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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 제22권 / 상량문(上樑文)
자규루 상량문〔子規樓上樑文〕
삼가 생각건대 선왕의 수레 떠나신 지 이미 아득하나
아! 성대한 덕을 잊을 수 없는데, 화려한 누각을 다시 건립하니 슬프다!
남은 자취가 비로소 드러났네.
매죽루(梅竹樓) 옛터에 세우고, 두견으로 이름을 새로 붙이니, 지난날 두견에 의탁했던 노래를 추억한 것이요, 백성들이 슬픔을 일으켰던 장소에 붙인 것이네.
생각건대 이 영월(寧越)의 관풍루(觀風樓)는, 바로 선왕께서 승하하신 유허(遺墟)라오.
처음엔 남면(南面)하는 존귀한 자리에 거하여 드높이 몸을 공손히 할 뿐 관여치 않았는데, 종국엔 동향하는 자리로 물러남을 사모했으니 오호라! 지극한 덕을 이루 다 말하기 어렵네.
부왕을 계승해 삼 년 동안 재위하여 거의 강호에 달이 진다는 도참과 똑같았고, 군주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서 마침내 형만(荊蠻)에서 약초 캐는 걸음을 하였네.
노을 깃발이 하늘로 올라가니 어느 산에서 백마의 그림자를 찾을까?
용의 수염이 아래로 떨어지니 남은 백성들 창오(蒼梧)의 구름을 곡하였네.
일찍이 호젓한 정자에 걸음 했을 때, 마침내 원통한 새에 비견한 시를 지었네.
달이 지는 새벽 산에 너의 울음소리 애를 끊으니 촉(蜀)나라 임금의 혼이요,
높은 누각의 옥피리 소리 심금을 찢으니 상비(湘妃)의 대나무로다.
하늘 위로 꽃 난간이 아스라하니 온갖 일이 지나가는 구름인 듯 흔적 없고,
인간 세상에 아름다운 시구가 전해오니 백 년 인생이 번개처럼 지나가네.
하늘의 이치는 가면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니 군왕의 자리가 다시 빛나게 됨을 우러르고,
남긴 은택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니 옥음이 여전히 들릴 것을 생각하네.
다만 옛터는 이미 무성한 잡초에 인몰되어, 후세 사람들이 보고 기댈 곳이 없게 되었네.
봉우리가 구의산에 이어져 있으니 그저 남쪽 누각이 멀리서 절했다 전할 뿐이요,
눈물이 세 차례의 곡에 흘러내리니 부질없이 깊은 밤에 슬픈 노래 들리네.
산이 슬퍼하고 포(浦)가 그리워하는데 다만 단종의 남은 기록에서 징험될 뿐이요,
새가 울고 꽃이 지는 속에 영광전(靈光殿)처럼 홀로 남은 것을 볼 수 없었네.
오랫동안 나그네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냈으니, 어찌하면 옛 유적을 드러내리오.
부로들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모두들 그저 이 안에 있었다고만 말하니, 연대가 아득하여 그 장소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였네.
이에 치소(治所) 옆으로 지도를 살피고는, 마침내 마을 사이에서 터를 찾아보았네.
평범한 백성의 집이 들어섰으니 머무르셨던 곳 어디였나?
쓸쓸히 몇 칸 집만 남았으니 누각을 세울 땅이 없었네.
부사가 가는 것을 누가 저지시켰나?
환한 대낮에 우레와 비가 일어나니, 전해온 것이 틀렸기에 부사의 행차를 멈추었네.
하루아침에 화재를 부른 바람은 어디에서 왔나? 문양이 새겨진 몇 개의 주춧돌이 드러났네.
민가의 울타리가 반나절 만에 모두 타니 돌연 하나의 횃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는데,
재와 자갈이 거센 바람에 모두 날아가니 비로소 옛 누각의 남은 터가 드러났네.
땅의 형세가 완연히 하늘이 빚은 듯했으니, 이 때문에 군왕의 거둥이 있었던 것이리라.
