 신라 때부터 화랑에 의하여 전수되었다 하여 신라검(新羅劍) 또는 신검(新劍)이라 일컫는다. 고려 말기의 화약발명과 조선시대의 천무사상(賤武思想)으로 쇠퇴하였다가 임진왜란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함으로써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정조 때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 중 본국검 수련이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뒤 고종 때에 이르러 구미식 군사훈련을 개시한 뒤 자취를 감추었으나, 1896년 경무청에서 경찰훈련과 육군연무학교의 군사훈련과목에 검술과목이 채택되면서 일본식 검도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777쪽)고 풀이했다.
그리고 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권의 ‘검도’에 대한 설명(777쪽)에는 “광복 후 검도는 일제의 잔재라고 인식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니 1948년 6월 3일 재경유단자(在京有段者)들이 모여 대한검사회(大韓劍士會)을 조직 명맥을 유지...1953년 11월 20일 대한검도회(大韓劍道會)의 창립과 동시에 대한체육회에 가입...”이라는 문장도 함께 쓰여 있다. 남한은 해방 후 우리의 민족무예인 ‘본국검’을 외면(혹은 무지)하고 일본 검도를 대한체육회 종목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해방 후 북한의 권력자들이 ‘본국검’을 알 턱이 없었다. ‘검도’하면 ‘일본 검도’만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북한은 ‘일본 것’하면 대부분 ‘거부’다. 그래서 사전에서도 ‘검도’를 삭제했고, ‘검도복’을 “일본에서, 검도를 할 때 입는 옷”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이라도 북한의 수장(首長) 김정은과 현재 북한에서 문예정책을 입안하는 관리들이 앞의 자기들의 북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다면, ‘본국검’에 큰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본국검’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큰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남한 사회에서 이 귀중한 무형문화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북한 땅에선 매몰되어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이제 남한에서 ‘본국검’을 발굴하고 발전시켜온 본국검사(本國劍士)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머지않아 남한과 북한의 민족무예 검사(劍士)들이 한 자리에서 본국검술을 겨루고, 한민족의 고유한 춤 ‘황창무’을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진정한 민족무예로 승화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한에서도 한, 두 단체가 본국검을 전유물처럼 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도 남북교류 차원에서 본국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연구를 해주길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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