사람의 계획이 암암리 귀신과 통하였으니, 거의 조물주의 힘을 빌린 것과 같았네.
이에 나무를 베어 금장강(錦障江) 물에 내려보내고, 토규(土圭)로 측정하니 영실성(營室星)이 남방 하늘에 떴네.
한 자나 쌓인 눈이 홀연 녹으니 도끼와 자귀 들고 산에 들어갈 수 있었고,
아름드리 키 큰 소나무가 절로 뽑히니 용마루와 들보의 재목이 될 만하였네.
마치 영대(靈臺)를 계획하여 건립을 시작하자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완성된 것과 같았고,
〈사간(斯干)〉의 누각을 이미 낙성하자 꿩처럼 날아오를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네.
이 당시 어가가 노량(露梁)의 사육신(死六臣) 사당을 지났는데, 성상의 감회가 장릉(莊陵)의 시절까지 미쳤네.
충신의 장렬한 절개를 생각하여 특별히 60구(句)의 제문을 내려주시고,
명산에 보관된 기록을 뽑아 3백 년 유적을 거슬러 상고하셨네.
시호를 내려주고 후손을 녹용하여 길이 백 대의 교화를 수립하시고,
제단을 설치하고 향축(香祝)을 내리시어 일체의 제사를 똑같이 하도록 하셨네.
막 사관이 복명한 날은, 마침 관찰사가 장계를 올린 때였으니,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지금을 기다려, 서로 감응한 듯하였네.
예조 판서를 보내 사유를 고하게 하시니 서글픔에 성상께서 슬픈 감회가 일어나서요,
한식(寒食)을 맞아 제향을 경건히 올리시니 어슴푸레 혼령이 내려오신 듯하였네.
비로소 봄의 흥취를 가탁한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시고, 참으로 달 밝은 밤을 시름겨워했던 남은 구절을 회상하셨네.
백성들 마음을 크게 알 수 있으니 모두 이름을 보고 뜻을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켰고,
성상의 덕을 내가 흠잡을 데가 없으니 선왕을 잊지 못하는 그리움이 배나 간절하셨네.
날아갈 듯한 난간과 화려한 용마루는 완연히 옥궤(玉几)에 다시 기대어 계신 듯하고,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놀은 장엄히 신선의 수레가 멀리서 내려온 듯하네.
몇 해런가 황폐한 땅에 매몰되어 있던 것이, 신께서 아껴두신 세월 오래되었도다.
오늘 관찰사가 장계를 올리니, 마치 하늘이 인도하여 시킨 듯하네.
이에 상량가 짧은 노래를 엮어, 애오라지 자규새의 구슬픈 소리에 화답하네.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東
제왕의 수레가 외로이 첩첩산중에 의지하네 / 翠華孤寄萬山中
어이해 기이한 새가 와서 짝하는가 / 如何怪鳥來相伴
밤마다 슬피 울어 피를 토한 입술이 붉네 / 夜夜悲號血吻紅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西
누각 위로 날아서 가지 위에 깃드네 / 樓上于飛枝上棲
빼어난 강산 한없이 좋건만 / 越絶江山無限好
어이해 길이 베갯머리 향하여 울어대나 / 胡爲長向枕邊啼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南
꾀꼬리는 꾀꼴꾀꼴 제비는 지지배배 노래하건만 / 鶯語嚶嚶燕語喃
무슨 일로 네 울음소리 홀로 괴롭나 / 底事爾啼聲獨苦
돌아가자 돌아가자 언제나 세 번씩 울부짖네 / 不如歸些每成三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北
초췌한 의상이나 여전히 붉은색이네 / 憔悴衣裳猶絳色
검각 남쪽에서 고생하며 만 리를 왔으니 / 劍外間關萬里來
아이들아 화살 쏘아 사냥하지 말라 / 群童挾矢莫相弋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上
지난날 황금 침대와 비단 장막이 보이네 / 昔日金床與寶帳
신선 된 지 몇 해인가 옛 도성을 그리워하니 / 羽化幾年懷故都
남은 백성들 머리 들고 부질없이 바라보네 / 遺民翹首空相望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들어 올리니 / 兒郞偉拋樑下
푸드덕푸드덕 비단 날개로 바람 말을 따르네 / 翩翩錦翼隨風馬
청령포 너머 방초가 안개 같은데 / 淸泠浦外草如煙
달마다 나와 노니실 때 영험한 비가 흩뿌리네 / 月出遊時靈雨灑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화려한 누각은 태화산(太華山)과 함께 높이 걸리고,
선왕의 시는 상서로운 해와 빛을 다투기를.
능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햇빛을 가리니 어렴풋이 여섯 신하가 앞에서 달리는 듯하고,
왕손이 떠난 자리에 봄풀이 무성하니 차마 떠나지 못해 뭇 새가 늘어서서 절을 하는 듯하네.
부디 당시에 비를 일으킨 은택을 미루시어, 길이 백성의 구름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주-D001] 자규루 상량문 :
이계가 68세 때인 1791년(정조15) 2월 6일 정조의 명을 받고 지은 상량문이다.
자규루는 강원도 영월부(寧越府)의 객관(客館) 남쪽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이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에 머물 때 자주 올랐던 누각으로, 단종이 이곳에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는데 가사가 매우 슬퍼 영월 사람들이 이후 자규루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명월루(明月樓)라고도 한다.
1428년(세종10) 영월 군수 신권근(申權根)이 창건한 것으로,
1605년(선조38) 을사년에 일어난 대홍수 때 무너져서 터만 남았다가
1791년 3월 26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과 영월 부사 박기정(朴基正)에 의해 중건되었다.
1791년 2월 6일 윤사국의 장계를 통해 자규루 중건을 앞두고 발생한 여러 기이한 현상을 들은 정조는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에게 이 사실을 기록하도록 하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과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에게는 상량문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다만 자규루가 영월 부사 이동욱(李東郁)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동욱은 1789년(정조13) 6월 20일 영월 부사에 임명되어 재임하다가 1791년 4월 3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며,
박기정은 1791년 3월 11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영월 부사에 임명되었다.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자규루 공사는 1791년 1월 19일 시작하여 3월 26일 끝났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중건에 관여했다고 할 수 있다.
《正祖實錄 15年 2月 6日》 《國朝寶鑑 卷73 正祖朝5 辛亥(15年)》 《承政院日記》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靑城雜記 卷4 醒言》
[주-D002] 지난날 …… 노래 :
단종이 읊었다는 두 수의 자규사를 가리킨다. 문헌에 따라 〈두견을 노래하다[詠鵑]〉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첫 번째 시는 “달 밝은 밤 촉제의 혼이 울어대는데, 시름에 겨워 누각 머리에 기대었네. 네 울음소리 구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너의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이 세상의 괴로운 이에게 알려주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啼無我愁. 寄語世上勞苦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이며, 두 번째 시는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푸른 산중에서 그림자만 따르는 외로운 신세 되었네.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들지 못하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해도 한이 끝이 없네. 새벽 산에 달이 질 제 네 울음소리 사람의 애간장을 끊으니,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렀는지 떨어지는 꽃이 붉네. 하늘은 귀가 먹었는지 아직까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 겨운 이 사람만 귀가 유독 밝은지.[一自冤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이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六臣謀復上王》
[주-D003] 처음엔 …… 거하여 :
단종(端宗, 1441~1457)은 1450년(문종 즉위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52년 5월에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端宗》
[주-D004] 드높이 …… 않았는데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무위로 다스리신 분은 순 임금이실 것이다.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을 하였을 뿐이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군주답다, 순이여! 높고 커서 천하를 소유하고도 그 지위를 즐거워하지 않아 관여하지 않았다.[君哉舜也! 巍巍乎有天下而不與焉.]”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주-D005] 종국엔 …… 사모했으니 :
단종이 한명회(韓明澮)ㆍ권람(權擥) 등의 강요를 받아 1455년(세조1) 윤6월 11일에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창덕궁 동쪽의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간 것을 이른다. 《莊陵誌 卷1 舊誌 事實》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端宗》
[주-D006] 거의 …… 똑같았고 :
자세하지 않다.
[주-D007] 마침내 …… 하였네 :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서 지낸 것을 이른다.
단종은 1456년(세조2)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6월 8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고, 동년 9월에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노산군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형만(荊蠻)에서 약초 캐는 걸음’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인 태백(泰伯)이 아버지가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전위(傳位)함으로써 계력의 아들 창(昌 훗날의 문왕)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형만으로 달아나 약초를 캐며 살아간 고사를 이른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端宗》
[주-D008] 노을 …… 찾을까 :
단종이 1457년(세조3) 10월 24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영월의 객사 관풍헌(觀風軒)에서 17세의 나이로 승하한 것을 이른다. ‘노을 깃발’은 신선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뒤에 임금의 의장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백마’는 장례에 사용하는 말이다. 《莊陵誌 卷1 舊誌 事實》
[주-D009] 용의 …… 곡하였네 :
단종의 죽음에 백성들이 슬퍼했다는 말이다.
‘용의 수염이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은 임금이 죽은 것을 뜻하는 말로, 중국 상고 시대에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도 함께 올라가고자 용의 수염을 붙잡았으나 용의 수염이 빠져 수염을 붙잡고 있던 백성들이 황제가 지니고 있던 활과 함께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창오(蒼梧)’는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 갔다가 죽어 장사 지낸 곳으로, 뒤에 ‘창오의 구름’은 임금의 능침을 가리키게 되었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10] 일찍이 …… 지었네 :
단종이 읊었다는 두 수의 자규사를 가리킨다.
문헌에 따라 〈두견을 노래하다[詠鵑]〉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연려실기술》 권4 〈육신(六臣)의 상왕 복위 모의(上王復位謀議)〉에 실려있다.‘원통한 새’는 두견새를 가리킨다.
전설에 따르면 전국 시대 말에 두우(杜宇)가 촉(蜀) 땅에서 칭제(稱帝)하여 망제(望帝)라 칭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뒤에 신하 별령(鱉靈)의 처와 통정했다가 별령에게 선위하고 서산(西山)으로 달아났다.
마침 이때 이 새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와 비슷했기 때문에 촉나라 사람들은 이 새가 망제를 슬퍼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망제가 죽은 뒤에 망제의 혼이 이 새가 되었다고 여겨 ‘두우’라고 불렀다 한다.
두견새는 또 자규(子規)ㆍ망제혼(望帝魂)ㆍ불여귀(不如歸)ㆍ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한다. 《太平御覽 卷166 蜀王本紀》 《華陽國志 蜀志》
[주-D011] 달이 …… 혼이요 :
전설에 따르면 전국 시대 말에 두우(杜宇)가 촉(蜀) 땅에서 칭제(稱帝)하여 망제(望帝)라 칭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뒤에 신하 별령(鱉靈)의 처와 통정했다가 별령에게 선위하고 서산(西山)으로 달아났다. 마침 이때 이 새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와 비슷했기 때문에 촉나라 사람들은 이 새가 망제를 슬퍼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망제가 죽은 뒤에 망제의 혼이 이 새가 되었다고 여겨 ‘두우’라고 불렀다 한다. 두견새는 또 자규(子規)ㆍ망제혼(望帝魂)ㆍ불여귀(不如歸)ㆍ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한다. 《太平御覽 卷166 蜀王本紀》 《華陽國志 蜀志》
[주-D012] 높은 …… 대나무로다 :
단종이 자규루에 올라 즐겨 들었다는 피리 소리가 단종이 죽은 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처럼 후세 사람을 슬프게 한다는 말이다.
‘상비(湘妃)’는 순(舜) 임금의 왕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가리킨다.
전설에 따르면 아황과 여영은 순 임금을 찾아 나섰다가 순 임금이 죽은 것을 알고 상강(湘江)에서 슬피 울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소상반죽(瀟湘斑竹)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은 매번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가 밤에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이 피리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한다. 《博物志 卷8》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六臣謀復上王》
[주-D013] 군왕의 …… 우러르고 :
단종이 1698년(숙종24) 11월 6일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칭하고, 동월 16일에 신주를 영녕전(永寧殿) 제3실에 안치한 것을 이른다. 《肅宗實錄 24年 11月 6日, 16日》 《端宗實錄 卷1 附錄》
[주-D014] 다만 …… 되었네 :
기록에 따르면 1791년(정조15) 4월 17일 영월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장계를 올려, 단종이 노닐던 청령포(淸泠浦)에 부서진 주춧돌이 남아 있었는데 고로(故老)들이 가리킨 곳을 찾아보니 무성한 잡초에 뒤덮여 있어 이를 제거하고 돌을 쌓아 단을 만들겠다고 하자, 정조가 허락하였다고 한다. 《莊陵誌續編 卷1 淸泠浦》
[주-D015] 봉우리가 …… 뿐이요 :
‘구의산(九疑山)’은 순(舜) 임금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단종의 장릉(莊陵)이 있는 영월의 동을지산(冬乙旨山)을 이른다.
‘남쪽 누각’은 영월 부사 박기정이 두견새가 바위 위에 앉아 장릉을 향해 우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 감회가 있어 중건(重建)했다는 배견정(拜鵑亭)을 가리킨다.
이 바위에는 박기정이 새겼다는 ‘배견암(拜鵑巖)’이라는 글자가 있다.
1893년(고종30) 계사년 중동(仲冬)에 지어진 장릉 영(莊陵令) 조성악(趙性岳)의 〈배견정개건기(拜鵑亭改建記)〉에 따르면,
배견정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배견정이라는 이름은 박기정이 처음 사용하면서 드러났다고 한다.
배견정은 ‘두견새에게 절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전설에 따르면 단종을 모시던 6명의 시녀들이 단종이 죽자 금장강(錦障江)에 몸을 던져 순절한 뒤 두견새가 되어 단종의 묘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절하였다고 한다.
[주-D016] 세 차례의 곡 :
불여귀거(不如歸去), 즉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의 두견새의 노래를 이른다.
전설에 따르면 전국 시대 말에 두우(杜宇)가 촉(蜀) 땅에서 칭제(稱帝)하여 망제(望帝)라 칭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뒤에 신하 별령(鱉靈)의 처와 통정했다가 별령에게 선위하고 서산(西山)으로 달아났다. 마침 이때 이 새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와 비슷했기 때문에 촉나라 사람들은 이 새가 망제를 슬퍼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망제가 죽은 뒤에 망제의 혼이 이 새가 되었다고 여겨 ‘두우’라고 불렀다 한다.
두견새는 또 자규(子規)ㆍ망제혼(望帝魂)ㆍ불여귀(不如歸)ㆍ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한다.
《太平御覽 卷166 蜀王本紀》 《華陽國志 蜀志》
[주-D017] 영광전(靈光殿)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노 공왕(魯恭王)이 건립한 것으로,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쪽에 있다.
수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미앙궁(未央宮)이나 건장궁(建章宮) 같은 많은 궁전들이 없어졌으나 영광전만은 홀로 남았다고 한다.
[주-D018] 이에 …… 없었네 :
1790년(정조14) 2월 14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의 장계에 따르면, 영월 부사 이동욱(李東郁)이 작년 가을에 경내를 순찰하면서 자규루 옛터를 찾아 중건할 계획을 세워 10월 9일 객관 남쪽 담장 밖으로 가서 살펴보았는데 여염집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어 누각을 세울 곳이 못 되었기에 조금 넓은 곳을 찾아 건립할 것을 논의했다고 한다.
[주-D019] 부사가 …… 멈추었네 :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치고 비를 내려 영월 부사가 잘못된 터에 자규루 세우는 것을 저지했다는 말이다.
1790년 2월 14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영월 부사 이동욱이 조금 넓은 곳을 찾아 자규루를 건립할 것을 논의하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져 어쩔 수 없이 비를 피해 돌아왔다고 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길을 가는 것은 누가 혹 시켜서이며, 멈추는 것은 누가 저지해서이다. 그러나 가는 것과 그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非人所能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주-D020] 하루아침에 …… 드러났네 :
1790년 2월 14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이번에는 갑자기 큰 바람이 불더니 민가에 불이 났는데, 조금 뒤에 불이 꺼져 살펴보니 민가 5채만 탔을 뿐 아니라 또 그 재가 바람에 날려서 1자 높이의 평평한 터가 나타났고 이에 땅을 파보니 문양이 새겨진 옛 자규루의 주춧돌이 드러났다고 한다.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주-D021] 나무를 …… 만하였네 :
1790년 2월 14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그 당시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목재와 돌을 구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던 차에 마침 비가 내리더니 사흘 동안 계속되어 사방의 산에 쌓였던 얼음과 눈이 모두 녹아 금장강(錦障江) 동쪽에서 나무를 베어 물길을 따라 내려보내고,
봉래산(蓬萊山) 북쪽에서 돌을 캐었는데 진흙이 미끄러워 쉽게 자규루를 건립할 장소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토규(土圭)’는 고대에 해그림자를 측정하여 사시(四時)를 바로잡고 토지의 사방 원근을 측정하는 홀처럼 생긴 옥기(玉器)로,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따르면 1자(尺) 5치(寸)이다.
‘영실성(營室星)’은 북방 칠수(七宿) 중 하나인 정성(定星)의 다른 이름으로, 10월 황혼에 이 별이 남방 하늘 가운데에 나타나면 농한기여서 집을 지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주-D022] 마치 …… 같았고 :
‘영대(靈臺)’는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의 누대로, ‘신속하게 완성되어 신령이 만든 것 같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경》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영대를 처음으로 계획하여 이를 헤아리고 도모하였네.
서민들이 와서 일하는지라 하루가 못 되어 완성되었네.
일을 시작할 때 급히 하지 말라 하셨으나 서민들이 자식이 아버지의 일에 달려오듯 와서 일하였네.[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23] 사간(斯干)의 …… 있었네 :
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동우(棟宇)는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한 것처럼 높게 일어났고,
처마는 꿩이 날개를 편 것처럼 화려하고 높다.[如鳥斯革, 如翬斯飛.]”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24] 어가가 …… 내려주시고 :
정조는 1791년(정조15) 1월 수원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할 때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1456년(세조2)에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사당인 민절사(愍節祠)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고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탄식하였는데, 행전(行殿)에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불러주어 쓰게 한 뒤 근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정조의 60구 치제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2 〈육신사치제문(六臣祠致祭文)〉에 실려 있으며, 모두 464자이다. 《正祖實錄 15年 1月 17日, 2月 21日》
[주-D025] 명산에 …… 상고하셨네 :
정조는 1791년(정조15) 2월 6일 자규루의 중건과 관련하여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의 장계를 받고 전교를 내려, 얼마 전 사육신(死六臣)의 충절에 감회가 일어 사관(史官)을 보내 각 명산(名山)의 금궤석실(金櫃石室)에 보관된 국조(國朝)의 전례 고사들을 상고하게 하였다. 정조는 사신이 돌아와 복명한 날이 곧 자규루의 기둥을 세운 날임을 알게 되었으니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며 자규루 중건의 비용을 모두 공곡(公穀)으로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동년 2월 14일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자규루는 동년 1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2월 6일 기둥을 세웠다. 《正祖實錄 15年 2月 6日》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주-D026] 시호를 …… 하셨네 :
정조는 1791년(정조15) 1월 17일에, 1698년(숙종24)에 상소하여 단종의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청했던 고(故) 현감 신규(申奎)의 후손을 등용하여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고,
동년 2월 21일에는 박팽년(朴彭年)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삼문(成三問)의 부친 성승(成勝)은 박중림과 함께 죽었는데도 시호가 없다 하여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성승에게는 동년 2월 25일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생육신(生六臣) 중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 왕족 중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을 영월의 창절사에 추배하여 똑같이 제사하도록 하였다.
뒤에 배식단(配食壇)을 건립하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여 이에 따라 치제하도록 하였는데, 정단(正壇)에 안평대군 이하 32인, 별단(別壇)에 사적이 자세치 않은 8인과 연좌되어 죽은 190인 등 198인을 배향하도록 하였다. 《正祖實錄 15年 1月 17日, 2月 21日ㆍ25日》 《肅宗實錄 24年 9月 30日》 《弘齋全書 卷60 雜著 莊陵配食錄》
[주-D027] 막 …… 듯하였네 :
정조는 1791년(정조15) 2월 6일 자규루의 중건과 관련하여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의 장계를 받고 전교를 내려,
얼마 전 사육신(死六臣)의 충절에 감회가 일어 사관(史官)을 보내 각 명산(名山)의 금궤석실(金櫃石室)에 보관된 국조(國朝)의 전례 고사들을 상고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돌아와 복명한 날이 곧 자규루의 기둥을 세운 날임을 알게 되었으니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며 자규루 중건의 비용을 모두 공곡(公穀)으로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동년 2월 14일 윤사국의 장계에 따르면, 자규루는 동년 1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2월 6일 기둥을 세웠다. 《正祖實錄 15年 2月 6日》 《莊陵誌續編 卷1 子規樓》
[주-D028] 예조 …… 듯하였네 :
정조는 1791년(정조15) 2월 15일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인 홍문관 부교리 박기정(朴基正)을 특별히 대축(大祝)에 차임하여 향과 축문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예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을 보내 3월 3일 한식(寒食)의 절향(節享)을 거행하고 아울러 자규루의 중건과 충신들의 배식단(配食壇) 설치를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莊陵誌續編 卷1 陵寢修改》
[주-D029] 달 …… 구절 :
단종이 지은 자규사(子規詞)를 가리킨다.
문헌에 따라 〈두견을 노래하다[詠鵑]〉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첫 번째 시는 “달 밝은 밤 촉제의 혼이 울어대는데, 시름에 겨워 누각 머리에 기대었네. 네 울음소리 구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너의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이 세상의 괴로운 이에게 알려주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啼無我愁. 寄語世上勞苦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이며,
두 번째 시는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푸른 산중에서 그림자만 따르는 외로운 신세 되었네.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들지 못하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해도 한이 끝이 없네. 새벽 산에 달이 질 제 네 울음소리 사람의 애간장을 끊으니,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렀는지 떨어지는 꽃이 붉네. 하늘은 귀가 먹었는지 아직까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 겨운 이 사람만 귀가 유독 밝은지.[一自冤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이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 六臣謀復上王》
[주-D030]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놀은 :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중 “저녁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주-D031] 바람 말 :
한 무제(漢武帝) 때 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이 무제의 명을 받고 지은 〈교사가(郊祀歌)〉 19장 중 “천지 신령이 내려오실 때는 바람같이 빠른 말을 탄다.[靈之下, 若風馬.]”라는 구절이 보인다. 《漢書 卷22 禮樂志》
[주-D032] 태화산(太華山) :
강원도 영월과 충청북도 단양(丹陽)의 경계에 있는 1,027미터 높이의 산이다.
[주-D033] 능침의 …… 듯하고 :
장릉(莊陵) 주위의 소나무들이 능을 향하여 절을 하듯 굽어있어 마치 사육신이 생전에 단종을 모신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주-D034] 왕손이 …… 무성하니 :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초은사(招隱士)〉에 “왕손께선 노시느라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은 자라나서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35] 구름 바라는 마음 :
단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제요는 이름이 방훈이니, 그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 지혜는 신과 같았으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따스한 햇볕과 같았고, 멀리서 바라보면 비를 내려 주는 구름 같았다.[帝堯者放勳, 其仁如天, 其知如神, 就之如日, 望之如雲.]”라는 말이 보인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상아 (역) | 2021